<한가위특집> ⑩명절만 되면 생각나는 추억의 스타들

  • 최현경 mw2871@naver.com
  • 등록 2013.09.17 07: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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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켜면 아이돌 일색…어르신들은 따분하다

[일요시사=특별기획팀] 가족들이 모이는 명절만 되면, TV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아이돌’ 특집 프로그램들이 수없이 쏟아진다. 우리 부모들에게도 한 때 로망이었던 스타들이 있었다. 이젠 추억이  된 그 스타들. ‘어른’을 위한 스타, 누가 있을까.




요즈음 TV에는 수많은 아이돌이며, 다들 비슷하게 생긴 배우들 등 정신없이 많은 연예인들의 얼굴이 지나간다. 얼굴도 알아보기 어려운 어린(?) 스타들 사이에서 가끔씩 떠오르는 옛 스타들이 있다. 예쁜 외모 또는 뛰어난 노래실력들로 당시의 화제가 되었던 스타들. 세월의 흐름과 함께 잊혀진 스타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지금도 후배 연예인들의 성대모사 대상이 되고 있는 ‘꺾기’창법의 대가, 나훈아는 1966년 당시 19세 나이로 ‘천리길’을 발표하면서 가요계에 데뷔했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 ‘강촌에 살고 싶네’ ‘님 그리워’ 등의 히트곡을 만들어내며 정통 트로트를 고수했다. 71년 ‘가지 마오’를 통해 KBS 음악대상을 수상하고 그 이후로도 ‘고향역’ ‘머나먼 고향’을 차례로 히트시켰다.

나훈아는 노래실력뿐만 아니라 뛰어난 작곡, 작사 능력으로 100곡 이상의 곡을 만들어 내면서 ‘대한민국 가요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린다. 데뷔 이후 약 2500곡을 녹음하고 19개의 정규앨범을 포함하여 총 200개의 앨범을 발표했다.

행적에 대한 관심
언론의 억측들로

가수로서 완벽했던 나훈아는 완벽하지 못한 사생활로 세간의 입에 오르내렸다.


75년 첫 번째 아내, 이숙희씨와 이혼한 그는 76년 당시 유명했던 배우 김지미와 결혼하며 화제를 일으켰다. 그는 공식적으로 3번의 결혼을 했는데 85년 김지미와의 이혼 이후, 후배가수였던 정수경씨와 결혼했지만 현재 이마저도 순탄치 못했다. 2007년 예정됐던 공연 취소를 끝으로 그가 노래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그러던 그가 2008년 돌연 기자회견을 자청해 ‘신체절단설’을 부인했고 그것이 공식석상에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간혹 그의 근황이 들리고 있지만 그의 모습은 언론에 노출되지 않았다. 최근 한 종편방송에 출연한 나훈아의 지인은 “나훈아가 양평의 실버타운 같은 비싼 요양원에 있다”고 전했다.

영화 <변강쇠> ‘옹녀’역의 영화배우 원미경은 당시 짙은 농염함으로 남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 섹시배우다.

원미경은 78년, 18세에 미스 롯데 선발대회에서 ‘미스롯데’로 선발됐고 TBC 공채탤런트 20기로 데뷔하며 이미숙, 정애리와 함께 80년대 트로이카로 불렸다.

70∼80년대 스타덤 올랐다 홀연 사라져
은퇴 후 억측기사와 황당소문에 시달려

연기자로서 그의 첫 작품인 79년 MBC 드라마 <청춘의 덫>은 비윤리적이라는 이유로 방송 도중 중단되었다. 이어 영화 <청춘의 덫>이 제작되며 영화배우 원미경으로서 영화계에 데뷔했다. 영화 <청춘의 덫>은 박근형, 한진희, 유지인이 함께 출연한 영화로 2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했다. 당시 그의 나이 20살.

영화 <청춘의 덫>에 이어 영화 <제3 한강교>를 통해 깊이 있는 멜로 연기력을 인정받은 원미경은 ‘제 18대 대종상-신인상’ ‘백상예술대상-신인상’을 받으며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색깔있는 여자> <F학점의 천재들> <심장이 뛰네>등 많은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하며 인기를 이어나갔다.

