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유일' A급 타짜녀, 한마담 정체

화려한 손기술 도박꾼 킬러 ‘사기의 여왕’

[일요시사=사회팀] 사기 도박계의 여왕으로 불리는 한모씨. 이 여성은 영화 <타짜>에서 ‘정마담’처럼 일명 ‘한 마담’이라고도 불린다. 평소 건장한 남성 2명을 대동하는 한씨는 서울·경기 일대를 주무대로 여성으론 유일하게 ‘A급 타짜’로 칭해지고 있다. 도박꾼을 협박해 돈을 뜯어내고 보복성 위협을 가하는 것으로 악명 높다.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1990년대 중반부터 큰 판돈이 오가는 전국의 내로라하는 도박장에서 ‘사기도박의 꽃’으로 활약을 떨친 한모(56)씨. 한씨는 2000년대 들어서서 국내 최대 사채업자로 알려진 ‘명동 사채왕’으로 이름을 떨쳤던 최모(59)씨와 손잡고 직접 도박장을 열거나, 상습 도박꾼에게 10%를 이자로 받고 현금을 빌려주는 일명 ‘꽁지꾼’ 역할을 도맡으며 자금을 축적해 나아갔다. 또 서울 영등포 지역 조폭 원로인 유모(62)씨와도 꽁지놀이를 한 것으로 알려져 조직폭력배와 사채업자 등 넘사벽 인맥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공갈협박에도
수사망 피해

영화 <타짜>에서 배우 김혜수가 연기한 정 마담을 연상케 하는 그의 사기도박 수법은 수도권 일대를 단번에 주름잡을 만큼 교묘하고 철저했다. 한씨와 단 한 번이라도 도박을 해 본 사람들은 일제히 “화투장 뒷면만 보고도 자신이 원하는 패를 제외한 나머지 패를 상대방에게 배분할 수 있는 신의 손기술을 자랑한다”고 언급한다. 업계 관계자들은 이런 한씨를 두고 “도박계에서 흔치 않은 ‘A급 여성타짜’로 꼽힌다. 90년대 중반부터 조직폭력배와 사채업자를 등에 업고 체계적으로 사기도박과 관련된 사건사고 등을 제조하며 차츰 거물이 됐다”고 전했다.

이처럼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십수년을 넘게 자행해온 한씨의 사기도박과 상습 도박꾼을 상대로 한 공갈 협박 및 보복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2년 전 서울 여의도 한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에 상습 도박꾼 A씨를 집 안으로 불러들인 한씨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옆에 건장한 남성 2명을 끼고 있었다. 한씨는 A씨에게 “네가 매일 상습 도박판을 벌이는 것도, 도박 때문에 경찰 수배를 피해 다니는 것도 모두 알고 있다. 말을 안 들으면 경찰에 신고해서 잡아넣을 것이니 내 말 잘 들어라”라고 협박했다.

수도권 도박장 주무대 “극악무도”악명 자자
명동 사채왕·영등포 조폭두목과 손잡고 활동


얼마 뒤 A씨는 한씨가 요구한 돈 2000만원을 울며 겨자 먹기로 건넸다. 한씨 일당의 횡포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던 A씨는 자신의 상습 도박 혐의를 자수해 처벌을 받고 나온 뒤, 최근 서울중앙지검에 “빌려준 돈을 갚지 않으면 경찰에게 도박장을 신고 당하거나 그와 연계된 조폭들에게 죽지 않을 만큼 무작위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고 실토하고 한씨 일당의 악행을 제보했다. 그런데 한씨의 협박에 돈을 뜯긴 상습 도박꾼은 비단 A씨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피해자 B씨 역시 같은 아파트로 불려가 한씨로부터 수천만원을 뜯겼다고 검찰에 제보했다.

검찰은 피해자들의 제보를 받고 곧바로 서민 생활 침해사범 합동수사부를 출범시켰다. 전국 각 검찰청에서 ‘여성 타짜’ 한씨에 대한 수사와 내사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강남 룸살롱의 황제’가 이경백이라면 ‘도박계의 여왕’은 한 마담이라는 말이 방방곡곡에서 돌고 있을 정도로 한씨는 서울과 경기 등 수도권 일대 도박장에서는 유명인사로 꼽히고 있다.

한씨는 ‘도리짓고땡’이라는 종목에서 화투장 뒷면만 보고도 원하는 패를 자신과 상대에게 정확히 배분할 수 있는 화려하고 능수능란한 손기술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전국에서 기승을 부리는 도박꾼들이 한씨를 상대로 공갈 및 도박장 개장 혐의 등으로 수차례 고소했지만 한씨는 모두 ‘혐의 없음’ 처분을 받아 요리조리 수사망을 피해나갔다.

끈질긴 보복에
피해자 수십명

검찰 관계자 및 피해자들은 “한씨가 사전에 참고인을 찾아가 진술을 번복시키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처벌을 피하는 수법을 사용해 그간 수사가 만만치 않았던 게 사실이다”라고 설명했다.

한씨에게 거액을 뜯긴 또 다른 피해자 C씨는 검찰 조사에서 “한씨는 돈을 갚지 않으면 경찰에 도박 현장을 직접 신고해 구속시키는 등 반드시 보복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전국의 타짜 수십 명이 손 쓸 겨를도 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한씨는 2011년부터 사채왕 최씨와 돌연 갈라서면서 검찰에 최씨에 대한 비리 사실을 제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에 따르면 한 부동산투자신탁회사는 거액의 사채를 끌어들여 회사를 코스피에 상장시킨 뒤 회사 임원 여러 명이 회삿돈 수십억원을 빼돌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검찰은 지난 1월 회사 임원들을 줄줄이 배임 및 횡령 혐의로 기소한 바 있다.


