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태추적] 유치원 입학대란 요지경 실태

"대입보다 치열" 가족 총동원 007 눈치작전

[일요시사=사회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운 아이 유치원 보내기. 그야말로 전쟁터나 다름없다. 만삭일 때부터 국·공립 유치원에 보내기 위해 줄을 잇는 산모들, 맞벌이 딸 대신에 새벽부터 꽁꽁 언 발을 싸매고 표 추첨을 기다리는 할머니 등 유치원 입학에 시름을 앓고 있다. 아이들 교육의 시발점인 유치원 입학 대란을 살펴봤다.

“일을 그만둬야 하나 걱정이에요.”

유치원 추첨을 기다리던 한 맞벌이 학부모 이모씨가 한숨을 쉬며 털어놓았던 말이다. 유치원 추첨에서 아쉽게 떨어져 현재 다니고 있는 직장까지 그만둬야할 상황에 놓였기 때문. 이씨는 말단 공무원 남편과 결혼해 맞벌이를 하며 어렵게 가정을 꾸려나갔다. 돈 모으기 전까지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2년 만에 예쁜 딸을 갖게 됐고, 현재 그 아이가 유치원에 가게 될 나이에 접어들었다.

유치원 교육 필수에
입학추첨 대란 일어

아이가 어릴 때는 친정엄마가 종종 봐주거나 전업주부인 여동생이 봐주곤 했지만 지금의 상황은 달라졌다. 조기교육이 중요하다고 매스컴에서 하도 떠들어대는 통에 유치원 교육은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코스가 돼버렸고,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유치원 입학에 온 힘을 쏟는다.

이씨는 “지금 추첨이 안 되면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 둬야 하는 판이다. 나 같은 맞벌이 주부들은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모르겠다. 정부가 뾰족한 대책을 마련하지도 않고 무책임한 법안만 내놓고 있으니 답답할 따름”이라고 전했다.


5살 된 손자를 유치원에 입학시키기 위해 추첨을 기다리던 한 할머니는 “유치원에 보내는 것을 뭐 이렇게 어렵게 해놓았냐”며 “이렇게 해서 애들이 어떻게 공부하겠나. 돈 없으면 애들 유치원도 제대로 못 보내는 나라에서 서민들은 어떻게 살겠나”라고 한탄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사립유치원의 횡포로 정부보조금은 유명무실이 될 만큼 원비는 50% 이상 올라 양육비에도 큰 타격이 예상되고 있다. 내년부터 정부가 지원해주는 29만원 보육비 덕 좀 볼까 생각했던 99%의 서민들은 김칫국만 마신 된 꼴이 됐다.

140만명 중 40%만 입학 가능…추첨에 ‘발 동동’
당첨 불확실성 대비 중복지원…대리출석 촌극도

실제로 한 유치원은 올해 57만원이던 유치원비를 내년부터는 73만원으로 책정했다. 즉 70% 가량 원비를 올린 것. 무상 보육비를 받아도 학부모 부담은 크게 줄지 않는다. 이에 막무가내로 원비를 올린 유치원 측은 물가 탓으로 돌리고 있다. 모 유치원 원장은 “올해 같은 경우에는 원비 상승폭이 꽤 큰 편이거든요. 워낙 물가가 많이 올랐고, 인건비도 많이 나가고 저희도 힘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요”라고 반박했다.

실제로 많은 맞벌이 부부들은 국·공립 유치원 입학은 엄두도 내지 못 하고 일반 사립유치원에라도 보낼 수 있을까 전전긍긍 하고 있다. 하지만 사립유치원의 교육비가 소위 대학 등록금 수준에 육박해 아이를 둔 부모들의 걱정은 날로 더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우여곡절 끝에 유치원 입학 추첨에 성공해 유치원에 보내기는 했지만 넘어야 할 또 다른 관문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많은 학부모들은 5세 미만으로 확대된 정부의 무상보육지원정책으로 유아 교육비를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효과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전국 대부분의 유치원들이 벌써부터 월 교육비를 5∼10% 가량 인상키로 결정했기 때문.

