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획> 망해도 잘사는 부자들(24)김철호의 기아그룹

  • 한종해 han1028@ilyosisa.co.kr
  • 등록 2013.07.30 11:14:14
  • 댓글 0개

오너는 '활짝' CEO는 '쫄딱'

[일요시사=경제1팀] '기업은 망해도 기업주는 산다.'
잘 나가던 기업이 망했다는 소식은 심심찮게 들려온다. 그런데 망한 재벌이 '깡통'을 찼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이 없다. IMF 이후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이 줄줄이 공중분해 됐지만 해당 기업에서 중책을 맡았던 경영진과 그 가족들은 멀쩡히 잘 살고 있다. 미리 '주머니'를 채워놔서일까. <일요시사>가 연속기획으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망한 기업' 수뇌부들의 현주소를 조명해봤다.



기아자동차의 역사는 국내 자동차회사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아차의 전신인 경성정공이 해방 전이던 1944년 8월에 설립됐기 때문이다. 경성정공을 설립한 고 김철호 기아그룹 창업주는 일본 현지에서 볼트와 너트 제조기술업체로 명성을 날렸던 삼화제작소를 이끌며 일본은 물론 국내까지 이름을 날리던 전문경영인이었다.

김 창업주는 이때 모은 재산 500만엔을 갖고 귀국해 경성정공을 설립했다. 45년 1월 경성정공은 자전거 부품을 생산하다가 50년 6·25 전쟁 발발로 인해 사업을 잠시 멈췄다가 52년 부산공장에서 국내 최초 국산 자전거인 '3000리호'를 완성했다. 이때부터 경성정공의 상호는 '기아산업'으로 변경됐다.

자전거→자동차

이후 기아산업은 59년 일본 혼다와 동양공업(현 마쯔다) 등과 2륜 모터싸이클 및 3륜차 생산을 위한 기술제휴를 체결하고 자동차산업에 진출했으며 3년 뒤 기아혼다 C-100과 기아마스타 K-360을 생산했다.

이를 통해 확보한 자금으로 국내 최초로 일관공정 시스템을 갖춘 소하리 공장을 완공하고 기업을 공개했다.
70년대 정부는 생산은 되지만 개발은 못하던 국내 자동차업계 국산화를 위해 집중 육성시켰다. 이를 통해 기아차 '브리사'가 탄생했다. 브리사는 83년까지 총 3만1017대가 생산됐다.

같은 시기 기아산업은 대기업으로 발돋움했다. 73년 김 창업주의 타계에 따라 장남 김상문씨가 대를 이어 2세 경영인으로 등장했고 경쟁업체였던 아시아자동차공업을 인수, 군수차량 부문에 진출했으며 기아기공을 설립해 정밀부품 생산의 발판을 마련했다. 79년에는 프랑스의 푸조 604와 이탈리아의 피아트 132를 한국에 들여와 생산했다. 기아차의 시작이 됐던 자전거 사업은 이때쯤 분리됐다.


80년대를 덮친 '오일쇼크'와 정부의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로 인해 승용차 생산을 중단하게 된 기아차는 정부의 지시에 의해 타이탄 2.5톤과 봉고 1톤 등의 화물자동차만을 생산했다. 당시 18개사에 이르던 계열사 중 5개사를 매각할 정도로 심각한 경영상 어려움을 겪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기아기공 사장이던 김선홍 전 기아그룹 회장이다. 기아차는 83년 유상증자를 단행하고 일본의 마쯔다와 이토츄의 자본으로 자본금을 확충했다. 또한 봉고 코치를 통해 '봉고신화'를 이뤄냈으며 농촌 차량인 세레스 역시 성공해 어려움을 이겨냈다.

87년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가 일부 해제되자 기아차는 국내 최초의 월드카인 '프라이드'를 만들었다. 프라이드는 현재도 생산 중에 있으며 엔트리모델로도 사용되고 있다. 91년에는 독자모델인 '세피아'와 '스포티지' 등을 개발해 도쿄모터쇼에 출시했으며 미국에 수출하기도 했다.

