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노무현 쇼크③노(盧) 가슴 후벼 판 사람들

‘노심’에 비수 꽂아도… 타협하지 않았다! 굴복하지 않았다! 구걸하지 않았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가슴으로 보낸 국민들의 마음속에 ‘인간 노무현’에 대한 향수가 좀처럼 지워지지 않고 있다. ‘있을 땐 몰랐다’는 그리움과 ‘있을 때 잘할 걸’이란 아쉬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자책감에 ‘그냥 그렇게 보낸’ 울분과 탄식이 섞인 전 국민적 애도 물결이 여전히 출렁이고 있다. 그리고 이제 서서히 국민들의 참담하고 비통한 심정이 원망과 분노로 격앙되면서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는 노 전 대통령의 정치인생에 ‘상처’를 입힌 인사들에게 화살이 쏟아지고 있다. 그동안 ‘노심’에 비수를 꽂은 옛 동지들과 정적들을 추려봤다.

‘영원한 적, 동지 없는’구린 정치판서 수많은 배신 맛봐
친노세력 속속 변절…옛동지 등 돌린 뒷모습에 한숨만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탈권위과 수평적 리더십으로 국민과의 의사소통은 물론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의 ‘개혁’을 선창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원칙’과 ‘소신’이 그의 무기였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 후에도 기존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뚜렷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행동 하나 하나…
말 한마디에 시비

그러나 정치판엔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는 법. ‘구린 전통’은 노 전 대통령도 그냥 두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은 줄곧 ‘가시밭길’이었던 정치인생에서 수많은 배신과 모욕을 견뎌야 했다.
정치에 입문한 이후 지난 20여 년 내내 그랬다.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같은 자리에서 한 시선으로 ‘노(盧)비어천가’를 외친 옛 동지들의 등 돌린 뒷모습을 쓸쓸히 지켜봐야 했고 행동 하나 하나 또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시비를 거는 정적들의 꼬투리 공세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는 타협하지 않았고 굴복하지 않았으며, 구걸하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에게 가장 먼저 ‘배신’을 맛보게 해준 인물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다. 노 전 대통령은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어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다가 1988년 13대 총선 때 김 전 대통령(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의 권유로 정치에 발을 들였다.
그해 13대 총선에서 5공 신군부의 핵심인물인 허삼수(당시 민정당 후보)씨를 누르고 정계에 입문해(부산 동구) 곧바로 이어진 5공 청문회를 통해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을 정치권에 끌어들인 김 전 대통령의 손을 뿌리쳤다. 김 전 대통령이 1990년 3당 합당(민정당-통일민주당-공화당)에 나서자 민주화운동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 ‘변절자’라고 맹비난하며 제 발로 뛰쳐나왔다.
결별 대가는 컸다. 노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당시 평민당 총재)의 우산 속으로 들어갔지만 허삼수씨와 다시 맞붙은 1992년 14대 총선에서 고배를 마셨다. 여당을 이끌던 김 전 대통령이 노 전 대통령 대신 허씨를 “충직한 군인”이라고 거든 결과였다.

이어 1995년 부산시장 선거, 1996년 15대 총선, 2000년 16대 총선에서도 연거푸 물을 마셔야 했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대선 당시 대놓고 “이명박을 지지한다”고 밝힌 것도 모자라 틈만 나면 각종 공식석상에서 “노무현을 괜히 키웠다”는 취지의 발언으로 노 전 대통령의 가슴을 후벼 파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아군’들로부터 깊은 상처를 입었다. 특히 이인제 의원(무소속)과는 경선을 거치면서 완전히 ‘앙숙’으로 돌아섰다. 당초 두 사람 간 관계가 원만했던 것은 아니지만 경선 이후 더욱 벽을 쌓았다.

