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대담> 윤여준이 보는 혼란 속 희망

“지금 고통은 민주주의 성장통”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지난 10년 동안 대한민국은 두 번의 탄핵과 한 번의 계엄을 겪었다. 일어서고 좌절하기를 반복하면서 경제는 휘청였고 정치 양극화는 고점을 찍었다. YS(김영삼 전 대통령)를 시작으로 정치사의 명과 암을 모두 지켜본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그럼에도 비관적으로 보지 않는다”고 말한다. 윤 전 장관이 본 희망은 이 모든 걸 겪고도 다시 일어나는 대한민국 국민의 회복력이었다.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의 정치 인생은 좌우 이념을 가리지 않는다. 청와대를 비롯한 행정부, 국회, 선거 등 크고 작은 나랏일을 함께하며 30년 넘게 국정 운영에 관여했다.

1994년 김영삼정부 시절 청와대 대변인 겸 공보수석을 지낸 그는 1997년 제4대 환경부 장관에 임명됐으며 1998년 이회창 전 국무총리의 ‘제갈공명’으로 이름을 알렸다. 2000년 한나라당의 제16대 총선을 시작으로 2006년 오세훈 서울시장캠프 공동선대위원장, 2012년 문재인 후보 캠프 국민통합추진위원장, 2014년 안철수 의원이 이끈 새정치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 등을 차례로 지냈다.

지난 4월에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후보의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상임총괄선대위원장으로 깜짝 발탁됐다. 선거를 승리로 이끌어온 윤 전 장관은 이재명 대통령의 취임 30일 기자회견을 본 뒤 “이 대통령 밑에서 일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호평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국정 운영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해 왔던 윤 전 장관은 ‘보수 책사’로 통한다. 그러나 막상 그는 이 같은 별명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듯 했다. <일요시사>와 인터뷰 도중 “보수 책사이시다”라는 취재진의 말에 그는 양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책사가 아니라고 10년째 말하는데 여전히 사람들은 그러네. 책사라는 단어를 빼달라고 매번 말해도 늘 기사에 넣더라고. 지금은 국민을 설득하는 시대지, 속이는 시대가 아니에요. 책사는 꾀를 내거나 어두운 지혜를 쓰는 것을 뜻합니다. 지금 시대에는 가당치도 않은 말이지. 어떻게 주권자를 속일 수가 있나.”


다사다난한 한 해의 끝에서 <일요시사>와 만난 윤 전 장관은 책사가 아닌 국민의 잠재력을 일깨워 줄 ‘통치자’이자 ‘전략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윤 전 장관의 일문일답.

-2025년은 격변의 해였다. 지난 1년을 돌아본다면?

▲숙명인지 모르겠으나 근래에 항상 격랑하고 격변하는 세월을 보냈다. 국민도 상당이 이골이 난 것 같다. 지난 1년간 한국에 일어난 일은 다른 나라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엄청난 사건의 연속이다.

예전부터 우리 백성이 평온한 삶을 살았던 적이 별로 없다. 나라 자체가 분단국가이지 않은가? 그래도 긍정적으로 본다면 우리 국민은 웬만한 위기에는 까닥하지 않는다. 이미 탄핵을 겪은 만큼 올해 사건들을 보통 예사로 생각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았을 때 마음이 아프다.

-도서 <대통령의 자격>을 집필하셨다. ‘스테이트크래프트(Statecraft·통치 역량)’를 강조했는데,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역량은 무엇인가?

▲국가를 통치하는 기본 역량은 공공성이다. 이는 공동체 구성원의 연대 의식을 일으키는 핵심 가치다. 기본 역량은 변하지 않지만 나라가 처한 상황에 따라 유연성을 가진 지도자가 필요하겠다. 태어날 때부터 이를 습득할 수는 없겠지만, 과정은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 정치 역사가 긴 나라에서는 하루아침에 대통령이 탄생하기 어렵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이 과정이 생략됐다. 그러다 보니 윤석열 전 대통령 같은 인물이 등장한 것이다. 윤석열정부와 대통령 탄핵 정국을 거치면서 국민이 많은 걸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에서 “어느 시대에도 인재는 있다”고 하셨는데….

