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신임 한국은행 총재 신현송

CBDC·예금토큰으로 ‘3고’ 잡을까

[일요시사 취재2팀] 김유미 기자 = “신중하고 유연한 통화정책 운용을 통해 물가안정과 금융 안정을 도모해 나가겠다.”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 21일 취임식에서 각오를 밝혔다. 그가 인사청문회 당일 청문보고서 채택이 불발된 첫 후보자라는 오명은 벗은 셈. 신 총재는 취임 후 숨 고를 틈도 없이 곧장 중동발 3고(고유가·고금리·고환율) 위험성이라는 시험대로 자리를 옮겨갔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와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교수. ‘중앙은행의 중앙은행’으로 불리는 국제결제은행(BIS) 경제보좌관 겸 통화경제국장.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가 최근까지도 달고 있던 이름표다.

신 총재는 40여년간 해외 경제학계와 국제기구 등을 거치며 쌓은 명성과 이력, 거시경제와 통화정책 분야의 전문성을 인정받아 한국은행 총재 후보자로 지목됐다. 통화정책 수장으로서 지녀야 할 전문성과 경제 정책 방향성에서는 대체로 긍정 평가가 나온다.

탁월한
국제 감각

이재명 대통령은 인사청문 요청 사유서에 “국내외 금융·경제 상황에 대한 뛰어난 통찰과 통화정책 등 거시경제 정책 전반에 대한 이해, 탁월한 국제 감각을 모두 갖추고 있다”며 “물가안정과 금융 안정을 통해 국민 경제의 건전한 발전을 도모하는 데 적임자”라고 지명 이유를 적었다.

이규연 대통령 비서실 홍보소통수석은 신 총재가 “학문 깊이와 실무적 통찰력을 모두 갖춘 국제금융과 거시경제 분야 세계적 권위자”라며 “중동 사태로 인해 국제 경제에 불확실성이 더 커진 상황에서 물가안정과 국민 경제 성장이라는 통화정책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적임자”라고 설명했다.

신 총재는 2009년 이명박정부 시절 국제경제보좌관으로 일한 이력을 지녔다. 당시 미국 프린스턴대 경제학과 교수였으며 통화정책 전문가로 통했다. 국제경제보좌관은 수석비서관과 비서관의 중간급으로 당시 청와대 직제개편 때 신설됐다.

신 총재를 두고, 미국 컬럼비아대 경제사 교수 애덤 투즈(Adam Tooze)는 “BIS 수석 경제학자이자 ‘거시 금융론(Macro finance)’이라는 새로운 분야에서 가장 탁월한 사상가”라고 적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를 다룬 세계적 베스트셀러 <붕괴(Crashed)>에서다.

투즈는 신 총재에게 노벨 경제학상을 줬어야 한다고도 했다. 2022년은 벤 버냉키 당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에게 그 상이 돌아갔던 때다. 투즈는 당시 블로그에 “진정으로 현대 국제금융 시스템의 역동성과 그것이 실물경제와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 경제학자에게 상을 주고 싶었다면” 그 상은 BIS 팀과 “가장 두드러지게는 신현송에게 돌아가야 했다”고 주장했다.

신 총재는 지난 21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별관 강당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한국 경제를 현 시점에서 진단하고 중점 과제를 꼽았다. 요약하자면, 신 총재호 한은은 CBDC와 예금토큰을 기반으로 프로젝트 한강과 아고라 프로젝트에 방점을 찍을 가능성이 커졌다.

그는 취임식에서 우리 경제가 “중동전쟁에 따른 공급충격으로 물가와 성장 경로의 불확실성이 한층 커졌다”고 진단했다. “국제유가가 상승해 물가 상방 압력과 경기 하방 압력이 동시에 증대됐고, 금융시장의 높은 변동성과 금융 불균형 누증 위험도 지속되고 있다”며 “녹록지 않다”고 평가했다.

