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사회1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헌금을 낸다. 매주 내는 주정헌금, 수입의 10%를 내는 십일조, 감사헌금 등 다양한 종류로 ‘정성’을 표한다. 헌금의 액수는 자유지만, 요즘 헌금봉투는 뭔가 불편하다.
과거 일부 대형교회가 헌금 봉투에 구멍을 뚫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교회 관계자들은 구멍논란을 두고 헌금 개수 작업을 용이하게 하고, 실수하지 않기 위해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구멍을 뚫었다고 했다. 교인들의 반응은 엇갈린다. 헌금봉투 타공 때문에 안에 넣은 돈의 색, 즉 액수를 한 눈에 구별할 수 있어 타인의 눈치를 본다는 것이다.
누구를 위해서?
당시 헌금봉투 타공 논란은 뜨거웠지만 ‘반짝’하고 그쳤다. 그리고 수년이 지난 지금, 구멍은 여전했다. 이제는 대형교회뿐만이 아니라 동네교회 헌금봉투에도 구멍이 생겼다. 어느 순간부터 교회 내부의 보편적인 현상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논란을 기피하지만 일부 교인들은 헌금봉투 구멍에 불쾌감을 나타내고 있다.
인천 A교회의 교인 박모씨는 “처음에는 구멍이 뚫려있어 당황했지만 이제는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했다. 반면 교인 최모씨는 “주일(일요일)에 헌금할 때마다 머뭇거리며 주위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헌금함 옆에 비치된 30여종의 헌금봉투들이 모두 가운데에 직경 5mm나 되는 구멍이 뚫려있어 안에 넣은 돈의 액수를 쉽게 구별할 수 있다”며 “돈이 없어 1000원짜리만 헌금하려 해도, 구멍이 뚫려있어 혹시나 남들이 볼까봐 억지로 1만원짜리를 넣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중요한 핵심은 교인들이 직접 구멍을 뚫었던 과거와 달리 이미 타공 된 헌금봉투가 따로 제작된다는 사실이다. 많은 교인들이 자주 애용하는 한 기독교 백화점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이미 오래전부터 구멍을 뚫어 판매했다. 문제가 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는 법. 보통 헌금봉투는 교회 측에서 기독교백화점을 통해 묶음으로 구매한다. 헌금봉투 구매시 타공 여부를 유심히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서울 H교회 초등부의 한 교사는 “구입할 때 구멍 여부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며 “구멍이 있는 줄도 몰랐다”고 말했다. 무감각한 걸까 아니면 무관심한 걸까. 어제 오늘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헌금봉투 타공 문제는 여전히 방치되고 있다.
대형교회서 시행하다 소형교회까지 번져
많이 내도록 유도책…교인들 액수에 부담
한국의 대형교회들은 교인수가 수천 명에서 수만 명에 이른다. 한 해 재정운용액이 100억원이 넘는 교회도 있다. 이 재정운용액은 교인들의 헌금과 비례한다고 볼 수 있다. 즉 교인들의 헌금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일부 대형교회가 헌금봉투에 구멍을 내면서 몇몇 교인들은 교회가 상업적으로 변하는 것 같다며 불쾌감을 나타내고 있다. 의도야 어찌됐든 속이 훤히 보이는 헌금봉투에 신자들이 부담을 느끼는 건 사실이다. 문제는 작금의 현상이 대형교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이제는 구멍 뚫린 헌금봉투가 소형교회까지 자연스럽게 퍼져나가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러한 행위가 교인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구멍난 헌금봉투가 더 많은 헌금을 내도록 암묵적인 강요를 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멍 뚫은 헌금 봉투를 비치하면서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은 교회들이나, 돈을 내는 데 있어 주변의 의식을 두려워하고 헌금 액수에 부담을 느끼는 그 교인들이나 헌금에 대한 성경적 진리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오래전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헌금함이 13개나 있었다고 한다. 헌금함과 헌금에 쓰이는 동전은 모두 쇠로 만들어졌고, 동전은 단위에 따라 굵기와 크기가 달랐다.
부자가 단위가 높은 동전 뭉텅이를 헌금함에 넣을 때 울려 퍼지는 묵직하고 요란한 소리는 가난한 사람들의 어깨를 움츠리게 하고 부자의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었다. 과부의 전 재산인 두 렙돈은 한 끼 식량을 겨우 살 수 있는 액수였다. 그걸 헌금함에 넣을 때 청정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는 과부의 얼굴을 벌겋게 만들었을 것이다.
종교 지도자들 눈에 과부는 돌보고 챙겨 주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저 착취대상에 불과했다. 성경의 마가복음 본문을 보면 예수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을 비난한다.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겼다. 지금은 그런 종교 지도자들을 비난한 예수님의 말씀을 피 빨린 가난한 사람을 칭찬한 말씀으로 둔갑시킨다. 그러니 구멍 뚫린 헌금 봉투를 보면서 쇠로 만든 헌금함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오늘날 한국의 많은 대형교회들처럼 수많은 종류의 헌금 봉투들을 비치하고 직분에 맞게 액수를 정해주며 암묵적으로 헌금 경쟁을 부추기는 행위들은 모두 비성경적인 작태다. 헌금을 낼 때 적은 돈으로 인해 주변을 의식하며 두려워하는 교인들도 결국 이 같은 진리에 무지하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 진정한 교인이라면 헌금 액수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지나치게 남을 의식하는 한국의 문화도 이러한 괴현상에 일조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구멍 뚫린 헌금봉투’가 진정 더 많은 헌금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는 대형교회의 세속화, 기업화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봉투논란을 차치하고도 대형교회들은 지나치게 물량·성장주의에 빠져 있으며 정치·경제권력 뺨치도록 세속화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과도한 외형적 성장의 추구가 이런 논란을 탄생시킨 것이다.
헌금봉투 타공에 대한 교회 측의 입장은 결혼식장이나 장례식장에서 흔히 그렇듯 봉투에 돈이 남아 있는 경우를 막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또 신자들 개개인의 신심과 재산, 또는 가치관에 따라 그에 대한 견해도 다를 것이다.
궁색한 변명만
하지만 사안을 표피적으로 봉투 구멍여부에 포커스를 맞춘다면 본질을 놓치는 것이다. 문제는 일부 교회의 처신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점이다. 교회가 거두는 헌금 가운데 사회구제비는 미미하다. 반면 외형적 성장에는 많은 투자를 한다. 또 일부 교인에 국한된 것인지 모르지만 헌금 지폐의 종류가 노출되는 데 부담을 갖게 만드는 ‘교회문화’에 대해서도 깊이 성찰해야 한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고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어야 할 시대, 한국은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한다. 교회의 모습을 바라보며 희망보다는 도리어 씁쓸한 미소와 불안감이 느껴진다.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가 되길 희망할 뿐이다.
이광호 기자<khlee@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