기아차는 이후에도 아벨라와 크레도스 등을 내놓으며 승승장구했지만 방만한 경영과 노사갈등, 아시아자동차에 대한 투자 실패 등으로 97년 외환위기 당시 부도를 냈고, 이후 현대-대우-삼성-포드 등의 인수경쟁 속에서 98년 현대차에 합병됐다.

'구원투수' 김선홍, 집까지 날리고 철저한 은둔생활
2·3세 삼천리자전거 대주주…차 부품 회사 경영도

현대차와 가족이 된 기아차는 카렌스-카니발-카스타 등 세가지 SUV차량을 내놓으며 폭발적인 호응을 받았으며 이어 내놓은 쏘렌토와 옵티마 등도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재기의 날개를 펴기 시작했다. 현재는 세계 자동차 디자인 트렌드를 주도하는 메이커로 대변신에 성공해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가장 독창적이면서 트렌드한 브랜드란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김 전 회장은 98년 부실계열사 지급보증과 회사 공금횡령 등 혐의로 4년형을 선고받아 2년을 복역한 후 2000년 형집행정지로 출감했다. 이후 마지막 재산이었던 잠실 J아파트에 살면서 북한 남포공단의 자동차 조립, 생산 기업인 평화자동차 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이도 곧 접었다. 이후 2004년 하반기 예금보험공사의 압류 조치로 서울 미아리 인근 북한산 자락의 32평형 아파트에 살고 있다.

김 전 회장은 어지간해선 바깥 출입을 하지 않는 편이다. 자동차 전문가 김 전 회장에게 외부 강연 요청도 간간히 들어오지만 일절 응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교회장로 활동만 하고 있을 뿐이다. 올해 그의 나이 81세. 김 전 회장 측근에 따르면 건강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한다.


그의 명의로 된 모든 재산은 가압류되어 있고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도 그의 차남 명의로 되어 있다. 그의 차남 명식씨는 서강대학교 자연과학부 물리학부교수로 있다가 기아 부도 직후 영국의 한 대학으로 직장을 옮겼다. 김 전 회장의 부인 윤옥중씨는 S교회 최초의 여성 장로로 주목받았다.

김 창업주가 세상을 떠나고 김 전 회장이 취임하기 전 잠시 회사를 이끌었던 김 창업주의 장남 상문씨는 기아산업 자동차 사업부에서 분리되어 나온 삼천리자전거에 적을 두고 있다. 상문씨의 아들 석환씨가 삼천리자전거 대표를 맡고 있으며 이들 부자의 지분을 합치면 28.26%에 달한다. 석환씨는 기아차가 현대에 매각되기 전 기아차에서 경영수업을 받은 바 있다. 그의 동생 영환씨는 삼천리자전거 계열사인 참좋은레져 연구소장을 맡아 기술개발(R&D)부문을 책임지며 형에게 힘을 보태고 있다.

어디서 뭘 하나

김 창업주의 외손자 배석두씨는 자동차부품 전문기업인 세코그룹을 이끌고 있다. 세코그룹은 기아차의 부도로 위기를 맞아 지분 전부를 미국계 타워오토모티브사에 넘기고 클러치, 캠샤프트 등 다른 자동차 부품 사업에 집중했다. 세코그룹 계열사 중 캠샤프트를 생산하는 서진캠의 경우 2001년 67억원이던 매출이 2011년 1705억원으로 증가했으며 또 다른 계열사 서진오토모티브 역시 같은 기간 3배 정도 매출이 성정했다.

2010년에는 프라코가 보유한 코스닥 상장업체 에코플라스틱을 인수하고 2011년에는 현대위아로부터 아이아를 사들였다. 세코그룹은 2011년 연결기준 매출 8874억원, 영업이익 165억원을 각각 올렸다.