국내 경제는 “인구구조 변화, 양극화 심화, 부동산시장과 가계부채 문제로 성장 동력이 약화하고 있다”며 “이 구조적 문제가 세계 경제 변화와 맞물려 어떻게 전개될지 예단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짚었다.

“오늘날 세계 경제 질서는 지정학적 갈등과 AI 기술 혁명으로 대전환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며 AI 기술 변화도 언급했다. AI 기술은 “지난 몇 년 사이에 산업 지형을 변화시켰다”며 “경제 성장과 생산성, 노동시장 등 경제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예상했다.

옥스퍼드대 졸업 후 IMF와 BIS 거친 금융통
탁월한 사상가…“버냉키보다 낫다” 평도

이를 토대로 향후 4년간 한국은행이 추진할 중점 과제로 ▲신중하고 유연한 통화정책 ▲금융 안정 강화 ▲지급결제 안정성 유지 ▲경제 구조 개혁 등 네 가지를 들었다. 그중에서도 정부 및 관계기관과 커뮤니케이션을 자주 하고, 지급결제 혁신을 이루겠다고 한 점이 눈에 띈다.

물가안정과 금융 안정을 도모할 통화정책의 유효성을 높이기 위해 정책 수단을 재점검하고 정부와는 정책 공조를, 시장과는 양방향 소통을 강화해 나가겠다고 했다.

급격한 금융시장 변화에 따른 건전성 지표와 시장가격 지표 움직임을 적극 활용해 조기 경보 기능을 강화할 것 역시 다짐했다. 비은행 부문 정보 접근성을 제고하고 금융기관의 부외 거래, 비전통 금융상품 등으로 분석 범위를 확장해 중앙은행이 금융 안정 역할을 강화할 방안을 관계기관과 논의해 나갈 것을 제언했다.

‘원화의 국제화’ 추진과 ‘미래 통화 제도’ 설계 방침에 따른 도구로 중앙은행디지털화폐(CBDC)와 예금토큰을 제안했다. “프로젝트 한강 2단계 사업을 통해 CBDC와 예금토큰 활용도를 높이고 아고라 프로젝트 등 국제협력을 통해 디지털 지급결제 환경에서 원화 위상을 높여 나가겠다”는 것.

기존 인사청문회 서면 답변 등으로 화제가 됐던 스테이블코인은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지난 15일 인사청문회 때는 CBDC와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각각 용도에 따라 역할이 있을 수 있다”고 두 가지 모두 사용할 가능성을 내비쳤으나 취임식에서는 달랐다. 같은 ‘테더(USDT)’라도 기반이 이더리움인지, 트론인지에 따라 상황이 달라지므로 ‘화폐 단일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스테이블코인은 보조 수단 정도로 활용할 가능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프로젝트 한강은 한은,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 시중은행이 협력해 일반 이용자를 대상으로 수행하는 디지털 화폐 실거래 테스트(Pilot Test)다. 1단계는 2023년 10월부터 2025년 8월까지 진행했다. 디지털화폐 및 예금토큰을 제조해 발행, 유통, 환수를 거쳐 폐기되기까지 전 과정 작동 과정을 확인했다.

지난 2월부턴 2단계가 가동됐다. 생체인증, 개인 간 송금 등 시스템 확충을 시작으로 국고금 집행 시범사업 지원, 시중은행과 후속 실거래를 시행하는 데 착수한다는 방침이다. 상용화 기반 마련을 위한 외부 기관 종합 컨설팅도 진행한다.

