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을 타도 긴가민가하세요.” 지난 6월11일 인터뷰를 위해 서울 도산공원 근처 카페에서 만난 배우 류현경은 “연기자 생활을 오래해서 많은 사람들이 알아보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기자가 민망할 정도로 크게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본인은 “유명세가 없어서”라고 말하지만 기자가 본 류현경은 ‘배우는 천의 얼굴을 지니고 다양한 삶을 살 수 있는 직업’이라는 말처럼 맡는 배역마다 다양하게 변신을 하는 모습 때문에 동일인임을 인지를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종횡무진하며 살고 있는 류현경을 만나 그녀의 연기에 대해 들어보았다.
96년 김혜수 아역으로 데뷔…깊은 인상 남기며 첫 활동 시작
다양한 캐릭터의 조연 거쳐 마침내 영화 <물 좀 주소> 주인공
<아역>
류현경의 올해 나이는 27세. 13세 때 연기생활을 시작, 데뷔 14년차에 접어든다. 그녀가 연기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막연한 동심 때문이었다. 어렸을 적 가수 서태지를 좋아해 그의 뮤직비디오를 본 후 같이 출연한 여자 탤런트처럼 연기자가 되면 서태지와 만날 수 있으리라는 소박한 꿈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서태지와 아이들이 처음 나왔을 때부터 좋아했어요. 당시 아역 연기자였던 이재은씨가 서태지와 아이들과 함께 TV에 출연하는 것을 보고 연기자 데뷔를 결심했어요. 하지만 아직 만나 본 적은 없어요.”
1996년 SBS 설날특집극 <곰탕>에서 톱스타 김혜수의 아역으로 나와 깊은 인상을 남기며 첫 활동을 시작한 류현경은 이후 드라마 <학교2> <무인시대> <단팥빵> <떼루와>, 영화 <깊은 슬픔> <태양은 없다> <마요네즈> <비천무> <일단 뛰어> <조폭마누라2> <동해물과 백두산이> <신기전>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했다.
그녀가 이처럼 많은 작품에 출연한 것은 연기의 매력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매력이란 자신이 아닌 타인이 될 수 있다는 것, 이런 저런 배역을 경험하면서 다양한 사람의 삶을 살아보는 것이 그녀에겐 기쁨이다.
“연기란 하면 할수록 재미있고 제 자신이 다른 사람의 삶을 체험할 수 있어 좋은 것 같아요. 어릴 적부터 연기자의 길을 선택했지만 후회해본 적은 없어요.”
<조연>
류현경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녀의 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팔색조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무인시대>에서는 화려한 외모와 요설로 주위 남자들을 파멸로 몰고 가는 악녀 캐릭터를, <단팥빵>에서는 덜렁대고 푼수끼 넘치는 오버의 여왕 캐릭터를 선보였으며 영화 <조폭마누라2>에서는 왈가닥 여고생으로 나와 신은경을 내내 구박하는 모습으로 관객들의 눈총을 받았고 <동해물과 백두산이>서도 대책 없이 사고만 치는 경찰서장 딸로 나왔으며, <신기전>에서도 인상깊은 연기를 펼치는 등 다양한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20대의 연기자라면 다양한 배역을 소화하기가 다소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녀는 오랜 연기생활로 탄탄하게 쌓인 내공으로 무난하게 이를 극복하고 있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열심히 해야죠. 때로는 힘들 때도 있지만 제 연기를 보고 실컷 웃거나 울 때 연기자로서 많은 보람을 느껴요.”
아역 때부터 많은 드라마에 출연하며 다져온 연기력 때문인지 류현경은 항상 드라마나 영화에 조연급 캐스팅 1순위에 올라있다. 캐스팅 1순위에 올라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혹시나 조연으로 굳어지는 것은 아닌지 조바심이 들지는 않을까.
“조바심이 들거나 하지는 않아요. 지금도 배우가 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뭐든지 때가 있는 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열심히만 하면 언젠가는 빛 볼 날이 오겠죠.”
어릴 적 서태지가 좋아서 연기자의 꿈을 키워온 류현경은 연기를 시작하면서는 현장이 좋아서 무작정 연기를 해왔다. 연기학원을 등록해 처음 현장에 투입됐을 때를 잊을 수가 없을 정도로. 자신이 살던 세계와는 또 다른 세계를 맛본 류현경은 20살이 넘어서야 연기자에 대한 매력을 느꼈다.
“2년 전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신기전>을 찍으면서 김유진 감독님이 디렉션 하는 걸 보고 영화라는 작업에 이런 매력이 있고, 연기가 이렇게도 달라질 수 있다는 걸. 그때서야 비로소 평생 연기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주연>
아쉬움을 달래기 위함일까. 류현경은 저예산 영화 <물 좀 주소>의 곽선주 역을 덥석 붙잡는다. ‘선주’는 여배우라면 누구라도 탐낼 만한 다양한 매력이 넘치는 인물이다.
갓난아이를 홀로 키우는 22세의 싱글맘이자 강한 생활력으로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캐릭터다. 여기에 밝고 톡톡 튀는 성격에 당찬 모습까지 많은 스펙트럼을 보여줄 수 있는 매력적인 여자다.
“선주는 배우로서 욕심이 나는 역할이에요. 감독님은 제게서 이중적인 매력을 봤다고 하시더라고요. 중성적이면서도 여성적인, 그래서 오디션에서 합격했죠. 촬영 2주 전에 캐스팅되어서 불안한 마음에 더 열심히 한 것 같아요. 발레에 나레이터 모델 등등 극중 선주가 하는 일들을 열심히 배웠죠. 하루 몇 시간을 발레하고 노래 배우고 그랬어요.”
류현경은 드라마 <떼루아>를 마지막으로 자신의 소속사였던 예당에서 나와 엠지비엔터테이먼트에 새로운 둥지를 틀게 됐다. 연기를 계속해야겠다는 결심을 내린 그녀에겐 힘든 선택이기도 했다.
“예당에서 퇴출당했어요. 저에게 손을 내밀어준 엠지비엔터테이먼트에 감사하죠. 다시 소속사에 속하게 돼서 심적으로 든든하고 많이 편해졌어요. 진정한 연기자가 되도록 노력할게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