▲이 세상이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다 필요해서 나온 사람들이다. 본인의 역할이 있고 잘난 놈들만 역할이 있는 게 아니다.

-윤 전 대통령도 국민이 뽑은 권력이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대통령은 당선 이후가 더 중요하다. 후보들은 당선되는 데에만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 되고자 하는 사람은 되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된 이후에 어떻게 할 것인지, 자신이 그런 실력을 갖췄는지, 이론적인 지식과 경험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가 이뤄지면 국정이 망가지고 스스로가 망가진다.

대한민국은 규모에 비해 굉장히 다스리기 어려운 나라다. 사회가 다원화돼있고 국민의 수준이 높기 때문에 이를 소홀히 하고 “감히 내가 누구인데”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 쉽다. 우리는 그런 생각으로 나라를 통치한 사람들의 말로를 지켜봤다.

-6·3 조기 대선 당시 민주당 이재명 대통령 후보 캠프의 상임총괄선대위원장으로 활동하셨다. 선거 기간 동안 바라본 이 후보는 어떤 사람이었나?

▲이재명 대통령과 처음 만난 건 그가 성남시장을 할 때였다. 전화가 와서 “무슨 일이십니까?”라고 물어보니 점심을 같이하자는 연락이었다. 가게 구석에 둘이 앉아서 꽤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당시 그는 나에게 국정에 대한 이런저런 것들을 물었고, 꽤 재밌게 대화한 기억이 난다.

대통령 기본 역량은 윤리와 공공성
이, 도덕성 신경 쓰면 훌륭한 지도자

짧은 시간 내에 사람을 평가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 대통령은 자기 생각이 분명한 사람이다. 지적과 수정을 받아들이는 그릇을 갖췄다. 지도자는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

-이재명정부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윤석열정부 이후 등장한 만큼 이 대통령의 책임이 무거워 보인다. 도덕성과 효율성, 두가지의 가치를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대장동 등 이 대통령의 도덕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효율성 측면에서 봤을 때 이 대통령은 근래 등장한 사람 중 가장 행정력이 뛰어나다.

윤 전 대통령이 파탄 낸 국정을 빠르게 정상궤도로 올렸다. 그렇기에 효율성과 도덕성 두 가지를 놓고 극단적으로 선택하라고 했을 때 나는 효율성을 택할 것이다.


-도덕성을 중요시하는 대한민국 정서 특성상 효율성만 강조해서는 국민을 설득하기 어렵지 않을까?

▲ 도덕군자란 무엇인가? 나만 잘살고 나라를 망가지게 두면 그것을 어떻게 훌륭한 지도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이 대통령에게 굉장히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 이번 정부를 통해 망가진 대한민국 국정을 상당 부분 회복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 대통령이 도덕성을 신경 쓰면 훌륭한 대통령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본다. 이후에 등장할 대통령에 대한 기준치도 높인 셈이다. 국민의 눈높이가 올라갔으니, 후임자 역시 그에 걸맞은 사람이어야 한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물리적인 규모는 큰 나라가 아닐지 몰라도 잠재 능력은 몹시 크다. 워낙 국민적 역량이 뛰어나고 다양성을 갖춘 나라인데, 일부 정치인은 대통령이 돼 권력만 잡으면 일이 쉽게 풀린다고 생각한다. 어림도 없는 일이다.

-보수 진영에서는 여전히 이 대통령의 ‘비호감’ 프레임이 짙다.

▲국민이 원하는데 대통령이 봤을 때 옳지 않은 길일 수도 있다. 따라서 지도자는 자기의 반대편에 선 다수의 국민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국민을 설득하고 동의를 얻는 탁월한 리더십과 신뢰를 갖춰야 한다. 정도를 걸으면서 이 모든 걸 갖추는 게 쉽지는 않다.