아고라(Agora)는 BIS와 국제금융협회(IIF) 등이 추진하는 블록체인 기반 국가 간 송금 개선 프로젝트다. 우리나라는 물론, 미국, 유럽연합(EU), 영국, 일본 등 7개국 중앙은행과 40여개 각국 주요 은행이 참여하고 있다. 한강과 아고라가 연계되면 원화 예금토큰을 글로벌 영역으로 확장해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높은 변동성
불균형 누증

한은 조직 운영도 기존과 달리할 것을 목표했다. 임직원 각각의 역량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데 힘을 쏟겠다고 역설했다. “한국은행의 위상이 제고되는 과정에서 구성원 개개인도 함께 성장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 같은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조사 연구와 정책, 현업과 관리 등 전 부문에 걸쳐 성장 기회를 폭넓게 제공하고 합당한 처우가 뒷받침되도록 조직 문화와 내부 경영 개선에 꾸준히 힘쓰겠다”고 했다.

신 총재가 취임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국회 재정경제기획위원회(이하 재경위)는 인사청문 경과보고서를 두 번씩이나 채택하지 않았다. 그는 한은 총재 인사청문회 도입 이후 청문회 당일 청문보고서 채택이 불발된 최초 후보자였다.

앞서 재경위는 지난 15일 마련한 인사청문회에서 야당이 요구한 신 총재 자녀 자료가 제출되지 않자 보고서 채택을 미뤘다. 쟁점 중 하나는 영국 국적 장녀를 서울 강남 아파트에 내국인으로 불법 전입을 신고했다는 것이었다.

국회 재경위 소속 개혁신당 천하람 의원은 신 총재가 2023년 서울 강남구 논현2동 주민센터에 자필로 제출한 장녀 전입신고서를 입수했다고 밝혔다. 신 총재가 1999년 영국 국적을 취득해 외국인이 된 장녀를 자신이 보유한 서울 강남구 동현아파트에 전입한 것으로 신고했다는 것이다.

신 총재는 장녀를 외국인으로 해 사는 곳을 등록해야 했지만, 옛 주민등록번호를 이용해 그를 내국인으로 신고했다. 천 의원은 ‘주민등록 또는 주민등록증 등에 관해 거짓의 사실을 신고 또는 신청’하는 행위를 금지한 주민등록법 위반에 해당할 수 있다고 꼬집었다. 이 법에 따르면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당시 신 총재가 장녀 전입 사유로 ‘가족과 함께 거주’를 기재한 점도 문제가 됐다. 청문회를 앞두고 그가 “장녀는 5년 전 결혼해 해외에서 독립된 가정을 이룬 상황”이라고 밝힌 부분과 다르다는 지적이었다.

천 의원은 “국회 답변서에는 ‘독립 가정’이라고 했으면서 전입신고서에는 ‘함께 거주’라고 했으니, 둘 중 하나는 명백한 거짓”이라며 “한국 국적자 혜택을 노린 것이 아니라면 의혹 해소를 위해 건강보험 및 출입국 관련 자료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1991년생인 신 총재 장녀는 미국 프린스턴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2021년 9월 캘리포니아에서 결혼했다. 이번 허위 전입 신고는 장녀가 국적 상실 신고를 하지 않아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 총재는 행정 절차를 잘 알지 못해 국적 상실 신고가 빠졌다고 해명했다. 그의 배우자와 장남이 각각 2011년과 2012년에 이미 국적 상실 신고를 완료한 것과 배치된다.

외국인 부인
외국인 자녀

배우자와 장남 국적 문제도 불거졌다. 신 총재 배우자는 미국 뉴욕에서 출생한 미국 시민권자다. 1996년 영국에서 태어난 장남은 영국 국적이다. 그는 만 18세 이전 한국 국적을 포기해 병역을 이행하지 않았다. 현재는 영국 런던에서 학업 중이다.

신 총재는 “배우자는 한국에 정착해 거주할 예정으로, 향후 국적 회복 허가를 신청할 계획”이며 “자녀들의 국적은 그들의 의사를 존중할 수밖에 없는 점을 양해해 달라”고 했다.