단아함과 청순함의 대표 아이콘이던 원미경은 86년 영화 <변강쇠>에서 섹시한 배우로서의 이미지를 보이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다음 해인 87년 당시 출연 중이던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의 담당PD인 이창순과 2년 열애 끝에 결혼했다. 결혼 후, MBC 드라마 <아줌마>에서 억척스러운 ‘주부’역할을 하며 ‘MBC 연기대상 여자 최우수상’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했다. 섹시스타에서 억척스러운 아줌마까지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며 연기자의 길을 걷던 그는 2002년 MBC 드라마 <고백>을 마지막으로 활동을 중단했다.

활동을 중단한 원미경은 현재, 남편인 이창순PD와 미국 버지니아주에 거주 중이다. 원미경은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에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당분간은 계획이 없다. 다만 언제라도 좋은 작품이 있으면 실망스럽지 않은 좋은 모습으로 찾아뵐 날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귀여운 아역배우 출신
시대흐름에 외면당해

“아저씨∼계란 드실라우?”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귀여운 목소리의 아역배우 전영선.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던 전영선은 영화배우였던 고모 나애심(본명 전봉선)의 권유로 영화 <종말 없는 비극>을 통해 데뷔했다.

아역 전영선의 연기력이 단연 돋보였던 영화는 1961년에 제작된 신상옥 감독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이다.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최은희, 김진규, 도금봉 등 최고의 배우들이 출연하며 많은 인기를 끌었던 작품으로 ‘옥희’역의 전영선 또한 앙증맞은 표정연기와 똑부러진 소녀의 아역배우로 거듭났다.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통해 천재적인 자질을 보여준 전영선은 안성기, 안인숙 등과 함께 '꼬마별'로 불리며 <불효자> <슬픔은 없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등 약 25편의 작품에서 아역을 도맡아 출연했다. 

그 중 신상옥 감독의 영화 <이 생명 다하도록>은 전영선에게 상을 안겨준 작품이다. 영화<이 생명 다하도록>에 출연한 전영선은 62년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국내 최초로 아역특별연기상을 수상했다. 당시 분단의 아픔을 겪었던 독일의 분위기가 분단과 전쟁을 소재로 한 한국영화에 관심을 갖기 충분했다고.




69년 영화 <암살자>를 마지막으로 영화계에서 사라졌던 그는 75년 고영남 감독의 영화 <서북청년>의 주연을 맡았다. 아역스타답게 탄탄한 연기력이 뒷받침되었지만 외모를 중요시하는 시대 흐름 때문에 성인 여배우로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다시 영화계의 별이 되고자 했던 전영선은 81년 영화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조연으로 출연했고 이 작품이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70년대 당시 연애잡지였던 <아리랑>과 <명랑>은 문희, 남정희, 윤정희를 ‘1세대 여배우 트로이카’라 칭했다. 그 이후로 당대 인기있는 여배우들을 ‘2세대, 3세대 트로이카’라고 지칭하곤 했다.

여배우 트로이카
여전히 아름다워

1세대 여배우 트로이카에 이어 70년대 후반에는 유지인, 장미희, 정윤희가 2대 여배우 트로이카로서 그 뒤를 이었다. 이 중에서도 단연 외모가 돋보였다는 정윤희. 지난 2005년 한 여성잡지에서 영화계 리더들을 대상으로 ‘한국 여배우 최고 미인’에 대한 설문조사에서는 ‘정윤희’가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젊은 층에게 배우 수애와 닮아 관심이 높아진 영화배우 정윤희는 75년 영화 <욕망>으로 데뷔했다. 영화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여자와 비> 등의 작품을 통해 연기력을 인정받아 각종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및 여자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했다.