한종해 기자<han1028@ilyosisa.co.kr>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케이삼흥 사태가 대국민 사기극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피해자가 최소 1000여명, 피해액은 수천억원에 이르는 등 실체가 드러날수록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상황이다. 피해자들은 무엇에 홀려 돈을 넣었을까? 무엇이 그들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안겨줬을까? “징조도 없었어요. 2월까지는 돈이 잘 들어왔거든요. 3월25일하고 27일에 원금하고 배당금이 안 들어오면서 난리가 난 거죠.” <일요시사>와 연락이 닿은 한 케이삼흥 투자 피해자는 여전히 정신이 없는 듯했다. 이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에게도 투자를 권유했다고 한다. 현재 원망 그 이상의 감정을 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2월까진 괜찮았다 최근 케이삼흥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2021년 설립된 부동산 투자플랫폼업체 케이삼흥은 월 최소 2% 수익을 보장하겠다며 투자자를 끌어모았다. 연 단위로 따지면 24%의 고수익 투자상품인 셈이다. 피해자는 ‘정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의 말에 현혹된 것으로 보인다. 케이삼흥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개발 예정인 토지를 매입한 뒤 개발사업이 확정되면 소유권을 넘겨 보상금을 받는 방식으로 수익을 만들 수 있다고 홍보했다. ‘토지 보상 투자’라는 용어가 나왔다. 직급에 따라 수익금을 차등 지급하는 다단계 방식으로 업체를 운영해 전형적인 ‘다단계금융 사기’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번 사태서 의문이 제기된 부분은 횡령 등의 혐의로 복역한 경험이 있는 김현재 케이삼흥 회장이 어떻게 또다시 수천명에 이르는 투자자를 끌어모았는지다.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의 창시자로 불린다. 토지를 싼 가격에 사들인 뒤 개발 호재 등이 있다고 소문내 이를 쪼개 파는 방식으로 사기를 저질렀다. 이 과정서 투자금 200억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2006년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20여년이 지난 2021년 김 회장은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서울 등 전국에 7개 지점을 둔 케이삼흥은 언론 광고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통해 투자자를 모았다. 한 케이삼흥 직원에 따르면, 7개 지점서 일하는 직원은 300~350명가량이었다. 직원들은 이른바 가족·지인 영업을 통해 투자자를 모집했다. 월 2% 수익 약속에 수천명 투자 20년 전과 과정도 결과도 같다? 대부분의 직원은 중·장년층으로 인터넷 기사 등을 통해 공개된 김 회장의 과거를 잘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 회장의 사기 전과를 알고 있던 피해자 역시 “원래 무죄였다”거나 전직 대통령을 거론하는 김 회장의 말솜씨에 넘어갔다고 한다. 훈장, 공적비, 기부 기사 등은 김 회장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따박따박 통장에 찍히는 배당금은 김 회장에 대한 신뢰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투자금의 1.5~2%에 이르는 배당금이 매달 입금되고 계약에 따라 만기가 되면 원금이 들어오는 구조였다. 예를 들어 1000만원을 투자하고 3개월 만기로 계약을 맺었다면 1060만원을 돌려받게 되는 셈이다.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에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김 회장은 본인의 사재를 털어 부족한 부분을 메꾸고 있다고 직원들에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면서 직원들에게 더 열심히 일하라고(투자자를 모집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김 회장은 자신의 재산이 1조원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수익이 나기 전까지 자신의 돈으로 원금과 배당금을 일부 주고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꾸준히 원금과 배당금을 받은 대부분의 피해자는 더 많은 돈을 재투자했다. 피해액이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불어난 이유다. 하지만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방식의 사업구조는 자금 순환이 막히면서 결국 무너져 버렸다. 피해자는 지난 2월까지 원금과 배당금을 정상적으로 받았기에 케이삼흥 사태를 예측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 중장년층↑ 하지만 경고음은 분명히 존재했다. 회계법인은 케이삼흥에 대해 ‘감사 의견 거절’을 냈다. 감사 의견 거절은 ▲감사인이 감사보고서를 만드는 데 필요한 증거를 얻지 못해 재무제표 전체에 대한 의견 표명이 불가능할 때 ▲기업의 존립에 의문이 들 때 ▲감사인의 독립성 결여 등으로 회계 감사가 불가능한 상황에 제시한다. 기업 내부 사정이 심상찮다는 소리다. 