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사회팀] '그날'서울 여의도공원은 오후 2시께부터 사람들로 북적였다.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아 기획된 대형 소셜 이벤트 '솔로대첩'이 오후 3시에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영하의 쌀쌀한 날씨였지만 행사 시작 전부터 이어진 솔로들의 행렬은 그야말로 장관을 이루었다. 슈트 차림으로 한껏 멋을 부린 남성부터 핑크빛 볼터치로 두근두근 기대를 드러낸 여성까지. 여의도공원은 '솔로'들의 '짝짓기' 본능으로 넘실댔다.
지난 24일 오후 1시40분. 기자가 도착한 9호선 여의도역은 평소보다 2∼3배 정도 많은 인파로 붐볐다. 여의도공원으로 향하는 길엔 대목을 맞아 대학생들이 좌판을 벌이고 있었다. 핫팩과 장갑, 장미꽃 등을 들고 나온 그들은 커플 마케팅으로 솔로들의 호주머니를 노렸다. 커플이 되고 싶어 장미꽃을 구입했다는 한 남성은 "오늘 잘돼야 할 텐데…"라며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오늘만 기다렸다”
될 사람은 됐다
여의도 공원에 도착하자 '논산 훈련소'를 방불케 하는 수컷들의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붉게 상기된 얼굴로 기자에게 말을 건넨 한 남성은 "오늘만을 기다려왔다"며 각오를 드러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남성들의 초조함은 더해갔다. 극심한 성비 불균형 때문이었다. 남성 참가자가 너무 많은 까닭에 성비는 8:2 정도로 추정됐다. 드레스 코드는 남자가 화이트, 여자가 레드였지만 붉은 색 옷을 입은 여자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남자들의 손에 쥐어진 붉은 장미꽃이 무척 안쓰러워 보였다.
오후 3시께 '솔로대첩' 주최자인 유태형(26)씨가 화이트 재킷을 입고 등장했다. 수많은 취재진에 둘러싸인 그는 '남탕'으로 변질한 이 축제(?)에 대해 "기분이 처참하다"고 심경을 밝혔다. 그러나 경쟁은 심해졌어도 구애를 받아줄 여성은 분명 있었다. 경기 고양에 사는 이모(23·남)씨는 "여자가 얼마 없지만 행사가 시작되면 제일 먼저 작업을 할 것"이라면서 "센 척을 좀 해서 여자들을 넘어오게 하겠다"고 공언했다. 이에 화답하듯 경기 안양에서 온 박모(20·여)씨도 "궁금해서 오긴 왔지만 마음에 들면 거절할 이유가 없다"면서 "안경은 안 썼으면 좋겠고, 키는 커야 한다. 얼굴은 덤"이라고 구애 승낙 기준을 귀띔했다.
여 2명에 남 15명 둘러싸고 "선택해줘" 진풍경
전화번호 남발…유유히 팔짱끼고 사라진 커플도
같은 시각 현장에서는 "오후 3시24분으로 알람을 맞춰 주세요!" "남자 분들은 이쪽으로 오시고 여자 분들은 반대편에 계세요"등의 스태프 안내가 육성으로 이뤄졌다. 솔로대첩은 플래시몹 형태로 기획됐기 때문에 무대나 마이크 등의 공연 장비는 동원되지 않았다. 동시에 참가자들에게는 분홍색 쪽지가 전달됐다. 쪽지에는 "산책하러 오셨어요?" "같이 걸으실래요?"등의 공식 암호가 적혀있었다. 참가자들은 쪽지를 확인하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운명의 3시24분. 기대와 달리 알람은 울리지 않았다. 참가자 대부분이 스태프의 안내대로 휴대폰 알람을 설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자경단(자치경찰단) 등의 스텝들이 곳곳에서 생목으로 "시작했습니다"를 외쳤고 우여곡절 끝에 메인이벤트는 막을 올렸다.
대략 2000여 명으로 추산되는 남성들은 신호와 함께 일제히 여성들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 험악한(?) 기세에 눌린 여성들은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을 연상케 하는 수백 남성들의 횡보는 거대한 파도 같았다. 여기에 남녀들 틈에 섞여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기자들까지 가세하자 일대는 아수라장이 됐다. 과도한 취재 열기에 한 여성은 "짜증나, XX. 기자새끼들"을 연발하며 공원 뒤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몇몇 남성은 "이게 뭐야" "벌써 끝났어"등의 탄식과 함께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소위 '될 사람은 된다'는 말처럼 오후 3시35분께 '솔로대첩 1호 커플'이 탄생했다. "너무 귀여워서 말을 걸었다"고 말한 이 남성은 준비한 꽃다발을 여성에게 안겨주고 수많은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
“잘생기면 좋아요
미친놈들 싫어요”
이에 자극 받은 남성들은 저마다 적극적인 구애를 시작했다. 얼굴에 여드름이 난 한 사내는 단발머리에 붉은 머플러를 한 여성을 붙잡고 "저 이상한 사람이나 변태 아니니까 일단 들어주세요. 이렇게까지 와서 번호 좀 알려 달라고 하는데 저도 용기 많이 냈거든요"라며 설득을 시도했다.