예로 경기도의 모 사립유치원은 지난해 42만5000원이던 월 교육비와 18만원이던 방과 후 교육비를 각각 5% 인상하기로 했으며, 또 다른 유치원도 35만원의 교육비 10% 인상을 고려중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일부 유치원은 월 교육비 대신 입학비와 기타 경비를 인상하거나 타 유치원의 동향을 살피는 등 눈치작전을 펼치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이에 따라 학부모들은 ‘유치원 입학 대란’이라 불릴 정도로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자녀를 유치원에 보내도 또다시 학비를 걱정해야 할 판에 울상을 지을 수밖에 없다.


유치원 입학 전쟁
서민들만의 고충 아냐

교육과학기술부 통계자료에 따르면 전국 17개 시·도 만 3세의 월 교육비는 국·공립 7만1810원, 사립 42만8793원이 소요된다고 한다. 이어 만 4세는 국·공립 10만2728원, 사립 44만3252원 정도가 들고 만 5세 이상은 국·공립 8만8637원, 사립은 44만395원이 소요된다.

대선을 앞두고 정부가 무상보육지원 확대정책을 내놓으며 내년부터 아이 1명 당 22만원 씩 보육비를 지원해주겠다고 선언했지만, 지원비만큼 원비를 함께 올리는 악덕 유치원들이 잇따라 증가하고 있어 사실상 무상보육정책은 실효성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처지가 됐다. 이에 학부모들은 당초 안고 있던 부담이 더 가중돼 긴 한숨만 내쉬고 있다.

하지만 유치원 입학경쟁은 비단 서민들만 겪는 고충은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지금은 돈이 있어도 유치원에 못가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고 있다. 내년 유치원에 입학할 만 4∼5세 어린이는 약 140만 명 정도인 것으로 추산됐지만 그 중 전국의 유치원 수용 인원은 61만명 남짓이다. 즉 유치원 총 입학원생 중 40% 정도만 유치원에 갈 수 있게 된 셈이다.

2013년 입학을 위해 실시된 서울의 모 유치원 원생 추첨에는 140명이 정원이다. 추첨과정은 참담했다. 입학 추첨에 지원한 학부모는 정원의 두 배 이상을 웃도는 350여 명이 몰렸기 때문. 이중 14명을 선발하는 ‘만 3세 기본교육과정’ 일반전형에 지원한 학부모는 총 118명으로 경쟁률이 9대 1에 육박했다. 결국 학부모들은 정부 지원금을 받고도 원비를 올린 유치원에 아이를 맡기거나 상대적으로 원비가 훨씬 비싼 영어 유치원이나 놀이학교를 찾아야 했다.

일례로 서울 강남의 모 놀이학교는 매달 150만원을 웃도는 월비를 챙기고 있다. 이 놀이학교의 교육비는 약 70여만원. 여기에 재료비 21만원과 방과 후 활동비, 식대 등을 포함하면 사립 유치원 못지않게 비싼 금액이다. 물론 놀이학교 측은 정부 지원금은 받고 있지만 학부모 측에 무상보육비로 지급될 금액은 교육비에 포함될 수 없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많은 학부모들은 정부 보조금이라도 더 챙기기 위해 일반 국·공립이나 사립유치원을 선호하고 있다.

사립유치원 추첨에 지원했다가 한 번에 당첨된 분당의 30대 주부 최모씨는 “원서를 여러 군데 넣어볼까 생각했는데 다행히 1곳에 넣은 곳에 입학하게 됐다. 당첨이 되자 여기저기서 ‘좋겠다’, ‘정말 잘 됐네’ 등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며 “발표 때까지 초조한 심정으로 기다렸는데 운이 따른 것 같다. 또래 이웃들은 대부분 추첨에서 떨어져 결국 비싼 영어 유치원에 보내게 됐다”고 당시 상황을 회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출산율 늘리기와
무상보육의 아이러니 

