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년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우리나라가 지금은 전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선진 민주주의국가와 세계 10대 경제 강국이 됐다. 그래서 세계는 75년 동안 민주화와 경제성장이라는 기적을 만들어낸 우리나라를 우러러보고 있다.
이는 민주화와 경제 성장을 위해 목숨을 바친 희생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데 전 세계는 우리나라 민주화보다 경제성장에 더 큰 박수를 보내고 있고, 민주화운동 희생자에 대해선 많은 관심을 가지며 애도와 추모를 해왔지만, 산업 현장에서 목숨 바친 노동자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었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민주화운동 희생자보다 산업재해 희생자가 수십 배 많은 데도 산업 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적은 점을 지적해 왔다. 최근 3년간(2022~2024) 산업재해 사망자만 연간 2000명을 웃돈다고 한다. 중상자까지 합치면 연간 1만여명이 넘을 것이다.
다행히도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 하청 노동자 김용균씨가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원청의 안전 책임 강화와 안전시스템을 강화해야 한다는 사회적 목소리가 커지면서 2021년 중대재해법이 제정됐다. 이때부터 정부도, 사회도, 국민도 산업재해 희생자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갖기 시작했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국무회의를 통해 산업 현장에서 사고가 더 이상 나지 않도록 강력한 조치를 주문했는데도 포스코이앤씨 현장에서 잇따라 사망사고가 나자 “건설면허 취소, 공공입찰 금지 등 법적 가능한 모든 방안을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관련 부처들이 다각도로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법조계에선 “산업안전보건법, 건설산업기본법 등을 적용해도 중대재해를 일으킨 건설사에 대한 영업 정지, 공공입찰 제한은 가능하지만 등록 말소까지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로 면허가 취소됐던 동아건설의 등록 말소 사유는 중대재해가 아닌 부실시공이었다. 이후 등록 말소 사례는 없었다고 한다.
필자는 이 대통령이 등록 말소까지 언급했다는 건 실제 면허 취소보다 8월 임시국회에서 노란봉투법 통과에 방점을 두고 한 말이라 생각한다.
국민의힘은 중대재해법과 노란봉투법은 악법이라며 계속 반대해 왔다. 그런데 8·22 전당대회를 앞두고 최근 자주 발생하는 산업재해 희생자들에 대한 예우 차원인지 노란봉투법 반대에 소극적인 편이다. 송언석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도 ‘수정안 협조’ 제안을 하면서 한 발 물러선 느낌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란봉투법은 어차피 더불어민주당 강행으로 통과될 것이고, 그러면 당연히 우리나라 기업은 상당한 혼란을 겪을 것이다.
계약, 공정, 노무 관리에서 비용 리스크가 늘어나고 사업 지연에 따른 부작용도 따를 것이고, 장기 파업 시 인건비 증가와 사업 지연으로 인한 지체 페널티 부담도 커질 것이다. 그리고 하도급사 선정 기준을 강화하고 관리 비용 증가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니 기업도 이제는 생각을 바꿔야 한다. 현대는 비용과 목숨을 저울질하는 시대가 아니다. 노동자의 안전과 목숨이 기업의 이윤보다 더 중요한 시대가 됐다.
이 대통령도 “사람의 목숨을 사람의 목숨으로 여기지 않고 작업도구로 여기는 건 아닌지, 돈보다 생명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모든 사회 영역에서 다시 되새겨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산업 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희생자 덕에 이만큼 경제 강국이 됐는데, 이제 더 이상 노동자의 희생을 방치하면 안 된다. 기업도 이 대통령이 언급한 것처럼 노동자의 목숨이 기업의 이윤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필자는 민주화운동 기념행사 때마다 추모제가 열리듯이, 정부나 기업이 산업 관련 행사 때마다 추모제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산업재해 희생자를 위한 묵념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희생자 유가족에 위로금을 주는 선에서 끝나지 말고 추가로 도와주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이게 바로 생명을 중시하는 기업의 문화라 할 수 있다.
1980년대 말 방글라데시 주재원으로 근무할 때, 당시 현지인이 죽으면 기업은 200만원만 주면 형사처벌을 면하는 걸 봤다. 그리고 현지서 영국인이 사고로 죽었는데 수천만원을 보상받는 것도 봤다. 후진국은 기업의 이윤이, 선진국은 사람의 목숨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지금 우리나라는 선진 민주주의국가고 세계 10대 경제 강국이다. 100억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자유와 목숨을 가진 국민들이 살고 있는 나라다.
우리나라가 세계로부터 인정받는 경제 강국이 된 만큼, 이제 산업재해 희생자에 대해 민주화운동 희생자와 비슷한 대우를 해주는 나라가 돼야 한다. 노란봉투법이 기업을 힘들게 한다면 다시 법을 개정하면 된다. 그러나 목숨이 돈보다 중요하다는 명제는 바꾸면 안 된다.
산업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특히 노동조합도 노란봉투법을 내세우며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지 말고, 기업의 입장도 고려해 유연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래야 우리나라가 더 큰 경제 강국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