보유 자산 중 외화자산이 상당하다는 이유로 우려를 사기도 했다. 지난 13일 신 총재는 청문회 서면 답변서를 제출하며 “우려를 충분히 이해한다”며 “외화표시 금융자산을 상당 부분 처분했고, 외화자산 비중을 순차적으로 줄여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신 총재는 본인과 배우자, 장남이 보유한 재산 총 82억4102만원 중 45억7472만원(55.5%)이 해외 금융 자산과 부동산이라고 신고했다. 일각에서는 환율이 상승할수록 원화 환산 평가액이 불어날 수 있는 만큼, 외환 당국 수장으로서 이해충돌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신 총재는 “이해충돌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며 “모든 정책 판단의 기준은 국민 전체의 이익일 것”이라고 했다. 또 “국내 주식은 매도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신 총재는 런던 증시에 상장된 한국 주식 투자 상장지수펀드(ETF) ‘Franklin FTSE Korea UCITS ETF’를 지명 직전 매수했다는 의혹에는 “총재 지명 시기와 관련이 없다”고 해명했다. “한국 증시가 여타국 대비 강세를 보임에 따라 포트폴리오 관리 측면에서 매입해 온 것”이라 말했다.

본인 명의로 보유한 15억900만원 상당의 서울 강남구 언주로 동현아파트(84.92㎡)와 부부 공동명의로 가지고 있는 18억원 상당의 종로구 신문로 디팰리스 오피스텔(198.108㎡), 배우자 명의 2억8494만원 상당의 미국 일리노이주 소재 아파트 등에 대해서도 지적이 있었다.

신 총재는 다주택자 논란이 일자 “공직 후보자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있으며, 보유하고 있는 3채 중 2채를 매물로 내놨다”고 밝혔다.

청문회 당일 보고서 미채택 첫 사례
여권법 위반·외환 자산으로 ‘시끌’

재경위는 최초 인사청문회 개시일인 지난 15일에서 5일이 지난 20일 신 총재 인사청문 경과보고서를 채택했다. 재경위원장인 국민의힘 임의자 의원은 “대내외 경제 상황이 엄중해 한국은행 총재라는 직위의 공백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은 많은 위원님께서 공감하시는 부분”이라면서 채택 이유를 설명했다.

임 위원장은 “국적을 상실한 자녀가 대한민국 여권을 이용한 출국 기록이 확인됐고, 대한민국 여권을 재발급받은 적이 있다는 것은 기재토록 하겠다. 그것은 팩트(사실)이기 때문”이라며 논란을 일단락 지었다. 천 의원 의견은 인사청문 보고서에 소수 의견으로 기재됐다.

신 총재는 1959년 대구에서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현대건설 부사장과 현대종합상사 사장을 지냈다. 아버지가 영국으로 일자리를 옮기게 되자 1968년부터 3년여가량 런던에서 초등학교에 다녔다. 다시 귀국해 학업을 이은 적도 있으나 아버지와 함께 영국으로 돌아가 1974년부터 4년간 이매뉴얼 스쿨에서 공부했다.

1977년 옥스퍼드대 모들린 컬리지에 PPE전공으로 합격했다. 당시 모들린 컬리지 신입생 2인에게만 수여되는 더미십 장학금을 받았다고 한다. 1978년에는 고려대학교 경제학과에 편입했는데, 한국과 영국 두 군데 대학 ‘이중 학적’으로 의심할 수 있는 대목이다.

신 총재는 “입대를 앞두고 한국 문화를 익히고 적응 기간을 갖고자 고려대로 편입학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신 총재는 고려대를 1년 다니고 다음 해인 1979년 8월부터 서울 용산에 자리한 한미연합군사령부에서 영문 타자병으로 복무했다. 입대 직후 고려대에 휴학계를 제출했으나 기한 내 복학하지 않아 1984년 제적 처리됐다. 그는 1982년 3월 전역해 영국으로 돌아가 옥스퍼드대 철학·정치·경제학과에 정식 입학했다.