그렇다면 왜 이렇게 유치원 입학이 어려워진 것일까. 전문가들은 가장 큰 원인이 무상보육정책에 있다고 입을 모은다. 올해 1년 동안 만 0∼2세와 5세에 대한 무상보육이 처음으로 실시됐는데, 내년부터 만 3∼4세까지 무상보육이 확대되면서 유치원 지원자 수가 더 늘어나고 있다는 것. 국민 모두가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려 하니 시설이 모자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린 것이다. 특히 학부모들이 선호하는 일부 사립유치원은 경쟁률이 11대 1에 달하면서 추첨 경쟁에 몰리고 있다. 예비 유치원생을 둔 일부 학부모들은 1, 2순위 유치원에서의 당첨 불확실성에 대비해 과거 대입시절에 쓰던 동일한 수법으로 4∼5군데씩 원서를 집어넣는가 하면 추첨일이 중복될 경우 가족들을 동원해 대리추첨을 하는 등 촌극도 벌이고 있다.

서울 관악구에서 두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있는 학부모 오모씨는 “유치원비 인상으로 정부 무상보육은 말짱 도루묵이 될 텐데 내년에 시행될 지원 확대가 무슨 소용인지 모르겠다. 정부가 기본적으로 원비를 규제하지 않는다면 결국 악덕 유치원만 배불리는 꼴이나 다름없지 않은가”라고 비판했다.

사립 원비 70만원으로 올려 정부 보조비 소용없어
원측, 물가·인건비 이유로 70%↑…횡포 속수무책

결국 아쉬운 쪽은 학부모다. 무상보육제도가 실시됨에 따라 각종 언론에서는 ‘서민을 위한 정책이다’라며 정부를 서민경제의 축이라고 칭송했다. 반면 실제 시행되고 있는 정책의 효과는 미미할 뿐 아니라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오고 있다. 정부에서 어린이집과 유치원비에 대한 정확한 규제를 마련하지 않으니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교육기관들은 정부 지원금 받고도 월 교육비와 입학비 등을 대거 올리며 배짱영업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 것. 결국 출산율을 높이자는 정부의 바람과 내년에 시행될 보육정책은 모순정책으로 변질된 셈이다. 


유치원 추첨에 7차례나 떨어진 주부 한모씨는 “주위에서 ‘얼마나 좋은 유치원에 보내려고 그렇게 애를 쓰세요?’라고 묻더라고요. 제 속이 타들어가는 심정도 모르면서. 7번이나 떨어지니 포기 할만도 한데 다들 (유치원에)보내니까 제 아이만 안 보내면 이상하잖아요. 괜히 자격지심도 생기는 것 같고…”라며 씁쓸해했다.

또 다른 주부 윤모씨는 “아이는 많이 낳으라고 큰 소리 치면서 정작 아이를 키울 학부모를 위해 기본적인 문제도 해결하지 않으니 정부 정책도 믿을 수가 없고 책임감도 없어 보인다”며 “이런 악순환이 지속되면 돈이 무서워서 도대체 누가 아이를 낳으려 하겠나”라고 지탄했다.

보여주기 정책보다
실용적인 정책 우선

최근 유치원 입학을 두고 주위에서는 ‘로또’ 혹은 ‘바늘에 실 꿰기’라고 비유한다. 그만큼 당첨확률이 낮다는 의미다. 국·공립 유치원을 아무리 늘려도 아이들 수에 비하면 현저히 부족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정부 지원금 받고도 원비를 올리는 일부 유치원의 배짱 영업, 무상보육비를 부담하고도 이런 현실을 통제 못 하는 정부로 인해 학부모만 유치원 추첨에 떨어져서 한 번 울고, 비싼 유치원비에 두 번 우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할 것이다.

