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션 여주인 살인사건 전말

  • 강현석 angeli@ilyosisa.co.kr
  • 등록 2013.09.10 11: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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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파·막가파 뺨치는 동갑내기 2인조?

[일요시사=사회팀] 강원도 속초의 한 펜션을 운영하던 50대 여주인이 살해됐다. 그는 두 명의 남자에게 차례로 성폭행 당한 뒤 목숨을 잃었다. 이른바 '펜션 여주인 살해사건'은 그 피해의 심각성뿐만 아니라 범인들이 범행 후 저지른 돌출행동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지난해 7월 제주도에서는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대형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제주 올레1코스를 걷던 한 40대 여성은 갑자기 나타난 괴한에게 목숨을 잃었다. 사체 발견 당시 피해 여성의 웃옷은 벗겨져 있었다. 누군가 성폭행을 시도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통칭 '제주 올레길 살인사건'의 범인 강모(46)씨는 피해 여성을 성폭행하려다 실패하자 목 졸라 살해한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4월 대법원은 강씨에게 징역 23년과 정보공개 10년, 전자발찌 착용 10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감형 없는 중형이었다. 

여성만 노린
사이코 범죄

그러나 이로부터 1년여가 흐른 지난 8월 강원도에서는 또 다른 대형 강력 성범죄가 발생해 충격을 안겼다.
이른바 '펜션 여주인 살해사건'은 ▲처음부터 여성을 노린 계획범죄라는 점 ▲성범죄와 살인, 시신유기가 한꺼번에 이뤄졌다는 점 ▲범인(들)이 전과를 갖고 있으며, 사이코패스 성향을 보였다는 점 등이 '제주 올레길 살인사건'과 동일했다.

지난 2일 강원 춘천경찰서는 부녀자를 납치 살해한 후 시신을 유기한 혐의로 김모(42·제주)씨와 또 다른 김모(42·전북 군산)씨를 붙잡아 조사했다.


이들은 50대 펜션 여주인을 살해한 후 오대산 국도변에 시신을 유기하고, 또 다른 여성을 납치해 윤간하는 등 범행 수법에서 잔인함을 보였다.

특히 이들 중 한 명은 아동을 강제 추행한 혐의로 수배 중에 있던 인물로 알려져 그 충격은 더했다.

두 김씨는 3년 전 서울갱생보호소에서 처음 만났다. 각자 강도상해와 특수강도 등 다수의 전과가 있었던 이들은 출소 후 다시 만나기로 하고 친분을 쌓았다. 약속대로 재회한 이들은 곧바로 돈을 구할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변변한 직장도 없던 이들에게 뾰족한 방도가 있을 리 만무했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남에게서 돈을 빼앗을 궁리를 하는 것뿐이었다. 특히 욕정에 목마른 김씨 등에게 유흥비는 절실했다.

두 사람은 지난달 27일 오전 3시께 서울에서 40대 여성 A(44)씨를 납치했다. A씨는 두 김씨가 안면이 있는 사업가로부터 소개받은 인물로 전해졌다. A씨는 한 상조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영업 직군의 사원이었다.

서울서 40대녀 납치해 번갈아 성폭행
경찰 추적 피해 도주 중 펜션에 숨어

김씨 등은 범행으로부터 하루 전 26일 "상조에 가입할 사람들을 소개해주겠다"며 A씨를 불러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적어도 15명은 가입시켜 주겠다"는 이들의 꾐에 A씨는 김씨 등을 만나러 갔다.


하지만 A씨를 만난 두 김씨는 돌변했다. 이들은 A씨가 타고 온 차를 탈취한 뒤 강원 춘천시 남산면의 야산으로 A씨를 끌고 갔다. 김씨 등은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A씨를 잔인하게 윤간했다. 번갈아가며 성폭행하고 수중에 있던 돈과 체크카드를 빼앗았다.

