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자기들만의 장난은 아니어야지.” 김영권의 <선감도>를 꿰뚫는 말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청춘을 빼앗긴 한 노인을 다뤘다. 군사정권에서 사회의 독초와 잡초를 뽑아낸다는 명분으로 강제로 한 노역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는 청춘을 뺏겨 늙지 못하는 ‘청춘노인’의 모습을 그려냈다.
“서울의 소년원에선 이 정도로 배를 곯진 않았어요! 삼시 세끼 곤쟁이젓, 정말 미치겠어요!”
다른 원생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옳소!” 하는 호응이 터져나왔다.
거짓 나라일
“조용히들 해! 나라에서 하는 일을 거짓이라고 우길 셈이냐? 너희들은 부랑자라는 사실을 명심하라구.”
그러자 또 다른 원생이 못 참겠다는 듯 벌떡 일어섰다.
“아까도 우리를 보고 나라 발전을 저해하는 부랑아들이라 뭘 요구할 자격도 없다고 하셨는데, 도대체 그 부랑아란 말뜻이 어떤 건지 가르쳐 주십시오.”
“몰라서 묻는 거냐? 한 마디로 일정한 주소도 직업도 없이 떠돌아 다니는 애들을 말한다.”
“그렇다면 말이죠, 저희들은 부랑아가 되고 싶어서 됐겠습니까? 대부분 이 전쟁통에 부모를 잃었거나 내버려진 애들 아닙니까? 더군다나 멀쩡히 부모가 살아 있고 소박한 가정이 있는 경우도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애들은 억지 단속에 걸려 끌려왔다고 해요. 그것만 해도 억울한데 무슨 큰 죄인이나 되는 것처럼 취급한다는 건 이해가 안 됩니다!”
주임 선생은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
“하긴 북쪽에서 쳐들어 온 6.25 전쟁이 없었더라면 너희들은 고아 신세가 되어 떠돌다가 여기 들어와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란 걸 알아야 해. 6.25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단련이 된 것이다. 그때 만일 미국의 도움이 없었으면 우리는 소련이나 중공의 후원을 받은 북한에게 흡수되고 말았을 것이다.”
주임 선생은 헛기침을 한번 했다.
“물론 나라의 법이 너희들 개개인의 사정을 일일이 참작하지 못한다는 건 유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멀쩡한 몸으로 떼지어 다니며 문전걸식이나 패싸움이나 도둑질을 하는 건 분명 국가 차원의 범죄야. 때문에 혁명 정부는 너희들에게 갱생의 기회도 줄 겸 건설적인 나라를 만들기 위해 일정기간 보호한다는 것이다.”
그러자 갑자기 심상찮은 소란이 인다 싶더니 곧 폭탄 같은 항변이 사방에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집어쳐라! 찢어진 대가리에 소금을 뿌리는 게 보호하는 거야?”
“우리 집, 부모 형제 곁으로 돌려보내 다오!”
“갱생과 자립의 기회도 몸이 건강해야 생기는 거야!”
“여기서 죽어간 귀한 목숨 살려내라!”
한번 일기 시작한 불길은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걷잡을 수 없는 아우성으로 변했다. 앉아 있던 원생들은 여기저기 일어섰다. 분위기가 긴박하게 변하고 있었다.
“그 위대한 혁명정부에 연락에서 감사 한번 받아봅시다!”
이런 요구도 들고 나왔다.
그러나 주임선생은 털끝만큼도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눈알에 힘을 주고 반란자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결정 여하에 따라 공권력과 직결된다는, 따라서 반란자들에게 엄청난 화가 초래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주지시키려는 듯한 자세였다.
노랑머리 사내가 목청을 돋워 말했다.
나라의 법이 개인 사정 참작 못해
“혁명정부에 연락해 감사 받아보자”
“요점을 정리해 주십시오! 갱생과 자립을 위해 그러는 것이니 우리는 주면 주는 대로 먹고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아라 이 말씀이십니까?”
“건방지다. 지금 누구 앞에서 공갈치냐?”
“우린 그저 확답이 듣고 싶을 뿐입니다.”
“흠, 앞으로 너희의 태도를 보아 체벌 문제는 좀 숙의해 보겠다. 그러나 아까도 말했듯이 식사 문제는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야. 워낙 많은 인원이기도 하지만, 모든 예산은 위에서 결정돼 내려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식사에 관해 전혀 개선해 볼 수 없다는 말입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끝내 원생들은 감정을 폭발시키고야 말았다.
“정부의 감사반을 불러라!”
“그럴 거 없이 우리 모두 이 지옥 같은 데를 빠져나가자!”
마구 악을 쓰던 원생 몇 명이 갑자기 쌓아올린 식기더미로 달려들어 냅다 걷어차 버렸다.
위태롭게 놓였던 윗부분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자 흥분한 수백 명이 달려들어 그것들을 사방으로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관사에 쳐들어가 선생들도 이렇게 먹고 사나 확인해 보자!”
“야 이 저승사자 같은 놈들아, 우릴 지옥에서 내보내라!”
당황한 선생들이 질려서 허둥대는 가운데 수많은 식기들이 내용물을 흩뿌리며 허공에 난무했고 온갖 욕설이 메아리쳤다.
원장이 부원장과 함께 나타난 건 그때였다.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달려온 원장은 주임 선생의 귀엣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앞으로 나섰다.
“아, 조용 조용히 해! 모두 앉아서 얘기하자구!”
그러나 격분한 원생들의 쿠데타는 누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참다 못한 원장이 버럭 소리쳤다.
“이 자식들이 왜 이리 말을 안 들어. 모두 앉으라니까!”
원장은 허리춤에 찬 권총집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충혈된 눈은 불을 뿜고 있었다.
원장의 일갈에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 누구 한 사람 일어나서 얘기해 봐!”
원장과 대화
소란이 좀 잦아들자 원장이 따지듯 물었다. 노랑머리가 다시 나섰다.
“다름이 아니라, 저희들의 하루 급식 정량이 얼마인지 알고 싶습니다.”
“흐흠! 그러니까 밥이 좀 적다 이거야?”
“네. 그리고 허구헌날 꽁보리밥 아니면 강냉이밥에 반찬은 혓바닥이 질려 버릴 정도로 짜디짠 곤쟁이젓만 계속 나옵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