김지선 기자 jisun86@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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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발 ‘채 상병 특검’ 파장

야당발 ‘채 상병 특검’ 파장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순직 해병 진상규명 방해 및 사건 은폐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채 상병 특검법)이 야당 주도로 지난 2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지난해 7월19일 사건 발생 10여개월 만이다. 국민의힘은 표결에 반발하며 퇴장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채상병 특검법에 대한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할 것으로 관측됐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이날 본회의서 ‘이태원참사특별법’을 합의 처리된 뒤 ‘의사일정 변경 동의안’을 제출하며 채 상병 특검법 상정을 요구했다. 채 상병 특검법은 해병대 채수근 상병이 실종자 수색 작전 중 순직한 사건을 초동 조사하고 경찰에 이첩하는 과정서 대통령실·국방부가 개입했다는 의혹을 특검이 수사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경찰 이첩 개입 의혹 김진표 국회의장이 이를 수용해 의사일정 변경동의안에 대한 표결이 이뤄졌고, 재석 168명 전원 찬성표로 가결됐다. 표결에는 야당만 참여했고, 국민의힘은 반발해 사실상 표결에 불참했다. 민주당은 원래 본회의 안건에 없었던 채 상병 특검법을 처리하기 위해 의사일정 변경을 우선 시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국민의힘은 이번 본회의에 합의되지 않은 법안이 올라가는 것 자체를 반대해 왔다. 당초 김진표 의장도 여야가 합의해 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양당 원내대표를 의장석으로 불러서 마지막으로 중재를 시도했지만 5분 뒤 김 의장은 여러 가지로 고려한 끝에 의사일정 변경 동의의 건을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양당의 마지막 협상도 결렬됐고, 국민의힘에서는 유일하게 자리에 남았던 김웅 의원만 찬성표를 던졌다. 당시 방청 중이었던 해병대 예비역연대 법률 자문, 김규현 변호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노년의 해병대 예비역들도 연신 눈물을 흘렸다.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 겸 당 대표 권한대행은 이날 야당이 강행 처리한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에게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를 건의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윤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 로텐더홀서 규탄대회를 열고 “그간 우리 당은 이태원참사특별법에 합의 처리하는 조건으로 의사일정에 동의했다. (민주당과 김 의장이)채 상병 특검법을 애초에 처리하겠다고 했으면 저희는 오늘 본회의 의사일정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모처럼 이태원법 합의 처리를 통해 협치 분위기가 조성되고 의회정치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있는데 오늘 의사일정 변경까지 해서 채상병법을 처리하겠다는 것은 정치 도의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채 상병 특검법 표결 시 본회의장을 퇴장하느냐’는 질문에 “우리는 채 상병이 의사일정으로 상정되는 것 자체를 반대한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규탄대회 뒤 거부권 행사 건의와 관련한 질문에 “입법 과정과 법안 내용을 볼 때 거부권을 건의할 수밖에 없다”고 단언했다. 국힘 퇴장 속 야당 전원 찬성 조각난 협치···대통령 또 거부? 민주당은 국회 본회의에 의사일정 변경안을 제출한 상태다. 이날 본회의는 이태원특별법 처리를 위해 여야 합의로 잡은 일정인 반면, 여당이 채 상병 특검법에 반대하는 상황서 입법을 강행하기 위해 의사일정을 변경해 본회의 부의를 시도하겠다는 의도였다. 대통령실은 이날 야당의 강행 처리 예고를 예의주시하면서도 공수처 수사가 우선이라는 입장이다. 정진석 비서실장은 용산 대통령실 브리핑서 “민주당이 오늘 국회 본회의서 채 상병 특검법을 의사일정까지 바꿔가면서 일방 강행 처리한 것은 대단히 유감”이라며 “엄중하게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이 같은 입장 표명은 특검법에 대한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시사한 것으로 풀이된다. 