인기 절정이던 84년, 정윤희는 조규영 중앙산업개발 회장과 결혼하며 영화계 은퇴선언을 했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2대 여배우 트로이카, 유지인, 장미희와는 달리 배우의 길을 선택하지 않은 정윤희에 대한 팬들의 관심은 계속됐지만 결혼 이후 단 한 차례도 공개석상에 얼굴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그는 2005년 MBC 한가위 특집다큐 <우리가 사랑한 여배우들-카페 정윤희>를 통해 “직접 만나 뵙고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며 “아직까지 저를 잊지 않고 기억해준 분들께 감사하다”는 자필편지로만 소식을 전했다. 최근 한 언론사에 의해 공개된 그녀의 최근 모습에 대한 네티즌들은 “여전히 아름답다”, “배우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소탈하고 검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팬들의 바람대로
조용히 활동 재개도

70년대 소녀들의 우상이던 포크계의 전설, 그룹 ‘어니언스’. 당시 가요계는 신나는 ‘팝계열’의 음악이 등장하고 있었다. 72년 ‘작은 새’로 가요계에 데뷔한 포크 그룹 어니언스의 등장은 포크음악의 대중화에 본격적으로기여했다. ‘편지’ ‘저 별과 달을’ ‘외길’ 등 이들의 앨범에 수록된 곡 전부가 히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유쾌하고 잘생긴 외모 또한 여고생들의 마음을 흔드는 요소 중 하나였다.

그들의 인기를 당시 한 음악잡지에서는 “이대강당에서 지난 74년 5월 4일 열렸던 어니언스의 리사이틀은 모여든 관객들을 제 시간에 입장시키지 않고 있다가 관객들이 강당에서 이대교문까지 장사진을 이루는 등 대학가에서 흔치 않은 진풍경을 보인 뒤에야 뒤늦게 시작됐다. 교복차림의 중고교생들이 대부분인 것 같은 관객들은….”이라고 했다. 이후 멤버였던 이수영은 영화 <그대의 찬 손>에 출연하는가 하면 74년 KBS 방송가요 대상을 받으며 실력을 검증받았다. 

이들은 75년 멤버 이수영의 군입대와 함께 해체됐다. 홀로 남은 임창제는 ‘어니언스 임창제’라는 이름으로 가수 생활을 이어갔다. 이후 이수영은 군 제대를 하며 79년 ‘하얀 면사포’와 80년 ‘숙녀’라는 이름의 두 앨범을 마지막으로 가요계를 떠났다. 가요계를 떠난 그는 종합건설회사에서 근무하다 2002년 건설업 중견 사업가로서의 길을 걸어왔다. 이수영과 임창제는 ‘어니언스’라는 이름의 와인바와 카페를 각자 운영해오며 팬들과의 만남을 이어가고 있었다.

지난 2004년, 어니언스는 그들의 음악을 듣고 싶다는 팬들의 바람에 따라 ‘추억의 낭만 콘서트’를 통해 해체 후 30년 만에 변하지 않는 호흡을 보여줬다. 같은 해, 8월 이수영은 ‘프레셔스 메모리즈’를 발표하며 홀로 음악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다른 멤버인 임창제는 지난 2월 KBS의 한 프로에 딸 임나경과 함께 출연해 과거 싱어스 누들(성대에 생긴 양성종양)로 인한 후유증 등을 고백하며 근황을 전했다.


좋은 작품으로 볼 수 있다면…
복귀 언제쯤? 기약 없는 귀환

66년 걸쭉하고 허스키한 저음으로 무대를 압도하던 소녀, 문주란. 당시 16세란 나이와 앳된 소녀얼굴과 달리 카리스마있는 저음으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은 가수다. 데뷔와 함께 주목을 받았던 10대 신인스타, 문주란은 ‘보슬비오는 거리’ ‘파란 이별의 글씨’ ‘낙조’ 등의 히트곡을 내며 무명생활없이 스타가 되었다.

65년 잡지 아리랑에서 주최한 연말 시상식에서 최고 인기상 독수리상을 수상했으며 이후 MBC 10대 가수 가요제 가수상, TBC 신인상 수상 등을 수차례 수상하며 당대 최고가수였던 남진, 이미자와 같은 선배들과 한 무대에서 섰다. 어린 나이에 데뷔하며 인기를 누리던 문주란은 데뷔 3년 만에 한 방송국 PD와의 스캔들과 언론의 억측기사들로 힘들어하다 음독자살을 시도를 하며 연예계에서 사라졌다.

