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세태> 살인 부른 층간소음 분쟁 실태

이웃사촌 옛말…아이들 시끄럽다고 칼부림

[일요시사=사회팀] 정초부터 칼부림이 일어 전국을 충격 속에 빠뜨렸다. 명절을 맞이해 노부모를 뵈러 왔던 30대 형제는 40대 이웃남성이 휘두른 흉기에 찔려 한순간에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이처럼 끔찍한 살인을 부른 원인은 바로 층간소음에 있었다. 특히 다세대 주택인 아파트의 경우, 층간소음문제로 이웃 간의 다툼이 자주 발생한다. 발소리, 음악소리 등 사소한 소음 때문에 멱살잡이부터 살인충동까지 일으키는 층간소음의 문제점을 집중분석했다.



한해를 여는 명절 설을 하루 앞둔 지난 9일, 서울 중랑구 면목동의 한 아파트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40대 남성 김모(45)씨가 윗집의 층간소음을 이유로 항의하러 올라간 뒤, 인테리어사업을 운영 중인 30대의 김모 형제와 긴 시간 동안 언쟁을 벌이다 격분한 나머지 재차 올라가 흉기로 찌르고 달아났다.

사소한 말다툼이
끔찍한 살인으로

사건 당일 피의자 김씨는 내연녀의 동생이 거주하는 중랑구의 모 아파트 6층으로 향했다. 연휴를 맞아 내연녀 가족과 아늑한 시간을 즐기던 중, 그는 내연녀 박모(49)씨가 “시끄럽다”며 7층에 인터폰을 걸어 말다툼하는 것을 지켜보다 분을 참지 못하고 위층으로 따라 올라가 항의했다. 이 층간소음이 피바람을 몰고 온 사건의 발단이 됐다. 윗집은 노부모만 살고 있었지만 명절을 맞아 두 아들 내외와 손자들이 방문해 사건 당일에는 평소보다 북적거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여성들 간 사소한 말다툼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던 이 사건은 아파트 밖 화단에서 남자들끼리 재차 시비가 벌어지며 대형 사건으로 번졌다.

싸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김씨는 평소 차에 보관해온 흉기를 갖고 혼자 다시 7층으로 올라가 피해자 형제를 아파트 밖 화단으로 불러냈다. 아파트 밖 화단에서 만난 양측은 2차 전쟁이 불붙어 욕설을 주고받으며 거칠게 싸우기 시작했다. 흥분이 극에 다른 김씨는 이들 중 형(33)을 흉기로 가슴 등 5군데 찌르고, 도망가는 동생(31)을 쫓아가 3차례 흉기를 휘둘렀다. 치명상을 입은 김씨 형제는 곧바로 병원에 실려 갔으나 이내 과다출혈과 쇼크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명절을 맞아 한자리에 모인 김씨 형제 가족은 갑작스런 봉변으로 한순간에 가정이 파탄났다. 게다가 형은 슬하에 세 살배기 딸이 있었고, 동생 또한 결혼한 지 불과 2달밖에 되지 않은 신혼이었기 때문에 주위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설날 부모 찾은 형제…예기치 못한 날벼락
아래윗집 깊어진 갈등 폭행·살해 사건으로

반면 범인 김씨의 입장은 달랐다. 범행 후 그의 행동은 오히려 놀라울 정도로 태연하고 침착했다. 그는 살인을 저지른 뒤 집으로 올라가 옷가지를 챙겨 내연녀 박씨의 차를 타고 신림동으로 이동, 지인에게 전화해 강서구청 인근 술집에서 만나 술을 마셨으며 이튿날 오전 2시까지 노래방에서 유흥을 즐겼다. 김씨는 경찰에 붙잡히기 전까지 강남역, 장지동, 쌍문동 등 서울 시내와 의정부와 부천 등을 오갔고, 휴대폰 전원을 ‘껐다 켰다’를 반복하며 경찰의 추적을 따돌렸다. 잠자리의 주된 장소는 찜질방이었고 이동은 지하철과 경전철, 광역·간선버스 등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경찰은 도피자금이 떨어져 과거 대리운전기사로 일했던 주점에 전화를 걸어 밀린 임금을 송금해달라고 요구한 김씨의 전화번호 발신지를 추적해 지난 13일, 닷새 만에 수원 KT영통지사 앞 공중전화 부스에서 그를 검거했다. 경찰조사 결과 김씨는 2009년 돈을 빌린 이후 고소전을 벌이는 등 사이가 좋지 않은 사채업자를 위협하기 위해 지난해 3월 흉기를 구입, 차에 보관하고 다닌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처음에는 위협만 주려고 했는데 순간적으로 화를 참지 못하고 범행을 저지르게 됐다”고 말하며 범행일체를 시인했다.