정 실장은 “채 상병의 안타까운 죽음을 이용해서 정치적 목적으로 악용하려는 나쁜 정치”라며 “공수처와 경찰이 이미 본격 수사 중인 사건인데도 야당 측이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특검을 강행하려고 하는 것은 진상규명보다 다른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여권에선 채 상병 특검법 자체의 법리적 문제점을 지적하는 동시에 이미 수사 중인 사안에 특검을 도입하는 배경에 정쟁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바라봤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와 경찰서 진행 중인 수사가 끝난 다음, 그 과정이나 결과를 토대로 특검 도입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순리라는 것이다. 야당이 특검을 당장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지적도 잇따른다. 대통령실은 무엇보다 2021년 군사법원법 개정으로 해병대수사단에 수사권이 없어졌기 때문에 야권이 주장하는 ‘수사외압’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해병대수사단이 기초 조사는 할 수 있겠지만, 관계자 수십명을 소환하고 연루자가 몇 명이고 하는 것은 법에 규정된 권한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히려 당시 박정훈 해병대수사단장의 ‘월권’ 가능성을 지적한 셈이다. “정치적 의도” 대통령실 발끈 또 과거 공수처 설치와 군사법원법 개정을 주도했던 민주당이 특검을 추진하는 모순을 거론하며, ‘참사의 정쟁화’를 시도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하는 분위기다. 이날 정 실장은 “현재 공수처와 경찰서 철저한 수사를 진행 중이므로 수사 당국의 결과를 지켜보고 특검을 도입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공수처와 경찰이 우선 수사해야 하고 그 결과에 따라 특검 도입 등의 절차가 논의되고 이어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공수처는 민주당이 패스트트랙까지 동원해 설치한 기구다. 당연히 수사 결과를 기다려보는 것이 상식이고 정도”라며 “지금까지 13차례 특검이 도입됐지만 여야 합의 없이 이뤄진 사례는 단 한 차례도 없다”고 설명했다. 사실상 야당이 단독으로 주도한 이유도 있다. 채 상병 사건 수사 과정서 윤 대통령,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 이시원 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관 등이 수사를 왜곡하고 은폐하려 했다는 관련 정황은 이미 상당 부분 나왔다. 국방부는 사단장 등 고위 지휘관들의 혐의를 축소하려 했고, 경찰에 넘긴 수사기록도 매끄럽지 않은 과정을 통해 회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대통령실과 국방부 관계자들이 전화와 문자메시지 등으로 조율한 흔적도 엿보였다. 국민의힘은 특검법 협상에 나서지 않으면서 “공수처 수사가 우선”이라는 주장이다. 다만, 공수처 수사가 1년 가까이 진척을 보이지 않으면서 야권서 반발이 터져 나왔다. 과거 대통령실이 채 상병 순직 사건을 ‘조그마한 사고’라고 언급한 사건도 국민적 분노를 유발했다. 지난 3월22일 채 상병 순직 사건과 관련해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한 매체와 인터뷰서 ‘조그마한 사고’로 표현하고 “전 지휘관이 법적인 문책을 받는 건 부적절하다”는 취지로 실언한 바 있다. 더구나 공수처는 지난해 8월 고발장을 접수한 이후 인력 부족, 수사 의지 등을 핑계로 현재까지 ‘수사 진행 중’이라는 변명만 되풀이했다. 해병대를 비롯한 국민 여론도 특검에 찬성하는 분위기다. 눈물 흘린 해병들 왜? 해병대예비역연대는 지난 2일, 국회 본회의를 앞두고 국민의힘 당사를 찾아 채 상병 특검법 상정과 통과를 강하게 요구하기도 했다. 해병대를 상징하는 붉은 옷을 입은 이들은 이날 오후 1시 서울 영등포구 국민의힘 당사 앞에 모여 “채 상병 특검법 통과, 박정훈 대령 탄압 중지” 등이 적힌 손팻말을 들고 “(채 상병 특검법에 반대하는 국민의힘 같은)이런 세력들이 우리나라의 집권여당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을 대표해 마이크를 잡은 정원철 해병대예비역연대 회장은 “국민의힘이 진정으로 이 나라의 안보를 생각하는 사람들인가. 국민의힘과 대통령은 민심을 외면하지 말고 채 상병 특검법을 수용하길 바란다”고 외쳤다. 해병대예비역연대에 법률자문을 하고 있는 해병대 출신 김규현 변호사는 “(국민의힘은)처음엔 ‘독소 조항이 있다’고, 지금은 ‘공수처와 경찰이 수사 중이니 그 수사가 끝난 다음에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며 “과거 특검 때에는 (앞서)경찰·검찰이 수사를 안 했는가”라고 되물었다. 