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정치팀] 정국을 또다시 안갯속으로 몰아넣었던 안철수 전 무소속 대선후보의 사퇴 선언에서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떠오른다. 10년 전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의 '이별'이 그것이다. 당시 노 후보는 갑작스러운 단일화 파행에도 당당히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안 전 후보를 놓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 있다. 10년 전 노무현에겐 있었고, 10년 후 문재인에게 없는 것은 무엇일까. <일요시사>가 10년 전으로 돌아가 노 전 대통령에게 있는 ‘그 무엇’을 찾아보았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2년 12월18일. 제16대 대통령선거를 앞둔 시점이었다. 김행 국민통합21 대변인은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가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라고 발표하기에 이른다. 근래에 있었던 안 전 후보의 '후보사퇴'보다 조금 더 공격적이면서도 노골적인 '지지철회'였다. 때는 대통령선거를 하루 앞둔 밤 10시30분이었다. 한나라당은 환호했다. 반대로 야권은 충격에 휩싸였다. 정치권은 그야말로 폭풍전야였다.
진짜 '통큰 형님'은 노
초반 문 후보의 지지율이 안 전 후보에게 뒤쳐졌던 것처럼, 당시 노 후보도 정 후보에게 한참 뒤져 있었다. 2002년 9월23일 한 언론사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회창, 정몽준, 노무현 대선후보는 각각 31.3%, 30.8%, 16.8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노 후보는 등장과 함께 '노풍'을 일으켰지만, 이것은 보수진영의 이 후보와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에 힘입은 정 후보에게는 '찻잔 속 태풍'에 불과했다.
대선을 한 달여 앞둔 11월12일에 이르러 노 후보는 갑자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지지율 22.1%로 22.8%인 정 후보를 바짝 추격한 것. 우여곡절 끝에 11월25일 단일화가 성사되며 '창' 대 '정-노' 구도가 짜여졌다.
때를 잡은 노 후보는 과연 '통큰 형님'다웠다. 정 후보가 주장한 여론조사 방식을 노 후보가 전격 수용하면서 단일화의 물꼬가 본격적으로 트였다.
문 후보가 단일화 협상에서 '통큰 형님'으로 안 전 후보를 압박하면서도, '유리한 방식'을 고수하며 안 전 후보를 질타하던 모습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정치권은 노-정 단일화에 부정적이었다. 단일화 방식을 둘러싸고 양측이 평행선을 달리며 팽팽한 신경전을 벌인 탓이다.
조사방법을 둘러싼 진통 끝에 노 후보가 '완전히' 양보하면서 정치권의 이 같은 우려는 한 방에 날아갔다.
가까스로 합의를 도출한 양측은 TV토론을 거쳐 11월24일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결과는 노 후보의 승리였다. 노 후보는 46.8%, 정 후보는 42.2%를 기록한다. 예상을 뒤엎는 결과였다.
노 후보의 승부수다운 기질은 여기에서 익히 엿볼 수 있다. 노 후보는 협상과정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방법을 고수하지 않았다.
그리고 막판에 정 후보의 주장을 모두 수용해 지지율을 끌어올려 역전에 성공했다.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수익'을 챙긴 것이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는 현재의 문 후보와는 확실히 다른 면모다.
승부수 자질’ 부족, 극적 효과도 없어
안철수 사퇴 후 '조용~', 오로지 '안전'
추미애 민주통합당 의원이 언론을 통해 "노무현은 '돌직구', 문재인은 '우회스타일'"이라고 표현한 것도 당시 노 후보와 현재 문 후보의 차이점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단일화는 성사됐지만 결국 깨졌다. 이 전철 또한 문 후보가 비슷하게 밟았다.
노 후보는 한마디 '말'로 공들여 쌓은 탑을 무너뜨렸다. 노 후보는 선거 전날 종로에서 저녁 7시55분 유세를 시작해 8시5분께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정치선배들이 하지 못했던 후보단일화를 해냈고, 또 승복했으며 또 협력하고 있지 않은가"
이때 노 후보는 지지자들 뒤쪽에서 '차기 대통령 정몽준'이란 내용의 피켓을 발견한다.