김씨는 20여 년 전 저지른 상해와 도박 등 3건의 전과를 제외하면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운영하던 자동차 타이어 수리 사업이 외환위기 때 망한 후 가정형편 문제로 이혼까지 당한 그는 의류노점상 등을 전전하며 생계를 꾸려왔다. 현재 부인과는 서류상으로 재결합한 상태지만 7년 전부터 왕래가 전혀 없었다. 내연녀 박씨는 “김씨는 평소 폭력성도 없고 술조차 마시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경찰에서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층간소음갈등에
방화·폭행 빈번

사실 층간소음살인은 어제오늘일이 아니다. 지난 2010년 3월 대구시 수성구 모 맨션에서 배모(47)씨 집에서 배씨가 위층에 사는 이모(37)씨를 식칼로 찔러 숨지게 하고 달아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배씨는 3년 전부터 평소 이씨 집에서 소음과 냄새가 난다며 수시로 현관문을 발로차고 욕설을 하는 등 갈등을 빚어 왔으며 자신의 항의 사실을 따지러 온 이씨와 말다툼 끝에 이 같은 일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4월에도 경기도 남양주시 모 아파트에 2층에 거주하는 이모(64)씨가 위층에 사는 한모(48)씨와 말다툼을 하다 흉기를 휘둘러 한씨를 숨지게 하는 층간소음살인이 연이어 발생하기도 했다. 경찰조사결과 혼자 사는 이씨는 6개월 전부터 층간소음문제로 이웃 한씨와 자주 다퉜으며, 이날 한씨와 화해하기 위해 술을 마시던 중 다시 말다툼을 하다가 홧김에 흉기를 휘두른 것으로 밝혀졌다.

다음해 5월, 서울 은평구 모 빌라에서도 정신병을 앓고 있던 이모(31)씨가 2층에 사는 소모(46·여)씨 집에 찾아가 “평소 왜 시끄럽게 하느냐”며 주방에 있던 흉기로 소씨의 배 등을 세 차례 찌르고 목을 졸라 살해해 층간소음이 ‘단순한 갈등’이 아닌 심각한 사회문제로 인식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음과 바닥두께와 관련, 건설공법에 어긋날 시 적합한 처벌법이 마련·시행되지 않아 층간소음은 이웃 간 갈등으로 치부되다 올해 층간소음살인과 방화 사건이 잇따르면서 다시금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와 관련된 살인은 손에 꼽을 정도지만 폭행 및 협박, 흉기를 휘두르며 위협을 주는 행위 등은 수없이 많았다. 대표적 사건이 바로 설 명절 당일에 일어난 방화사건이다.   


설이던 지난 10일 서울 양천구 목동의 3층짜리 다가구주택에서 층간소음 갈등으로 방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주택 1층에 사는 박모(49)씨는 이날 오후 1시30분께 2층 홍모(67)씨 집에 들어가 휘발유가 든 맥주병을 거실에 던지고 불을 붙였다. 당시 집에는 설을 맞아 부모를 찾은 홍씨의 자녀와 두 살배기 손녀 등이 있었다. 다행이 불은 17분여 만에 꺼졌지만 홍씨 부부는 중화상을 입는 등 크게 다쳤고 자녀 3명도 경미한 화상을 입었다.
조사 결과 박씨와 홍씨는 4년 전부터 층간소음문제 뿐 아니라 수도문제로 갈등을 겪은 것으로 나타났다. 홍씨 집에서 샌 물로 피해를 봤다며 소송으로 보상금까지 받은 박씨는 범행 1주일 전부터 층간소음으로 인해 심각한 불면증에 시달려 왔고, 사건 당일에도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소리에 감정이 격해져 방화를 결심한 것으로 드러났다.


아파트 층간소음 갈등으로 인한 폭행 사건이 인천에서도 발생했다. 이번에는 아래층 소음에 위층이 항의하면서 벌어졌다. 지난 10일 인천시 계양구 모 아파트 2층에 사는 오모(36)씨 등 3명은 소음에 못 이겨 김모(55)씨가 살고 있는 아랫집 1층에 내려가 현관문을 발로 차며 “안 나오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했다. 김씨가 문을 열자 오씨 등은 층간소음에 항의하며 멱살을 잡고 밀치는 등 폭행을 가했다. 이에 김씨도 방어하는 과정에서 폭력을 행사했고, 양측의 싸움이 짙어지자 현관 안전장치가 파손되기도 했다.

김씨는 “문을 부수고 한꺼번에 세 사람이 덮쳤다. 평소에 위층의 소음 때문에 헤드폰하고 귀마개를 항상 구비해 놓고 있는데 일방적으로 봉변을 당해 억울하다”고 하소연했다.