1985년 특별 최우등(Congratulatory First)으로 학부를 졸업했다. 당해 모들린 컬리지 졸업생 300여명 중 3명에게 수여되는 상이었다. 이후 1988년 옥스퍼드 대학교 너필드 컬리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어 사우샘프턴 대학교, 옥스퍼드대 너필드 컬리지,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교수로 근무했다. 영란은행 자문, 국제결제은행 자문교수도 담당했다. IMF 상주 연구자로 근무하던 시절에는 2006년 IMF 연차 총회에서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를 예측하기도 했다.

보유 자산
얼마길래…

프린스턴대 휴즈-로저스 석좌교수, 뉴욕·필라델피아 연방준비은행 자문교수 겸 금융자문위원도 맡았다. 2010년 안식년 기간에 청와대에서 국제경제보좌관으로 근무하며 G20 의제 설정에 도움을 줬다. 당시 원화 변동성 제어를 목표로 ‘거시건전성 3종 세트’를 마련했다.

2014년 5월부터는 BIS 경제보좌관 겸 조사국장 겸 수석 경제학자로 일하며 10년 이상 연구를 총괄했다. 비유럽·미국 출신으로는 최초였다. 2025년 1월부터 한은 총재로 지명된 지난 3월까지는 경제보좌관 겸 통화경제국장으로 근무했다.

<younme@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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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호 폭발’ 시험대 오른 한미 관계