-‘제왕적 대통령제’가 대한민국을 비극으로 이끌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대통령은 크게 통치하고 다스리는 것인데, 제왕적이지 않은 대통령이 존재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꼭 제왕적이라야만 대통령 되는 건 아니다. 권력의 속성은 ‘집중’과 ‘연장’이다. 대통령이 된 사람이 이를 절제하고 욕망을 누르면서 국가를 민주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국민 다수의 의사가 효과적으로 반영되면 우리는 통상 민주적이라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주적인 가치가 자연스럽게 내면화돼야 한다. 평생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이들도 권력을 잡으면 제왕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인물의 문제가 아닌, 국가 정치 운영 방식에 따른 차이인데 민주주의를 하나의 굳어진 제도와 체제로 받아들이면서 생긴 오류라고 생각한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는 매 순간 권력의 유혹을 마주할 것 같다.

▲실제로 많이 느낄 것이다. 권력을 잡는다는 건 사람을 마취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 마취 효과를 이겨내야 한다. 특히 대한민국은 국민 의식 수준이 굉장히 높기 때문에 대통령의 자리를 쉽게 봐서는 안 된다.

-국민의 의식은 높아지고 있지만 그들로부터 형성된 여론이 정치권에 잘 반영되고 있다고 보는지? 소수의 의견이 다수의 의견처럼 포장되는 경향이 있다는 해석도 나오는데….

▲그렇게 치부하는 것이 권력자의 입장에서 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민사회의 역량이 조직화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러면 어떤 권력도 함부로 휘두르지 못하고 비로소 민주주의가 제도적, 문화적으로 정착하는 때가 올 것이다.

좌절 반복…그래도 희망적인 이유?
“다시 일어난 국민, 버텨낸 기업”

-민주당 등 범여권은 ‘내란 청산’을 주장하고 있다. 내란 청산 이후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국민의 여론은 내란 세력을 청산하라는 것이다. 문제는 척결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척결은 하나의 과정이고, 이후 어떤 국가를 건설할 건지 계획하는 과정에 국민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지도자는 국민의 동의를 얻은 목표를 직접 실현하기 위한 정치적, 행정적 역량을 보여줘야 한다.

-국민의힘의 상황이 좋지 않다. 여론을 쇄신하는 방법이 있을까? 보수 진영에 오래 몸담았던 만큼 고민도 많을 것 같은데….

▲당연히 고민한다. 문제는 우리가 고민하는 것만큼 국민의힘도 고민하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한 사회의 민주주의가 성숙하는 길로 향하고 있고, 지금의 우리는 혼란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이걸 거쳐서 민주주의가 완성되는 것이지, 하루아침에 민주주의에 도달할 수는 없다.

이 모든 과정은 성숙한 사회로 향하기 위해 지나야 하는 필수적인 길목으로, 절대 비관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분단국가인 데다 경제적 어려움마저 겪어 ‘가능한 한 빨리 혼란을 극복하자’는 염원이 있는 것이지 단숨에 평화로운 사회로 거듭나는 법은 없다.

-윤 어게인(Yoon Again)이 국민의힘을 휘두르는 지금 보수를 일으킬 새 인물이 등장할 수 있을까?

▲새로운 인물이 등장해야 하고, 빠를수록 좋다. 보수든 진보든 어느 한쪽 세력이 올바르게 서야 다른 한쪽도 따라 서게 된다. 정권을 놓고 경쟁하는 세력이니 당연한 말이다.

-2026년은 병오년, 붉은 말의 해다. 역동적이고 진취적인 해로 정치권에도 역시 많은 일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해를 맞아 국회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제23대 총선이 한참 남지 않았나. 현역인 국회의원 한 명 한 명 붙잡고 바뀌라고 애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지금 의석 그대로 다음 총선까지 가야 한다. 그래도 비관적으로 보지 말자는 이야기다. 우리는 성숙한 사회로 향하는 대가를 치르고 있다. 뼈를 깎는 대가를 줄이려 노력은 하겠지만 지금의 고통 역시 필요한 시간이다.