케이삼흥의 경우 ‘회계연도의 현금흐름표 및 재무제표에 대한 주석을 받지 못했다’가 감사 의견 거절의 근거가 됐다. 그럼에도 수많은 피해자는 김 회장을 철석같이 믿었다. 오히려 정관계 인사를 잘 안다는 김 회장의 말이 피해자의 투자심리를 부추겼다. 과거에도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 사기로 검찰 조사를 받던 시기에 정관계 로비 의혹을 받은 바 있다. 당시 김 회장이 횡령한 돈 일부가 정치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정치권 등의 유력인사를 언급해 투자자의 믿음을 사는 김 회장의 수법은 이번 케이삼흥 사태서도 반복된 것으로 보인다. 한 피해자는 “(김 회장이)정치인 인맥이 많다는 말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 다양한 통로로 정보를 얻는 젊은 층에 비해 정보에 어두운 중‧장년층은 김 회장이 주장하는 인맥에 신뢰를 보냈다. 사기 전과 있는데도… <일요시사> 취재에 따르면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과의 친분도 주장했다. 강연 과정서 서울시 고위공무원의 직책을 언급하면서 그를 통해 협조 약속을 받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과정서 토지나 주택 등을 관리하는 공공기관의 이름도 등장한다. 투자자에게 수익금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김 회장은 “작년에는 부동산 경기 자체가 불투명하니까 1년 동안 거의 안했어요. 착공 들어가려면 제일 먼저 하는 게 보상 업무잖아요. 올해 작년 것까지 합쳐서 하고 있어요. 사업계획 세워놓은 것은 차질이 없다고 하니까”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공공기관,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을 말하면서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이)그걸 관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은 서울시서 주택, 재난안전 등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을)만나서 사업이 진행되면 케이삼흥 것을 우선적으로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했다. 토지 보상을 하는 과정서 케이삼흥에 우선적으로 협조한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김 회장은 ‘주진입도로’ 등을 언급하면서 “2단계든, 3단계든 관계없이 케이삼흥 것을 먼저 협조해주겠다고 그 약속까지 제가 다 받아냈으니까. 하반기에 보상 나오는 것은 확실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강연에 참석한 투자자들은 중간중간 호응하다가 김 회장의 말이 끝나자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정치인 인맥·훈장 자랑 당사자는 “처음 들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일요시사>에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확인을 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의 인물은 지난 8일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김현재라는 이름은 지금 처음 듣는다”고 전했다.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명도 이날 처음 들었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과는 사적 친분은 물론이고 전혀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현재 케이삼흥 사태는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서 수사하고 있다. 김 회장 등 케이삼흥 경영진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법)과 유사수신행위 규제법 위반 등의 혐의를 받는다. 지금까지 파악된 피해자와 피해액은 최소 규모로 시간이 가면 더 늘어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직원으로 불린 모집책이 가족이나 지인 등을 상대로 투자를 권유한 경우가 많아 가정이 파탄난 사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피해자 가운데 일부는 가족의 병원비 등을 투자금으로 넣은 경우도 있었다. 피해자들은 수사기관에 고소하거나 집회를 준비하는 등 개별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빠른 수사가 관건이라고 입을 모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자가 받는 정신적 고통이 커지기 때문이다. 실제 케이삼흥 사태와 같은 대형 사건서 투자금을 돌려받지 못하거나 투자를 권유한 사람에게 독촉을 받던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빠른 수사 피해 복구는? 한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 돈까지 다 끌어모아서 투자했다. 원금만이라도 제발 돌려받고 싶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직원이면서 동시에 투자자인 이 피해자는 5억원 이상을 투자금으로 넣었다고 고백했다. 김 회장의 입장을 듣기 위해 문자메시지, 전화 등을 통해 연락을 취했지만 닿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