‘나무호 폭발’ 시험대 오른 한미 관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지난 2월 시작된 중동 전쟁의 여파가 경제는 물론 외교까지 흔들고 있다.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 미국의 초조함이 우리나라에 불똥으로 튀는 모양새다. 이재명 대통령은 국익에 도움 되는 ‘실용 외교’를 줄곧 강조하고 있다. 어떤 선택이 우리나라에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다줄까. 미국과 이스라엘이 한낮에 이란 수도 테헤란에 폭탄을 떨어뜨렸다. 공습의 여파로 이란의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를 비롯한 고위급 인사들이 폭사했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란이 응전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들의 저항은 거셌다. 이란은 전 세계 원유의 20~30%가 오가는 물류 허브인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는 방법으로 응수했다. 끝날 듯 안 끝나는 원유 이동이 제한되면서 유가가 폭등했다. 주가가 출렁였고 물가도 오르기 시작했다. 이란은 전 세계 경제를 볼모로 잡고 버티기 작전에 들어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란을 석기시대로 돌려놓겠다’고 말하는 등 협박에 가까운 말로 압박했다. 이스라엘은 이란 주변국에도 폭탄을 투하하는 등 확전 태세를 보였다. 지난 2월28일 이후 두 달 가까이 이어지던 강 대 강 대치는 지난달 초 미국과 이란이 임시 휴전에 합의하면서 소강상태를 맞았다. 하지만 서로의 요구사항이 극명하게 다른 상황이라 휴전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무엇보다 호르무즈 해협에 대한 미국과 이란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길 원했다. 이번 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이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확인한 만큼 계속 주도권을 갖고 싶다는 뜻으로 풀이됐다. 반면 미국은 호르무즈 해협의 완전 개방, 자유 항행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호르무즈 해협에 대한 미국과 이란의 힘겨루기 양상은 다른 나라에 영향을 미쳤다.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가는 선박의 통행이 제한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은 선박을 멈춰 세운 이란에 반발해 군사작전을 기획했다. 호르무즈 해협에 발이 묶인 선박의 탈출을 돕는 이른바 ‘프로젝트 프리덤’이다. 프로젝트 프리덤 착수 첫날 이란은 즉각 반발했다. 미국과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인근에서 무력을 행사하면서 긴장 수위가 높아졌다. 불똥은 우리나라 선박에도 튀었다. 지난 4일 오후 8시40분경 호르무즈 해협의 아랍에미리트 움알쿠와인 인근 해역에 정박 중이던 HMM(옛 현대상선) 소속 선박 나무호에서 폭발과 함께 화재가 발생했다. 호르무즈 해협서 선박 사고 “이란 공격” VS “관련 없다” 폭발과 화재 당시 우리나라 국적 선원 6명을 포함한 24명이 타고 있었지만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HMM에 따르면 나무호는 예인선을 통해 두바이항으로 옮겨졌다. 두바이 현지의 한국선급 지부 인력, 중앙해양안전심판원 소속 조사권, 소방청 감식 전문가 등이 참여해 사고 원인을 조사했다. 외교부는 지난 10일 “조사 결과 5월4일 미상의 비행체가 HMN 선미를 타격한 것으로 확인됐다”며 “CCTV 영상에 해당 비행체가 포착됐으나 발사 주체, 정확한 기종 및 물리적 크기 등을 확인하기에는 제약이 있는 상황”이라고 정부 합동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면서 “현장에서 수거된 비행체 엔진 잔해 등을 추가 분석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문제는 나무호 폭발을 바라보는 엇갈린 시각이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 사건을 동맹의 전쟁 참여의 ‘지렛대’로 사용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일(현지시각) “이란이 한국 화물선을 포함해 관련 없는 국가들을 공격했다”며 “이제는 한국이 이 작전에 참여할 때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나무호 폭발과 관련해 사고 원인이 정확히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의 공격 때문이라고 규정해 버린 것이다. 반면 이란 측은 나무호 사건에 선을 그었다. 주한이란대사관은 지난 6일 “호르무즈 해협에서 발생한 한국 선박 피해 사건에 이란군이 연루됐다는 모든 의혹을 강력히 거부하며 단호히 부인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책임’을 언급했다. 이란대사관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관련 규정을 준수하고 발령된 경고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지정된 항로를 따르고 이란 이슬람 공화국 관계 당국과 협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피격이냐 결함이냐 또 “군사 및 안보적 긴장의 영향을 받는 환경에서 선포된 요구사항과 작전상의 실태를 무시할 경우 의도치 않은 사고가 발생할 수 있음은 자명하다”며 “이 같은 고려 사항을 무시한 채 해당 구역에서 통행이나 활동을 진행하는 당사자들에게 그런 결과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했다. 미묘하게 우리나라 선박 측으로 책임을 돌리는 듯한 뉘앙스다. 정부는 지난 6일 “(프로젝트 프리덤) 작전이 종료됐기 때문에 (참여) 검토는 꼭 필요하지 않게 됐다”고 밝혔다. 위성락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우리는 그동안 ‘해양 자유 구상’에 대해 검토하고 있었고 프로젝트 프리덤에 대해서도 검토하려고 했었다”고 말했다. 정부의 선 긋기에도 불구하고 이번 나무호 사건은 동맹국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노골적인 요구가 또다시 표면화했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는 반응이 나온다. 지난 3월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5개국을 향해 호르무즈 해협에 함정 파견을 요구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여러 국가, 특히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시도로 영향을 받는 국가들은 해협을 개방하고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 미국과 함께 군함을 보낼 것”이라고 자신의 트루스소셜에 글을 썼다.