-현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지 말자고 하셨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희망을 품을 일이 있는지?

▲나는 앞날을 낙관적으로 보는 사람이다. 어떤 상황이든 희망을 놓지 않고 산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잠재력을 발휘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고 그런 시스템을 제도로 갖추면 나라가 빠르게 성장할 것으로 본다. 대한민국은 비슷한 어려움을 수없이 겪었지만 그럼에도 이 정도의 국가를 만들었다. 보통 능력으로는 안 되는 일이다.

또 하나 예를 들자면 지금 경제체제가 유지되고 있지 않나. 민생은 경제고, 경제는 국력의 바탕이다. 경제가 망가지면 국가가 무슨 소용인가? 반복되는 악조건 속에서도 기업은 굉장히 잘 해줬다.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와중에 부도가 나기는커녕 성장한 곳도 있다. 새삼 대단하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우리 기업과 기업인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다.

-2026년 새해를 맞아 국민에게 덕담 한마디 부탁드린다.

▲희망을 품자고 말했지만 국민도 지친 것 같다. ‘이번 국면만 지나면 좀 낫겠지’ 했더니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한때 정치권에 몸을 담았던 고위 관료로서 국민에게 미안한 마음이 아주 크다. 하지만 우리 국민은 워낙 총명하다. 혼란의 시기도 언젠가는 지난다. 그날이 오면 국가가 경제적으로 윤택해지고 정서적으로 안정될 것이다.

<hypak28@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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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여발 사법 전쟁 ‘끝까지 간다’