80년대 다시 가요계로 돌아온 문주란은 일본에서 활동하며 국내에서도 ‘백치 아다다’ 등의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교통사고로 인해 곧 활동을 중단했다. 그 이후에도 국내 가요계에 간혹 앨범을 발표하며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를 발표하기도 했지만 이 또한 길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지난해 신곡 ‘양재동 거리’를 발표하며 SBS <도전 1000곡>, KBS <불후의 명곡>에 출연했다. 최근에는 한 방송에 출연해 인간 문주란으로서의 모습을 공개했다. 청평의 한 카페를 운영하며 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던 그는 데뷔 45년만인 지난 6월 첫 대형 콘서트를 시작으로 중후한 매력의 가수 문주란으로 돌아왔다.

 

최현경 기자 <mw2871@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제2의 전성기 스타들
안방 여왕들 속속 귀환

연예계를 은퇴했던 스타들이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다시 복귀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MBC 드라마 <모래시계>를 끝으로 배우 고현정은 결혼과 동시에 연예계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10년만에 이혼하며 연예계에 컴백한 고현정은 SBS 드라마 <봄날>을 시작으로 <선덕여왕> <대물> <여왕의 교실>등의 드라마를 통해 실력있는 연기파배우임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미스코리아 진 출신의 배우 오현경 비디오 파문으로 은퇴한 지 2년 만에 결혼하며 배우활동을 중단했다. 지난 2006년 안타까운 이혼소식과 함께 돌아온 오현경은 SBS 드라마 <조강지처 클럽>로 연예계에 복귀한 이후 MBC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 등을 통해 다양한 매력의 연기활동을 선보이고 있다.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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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대통령선거는 전 정부의 공과를 통째로 평가받는 시험이다. 여당 후보는 전 정부의 공이 크면 후광을 입고, 반대로 과가 많으면 핸디캡을 안고 시험장에 들어서는 셈이다. 이번 대선 정국은 대통령 탄핵으로부터 시작됐다. 야당은 5년 만에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정권 창출에 성공한 대통령은 집권 1~2년 차에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한다. 3~4년 차에 이르면 정부 안팎서 누수가 발생한다. 빠르면 이 시기에 레임덕이 시작된다. 임기 마지막 해에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 몸을 사려야 한다. 지지율에 따라 차기 대선에 끼치는 입김도 달라진다. 5년 단임제 이후 대체로 나타나던 대통령의 모습이다. 주기설 깬 집값 폭등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선거가 중간 평가의 성격을 띤다면 대선은 최종 시험에 가깝다. 모든 정당의 목표가 정권 창출인 만큼 대선의 무게감은 남다르다. 행정부 수장을 넘어 국가원수로서 대통령이 갖는 권한이 그만큼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과로 대통령직선제가 도입됐다. 국민 모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도록 헌법이 개정된 것이다. 대통령직선제가 정착된 이후 정권교체는 10년 주기로 이뤄졌다. 보수 진영의 노태우·김영삼정부에 이어 진보 진영의 김대중·노무현정부가 들어섰다. 이후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선으로 보수 진영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으로 물러난 뒤 진보 진영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재수 끝에 청와대에 입성했다. 그대로 이어지는 듯했던 ‘10년 주기설’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등장으로 깨졌다. 5년 만의 정권교체가 진보 진영에 안긴 충격은 컸다. 문 전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퇴임 전까지 40% 안팎을 오르내렸다. 지지율 10~20%대를 오가며 레임덕에 시달렸던 과거 대통령 때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그럼에도 진보 진영은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득표율 차이는 1%도 되지 않았다. 