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카우트> <가을로> <주홍글씨>에서 단아하면서도 강단 있는 연기를 선보인 배우 엄지원. 아름답고 우아한 도시 여성을 연기해온 그녀가 영화 <그림자 살인>을 통해 데뷔 이후 첫 시대극에 나섰다. 그녀는 이중생활을 즐기는 신여성이자 여류발명가인 ‘순덕’ 역을 통해 신선한 매력을 한껏 뽐낼 예정이다. 시대극에 최초로 출연하는 만큼 사대부가 부인의 몸가짐을 익히기 위해 차를 우려내는 다도 과정을 배우고 여류발명가라는 캐릭터에 맞춰 기계를 다루고 조립하는 법까지 배우는 등 그 어떤 작품보다도 아름다운 그녀의 매력을 만날 수 있다.
조선시대 여류발명가 순덕 역…황정민·류덕환과 연기
1초 국궁 장면 위해 한 달 동안 맹연습…대사톤에 신경
영화 <그림자 살인>은 그간 한국영화에서는 쉽게 다루지 않았던 탐정을 주인공으로 해 카라쿠리 인형과 백색가루, 피 묻은 천 조각 등의 단서를 통해 전대미문의 살인사건의 비밀을 파헤쳐 가는 탐정 추리극.
엄지원은 사설탐정, 열혈 의사와 함께 살인사건을 풀어 가는 여성 발명가 순덕을 연기했다. 황정민이 탐정 홍진호 역을 맡았으며 류덕환이 의사 광수로, 오달수가 종로서 순사부장 고영달로 나온다.
“극중 ‘순덕’ 캐릭터는 똑똑하면서도 절제미가 느껴지는 여성이고 그런 면이 마음에 들어 이 작품을 택한 거에요. ‘순덕’을 연기하면서 앉아만 있어도 큰 기품이 느껴질 수 있는 여인으로 비춰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죠.”
순덕은 왕족이었지만 몰락해 사대부 집안으로 시집온 여성으로 이중생활을 즐긴다. 집에서는 조신한 사대부 여자지만 밖에 나와서는 하고 싶은 것을 몰래한다.
“그 당시로는 드물게 미래에 대한 꿈과 비전을 가진 여성이에요. 오래전부터 진호와 인연을 맺죠. 순덕이 왕가의 딸로 있을 때 진호가 호위 군인이었거든요. 그러다 진호가 사설탐정이 되고 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되면서 함께 실마리를 풀어가는 역할이에요. 낮에는 발명을 하죠. 그렇다고 밤에 팜므파탈이 되는 건 아니에요.”
사건 실마리 풀어가는 역할
다른 배우들은 개화기 시대의 양복을 입고 나오지만 엄지원은 혼자 한복을 입고 나온다. 조선시대 느낌을 내기 때문에 대사톤에도 신경을 썼다.
“생각보다는 한복이 잘 어울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대사톤을 낮게 잡으면 연기가 가라앉고 너무 뜨면 대사가 튀더라고요.”
영화에는 순덕이 국궁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엄지원은 이 신을 위해 한 달간 국궁을 배우는 열의를 보였다.
“열심히 국궁을 배운 끝에 이 장면을 촬영했는데 알고 보니 영화에는 겨우 1초 나오는 장면이어서 아쉬웠어요. ‘나는 참 쉽게 가는 것이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관객이 그 장면을 기억해준다면 저는 만족해요.”
엄지원은 평소 단아하면서도 섹시한 이중적 이미지를 지닌 배우답게 조용하지만 선 굵은 캐릭터를 무난히 잘 소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단 예고편에서의 느낌과 다르게 예상보다 극중 비중이 약했다는 관객들의 아쉬운 시선이 적지 않았다.
“비중을 문제 삼자면 제가 더 많이 나와서 더 좋은 것들이 만들어질 수 있는 영화가 있다면 그 몫을 하는 게 맞지만 <그림자 살인>이라면 작품이 좋아서 택한 만큼 두 남자 주인공들에게 탄탄한 거름이 되어주고 싶은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픈 마음으로 촬영에 임했어요.”
엄지원은 지난 1998년 오락프로그램 <사랑의 스튜디오>에 출연하면서 연예계와 인연을 맺었다. 매끈한 외모와 활달한 성격 덕분에 대중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의외로 연기와 인연을 맺는 데 오랜 시간이 흘렀다.
2002년 드라마 <황금마차>를 시작으로 몇 편의 드라마에 출연한 후 2004년 영화 <똥개>에 출연하면서 배우의 이미지를 갖게 됐다.
“데뷔한 지 벌써 11년이 됐네요. <똥개>가 전환점이 된 작품이었죠. 그 전에 몇 편에 드라마에 출연했지만 배우의 느낌을 갖는 첫 작품이었어요.”
“나만의 스타일 생겼어요”
엄지원은 자신의 단점을 우유부단한 성격이라고 꼬집었다. 통통 튀어 보일 것만 같지만 ‘의외로’ 남을 너무 배려하다 보니 뜻하지 않게 피해를 보는 일도 왕왕 있었다. 어느 순간 자신의 성격이 세상사를 사는 데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성격을 고치기란 어렵잖아요. 제 단점을 장점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어요. 사람을 대할 때 열려있는 이른바 ‘오픈 마인드’를 갖는 거죠. 물론 예전과 달리 제 몫이 무엇인지를 잘 판단하려고 해요.”
평소 엄지원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기보다 지인과 깊게 우정을 주고받는 편이다. 엄지원은 예전엔 친구들을 한꺼번에 10명씩 만나봤지만 자신이 쓸 수 있는 에너지의 한계가 있어서 조절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소통의 농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여러 사람을 만나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이제 제 취향과 스타일이 생겼다고나 할까요. 예전에는 마냥 한없이 좋은 사람, 누구에게나 친절한 사람이고 싶었는데 지금은 제가 좋아하는 것이 분명해졌어요.”
사진 송원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