그러나 되돌아온 여성의 반응은 냉담했다. "저 그냥 구경 왔어요. 죄송합니다." 이 단발머리의 여성, 박모(21)씨는 "친구랑 누가 더 대시를 많이 받나 내기했는데 지금까지 모두 7명이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면서 "남자친구는 없는데 이런데서 만나는 건 좀 아닌 것 같다"고 말을 이었다.
기자와 헤어진 박씨는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오덕(?) 2명에게 더 러브콜을 받았다. 이를 모두 거절한 박씨는 훤칠한 한 남자와 팔짱을 끼고 자연스레 사라졌는데 그 남성은 바로 박씨의 남자친구였다. 남자친구와 사라지는 박씨를 보며 한 남성은 "몇몇 커플들이 우리에게 테러를 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커플들은 테러
솔로들은 멘붕
시간이 흐르자 짝을 찾지 못한 남성들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서울 노원에 사는 김모(23)씨는 "지금까지 3번을 시도했는데 모두 거절당했다"면서 "7번까지 해보고 안 되면 집에 가겠다"고 말했다. 마음이 급해지자 구경 온 미성년자에게 작업을 거는 남성들도 눈에 띄었다. 고등학교 2학년인 이모(18)양을 붙잡은 20대 후반의 사내는 "고등학생도 상관없어요. 마음만 맞으면 되죠"라며 끈질긴 접촉을 시도했다.
사내를 뿌리친 이양은 기자에게 "생각보다 복잡하고, 또래도 없어 재미가 없었다"며 "이제 친구들과 명동에 가서 프리허그를 할 거다"라고 계획을 밝혔다. 서울에 사는 남모(17)양 등 3명도 "'몇 살이세요'란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다"면서 "다짜고짜 손을 먼저 내미는 사람도 있어 불쾌했다"고 털어놨다.
그 순간 뒤편에서는 검은 코트차림의 남자 2명이 검은 스타킹을 신은 여자 2명의 손목을 잡고 부킹(?)하듯 산책로로 뛰어갔다. 공원 입구에 자리 잡은 한 사내는 뒤늦게 도착한 여성들에게 자신의 전화번호를 찍어주며 "근처에 있을 테니 연락을 달라"는 수법으로 접근을 시도했다.
여자 2명을 남자 15명이 둘러싸는 진풍경도 연출됐다. 각각의 남자 무리들은 저마다 "자신들에게 오라"며 먹이를 찾는 하이에나처럼 집요한 구애 세례를 퍼부었다. 돗자리를 펴고 지나가는 여성마다 양주를 강권하는 남자들도 있었다. 이에 한 여자는 "여기 진짜 미친놈들 많다"면서 서둘러 자리를 떴다.
20대남 고등생 상대 원조교제 시도
이동식 침대에 누운 장애인도 참가
준비한 꽃다발을 미처 전해주지 못한 남자도 있었다. 근육으로 영양이 전달되지 않는 장애(지체 2급)를 앓고 있는 오모(21·남)씨는 이동식 침대에 누운 채 보호자인 어머니와 함께 현장을 찾았다. 그는 "이런 축제를 한다기에 한 번 참여해 보고 싶었다"면서 "와보니까 마음이 좋은 것 같다"고 소감을 전했다. 오씨와 어머니는 2차 솔로대첩이 벌어진 서울 합정동의 '메세나폴리스'에도 참석해 공연을 즐긴 뒤 인근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오붓한 저녁 시간을 가졌다.
여의도공원에서의 솔로대첩은 저녁 6시가 넘은 늦은 시간까지 이어졌다. 월차까지 써가며 솔로대첩에 합류한 유모(28·남)씨는 "기왕 온 거 한 번씩만 더해보자"며 친구들과 함께 공원 주변을 배회했다. 같은 시각 서울 합정동 메세나폴리스에서는 공연이 가미된 솔로대첩 2차 이벤트가 진행 중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스태프 김모(27·남)씨는 "이번 축제를 위해 광주에서 올라왔다"면서 "운영에서 다소 미흡한 점도 있었지만, 음향 장비 등을 쓸 수 없는 여건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자평했다.
남녀 성비 8:2
솔로? 남자대첩!
이어진 스태프 뒤풀이에서 간부 한모(38·남)씨는 "언론에 안 좋은 내용도 보도됐지만, 상업성을 배제하기 위해 각별히 노력했고, 운영진이 일베 유저라는 식의 루머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한 뒤 "내년 중반에는 '커플대첩', 내년 이맘때는 '솔로대첩 시즌 2'등 젊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축제를 계속 기획하는 게 우리의 목표"라고 포부를 밝혔다.
이번 솔로대첩에서는 애초 우려와 달리 성추행이나 주취 폭력과 같은 강력 사건은 접수되지 않았으며 경찰청은 전국의 솔로대첩 참가자가 모두 2860명이라고 추산했다.
서울 여의도공원=강현석 기자 <angeli@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