사실상 가장 신속하게 사건을 처리할 방법은 법정 수사 기간을 최대 3개월로 정해놓고 있는 특검밖에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해병대 측은 이날 “3개월이 지나면 우리 군은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 안보에 전념할 수 있고, 정치권도 채 상병 문제를 일단락하고 지금 산적한 안보, 민생 정책을 논의할 수 있게 된다”며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는,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수사를 기다리며 이 정권이 끝날 때까지 채 상병 문제로 정쟁을 계속하겠다는 것인가. 지금이라도 국민의힘은 오후 2시에 열리는 국회 본회의에 전원 참석해 채 상병 특검법을 통과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집회를 마친 해병대 예비역 연대 회원 45명은 채 상병 특검법의 상정·통과 여부를 보기 위해 곧장 국회 본회의장으로 이동했다. 앞서 채 상병 특검법은 지난해 10월 민주당 주도로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된 후 180일의 숙려 기간을 거쳐 지난달 3일 본회의 자동 부의 요건을 충족했다. 여야는 지난 1일 이태원 참사 특별법 처리에는 합의했지만, 채 상병 특검법과 전세 사기 특별법 개정안에는 합의하지 못했다. 민주당의 채 상병 특검법을 처리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통한 것이다. 1년 가까이 진척 없는 수사 역풍 뻔한데···용산 선택은? 특검법 통과에 대해 대통령실은 야당을 향해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해석했다. 다만, 수세에 몰린 대통령실이 야당을 지적할수록 부정 여론만 키우는 분위기다. 더구나 대통령실은 스스로가 수사 대상이 되는 사안서 ‘협치’를 운운할 자격이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윤 대통령이 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는 있으나, 이로 인해 역풍을 맞게 되는 형국이다. 당장 여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용산의 뜻을 따를지 의문이다. 윤 대통령이 어렵사리 여당 의원들을 단속하더라도 다음 달에 시작하는 22대 국회에서는 궁지에 내몰릴 것이 분명하다.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여부에 신중한 모습이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거부권을 행사할지는 예단하기 어렵다”며 “김진표 국회의장은 합의 정신을 존중하는 분”이라고 일축했다. 윤 대통령은 그동안 여야 합의 없이 거대 야당이 일방적으로 처리한 법안들에 대해선 ‘과도한 갈등을 초래할 수 있다’며 거부권을 행사해 왔다. 그러나 ‘젊은 병사의 죽음’과 관련된 민감한 사안인 데다 야권과 언론이 국가안보실과 공직기강비서관실 등 대통령실 연루 의혹을 잇달아 제기한 상황이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여당의 총선 참패 한 달여 만에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도 윤 대통령에게 정치적 부담이다. 국회 재표결 시 여당 이탈표도 우려해야 하는 부분이다. 윤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용산 대통령실 회담서 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채 상병 특검법의 적극적인 수용을 요구한 데 대해 별다른 답변을 하지 않은 것도 복잡한 상황을 반영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한편 채 상병 특검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가운데, 공수처는 특검 출범 여부와 별개로 ‘채 상병 순직 사건 조사 외압 의혹’과 관련된 핵심 인물들을 불러 조사하며 수사에 속도를 내고 있다. 국방부가 채 상병 사건을 회수하고 재조사하는 과정서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 대통령실 등 ‘윗선’으로부터 외압이 있었는지 의혹을 풀어줄 핵심 인물들을 중심으로 소환조사가 이뤄지는 모양새다. 수사는 진행 중 공수처 수사4부(부장검사 이대환)는 지난 2일 오전 9시25분쯤 박경훈 전 국방부 조사본부장 직무대리를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혐의 피의자 신분으로 불러 조사했다. 이날 공수처는 박 전 직무대리를 상대로 국방부 조사본부가 채 상병 순직 사건을 재조사한 후 혐의자를 축소해 경찰로 넘기는 과정서 외압이 있었는지 등을 캐물은 것으로 알려졌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