‘이인제 대세론’이 ‘노풍’에 의해 서서히 함몰되자 다급해진 이 의원은 노 전 대통령의 장인이 6·25 빨치산 활동으로 옥사한 좌익인사란 점을 부각시켜 공격했고, 노 전 대통령은 “그러면 사랑하는 아내를 버리라는 말이냐”고 받아쳐 엄청난 호응을 받았지만 대선 내내 ‘색깔론’에 시달려야 했다.
이 의원은 16대 대선을 코앞에 둔 2002년 12월 초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한 뒤 “노무현 지지율은 광기다. 노풍은 광풍”이라고 노 전 대통령을 향해 독설을 퍼부었다. 지난 4월엔 ‘박연차 게이트’가 터지자 “노무현 정권이 비전도 신념도 없이 낡은 이념과 포퓰리즘에 의존해 생긴 결과다. 지금 드러나고 있는 것은 빙산의 일각”이란 입장을 드러내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대선 막판에 또 한 번 등에 칼이 꽂히는 아픔을 겪었다. 정몽준 한나라당 최고위원(당시 국민통합21 대표)으로부터다.
2002년 4월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노 전 대통령은 지지율 하락과 6·13 지방선거와 8·8 재보선의 연이은 참패로 같은 당 의원들이 집단 탈당하는 등 ‘반노’진영의 사퇴 압력을 받자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한일월드컵 열기에 힘입어 상승세를 탔던 정 최고위원과 ‘단일화’란 승부수를 던진 것.
이 결과 같은 해 11월, 노 전 대통령이 단일후보로 선출됐으나 정 최고위원은 대선 하루 전날 밤 노 전 대통령이 ‘다음 대통령은 정몽준’이란 피켓을 보고 “속도위반 하지 말라. 우리에겐 정동영, 추미애도 있다”고 말한 명동 유세 등을 문제 삼아 일방적인 지지철회를 선언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당시 한나라당 후보)를 57만표 차로 이기고 극적으로 대권을 거머줬지만 정 최고위원과 후보단일화를 이룬 뒤 포장마차에서 기울인 소주잔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으로 남았다. 정 최고위원 역시 노 전 대통령의 검찰 소환을 앞두고 “노무현은 배신과 기만의 정치로 표를 얻은 정치꾼”이라고 몰아붙인 바 있다.

정치적 시련 겪자
가신들까지 짐싸

‘대통령 노무현’의 행보도 순탄치 않았다. 그중에서도 2004년 3월 헌정사상 최초로 한나라당이 꺼내든 탄핵소추안은 노 전 대통령의 정치인생에 최대 위기를 불러왔다.
노 전 대통령에게 ‘탄핵 폭탄’을 떨어뜨린 실질적인 주역은 조순형 자유선진당 의원(당시 민주당 대표), 홍사덕 한나라당 의원(당시 한나라당 원내총무) 등이다. 조 의원은 노 전 대통령이 대선 후보시절 선대위원장을 맡은 참여정부 탄생의 일등공신.

‘여기서 맞고, 저기서 터지고’
정적은 소리 내 울지 못한다


하지만 민주당-열린우리당 분당 이후 2004년 17대 총선 때 노 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 선거운동으로 비치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처음 거론했다. 노 전 대통령이 대선 때 정 최고위원과 결별을 감수하고도 치켜세웠던 추미애 민주당 의원도 이를 거들었다.
홍 의원은 한나라당 쪽에서 이들 의원과 손발을 맞춰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진두지휘했다. 이들은 헌법재판소의 탄핵 기각 결정 이후 불어 닥친 메가톤급 ‘역풍’으로 여의도를 떠났다가 가까스로 다시 정치권에 얼굴을 내밀 수 있었다.

탄핵 역풍을 불러온 촛불집회 속에서 국민들의 기대감으로 온 나라가 들썩인 것도 잠시. 노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 동안 보수세력과 잦은 충돌을 빚었고, 사사건건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으면서 ‘희망의 메신저’에서 ‘원망의 표적’으로 추락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노 전 대통령이 이런 시련을 겪는 과정에서 측근들까지 하나둘 떠났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자 ‘친노세력’들이 속속 변절한 것. 이들은 한때 노 전 대통령과 한 배를 탄 정치적 동지였으나 참여정부 중반 이후 점점 거리를 두더니 ‘뒤뚱뒤뚱’한 정권 말에 이르자 다른 편에 붙거나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정동영 무소속 의원,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 천정배 민주당 의원, 강봉균 민주당 의원, 김한길 전 의원….

이들은 모두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와 ‘열린우리당 창당’(2003년 11월)의 일등공신들로 노 전 대통령의 보은 차원으로 참여정부에서 모두 한 자리씩(장관직) 차지했다. 그만큼 비수가 꽂힌 ‘노심’의 아픔이 더했다.
‘배반의 장미’는 열린우리당이 2004년 하반기부터 치러진 각종 재·보선과 2006년 5·31 지방선거에서 연달아 수모를 당하면서 싹을 틔웠다. 그 화살이 노 전 대통령에게 날아간 것.