하지만 A씨의 체크카드에는 잔액이 없었다. 김씨 등이 A씨에게서 빼앗은 돈은 3만원에 불과했다.

27일 오전 7시 현금 인출 시도 과정에서 김씨 등의 경계가 느슨해졌다. 이 틈을 타 A씨는 자신의 차를 타고 서울로 도망쳤다. 오전 7시50분께 A씨는 탈출 과정에서 도로를 이탈하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신고했지만
잡지못했다

A씨가 차를 타고 빠져나간 것을 알게 된 범인들은 택시를 타고 속초로 도주했다.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숨을 곳을 찾던 김씨 등은 B씨(54·여)가 운영하는 한 펜션에 묵게 됐다.

그 시각 탈출에 성공한 A씨는 경찰에 자신의 성폭행 피해 사실을 신고했다. 신고를 접수한 경찰은 휴대전화 통화내역 등을 분석해 이들의 신원 확보에 나섰다. 그러나 '강원에서 김서방 찾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음날 B씨의 펜션에 은신하고 있던 김씨 등은 B씨가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돈이 필요했던 김씨 등은 B씨를 새로운 범행 대상으로 정했다.

29일 오후 4시50분께 김씨 등은 여주인 B씨에게 "경포대로 놀러가자"며 유혹했다. 이들의 꼬드김에 넘어간 B씨는 김씨 등과 함께 펜션을 나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B씨는 자신에게 닥칠 위험을 알지 못했다.

한참을 노닥이던 김씨 등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다. 이들은 30일 새벽 4시20분께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 인근 야산으로 B씨를 끌고 갔다. 그곳에서 김씨 등은 B씨를 차례로 성폭행했다.

김씨 등은 B씨에게서 현금 20여만원을 빼앗았다. 범인들의 입장에서는 기대보다 적은 액수였다. 그러자 B씨는 "집에 돈이 더 있다"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제주에 사는 김씨는 B씨의 얼굴에 비닐을 씌웠다. 김씨는 살의를 갖고 있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또 다른 김씨가 친구의 행동을 말렸다. 그러나 제주에 사는 김씨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B씨의 손이 부르르 떨렸고, B씨는 질식사했다.

살인 후 김씨 등은 B씨의 시신을 앞에 두고 제사 지내듯 절했다. 이 절의 의미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불안한 심리상태를 표출한 돌출행동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단 경찰 조사에서 김씨는 "B씨의 죽은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을 봤다"고 진술했다.


절을 마친 김씨 등은 B씨의 시신을 오대산 인근 풀숲에 유기했다. 그리고 펜션을 떠날 때 타고 온 차를 몰고 다시 서울로 향했다.

의문의 뭉칫돈
범죄와 연관성

경찰의 추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지난 1일이다. 범행 후 제주에 사는 김씨는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는지 이날 오전 5시35분쯤 경찰 민원상담 전화인 182 민원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통화에서 김씨는 “내가 사람을 죽이고 시신을 오대산에 유기했다"며 "곧 자살하겠다"고 말했다. 신고를 접수한 경찰은 즉각 통화 내용 등을 토대로 용의자의 위치를 추적했다.

1일 오후 김씨 등은 경기도 안산에 있는 한 펜션 앞 노상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자살하겠다"던 김씨는 비교적 태연한 모습이었다. 경찰은 두 김씨를 살인 등의 혐의로 긴급 체포했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 1시30분께 경찰은 오대산 8부 능선 비포장도로 옆 풀숲에서 B씨의 시신을 찾아냈다.




경찰 조사에서 두 김씨의 또 다른 범죄 행각이 윤곽을 드러냈다. 제주에 사는 김씨는 13세 미만 미성년자를 강제 추행한 혐의로 지난달 29일 경기 경찰청으로부터 체포 영장이 발부된 상태였다. 전북에 사는 김씨 역시 특수절도 혐의로 경찰의 수배를 받는 중이었다. 이들은 모두 과거 성범죄 전과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아울러 이들은 A씨를 성폭행하기 전인 26일 후배의 집에서 시가 680만원 상당의 금(3냥)을 훔쳐 달아난 것으로 확인됐다.