거여발 사법 전쟁 ‘끝까지 간다’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회 문턱을 넘은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이 사법부를 강타했다. 검찰은 1999년 특별검사제 도입 이후 권한을 조금씩 잃다가 올해 해체가 결정됐다. 검찰이 26년 전 느끼다가 현실이 된 불안을 이젠 사법부가 느낄 차례일지도 모른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범여권이 지난 24일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대법원은 지난 18일 “내란 사건만 맡는 전담재판부를 만들어 운영한다”는 취지의 예규 제정 방침을 밝혔다. 특별재판부 영장전담 법관 하지만 민주당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같은 날 논평을 통해 ‘24일 처리 방침’을 밝혔다. 이날 법안 처리는 이미 예고된 결과였다. 박 대변인은 지난 21일 오전 기자 간담회에서도 “민주당은 국회 본회의에서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을 예정대로 처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당이 원래 처리하려던 법안은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법’이었다. 이 법안이 통과됐다면, 12·3 비상계엄 관련 재판을 맡을 특별재판부가 설치되고, 영장 심사를 맡을 특별영장 전담 법관이 따로 배정됐을 것이다. 이들은 국회·판사회의·대한변호사협회가 3명씩 추천한 위원으로 구성되는 9인 규모의 추천위원회의 2배수 추천과 대법원장의 임명을 거칠 예정이었다. 아울러 상고심에선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임명했던 대법관은 모두 제척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에 대해선 각계에서 위헌 논란을 제기했다. 그러자 민주당은 지난 16일 내용을 대폭 수정했다. 명칭도 특별재판부에서 전담재판부로 바뀌었다. 전담재판부 후보추천위원회는 법무부 장관·헌법재판소 사무처장 등 외부 인사를 제외한 후 법관으로만 구성될 예정이다. 추천위원회에 들어갈 법관 중엔 각급 판사회의·전국법관대표자회의가 포함된다. 전담재판부에 소속될 법관은 추천위원회·대법관회의를 거쳐 대법원장이 임명한다. 윤석열 전 대통령 등 12·3 비상계엄 주요 연루자들은 이미 형사재판 제1심을 받고 있다. 전담재판부는 항소심부터 맡을 예정이다. 대법원은 민주당의 공세에 맞서 반격에 나섰다. 대법원은 지난 18일 대법관 행정회의를 열어 ‘국가적 중요 사건에 대한 전담재판부 설치 및 심리 절차에 관한 예규’를 제정하기로 했다. 여기엔 “형법상 내란·외환죄와 군형법상 반란죄 사건을 전담해 집중 심리하는 전담재판부를 설치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된다. 대법원이 규정하는 전담재판부는 무작위 배당을 거쳐 사건을 배당받을 재판부가 지정되는 방식이다. 전담재판부로 지정된 재판부가 원래 맡던 재판은 다른 재판부로 재배당된다. 예규엔 “해당 재판부는 이후 내란·외환과 관련 없는 새로운 사건은 맡지 않는다”는 규정이 포함됐다. 하지만 민주당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박 대변인은 “사법부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왜 이렇게 늦게 했느냐”며 “왜 그동안 국민을 불안과 혼란에 빠뜨렸느냐”고 비판했다. 이어 “국회의 입법권을 대법원의 예규 제정에 맞춰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내란 전담재판부 신설이 갖는 ‘진짜 함의’ 대법원 예규 제정…반격 혹은 타협안 제시 민주당 정청래 대표도 같은 날 최고위원회의 중 “대법원이 헐레벌떡 자체 안이라고 내놨다”며 “더 일찍 해야 하지 않았느냐. ‘조희대 사법부’답다는 생각이 든다”고 비판했다. 국내 헌정사에서 특별재판부는 단 2회만 설치됐다. 제헌헌법 부칙엔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돼있었다. 이후 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 등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를 설치했다. 반민특위엔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가 설치됐다. 특별검찰부는 검찰총장 등 9명으로 구성됐고, 특별재판부는 ▲국회의원 5명 ▲법조인 6명 ▲사회 저명 인사 5명 등 총 16명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국회가 선출했다. 두 번째 특별재판부는 1960년 4·19 혁명 이후 개정된 제4차 개정 헌법을 근거로 설치됐다. 당시 개정 헌법엔 “3·15 부정선거 및 4·19 혁명 관련자들과 관련된 형사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특별재판소와 특별검찰부를 둘 수 있다”는 취지의 부칙이 포함돼있었다. 이후 설치된 특별재판부는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 제정을 거쳐 설치됐다. 민주당조차 ‘특별재판부’를 ‘전담재판부’로 수위를 낮춰 처리했다는 이유로 내란 특별재판부에 대해 불거진 위헌 시비를 거론한다. 