노 전 대통령은 이것을 보고 "너무 속도위반 하지는 말아 달라. 우리에게는 대찬 여성, 아니 여자라고 하자. 추미애 의원이라는 여성지도자가 있다. (중략) 그리고 국민경선을 끝까지 지키고 함께 해 온 정동영 최고위원도 있다"라고 연설한다.
정 후보 측은 노 후보의 이 같은 발언이 정 후보를 '여러 후보군 중의 하나'로 격하시키려는 속내를 드러냈다고 성토했다. 후보단일화의 암묵적 합의라고 할 수 있는 '차기 지위 보장' 문제를 일거에 묵살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민주당은 참담한 분위기였다. 노 후보는 측근들과 함께 11시30분 당사를 나섰다. 정 후보를 만나러 간다고 했다. 정 후보의 자택 앞에는 이미 20여 명의 취재기자가 몰려있었다.
투표 당일인 19일 0시5분, 노 후보 일행이 정 후보 자택에 도착했다. 2분여간 기다렸지만 정 후보 측은 반응이 없었다.
자택 안에 있던 정 후보 측 인사가 나와 노 후보에게 "정 후보가 술을 많이 드시고 주무시고 있다. 결례인지 알지만 지금 만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기다리던 노 후보 일행은 발길을 돌렸다. "어떻게 할 것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노 후보는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라고 답했다.
이 모든 과정은 전파를 통해 안방으로 여과없이 전달됐다. 국민은 노 후보의 기다림과 초조함에 공감했고, 허탈하게 되돌리는 발길을 목격했다. 노 후보는 이처럼 자신의 속내를 여지없이 드러내 민심을 끌어들였다.
그렇게 그는 대통령에 당선됐으며, 정 후보는 무릎을 꿇었다.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와 단 2.2%차, 57만표 차이였다.
10년 전과 비슷한 상황에서 문 후보는 아직도 '적절한 대처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안 전 후보의 사퇴 선언 당시 문 후보는 조용했다. 멀리서 "미안하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잃을 것도 없지만 얻을 것도 없는 그의 전략은 여전했다.
노 후보는 정 후보에게 확실히 병 주고 약도 줬다. 그는 정 후보에 대한 '정치적 부담'을 완전히 벗어 던지고, 자기 힘으로 대권을 거머쥐었다. 일거에 털어낼 것 다 털고, 챙길 것은 다 챙긴 셈이다. 노 전 후보는 임기 내내 정 후보에게서 자유로웠다.
하지만 문 후보는 안 전 후보에게 병 줄듯 약주고, 약 줄듯 병을 줬다. 혹여나 자신이 '다칠까' 승부를 피하며 '보신주의'에 급급했다는 지적이다. 문 후보의 이 같은 '안전제일주의'는 안 전 후보에 대한 ‘빚’을 불렸다.
결국 문 후보는 대선까지, 그리고 대선 이후에도 안 전 후보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 과정에서 노 후보는 자신의 참모들을 설득하고 이끌었다. 문 후보는 주변에 의해 설득당하고 이끌렸다. '노'는 능동적이었고, '문'은 수동적이다.
사실 이들은 애초부터 서로에게 늘 그랬다. 두 사람의 이 같은 조화는 참여정부에서 부작용을 방지하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집권 후 노 전 대통령의 승부수다운 '한 수' 이면에는 문 후보의 '신중함’이 뒷받침됐다.
노 '능동적' 문 '수동적'
이처럼 노 전 대통령에게는 자신이 써 내린 답안지 중 가장 안전한 하나를 선택해줄 문 후보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문 후보에게는 기가 막힌 답안지를 제시했던 '주군'이 없다.
즉 '노무현에게 문재인이 있었지만, 문재인에게는 노무현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이들을 이토록 다르게 만들었다. 이제는 주군을 모셨던 문 후보가 주군이 되기 위해 직접, 답안지를 써야 할 때다.
조아라 기자 <archo@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