열린우리당 존폐를 둘러싸고 노 전 대통령과 친정그룹간 신경전은 단순히 의견충돌을 넘어서 감정싸움으로 확전돼 집단탈당 사태로 이어졌고 결국 2007년 8월 열린우리당이 해체되는 수순을 밟았다.
특히 노 전 대통령과 정동영-김근태 사이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노 전 대통령이 “지도급 인사들이 열린우리당의 해체나 탈당을 주장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라고 지적하자 두 전직 의장은 “대통령은 더 이상 당의 현안에 상관하지 말라”며 맞받아치기도 했다.

급기야 청와대가 정동영-김근태의 노 전 대통령 비판을 ‘배신’으로 규정했고 이에 친노그룹이 ‘의리 없는 대통령’이라고 응수하면서 양측의 사이는 더욱 멀어졌다. 올 들어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되자 일부 친노인사 출신들이 ‘노무현과 거리두기’에 나서는 씁쓸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노(盧)비어천가’서
‘명(明)비어천가’로

노 전 대통령의 뒤통수를 친 참여정부 핵심 수뇌부들도 눈에 띈다. 이들은 ‘노무현 옷’을 벗은 뒤 한나라당으로 말을 바꿔 탔다.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치안비서관을 거쳐 서울경찰청장과 경찰청장을 지낸 허준영 코레일 사장은 2005년 말 시위대 강경진압의 책임을 지고 불명예 퇴진한 것에 불만을 품고 한나라당에 입당, 2006년 7·26 재보선(서울 성북 을)과 지난해 4·9 총선(서울 중구)에서 공천을 신청했으나 탈락했다.

참여정부가 추진한 각종 부동산 대책과 행정수도 이전 작업에 충주적인 역할을 한 최종찬 전 건설교통부 장관도 4·9 총선에서 한나라당 후보(안양 동안갑)로 나섰지만 배지를 달지 못했다.
2007년 10월 남북정상회담 당시 국방부장관 자격으로 노 전 대통령을 수행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악수하면서 허리를 굽히지 않아 ‘꼿꼿 장수’란 별명과 인기를 얻은 김장수 한나라당 의원은 4·9 총선 직전 한나라당에 입당해 비례대표로 선출됐다.

무엇보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 직전인 2007년 10월 자신이 직접 임명한 임채진 검찰총장의 수사팀으로부터 ‘표적’이 되는 고통을 당해야 했다.
이외에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전 금융감독위원장), 한덕수 주미대사(전 경제부총리), 윤진식 청와대 경제수석(전 산업자원부 장관) 등 노무현 정부 출신 인사도 이명박 정부로 자리를 옮겨 친노계에선 ‘배신자’로 낙인 찍혔다.

최근엔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막말을 쏟아낸 각계 인사들이 구설수에 오르고 있는 가운데 유난히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발언이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안 원내대표는 지난달 27일 노 전 대통령의 국민장을 앞두고 “국민장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변질시켜 소요사태가 일어날지 정말 걱정”이라고 말한 바 있다.

