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야심작’ 기초연금 빛과 그림자

국민 위한 연금 때문에 국민이 뿔났다

[일요시사=사회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핵심공약인 ‘기초연금제도’가 본격적으로 윤곽을 드러내면서 세대 간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기존 국민연금 가입자들이 65세 이상 노인만 수령 가능한 기초연금을 두고 역차별 논란을 제기한 것. 인수위는 소득별 혹은 연금수급여부에 따라 차등배분을 할 것이라 단언했지만, 납세자들의 반발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제멋대로 정해놓고 국민의 의무? 그럼 나 이제부터 국민 안 해!”

영화 <남쪽으로 튀어>에서 국민연금납부를 거부하는 최해갑이 나라를 위해 단 한 푼도 줄 수 없다며 내뱉은 말이다. 배우 김윤석이 연기한 최해갑은 영화에서 “나라가 해준 것도 없는데 왜 내가 연금을 내야하냐”며 국민의 의무인 세금과도 같은 국민연금납부를 극구 거부한다. 이는 단지 영화에서만 나오는 얘기가 아니다. 현재 대한민국은 올해 개정될 아이러니한 연금제도 때문에 세대 간 갈등과 계층 간 역차별 논란에 휩싸였다. 납세자연맹은 “차라리 국민연금 제도를 폐지하라”며 납부거부 태세에 돌입했다. 기초연금제도는 남기고 수년간 납입했던 적립금은 국민에게 돌려줘야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돈 내는 사람 따로
돈 받는 사람 따로

논란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기초연금제도를 핵심공약으로 내세우면서부터 시작됐다. 애초 박 당선인이 기초노령연금제도와 국민연금의 통합운영을 공약했지만 젊은 세대들은 추후 연금고갈을 우려, 기초연금안에 반기를 들며 사실상 국민연금납부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대선 당시 새누리당 대선공약집에는 ‘기초노령연금을 기초연금화해 모든 어르신에게 현재의 2배 수준으로 올려 지급하겠다’고 명시돼 있었다. 이는 65세 이상 모든 대상자에게 9만7100원이던 기초연금을 현재의 2배인 20만원 수준으로 올려주겠다는 의미와 같다. 여러 논란이 뒤따를 수 있는 민감한 사안임에도 박 당선인은 당시 명확하고 일관되게 공약을 내세웠다. 이에 10원 한 푼 내지 않고도 20만원의 연금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노령층은 하나같이 박 당선인을 지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부작용은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기초연금제도가 본격 시동을 걸면서 인수위 출범 후 기초연금의 재원을 국민연금의 적립금에서 충당하겠다고 발표해 국민연금 가입자들의 원성을 사고 있는 것. 나아가 재산권 침해 논란까지 불거지며 극심한 세대 갈등이 벌어졌다.

이 같은 논란은 국민연금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도 20만원씩 주겠다는 공약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혼선이 생겼다. 국민연금 가입자는 10년간 매달 8만9100원을 내면 65세 이후에 한 달에 15만원을, 18만7200원을 납부하면 22만5700원을 받을 수 있는데, 박 당선인의 공약대로 기초연금제를 도입하면 국민연금 가입자와 비가입자 간 차이가 대략 2만원밖에 차이나지 않자 형평성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젊은 세대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새누리당 측은 기초연금 재원을 국민연금이 아니라 국고에서 마련할 것이라고 둘러대며 논란을 잠재우는 듯 했으나, 인수위가 차등지급법안을 발표하며 재차 논란이 커졌다. 이는 세대 간 갈등에서 벗어나 국민연금 저소득 가입자들을 중심으로 국민연금 형평성 논란으로 바뀌었다.

당선인 핵심공약 ‘기초연금제도’본격 윤곽
‘매달 20만원씩’65세 이상 노인만 수령 가능

애초 기초연금 수급 대상자를 65세 이상 모든 노인으로 제한했던 박 당선인과는 달리 인수위의 경우, 국민연금 혹은 기초노령연금 수급 여부에 따라 지급 방식을 차등화 한다는 다소 엇갈린 방안을 내놓았다. 젊은 세대들의 반발이 거세질 것을 예상한 인수위가 시급히 내놓은 대책마련이 차등화 지급이었던 것.

인수위가 구상 중인 4개 그룹별 기초연금 차등화 방안은 국민연금 가입 여부와 현행 기초노령연금 수급 여부에 따라 연금액을 차등 지급하는 것이다. 국민연금을 성실히 납부한 가입자라면 기초노령연금 수령 여부에 따라 지급 받는 연금액이 달라진다. 국민연금 가입자이면서 소득이 하위 70%면 기존 국민연금에 기초연금 일부를 더해서 받는다. 기초연금은 현재 소득 하위 70%에 지급되는 기초노령연금 9만7100원에 추가 지급분 1만∼9만7100원으로 구성된다. 예를 들어 국민연금 가입자 중 소득 상위 30%에 속한다면 기초연금 차등지급분인 1만∼9만7100원을 받게 된다.

얼핏 보면 국민연금 ‘성실 납입자’가 역차별 받는 것에 대한 형평성 문제를 차등 지급으로 보완하는 대안 같지만, 기초연금의 도입 취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재원 마련에 대해서도 뚜렷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결국 차등화 지급은 소득수준과 가입여부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하는 비효율적 방안으로 인식되고 있다.  

