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자기들만의 장난은 아니어야지.” 김영권의 <선감도>를 꿰뚫는 말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청춘을 빼앗긴 한 노인을 다뤘다. 군사정권에서 사회의 독초와 잡초를 뽑아낸다는 명분으로 강제로 한 노역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는 청춘을 뺏겨 늙지 못하는 ‘청춘노인’의 모습을 그려냈다.

“아, 어쩌면 좋을꼬!”
운이 기침을 한 뒤 밑으로 내려가자 달래 여사는 마치 약방의 사환이라고 만난 듯 주절거렸다.
“이전엔 한번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아픈 사람이 밤새도록 한잠도 자지 않고 앓아대니, 대체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구먼.”
어둑한 골목
영감은 예의 흰 셔츠와 잠옷바지 차림으로 벽을 향해 돌아누워 있었고, 달래 여사는 그 곁에 쭈그리고 앉아 애절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운은 어떤 도움을 줄 수도 없어서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래도 혹시 무슨 수가 없을까 하고 무작정 밖으로 나섰다. 그는 어떤 방도를 찾지 못한 채 이리저리 거리를 방황했다. 어느덧 밤이 되었다.
밤공기는 텁텁한 대로 가슴을 틔워 주는 듯도 했으므로 운은 집도 절도 잊은 방랑자처럼 한동안 터덜터덜 걸었다. 하늘엔 별 몇 개가 곧 꺼져 버릴 듯 깜박거리고 있었다.
그때 어둑한 골목 한 모퉁이에서 악을 쓰며 지껄이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와 운의 발을 멎게 했다.
“이 썅! 내가 말이야, 오늘 말이야, 뼈빠지도록 일을 해서 몇 푼 받았단 말이야! 그래서 말이야, 한잔 걸치고선 아가씨를 찾았는데 왜 속여넘기느냔 말이야. 이 썅 늙다리야! 어서 돈을 내놔!”
그러자 질린 듯 애소하는 듯한 여자의 목소리가 대꾸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속이려고 했던 건 아니니 양해해 주세요. 그리고 노시긴 노신 거니까 거렁뱅이한테 적선하신 셈치고 참아 주세요.”
“늙어빠진 것이 그래도 입은 살아가지고 사람을 자꾸 놀리는군. 이제까지는 고딴 연극으로 사내들을 눙쳐먹었겠지만 나한테까지 통할려구. 쌍년! 내 돈을 안 뱉어내고 견디는지 보자!”
그러더니 어깨에 가방을 멘 사내 하나가 작달막한 여자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골목 어귀로 나왔다.
사내도 비틀거리는 품이 제법 취한 꼴이었지만 여인네는 벗어날 힘이 없는지 허리를 꼬부린 채 질질 끌리며 신음할 뿐이었다. 한적한 길가의 가로등 아래에 서서 사내는 잠시 두리번거리며 욕설을 씨부렸다.
그 순간 검은 윗도리를 걸친 젊은 사내 하나가 골목으로부터 튀어나와 단번에 여인의 머리에 붙은 주정뱅이의 손을 떼어내고 홱 떠밀었다. 주정뱅이는 맥없이 나둥그러졌다.
“먹고 살겠다는 사람을 왜 그래? 엔간히 처먹었으면 곱게 놀고 떠날 것이지 트집은 웬 생트집이야. 아가씨 탐내지 말고 집에 가서 딸내미 코딱지나 떼줘!”
불의의 습격과 설교로 골이 오른 사내는 몸을 일으켜 상대를 노려보았으나, 상대가 어깨에 힘을 잔뜩 넣고 인상을 쓰자 곧 침을 퉤퉤 뱉곤 투덜거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여인은 손을 재게 놀려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분가루가 떨어져 내릴 듯 허옇게 화장한 얼굴이 가로등 빛 아래서 슬픈 희극배우의 가면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용운은 그 가면 밑에 달래 여사의 얼굴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인은 젊은 사내에게 고맙다고 주억거린 뒤 주정뱅이가 간 방향을 피해 발을 옮겨놓았다. 그러자 젊은 사내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인사는 하고 가셔야지…… 한 장만 떼시오.”
집도 절도 잊은 방랑자
탈출에 대한 현실적 생각
“주인 아주먼네가 석 장 가져가고 두 장 뿐인걸. 이건 급한 용처가 있어서 말요.”
젊은 사내의 눈알이 희번덕거렸다.
“알만한 양반이 쩨쩨하게 구는군. 다시 머리끄덩이를 끌리고 싶어 이러는 거요?”
그러자 여인은 분바른 얼굴에 애절한 빛을 띠고 상대방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사내의 눈은 비웃음을 보일 뿐 그 험한 표정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여인은 고개를 수그리더니 주머니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사내의 낯짝을 향해 내던졌다. 사내가 그것을 집어 휘파람을 불며 사라진 뒤, 여인은 허물어지듯 주저앉아 어깨를 떨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짙은 어둠이 그 위에 내려앉고, 야경대원의 호각이 먼데서 삑삑거렸다.
운은 컴컴한 허공으로 눈을 주었다. 별들만이 뭔가 알아들었다는 듯 깜빡이고 있었다.
다시 여름이 왔다. 폭양(曝陽)과 매미소리는 비슷해도 똑같은 여름은 아니었다.
그 즈음 원생들 사이에서 불길한 소문 하나가 떠돌았다. 탈출 전과자 등 꼴통들을 골라 악명 높은 고하도 감화원으로 보낸다는 것이었다.
용운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렇잖아도 마음 한 구석에 어두운 예감 같은 게 깃들곤 했던 터였다. 그토록 말썽을 일으켰는데도 원장이나 담당 선생으로부터 호출 한번 없는 것도 미심쩍었다.
근래엔 마치 의붓자식 대하듯 무정하고 매서운 감시의 눈초리만 받을 뿐이었다. 용운은 너무 불안하고 초조해서 밥조차 제대로 삼키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용운은 탈출에 대해 좀더 현실적으로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과거의 방법에 대해 여러 모로 반성을 했다.
첫 번째 탈출은 의타적인 면이 강했다.
그때 그 발동선을 타고 가 성공을 했더라면 물론 좋았겠지만, 실패한 이상 문제점을 따져 더 나은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한 가지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생활 속의 다른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동안의 고생을 통해 어렴풋이나마 느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의 실패 원인은 자기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공상적으로 추진한 데에 있었다.
만약 수영 실력이 갖춰졌더라면 뗏목이나 널빤지 따위에 연연하지 않고도 바다를 건너 유토피아에 가 닿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유토피아
백곰이 가르쳐 준 방법은 시도할 가망이 별로 없었다. 감시가 심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밤에 혼자 바다에 뛰어든다는 것은 쉬운 일이 결코 아니었다. 더구나 헛소문이라고는 하지만 귀신 얘기까지 흉흉하게 나도는 섬이고 보면…… 캄캄한 바다에서 어디를 어떻게 헤매다가 죽을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 때문에 용운은 간조 시간과 물을 건너는 방법을 찾기에 고심하느라 밤새 머리를 굴리곤 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