공교롭게도 안 원내대표는 노 전 대통령과 사법시험 17회 동기로, 노 전 대통령 서거 직후 사법연수원 시절 함께 찍었던 사진을 꺼내 들며 감회에 젖는 액션(?)을 취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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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대통령선거는 전 정부의 공과를 통째로 평가받는 시험이다. 여당 후보는 전 정부의 공이 크면 후광을 입고, 반대로 과가 많으면 핸디캡을 안고 시험장에 들어서는 셈이다. 이번 대선 정국은 대통령 탄핵으로부터 시작됐다. 야당은 5년 만에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정권 창출에 성공한 대통령은 집권 1~2년 차에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한다. 3~4년 차에 이르면 정부 안팎서 누수가 발생한다. 빠르면 이 시기에 레임덕이 시작된다. 임기 마지막 해에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 몸을 사려야 한다. 지지율에 따라 차기 대선에 끼치는 입김도 달라진다. 5년 단임제 이후 대체로 나타나던 대통령의 모습이다. 주기설 깬 집값 폭등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선거가 중간 평가의 성격을 띤다면 대선은 최종 시험에 가깝다. 모든 정당의 목표가 정권 창출인 만큼 대선의 무게감은 남다르다. 행정부 수장을 넘어 국가원수로서 대통령이 갖는 권한이 그만큼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과로 대통령직선제가 도입됐다. 국민 모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도록 헌법이 개정된 것이다. 대통령직선제가 정착된 이후 정권교체는 10년 주기로 이뤄졌다. 보수 진영의 노태우·김영삼정부에 이어 진보 진영의 김대중·노무현정부가 들어섰다. 이후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선으로 보수 진영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으로 물러난 뒤 진보 진영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재수 끝에 청와대에 입성했다. 그대로 이어지는 듯했던 ‘10년 주기설’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등장으로 깨졌다. 5년 만의 정권교체가 진보 진영에 안긴 충격은 컸다. 문 전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퇴임 전까지 40% 안팎을 오르내렸다. 지지율 10~20%대를 오가며 레임덕에 시달렸던 과거 대통령 때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그럼에도 진보 진영은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득표율 차이는 1%도 되지 않았다. 지난 대선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윤 전 대통령에게 0.73%p 차이로 졌다. 대선 전 여러 여론조사에서 보여준 윤 전 대통령이 이 후보를 넉넉하게 앞선다는 결과와 비교해서는 선전이었지만 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을 고려하면 충격적인 패배였다. 게다가 당시 윤 전 대통령은 선출직 출마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는 ‘초보 정치인’이었다. 대선 패배, 서울이 결정적 역할 부동산 가격이 낙선에 영향 줘 민주당에서는 대선 패배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분출했다. 이 과정서 레이더망에 걸려든 게 ‘부동산’ 문제였다. 정확하게는 문재인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도마 위에 올랐다. 문정부에서는 20번이 넘는 부동산 대책이 쏟아졌다. 정부 발표가 나올 때마다 부동산시장은 널뛰었다. 실제 윤 전 대통령 승리의 쐐기를 박은 서울 표심이 부동산 정책에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이 개표 직후 제기됐다. 지난 대선은 말 그대로 양 진영을 ‘쥐어짠’ 선거였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텃밭’인 영남과 호남 지역서 총결집했다. 당락을 가른 건 서울서의 격차였다. 윤 전 대통령은 서울서 31만여표를 앞섰다. 전체 표 차이인 24만표보다 많다. 윤 전 대통령은 마포·용산·성동 등 이른바 ‘마용성’으로 불리는 지역과 광진·강동·양천 등 아파트가 밀집돼있으면서 상대적으로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서 이겼다. 구별로 따지면 25개 구 중 14곳에서 윤 전 대통령에게 더 많은 표를 몰아줬다. 21대 총선 때 민주당이 4곳을 빼고 21개 구를 이긴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선방이었다. 노원·도봉·강북 등 ‘노도강’으로 불리는 지역서도 윤 전 대통령은 선전했다. 이 지역은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곳이다. 재건축·재개발 아파트가 밀집돼있다. 승부 자체는 이 후보가 이겼지만 표 차가 근소했다. 총선 때 20% 가까이 차이 났던 게 대선에서는 1% 안팎으로 줄었다. 부동산 문제에 따른 민심이반이 뚜렷하게 드러났다는 분석이다. 완전한 실패 최악의 실정 같은 해 8월 국회입법조사처에서 발간한 <제20대 대통령선거 분석> 자료에도 부동산이 가른 표심이 언급돼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대선에서 유권자가 관심을 가진 의제는 경제 회복과 주거 안정 등 부동산 정책이었다. 대선 전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서 조사한 대선 주요 의제 관련 설문서도 경제 회복(32%), 부동산 문제 해결(32%)이 첫손에 꼽혔다. 40~50대보다 30대서 부동산 문제에 관한 관심이 컸다. 그러면서 이 후보가 과거 민주당 후보에 비해 수도권 득표가 낮았다며 부동산 가격 상승과 관련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민주화 이후 모든 대선서 민주당 계열 후보가 국민의힘 계열 후보에게 서울서 패한 적은 2007년밖에 없었다”며 “수도권은 인구가 집중된 탓에 득표율 차이가 작더라도 득표 차는 매우 크게 나타난다. 