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5개국은 중국, 프랑스, 일본, 한국, 영국 등이다. 그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에너지 수급에 큰 영향을 받은 국가들이 직접 호위 작전에 나서야 한다는 ‘수익자 부담 원칙’을 내세웠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에도 우리나라를 포함한 5개국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일부 국가들은 군함을 보내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우리나라 역시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다 두 달도 못 돼 또 한 번의 ‘트럼프발 호르무즈 청구서’가 날아든 것이다. 신중한 정부 넘겨 왔는데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각에서는 한미 관계에 균열이 생긴 게 아니냐는 말이 지속해서 흘러나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중동 전쟁을 빌미로 우리나라에 여러 가지를 요구하는 것과는 별개로 동맹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부정적인 상황이 잇따라 벌어지고 있다는 반응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 임기 초 각국에 관세 폭탄을 던질 때부터 시작된 균열이 아직까지 봉합되지 않고 있다는 말까지 들린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혈맹’이라고 불리던 한미 관계가 무색할 정도로 우리나라에 거친 태도를 보여왔다. 특히 관세 문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등을 대놓고 화두로 올렸다. 관세를 부과하고 분담금을 더 내라는 식으로 여러 차례 압박했다. 미군이 북한으로부터 우리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 돈으로 보상하라고 밀어붙였다. 최근에는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말을 두고 진실 공방이 벌어졌다. 정 장관이 지난 3월6일 국회에서 북한 우라늄 농축시설 소재지로 구성을 언급했다. 정부와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공식 확인한 영변과 강선 외의 장소다. 국민의힘 정보위원회 소속 의원들에 따르면, 정 장관의 발언 이후 미국은 4월 초 정보를 공유하는 것을 일부 제한했다. 정 장관은 구성이 과거 미국 싱크탱크나 국내 언론 보도 등으로 이미 언급됐던 장소라며 정보 유출이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재명 대통령도 지난달 20일 “정 장관의 발언 이전에 구성 핵시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각종 논문과 언론 보도로 이미 전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었던 점은 명백한 팩트”라고 두둔했다. 정 장관의 발언은 정쟁으로도 번졌다. 국민의힘은 정 장관의 해임 건의안을 발의했다. 국민의힘은 해임건의안을 발의하면서 “(한미) 동맹의 균열을 초래하고 국가 안보의 금도를 넘어섰다”며 그 배경을 밝힌 바 있다. 정 장관은 “안보 사안에 대해 숭미주의가 너무 지나친 것 같다”고 맞섰다. 정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은 자동 폐기됐다. 트럼프 노골적 참전 요구 청구서 받아든 이 선택은? 미국 측에서 우리나라 사법 체계를 흔드는 듯한 행보도 잇따라 나왔다. 김범석 쿠팡 의장, 방시혁 하이브 의장 관련 논란이다. 쿠팡은 지난해 11월 3300만건의 고객 개인정보 유출로 조사를, 방 의장은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 심지어 방 의장은 출국금지 상태다. 미국 정계에서는 다양한 경로로 쿠팡 ‘감싸기’를 하고 있다. 미국 기업인 쿠팡을 ‘차별적으로’ 대하지 말라는 게 골자다. 수사 대상에 오른 김 의장의 안전을 보장해야 안보를 논의할 수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 미국 공화당 하원의원들이 쿠팡 등 미국 기업에 대한 차별적 규제를 중단하라는 항의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최근에는 공정거래위원회가 김 의장을 쿠팡의 동일인(총수)으로 지정하면서 한미 간에 감정싸움이 불거질 수 있다는 말도 나왔다. 지금까지 쿠팡의 동일인은 법인이었는데 김 의장(개인)으로 바뀌면서 법적 책임이 대폭 늘었다. 실제 쿠팡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에서 공시 의무를 준수하고 있는 만큼 우리나라가 이중으로 규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차별적 조치라는 것이다. 또 김 의장이 미국 국적자인데 그를 한국법상 총수로 지정한 것은 한미FTA를 위반한 것이라고도 강조했다. 주한미국대사관에서 방 의장을 비롯한 하이브 관계자 3명의 출국금지를 해제해 달라는 요청이 경찰청에 오기도 했다.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는 하이브 상장 과정에서 방 의장이 2000억원대의 부당이득을 챙긴 혐의로 수사하고 있다. 경찰은 방 의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검찰이 보완 수사를 이유로 반려했다. 이 같은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이 내정간섭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어떤 이유로든 미국이 우리나라에서 수사를 받는 인물에 대해 특정 요구를 한다는 것 자체가 과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선택 기로 앞으로는? 더 큰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가 또다시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이재명정부의 외교 방향은 ‘국익’ ‘실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대통령은 전시작전권 전환 등 안보 독립을 외치는 중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외교는 오랜 시간 한미동맹의 바탕 위에서 이뤄졌다. 결국 선택해야 할 시기가 올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합류일까, 관망일까?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