협박해 돈 뜯어내고 보복 위협
검찰 첩보 입수해 비밀리 내사

대구지검 서부지청은 지난해 4월 부동산투자신탁회사 조모(50) 부회장에게 “비리 사실을 알려 상장폐지 시키겠다”며 협박해 9억여원을 가로챈 혐의로 최씨를 구속 기소했다. 이후 이 회사는 상장폐지 됐는데, 이 사건이 들통 난 배후에 한씨가 숨어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한씨의 제보로 인해 최씨가 저지른 그동안의 행각이 밝혀지며 불똥은 경찰로까지 튀기도 했다. 최씨에게서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경찰관 2명에 대한 영장이 청구된 것이다.

당시 사건을 담당하던 검찰은 “지난 2007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사건 무마와 관련 청부수사를 해주는 대가로 브로커 유씨를 통해 최씨로부터 총 4회에 걸쳐 2600여만원을 받은 혐의가 포착됐다”고 영장청구 원인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이어 검찰이 서민생활 침해사범 단속에 대대적으로 나서면서 도박의 여왕 한씨 사건도 재차 수면 위에 떠오른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관계자는 “한씨와 관련해 그동안 서울중앙지검 강력부와 수원지검, 대구지검 서부지청이 내사해왔다”며 “서민생활 침해사범 단속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라 전했다.

또 다른 도박의 꽃
우씨와 라이벌관계

‘도박계의 여왕’ ‘여성 타짜’라고 불리는 이는 또 있었다. 한씨와 쌍두마차로 꼽히는 우모(59)씨. 그는 지난해 가평의 모 펜션에서 억대 불법 도박판을 벌였다가 경찰에 검거돼 현재 구속 수감 중인 상태이나, 그녀 역시 한씨와 마찬가지로 국내 도박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거물이라고 알려졌다.

사기도박판을 떡 주무르듯 군림해온 우씨는 지난해 12월 내연남이자 한씨의 지인인 조폭 원로 유씨의 비호를 받아 전문도박꾼이 동원된 수억원대의 사기도박장을 운영한 바 있다. 검거 당시 우씨는 경기도 가평 소재의 모 펜션에서 화투에 칩이 달린 ‘총책’이라는 신종 억대 도박장을 개설해 운영해 왔는데, 총책수법을 잘 간파하고 있는 익명의 전문 도박꾼은 “화투패 뒤에 달려있는 칩이 컴퓨터와 연결돼있어 알아서 계산을 한다”며 총책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도리짓고땡 하면 화투장
뒷면만 보고도 패 알아”

또한 우씨 도박장의 주요 타깃은 평범한 가정주부들로 이들은 지인을 통해 우연히 도박판에 발을 들여놨다가 적게는 수백만원에서 많게는 수억원대까지 천정부지의 돈을 잃고 나가기 일쑤였으며, 우씨는 이들에게 도박자금을 빌려주는 대가로 거액의 부당이득을 챙겨왔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영화 <타짜>의 정 마담이 호구로 정한 건설업자를 속여 몇 차례에 걸쳐 부당이익을 취한 것과 동일한 수법이다.

우씨가 운영하는 도박장을 경찰에 신고한 한 남성은 “주먹계에 있는 내연의 처들이 도박계를 주름잡고, 조직폭력배들이 주부들에게 돈을 대주며 도박을 시켰다. 만약 채무를 상환하기로 한 날짜에 안 돌려주면 온갖 협박도 일삼는다”라고 말했다. 이어 우씨 도박장에서 거액의 돈을 잃은 한 여성은 “돈을 잃게 되면 곧바로 조폭들이 나서서 돈을 대주고 강제로라도 도박을 하게 만든다”며 “정해진 기일 내에 금액을 갚지 못 할 경우 가족들에게 불법 도박한 사실을 알리겠다고 하거나 아이들이 다니고 있는 학교로 찾아가겠다고 협박해왔다”고 심경을 밝혔다.

현재 검찰에서는 한씨는 물론 우씨 등과 연계돼 있는 또 다른 인물이나 불법 도박 조직 등은 없는지 수사를 진행 중이다. ‘도박의 여왕’ ‘도박의 꽃’이라고 불리는 한씨와 우씨 등 거물들이 검찰수사의 레이더망에 포착됨에 따라 향후 추가적인 피해사실 확인 및 관련자 색출이 가능할지에도 여론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번에도 검찰
칼날 피해갈까

십수년간 불법 사기도박판을 운영해 왔음에도 한씨는 미꾸라지처럼 검경 수사망을 잘 피해 다녔다. 그가 가진 남다른 인맥과 타인 앞에서 기죽지 않는 두둑한 배짱, 카리스마를 동원해 수많은 피해자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또한 자신의 등을 돌린 이는 감방에 넣어버리는 등 반드시 복수하는 잔인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때 한씨와 쌍맥을 이뤘던 우씨는 지난해 부당이익 취득 및 불법도박 운영혐의로 현재 수감 중인 상태지만 한씨는 아직 건재하다. 이번에는 검찰이 단단히 마음먹고 한씨의 범행을 모두 벗겨낼 것이라고 일침을 놓은 상태라 한씨가 또다시 검찰의 칼날을 교묘히 피해갈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김지선 기자 <jisun86@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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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