연금공단 자금 운용
비난 목소리 거세


반면 국민연금에 가입하지 않은 노인에게는 기초연금 20만원이 모두 지급된다. 그러나 국민연금 미가입자 중 소득 상위 30%로 현재 기초노령연금 미수급자라면 기초연금 20만원도 받을 수 없다. 이들에게 소액이라도 추가로 기초연금을 지급할지는 검토 중인 것으로 드러났다. 공무원 연금 등 특수직역 연금 가입자도 기초연금 대상에서 배제키로 했다. 공무원과 군인, 사학연금 가입자는 전체 노인의 약 4% 가량으로 나타났는데, 인수위는 이들이 충분한 연금을 받는 것으로 보고 있어 기초연금 지급대상에서 배제된 것으로 추측된다.

연금고갈의 문제도 크다. 현재 젊은 층은 수십년간 열심히 인해서 적립금으로 모아둔 국민연금을 기초노령연금과 통합하게 되면 본인 앞으로 적립한 국민연금은 전부 노인연금에 충당할 것이고, 20∼30년 후엔 못 받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눈치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의견은 다르다. 기금이 고갈돼서 국민연금을 못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처럼 세금을 더 거둘 수도 없고 대외신인도가 낮아 국채발행을 할 수 없을 때, 즉 나라에 외환위기나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라고 입을 모으며 해명에 나섰다.

기존 국민연금 가입자들 “역차별” 주장
수십년 10만원씩 내도 고작 2만원 차이

연금논란은 과거 국민연금공단이 거액을 들여 투자했던 해외의 빌딩과 이마트 등 기업으로까지 불똥이 튀며 진퇴양난에 빠졌다. 국민연금은 2009년 10월 당시 ‘88 우드 스트리트’ 건물을 매입, 작년 6월 런던 사무소를 개설했다. 당시 빌딩 매입 가격은 1억8300만파운드(약 3150억원)로 국민연금은 이 가운데 절반이 넘는 1850억원을 투자했다. 해당 건물 외에도 국민연금은 천문학적 숫자의 거액을 들여 영국 내 3개의 건물과 미국, 호주, 독일 내 건물을 매입·투자하면서 국민혈세를 남용한다는 강한 반발이 일었는데, 최근 기초연금제가 화두에 오르며 빌딩매입이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어 궁지에 몰렸다.

이밖에 국민연금이 지난해 6개월 동안 6237억원에 달하는 술·담배·도박 산업에 대한 투자액, 직원사찰과 노조탄압으로 빈축을 산 이마트 등 비윤리적 기업에 대한 투자도 적지 않다. 국민연금은 최근 노동탄압 사실이 드러난 이마트 주식을 62만주(지분율 2.24%) 보유하고 있다. 이마트 외에도 최근 다수의 노동자가 희생된 한진중공업(지분율 3.21%)과 쌍용차에도 투자하고 있다. 이는 ‘노동자의 노후보장을 위해 마련된 연금이 되레 노동자를 탄압하는 기업에 투자하는 격’으로 해석되며 세간에서는 “국민연금이 모순적 행보를 걷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뚜껑 열기 전까진
아무도 알 수 없어

국민연금공단 측은 사실상 노령연금도 지급하고 있어 현재 보유한 재원만으로는 인수위가 발표한 기초노령연금 20만원 지급이 당장은 어려운 실정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논란이 커진 후 민원이 여러 곳에서 발생하자 본부에서는 회의를 열어 가입자들을 상대로 하는 가이드라인을 급히 만들었고, 국민연금 가입자 중 연금 지급 사유(장애나 사망 등)가 발생할 시 연금을 조기 수급하는 경우를 대비해 상황을 지켜보고 정부에서 정확한 발표가 나오면 그때 환급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덧붙여 자영업자 등 워낙 많은 가입자와 이해 관계자가 걸려 있기 때문에 예상과는 달리 국민연금 재원은 차기 정부에서도 쉽게 건드릴 수 없을 것이라고 내다보는 시선이 많다. 인수위가 발표한 기초노령연금제도는 연금 지급의 기준이 되는 계산 공식도 복잡하기 때문에 정확한 안이 나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

<일요시사>와 통화한 국민연금공단의 한 관계자는 “현재까지 국민연금공단 차원에서 대응 방안이 문건화된 건 없다. 단 국민연금을 해지하겠다는 민원인들이 많아 전국 콜센터가 상담에 애를 먹고 있다”며 “재정 확보 문제가 걸려 있어 현 수급 연령(60세)을 단계적으로 상향해 65세로 조정하고  최대한 연금 수급을 늦출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이어 “인수위에서 국민들이 반응을 한 번 떠 본 것 아닌가 생각된다. 아직 정부가 출범하지도 않은 시점에 발표부터 먼저 한 것은 국민들의 반응을 보고 거기에 맞게 수정하겠다는 의중이 숨어있다고 봐야할지, 공약 이행 의지가 있는지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고 속내를 내비치기도 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국민연금 적정부담수준에 관한 연구 보고서’를 통해 “보험료 인상 충격을 줄이기 위해 올해부터 2033년까지 단계적으로 보험료율을 높여야 한다. 이 경우 보험료는 현재 9.0%에서 13.0%까지 높아진다”고 했다. 이어 “올해부터 추진되는 3차 국민연금 개혁이 무산될 경우 보험료 인상폭은 더 커질 수 있다”며 “인상시기를 10년 미루면 보험료 인상폭을 61%로 더 높여야 2080년까지 기금을 유지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신구 세대 간 갈등
한동안 지속될 듯

박 당선인의 주요 공약인 기초연금제도. 이는 소득과 국민연금 가입 여부에 따라 세분화하고, 국민연금과 통합 운영한다는 전제조건이 맞물리면서 젊은층, 노령층 어느 한 계층도 만족시키지 못해 ‘허무맹랑한 공약’이라고 불리고 있다. 지금도 새누리당과 인수위, 국민연금공단은 기초연금에 관련해 가장 효율적인 제도와 방안을 찾고 있지만 성난 민심을 잠재우기란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김지선 기자 <jisun86@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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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