이번 사건을 수사한 춘천경찰서 김병희 형사과장은 "(범인들의) 전과가 30범 가까이 되기 때문에 수사하는 방법을 다 알고 있어 체포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수사진조차 애를 먹은 이들의 도피 행각은 김씨의 돌발 신고로 비교적 쉽게 마무리됐다.

그러나 아직 풀리지 않는 의문점은 남아있다.

첫째, 김씨 등이 수중에 갖고 있던 돈이 수백만원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김씨 등이 후배에게서 훔친 금 3냥을 팔고 남은 돈으로 볼 수 있지만 드러난 정황으로 볼 때 김씨 등이 보유한 돈은 모두 부정한 범죄와 연관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에 따라 경찰은 김씨 등이 수백만원의 돈을 입수한 경로와 출처 등을 집중 추궁하고 있다.

둘째, 이번 사건의 주범인 제주에 사는 김씨의 사이코패스 판정 여부다. 앞서 김씨는 182 신고 전화에서 "자살하겠다"고 말했고, 경찰 조사에서도 "죄책감에 자살할 생각이었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하지만 경찰은 "김씨의 말을 온전히 믿을 수 없다"며 "김씨 등은 도피 생활 중 안마시술소에 가는 등 죄를 뉘우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여주인 야산 끌고가 차례로 몹쓸짓
반항하자 얼굴에 비닐 씌워 질식사

실제로 경찰은 "김씨에게서 사이코패스 성향이 감지됐다"며 "프로파일러에게 전문 상담을 의뢰했다"고 밝혔다. 김씨는 3일 춘전지법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 직후 "돌아가신 분과 유족들에게 고개 숙여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흐느낀 뒤 갑자기 태도를 바꿔 "돈 때문에 그 여자를 죽였다"고 진술하는 등 불안한 심리상태를 보이고 있다.

셋째, 이들이 갖고 있던 명함 60여장과 추가 범행의 상관성도 눈여겨볼 지점이다. 지난 4일 <동아일보>는 "제주 출신 김씨가 체포될 당시 보험사, 상조회사 등 영업 분야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명함 60여장을 가지고 있었다"며 "(김씨에게) 명함의 용도를 묻자 김씨가 ‘다 죽이려고 했다. 살려주면 금방 잡히니까"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김씨 등은 확보한 명함을 토대로 여성들에게 접근, 돈을 빼앗으려고 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경찰은 현재 이 부분도 보강 수사 중이다.

형량 높여도
강간은 계속

일각에서는 이번 '펜션 여주인 살해사건'이 경찰 수사력의 한계를 드러냈다고 지적한다. B씨가 살해되기 전 김씨 등은 이미 경찰의 수배를 받는 상황이었지만 수사가 더디게 진행되면서 제2의 피해자를 만들었다는 지적이다.

또 경찰은 박근혜정부 출범 후 4대악 근절을 목표로 내세웠지만 늘어나는 성범죄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그야말로 '빈수레가 요란하다'는 비아냥을 듣고 있는 실정이다.

더불어 경찰청이 최근 발간한 '2012 범죄통계'를 봐도 지난해 발생한 성범죄는 1만9670건으로 2011년에 비해 증가세를 보이고 있어 국민적 불안은 매년 가중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를 단기간에 해소할 뚜렷한 해결책은 현재로서 전무하다. 한쪽에선 '형벌의 수위를 높이면 강력범죄가 줄어들 것'이라 단언하지만 강력범죄에 대한 처벌 수위가 높아진 올해에도 '용인 살인사건' '펜션 여주인 살해사건' 등과 같은 강력 성범죄는 작년과 다름없이 반복되고 있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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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