그만큼 선거 승패에 수도권 표심의 영향이 컸다”고 설명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부동산 이슈와 득표율의 상관관계를 보기 위해 동 단위로 서울 지역의 아파트 가격을 살폈다. 아파트 가격 변동에 따른 득표율을 본 것이다. 분석 결과 2021년 아파트 가격과 2020~2021년 가격 변동이 윤 전 대통령, 이 후보의 득표율과 상관성이 높았다. 가격 변동보다는 가격 자체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아파트 평(3.3㎡)당 평균 가격이 높은 지역일수록, 아파트 가격 증가폭이 큰 지역일수록 윤 전 대통령의 득표율이 이 후보보다 높았다. 또 재산세 부담이 증가한 지역서 윤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많았다. 재산세가 늘었다는 건 그만큼 부동산 가격이 올랐다는 뜻이다. 지지율도 무용지물 민주당서 지목한 패배 원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주당은 대선 패배 1년 뒤인 2023년 8월 녹서(Green Paper, 정책을 제안하고 다양한 의견 수렴 과정을 담은 대화록) <민주당 재집권 전략 보고서>를 발간했다. 민주당 을지키는민생실천위원회(을지로위원회) 출범 10주년을 맞아 발표한 일종의 대선 패배 ‘반성문’이었다. 민주당은 해당 보고서에서 “오락가락하는 정책으로 집값 상승을 잡지 못했다”고 짚었다. 문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보수와 진보 양 진영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며 그 원인을 일관성 부족에서 찾은 것이다. 그러면서 “노무현정부 부동산 정책도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선거 대패와 당내 비난에도 철학과 원칙을 버리지 않은 점은 높게 평가된다”며 “문정부는 세제 개편 이후에도 집값이 계속 상승하면서 비판에 직면하자 전반적인 세제를 완화하는 정반대 조치를 취했다”고 지적했다. 문정부는 부동산, 즉 집이 투자가 아닌 거주의 대상이라는 점을 시장에 각인시키는 데 정책 방향을 맞췄다. 당연히 투기 수요를 때려잡는 데 모든 역량이 집중됐다. 부동산으로 재산을 불리려는 세력이 많아지면서 집값이 왜곡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른바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문정부는 세금 부과, 대출 규제 등으로 돈줄을 조였다. 2017년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대출 규제 강화 등의 정책이 시행됐고 2018년에는 주택을 보유한 사람이 규제 지역서 새집을 사려 할 경우 주택담보대출을 받지 못하도록 했다. 서울 25개 구, 분당·과천·하남·세종 등이 규제 지역으로 묶였다. 규제가 심해질수록 집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부동산이 ‘우상향 안전자산’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시중에 풀린 돈이 몰리고 또 몰렸다. 저가의 낡은 집 여러 채보다 고가의 좋은 집 한 채를 사자는 ‘똘똘한 한 채’ 이론도 생겨났다. ‘자고 일어나면 집값이 오른다’는 말이 돌면서 부동산 심리를 크게 자극한 것이다. 당시 ‘영끌족’ 지금은 곡소리 통계 조작으로 검찰 수사까지 부동산을 움직이는 건 ‘심리’라는 말이 있듯 너도나도 집을 사는 데 혈안이 되면서 집값이 요동쳤다. 집값이 오르는데도 수요가 있으니 계속 상승하는 구조였다. 이 과정서 ‘벼락 거지’ 등의 말이 생겨났다. 부동산 등 자산 가치가 급격하게 오르면서 상대적으로 가난해진 상황을 일컫는 표현이다. 동시에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어느 정부든 출범하자마자 제일 먼저 손대는 게 부동산 정책일 정도로 우리나라 국민의 ‘집’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다. 문정부 역시 임기 내내 ‘집값 잡기’에 몰두했다. 하지만 끝내 실패했다. 몇몇 전문가는 문정부의 가장 큰 패착으로 부동산 정책을 꼽을 정도다. 그 여파가 대선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후폭풍이다. 문정부 당시 ‘갭투자(전세 끼고 매수)’ 방식으로 집을 마련한 이들이 현재 파산 지경에 이르고 있다. 폭탄 돌리기를 하다가 더 버티지 못하고 폭발한 것이다. ‘영끌족’의 몰락이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산 사람은 높아진 금리를 견디지 못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문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펴면서 통계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수사가 진행 중이다. 당시 정책을 주도했던 대통령 비서실장, 국토교통부 장관 등은 감사원의 의뢰로 전부 수사 대상에 올라 있다. 이들은 정부 정책을 뒷받침하는 통계를 만들어내라고 통계청, 한국부동산원 등을 압박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감사원에 따르면 문정부가 통계를 조작한 횟수는 102회에 달한다. 2018년 1월부터 2021년 10월까지 일어난 일이다. 청와대와 국토교통부는 한국부동산원에 주택 가격 변동률을 하향 조정하도록 하거나 부동산 대책이 효과가 있는 것처럼 통계 수치 조정을 지시했다. 민주당은 ‘전 정권에 대한 탄압’이라면서 반발 중이다. 이번에도 이슈 될까? 이 후보와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재건축·재개발을 활성화해 공급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의 공약도 비슷하다. 후보별로 차이가 미미해 이번 대선에서는 부동산 이슈가 생각보다 대망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문정부의 정책 후폭풍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만큼 또다시 문정부에 이 후보가 발목을 잡히는 형국이 반복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