법원은 ‘무작위 전산 재판 배당’ 원칙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특정 재판부에 특정 재판을 배당한다”는 취지의 특별재판부에 대해선 기본적으로 위헌 시비가 불거질 가능성이 높다. 아직 헌법재판소가 관련 합헌·위헌 여부를 가린 적도 없다. 하지만 헌법 제27조는 “모든 국민은 헌법·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해 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재판 배당의 무작위성은 재판에 대한 외부의 부당한 압력·영향력으로부터 법관을 보호해 재판의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세운 원칙이다. 이는 위헌 시비가 불거진 핵심 이유였다. 그래서 과거엔 특별재판부를 설치하기 전에 개헌 과정 중 헌법 부칙에 그 근거를 규정했다. 헌법 부칙은 헌법 본문과 똑같은 효력을 가진다. 그래서 위헌 시비가 불거질 일은 없었다. 피해 가는 위헌 시비 하지만 위헌 시비를 피하려고 제시한 ‘내란 전담재판부’에 대해서도 논란이 이어졌다. 역설적으로 “기존 재판부 배당과 큰 차이가 없다”는 취지의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사법부는 이미 무작위 배당의 예외를 운용하고 있다. ▲특허법원 ▲서울행정법원 ▲지역별 가정법원 등 특정 분야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법원이 따로 설치돼있는 것도 무작위 배당의 예외다. 또 각급 법원은 이미 지식 재산·환경·의료 등 특정 전문 분야를 전담할 재판부를 분류한다. 법원장 재량에 따라, 재판장들과의 협의를 거쳐 특정 사건은 ‘적시 처리 필요 중요 사건’으로 분류해 특정 재판부에 배당해서 신속한 재판 진행을 추진한다. 기소된 사건이 이미 진행 중인 재판과 사실 관계·쟁점·피고인이 같으면, 이미 진행 중인 재판을 담당하는 재판에 배당한다. 물론 민주당이 거둘 수 있는 실익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정 대표는 민주당이 ‘특별’을 ‘전담’으로 바꿔가면서도 서둘러 개정안을 추진하는 이유를 분명히 짚었다. 그는 “조희대 대법원장의 사법부와 지귀연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의 재판부는 내란·외환 사건의 심리를 의도적으로 침대 축구하듯 질질 끌었다”며 “조 대법원장은 경고·조치를 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보다 못한 입법부가 나서기 전에 사법부가 진작 내란 전담재판부를 설치했다면, 지난 1년 동안 허송세월하는 것을 보면서 국민이 분통 터지는 상황은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대표의 주장 중 핵심 단어는 ‘조희대’와 ‘지귀연’이다. 민주당이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를 추진할 당시 민주당 전현희 최고위원은 지난 9월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지 부장판사를 지칭해 “재판의 공정성에 의구심을 갖도록 하는 인사들을 전보·징계한다면, 굳이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들기 위한 입법 조치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주장했다. 정 대표는 지난 15일 최고위원회의 도중 “조희대 사법부는 특검 수사 훼방꾼이 됐다”며 “조 대법원장이 지휘하는 대법원이 지난해 12월3일 내란에 동조한 건 아닌지 강한 의구심을 갖는다”고 지적했다. 사법행정사무를 총괄하는 조 대법원장의 권한 일부를 사실상 박탈하고, 지 부장판사를 내란 관련 재판에서 손 떼게 할 수 있다면, 민주당은 상당한 실익을 거둘 수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재판부 배당에 전국법관대표자회의를 개입시키는 것이다. 힘 실어준 진짜 이유? 전국법관대표자회의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당시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 이후인 지난 2018년 4월 “권한이 집중된 제왕적 대법원장을 견제하고, 법관의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를 갖고 설치됐다. 보수 진영 일각에선 이를 일컬어 “지나치게 민주당에 친화적”이라고 비판한다. 전국법관대표자회의 설치 직후 첫 의장으로 선출됐던 최기상 당시 서울북부지법 부장판사는 현재 민주당 의원이다. 전국법관대표자회의는 지난 9월 민주당이 주장한 의제 ‘대법관 증원론’을 포함한 상고심 제도 개선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어 “사법부는 대법관 증원안을 경청하고 자성해야 한다”는 취지로 보고서를 작성·공개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전국법관대표자회의를 일컬어 “민주당에 힘을 설어주기 위해 토론회를 개최한 게 아니냐”는 비판 목소리도 제기됐다. 대법원의 이재명 대통령에 대판 파기환송 판결에 대해서도, 정 대표는 지난 9월 전국법관대표자회의에 “조 대법원장 사퇴 권고 등 사법부에 대한 국민적 신뢰 회복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일각에선 “대법원의 예규 제정은 반격”이라고 해석한다. 