반면 윗집의 오씨 측은 “계속 저희 집에 찾아와서 항의 소음을 내더라. 매번 그래서 아이들이 잠을 못 자니까 마침 놀러 온 손님들 중 1명이 항의하러 내려간 것이다”라며 “전 세입자도 아랫집 사람과 층간소음 때문에 항의도 했고 멱살잡이도 해서 결국 1년을 다 못 채우고 이사를 나왔다고 들었다”고 반박했다. 

고문 같은 소음에
깨알 같은 복수도

층간소음으로 고통을 받은 이들은 스트레스로 인한 불면증, 우울증, 원형탈모 등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이들 중 일부는 “감정이 격해져 하루에도 몇 번씩 살인충동이 일어난 적도 있었다”며 “층간소음살인은 그 고통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처럼 소리로 많은 이들에게 심적 고통과 불편을 안기는 층간소음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층간소음의 주된 원인은 아이의 뛰는 소리나 어른의 발소리가 73.1%로 압도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되레 망치질 소리(3.7%)와 가구 끄는 소리(2.3%)는 낮은 비율을 기록했다. 반면 피아노 등 악기 소리(5.6%), 애완견이 짖는 소리(10.4%)는 적잖은 비율을 차지해 비애완인들의 눈총을 받고 있다. 잠깐 벌어지는 상황이 아니라 꾸준히 지속되는 경우 분쟁 빈도가 높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야외활동이 비교적 적고 실내 활동이 많은 겨울철에는 문의가 많다. 실제로 지난해 층간소음으로 불편을 겪는 민원이 무려 8천여 건에 이른 것으로 밝혀졌다.

담배연기 뿜기 등 아랫집 복수법 활개
정부 대책 마련 “먼저 대화로 풀어야”

층간소음문제로 지속적인 항의를 했음에도 뚜렷한 대안이 없자 아예 이웃에 대한 복수를 자행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인터넷 카페에 “화장실 환기통에 음산한 음악이나 야동을 틀어놓으세요. 효과 좋습니다” “새벽 야식 전단지에 윗집 전화번호를 인쇄해 배포 했습니다” “윗윗집과 친하게 지내세요” 등 ‘층간소음 보복법’ 사례들을 이미지까지 첨부하면서 친절히 설명했다. 이 밖에 긴 막대로 천장을 두드리는 것부터 천장에 우퍼를 밀착시켜놓고 메탈 음악을 트는 것까지 다양한 방법이 동원된다. 심지어 모터를 달고 전원만 켜면 지속적으로 충격음을 윗집에 전달하는 기계를 집안 천장에 만들어 인증사진을 올린 경우도 있다. 화장실 환기통에 담배연기를 뿜어 윗집에 보복하거나 샤워하면서 크게 노래를 부르는 등 깨알 같은 복수법도 소개됐다.

층간소음갈등이 비단 말다툼에서 끝나지 않고 폭행, 협박, 나아가 살인까지 불러오면서 심각성을 깨달은 정부와 다세대 공동주택이 많은 서울시는 구체적·실용적인 층간소음개선안을 구축했다.

국토해양부는 층간소음 분쟁을 줄이기 위해 새로운 아파트 건설기준을 마련, 법제처 심의를 앞두고 있다. 국토부가 마련한 개선안은 벽식(내부 벽이 기둥 역할)과 기둥식 아파트 바닥 두께 기준은 지금처럼 각각 210㎜와 150㎜로 유지하되, 소음발생이 심한 무량판식 바닥(보가 없는 바닥)을 현행 180㎜에서 210㎜로 두껍게 하는 것이 골자다. 이와 함께 바닥충격음을 가볍고 딱딱한 충격에 의한 소음인 경량충격음은 58㏈, 무겁고 부드러운 충격에 의한 중량충격음은 50㏈을 충족하도록 규제했다. 이와 관련 환경분쟁조정위원회는 현재 350만원으로 정해진 금전배상 대신 올해까지는 소음원인에 대한 조정을 주로 할 방침을 세우고 있다.

강압적 항의보다
대화가 해결책


층간소음갈등해결을 도맡는 이웃사이센터는 “층간소음을 해결할 때 가장 중점을 둬야 하는 부분이 위층의 사생활에 최소한의 변화만 주면서 소음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라며 “이동 가능한 가구의 다리에 테니스공을 끼우거나 가족 구성원이 슬리퍼를 신는 것 등이 대표적인 예로, 직접 찾아가 강압적으로 해결하기보다 당사자끼리 대화로 풀어야 비로소 갈등이 풀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지선 기자 jisun86@ilyosisa.co.kr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