지난 대선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윤 전 대통령에게 0.73%p 차이로 졌다. 대선 전 여러 여론조사에서 보여준 윤 전 대통령이 이 후보를 넉넉하게 앞선다는 결과와 비교해서는 선전이었지만 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을 고려하면 충격적인 패배였다. 게다가 당시 윤 전 대통령은 선출직 출마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는 ‘초보 정치인’이었다. 대선 패배, 서울이 결정적 역할 부동산 가격이 낙선에 영향 줘 민주당에서는 대선 패배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분출했다. 이 과정서 레이더망에 걸려든 게 ‘부동산’ 문제였다. 정확하게는 문재인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도마 위에 올랐다. 문정부에서는 20번이 넘는 부동산 대책이 쏟아졌다. 정부 발표가 나올 때마다 부동산시장은 널뛰었다. 실제 윤 전 대통령 승리의 쐐기를 박은 서울 표심이 부동산 정책에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이 개표 직후 제기됐다. 지난 대선은 말 그대로 양 진영을 ‘쥐어짠’ 선거였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텃밭’인 영남과 호남 지역서 총결집했다. 당락을 가른 건 서울서의 격차였다. 윤 전 대통령은 서울서 31만여표를 앞섰다. 전체 표 차이인 24만표보다 많다. 윤 전 대통령은 마포·용산·성동 등 이른바 ‘마용성’으로 불리는 지역과 광진·강동·양천 등 아파트가 밀집돼있으면서 상대적으로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서 이겼다. 구별로 따지면 25개 구 중 14곳에서 윤 전 대통령에게 더 많은 표를 몰아줬다. 21대 총선 때 민주당이 4곳을 빼고 21개 구를 이긴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선방이었다. 노원·도봉·강북 등 ‘노도강’으로 불리는 지역서도 윤 전 대통령은 선전했다. 이 지역은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곳이다. 재건축·재개발 아파트가 밀집돼있다. 승부 자체는 이 후보가 이겼지만 표 차가 근소했다. 총선 때 20% 가까이 차이 났던 게 대선에서는 1% 안팎으로 줄었다. 부동산 문제에 따른 민심이반이 뚜렷하게 드러났다는 분석이다. 완전한 실패 최악의 실정 같은 해 8월 국회입법조사처에서 발간한 <제20대 대통령선거 분석> 자료에도 부동산이 가른 표심이 언급돼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대선에서 유권자가 관심을 가진 의제는 경제 회복과 주거 안정 등 부동산 정책이었다. 대선 전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서 조사한 대선 주요 의제 관련 설문서도 경제 회복(32%), 부동산 문제 해결(32%)이 첫손에 꼽혔다. 40~50대보다 30대서 부동산 문제에 관한 관심이 컸다. 그러면서 이 후보가 과거 민주당 후보에 비해 수도권 득표가 낮았다며 부동산 가격 상승과 관련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민주화 이후 모든 대선서 민주당 계열 후보가 국민의힘 계열 후보에게 서울서 패한 적은 2007년밖에 없었다”며 “수도권은 인구가 집중된 탓에 득표율 차이가 작더라도 득표 차는 매우 크게 나타난다. 그만큼 선거 승패에 수도권 표심의 영향이 컸다”고 설명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부동산 이슈와 득표율의 상관관계를 보기 위해 동 단위로 서울 지역의 아파트 가격을 살폈다. 아파트 가격 변동에 따른 득표율을 본 것이다. 분석 결과 2021년 아파트 가격과 2020~2021년 가격 변동이 윤 전 대통령, 이 후보의 득표율과 상관성이 높았다. 가격 변동보다는 가격 자체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아파트 평(3.3㎡)당 평균 가격이 높은 지역일수록, 아파트 가격 증가폭이 큰 지역일수록 윤 전 대통령의 득표율이 이 후보보다 높았다. 또 재산세 부담이 증가한 지역서 윤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많았다. 재산세가 늘었다는 건 그만큼 부동산 가격이 올랐다는 뜻이다. 지지율도 무용지물 민주당서 지목한 패배 원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주당은 대선 패배 1년 뒤인 2023년 8월 녹서(Green Paper, 정책을 제안하고 다양한 의견 수렴 과정을 담은 대화록) <민주당 재집권 전략 보고서>를 발간했다. 민주당 을지키는민생실천위원회(을지로위원회) 출범 10주년을 맞아 발표한 일종의 대선 패배 ‘반성문’이었다. 