그 근거로는 “내란 전담재판부를 줄곧 반대하다가 갑자기 예규 제정을 밝힌 의도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는 점을 들었다. 민주당은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 외에도 기존 사법 체계를 모두 바꿀 만한 사법개혁안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대법원의 예규 제정에 대해선 “민주당의 공세를 적절한 선에서 수용해 더 큰 공세에 대비하려는 의도”라고 보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특별재판부’가 ‘전담재판부’로 바뀌었다고 해서 다른 사법개혁안 통과 시도가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법원으로선 기존 사법 체계를 모두 바꾸려는 민주당의 시도를 보면서 검찰이 해체되는 과정을 되새길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이미 민주당이 주도하는 사법개혁안 자체가 사실상 ‘기존 법원 해체’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 조금씩 권한 잃다 해체 결정 검 종착역은 헌재 최고법원 등극? 민주당 등 범여권이 검찰을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으로 분리해 완수했던 검찰 해체에 대해선 “헌법은 검찰 조직의 존재를 전제로 검찰총장의 존재를 규정했다”면서 위헌 논란을 제기하는 반대 측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범여권은 이를 강행했다. 큰 틀에서 보면, 검찰은 ▲특별검사제도 도입 ▲검경 수사권 조정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설치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 분리 등 과정을 거쳐 해체됐다. 최초의 특별검사(이하 특검)는 지난 1999년 김태정 전 검찰총장 부인에 대한 옷 로비 의혹과 한국조폐공사 노조 파업 유도 사건에 대해 진행됐던 최병모 특검이었다. 특검이 성립됐던 배경은 “검찰이 검찰총장의 부인이 연루된 사건을 제대로 수사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인 시선이었다. 아울러 당시 국회 구도는 여소야대였다. 한나라당은 “사건을 축소·은폐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흐름을 타고 강하게 밀어붙여 특검법 제정을 주도했다. 이후 현재까지 개별 특검법은 총 16개가 통과됐고, 상설 특검은 6회 추진됐다. 검찰로서는 1999년 최병모 특검 설치가 수사권·기소권 독점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현재까지 총 22회의 특검이 성립됐다는 것은 검찰에 대한 각계의 불신을 상징하는 중요 사실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검찰을 노리는 다음 단계는 검경 수사권 조정이었다. 최초의 검경 수사권 조정은 지난 2011년 진행됐다.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사법경찰관이 검사의 수사 지휘에 이의를 제기하는 재지휘 건의 제도 신설 등의 내용이 담긴 안을 대통령령으로 제정해 의결했다. 지난 2016년엔 ▲진경준 게이트 ▲정운호 게이트 ▲김형준 전 부장검사의 스폰서 의혹 ▲최순실 게이트 등이 연이어 발생해 검찰의 신뢰도에 대한 강한 문제 제기가 이어졌다. 이는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장기간 논의된 검경 수사권 논의로 연결된다. 공수처도 설치됐다. 민주당 집권 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사건을 강하게 기억하는 지지자들의 비원을 외면하긴 어려웠던 측면도 있었다. 그렇게 검찰은 서서히 권한을 빼앗겼다. 그러다가 지난 9월에 이르러 검찰은 내년부터 중대범죄수사청과 공소청으로 갈라질 운명에 처했다. 특히 중대범죄수사청은 행정안전부로 옮겨진다. 서서히 권한을 빼앗기다가 끝내 해체를 앞둔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민주당 등 범여권은 ▲법원행정처 폐지 ▲법 왜곡죄 도입 ▲대법관 증원 ▲재판소원 도입 등 사법개혁안을 시도하고 있다. 범여권이 사법개혁안을 모두 통과시킨다면, 사법부로서는 “검찰에 이어 사법부도 한순간에 와해된다”고 인식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한순간에 와해된다 법원행정처가 없어지면 대법원장의 권한이 줄어든다. 법 왜곡죄가 도입되면, 판사의 재판도 법적 처벌 범위 안에 포함될 위험에 노출된다. 대법관이 늘어나 대법관의 권위·희소 가치가 줄어든 후 재판은 헌법소원 제기 범위 안에 포함된다. 최종 종착지는 헌법재판소가 대법원을 제친 후 최상위 사법기관으로 규정될 순간임을 배제하기 어렵다. 지난 24일은 사법부가 느낄 법한 공포가 처음 피부에 와닿은 날이었을 수도 있다. 새해엔 민주당과 사법부의 전쟁이 더욱 거칠게 진행될지도 모른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