민주당은 해당 보고서에서 “오락가락하는 정책으로 집값 상승을 잡지 못했다”고 짚었다. 문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보수와 진보 양 진영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며 그 원인을 일관성 부족에서 찾은 것이다. 그러면서 “노무현정부 부동산 정책도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선거 대패와 당내 비난에도 철학과 원칙을 버리지 않은 점은 높게 평가된다”며 “문정부는 세제 개편 이후에도 집값이 계속 상승하면서 비판에 직면하자 전반적인 세제를 완화하는 정반대 조치를 취했다”고 지적했다. 문정부는 부동산, 즉 집이 투자가 아닌 거주의 대상이라는 점을 시장에 각인시키는 데 정책 방향을 맞췄다. 당연히 투기 수요를 때려잡는 데 모든 역량이 집중됐다. 부동산으로 재산을 불리려는 세력이 많아지면서 집값이 왜곡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른바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문정부는 세금 부과, 대출 규제 등으로 돈줄을 조였다. 2017년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대출 규제 강화 등의 정책이 시행됐고 2018년에는 주택을 보유한 사람이 규제 지역서 새집을 사려 할 경우 주택담보대출을 받지 못하도록 했다. 서울 25개 구, 분당·과천·하남·세종 등이 규제 지역으로 묶였다. 규제가 심해질수록 집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부동산이 ‘우상향 안전자산’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시중에 풀린 돈이 몰리고 또 몰렸다. 저가의 낡은 집 여러 채보다 고가의 좋은 집 한 채를 사자는 ‘똘똘한 한 채’ 이론도 생겨났다. ‘자고 일어나면 집값이 오른다’는 말이 돌면서 부동산 심리를 크게 자극한 것이다. 당시 ‘영끌족’ 지금은 곡소리 통계 조작으로 검찰 수사까지 부동산을 움직이는 건 ‘심리’라는 말이 있듯 너도나도 집을 사는 데 혈안이 되면서 집값이 요동쳤다. 집값이 오르는데도 수요가 있으니 계속 상승하는 구조였다. 이 과정서 ‘벼락 거지’ 등의 말이 생겨났다. 부동산 등 자산 가치가 급격하게 오르면서 상대적으로 가난해진 상황을 일컫는 표현이다. 동시에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어느 정부든 출범하자마자 제일 먼저 손대는 게 부동산 정책일 정도로 우리나라 국민의 ‘집’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다. 문정부 역시 임기 내내 ‘집값 잡기’에 몰두했다. 하지만 끝내 실패했다. 몇몇 전문가는 문정부의 가장 큰 패착으로 부동산 정책을 꼽을 정도다. 그 여파가 대선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후폭풍이다. 문정부 당시 ‘갭투자(전세 끼고 매수)’ 방식으로 집을 마련한 이들이 현재 파산 지경에 이르고 있다. 폭탄 돌리기를 하다가 더 버티지 못하고 폭발한 것이다. ‘영끌족’의 몰락이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산 사람은 높아진 금리를 견디지 못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문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펴면서 통계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수사가 진행 중이다. 당시 정책을 주도했던 대통령 비서실장, 국토교통부 장관 등은 감사원의 의뢰로 전부 수사 대상에 올라 있다. 이들은 정부 정책을 뒷받침하는 통계를 만들어내라고 통계청, 한국부동산원 등을 압박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감사원에 따르면 문정부가 통계를 조작한 횟수는 102회에 달한다. 2018년 1월부터 2021년 10월까지 일어난 일이다. 청와대와 국토교통부는 한국부동산원에 주택 가격 변동률을 하향 조정하도록 하거나 부동산 대책이 효과가 있는 것처럼 통계 수치 조정을 지시했다. 민주당은 ‘전 정권에 대한 탄압’이라면서 반발 중이다. 이번에도 이슈 될까? 이 후보와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재건축·재개발을 활성화해 공급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의 공약도 비슷하다. 후보별로 차이가 미미해 이번 대선에서는 부동산 이슈가 생각보다 대망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문정부의 정책 후폭풍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만큼 또다시 문정부에 이 후보가 발목을 잡히는 형국이 반복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