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깊이 잠든 한국을 깨우다’ 노벨문학상 한강

[일요시사 취재1팀] 스웨덴 한림원이 올해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발표한 순간 한국문학 앞에 놓여있던 벽이 허물어졌다. 노벨문학상은 외국 작가의 전유물이라고 지레짐작했던 국민을 놀라게 한 기분 좋은 충격이기도 했다. ‘아시아 여성 최초’라는 타이틀과 함께 벼락처럼 찾아온 소식이 ‘깊이 잠들어 있던 한국’을 깨웠다.

지난 10일 오후 8시경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속보로 쏟아졌다. 특정 작가의 집 앞에 취재진이 대기하고 있는 모습도, 수상을 기대하며 작가의 이력을 보도하는 기사도 없었다. 마츠 말름 한림원 사무총장이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호명하는 순간 나온 ‘Han Kang’이라는 단어가 한국은 물론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맨부커상
세계적 명성

한림원은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는 표현으로 한강의 작품세계를 언급했다. 이어 “한강은 자신의 작품서 역사적 트라우마와 보이지 않는 지배에 정면으로 맞서며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다”면서 “육체와 영혼, 산 자와 죽은 자 간의 연결에 대해 독특한 인식을 지니며 시적이고 실험적인 문체로 현대 산문의 혁신가가 됐다”고 선정 배경을 밝혔다. 

노벨위원회는 세계 각국 전문가의 자문을 거쳐 후보를 좁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5명가량의 최종 후보 가운데 그해 수상자를 선정하는 식이며, 후보는 공개되지 않는다. 매년 해외 도박사이트서 수상자를 점치지만 번번이 틀리곤 한다. 심지어 수상자조차 발표 10여분 전에야 소식을 알 수 있는 정도다.

실제 한강은 한림원 발표 전까지 유력 후보로 거론되지 않았다. 미국 유력 언론 <뉴욕타임스>서도 한강의 수상을 ‘놀라운 일(Surprise)’라고 보도했다.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깜짝’ 수상으로 비쳐질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한림원이 한강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한 이유와 그의 작품을 논평한 기자회견을 보면 30여년 동안 작가가 우직하게 그려온 작품세계가 보인다.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으로 한강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준 작품 <채식주의자>부터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등의 작품에 드러나는 인류 보편적 가치가 노벨위원회가 추구하는 그것과 맞아떨어졌다는 분석이다. 특히 ‘민간인 학살’ 등 한국서 일어난 폭력적인 역사를 소설에 담아내면서 그 안에 인간의 본성을 녹였다는 평이 주를 이룬다. 

인간의 폭력성이 만들어내는 비극, 이타심이 주는 위로. 한강이 30년의 문학 인생 동안 천착한 주제다.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그린 <소년이 온다>와 제주 4‧3 사건을 담은 <작별하지 않는다>는 한국현대사의 비극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낸 한강 문학의 ‘정수’로 평가받는다.

실제로 한림원은 한강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할 때 두 작품을 비중 있게 다뤘다.

<소년이 온다>는 <채식주의자>와 함께 한강의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지난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을 지키다 계엄군 총에 사망한 열여섯 살 소년 동호와 그 주변 인물을 그린 작품이다. 당시 상황을 직·간접적으로 겪은 인물의 면면을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현대사 비극을 인류 보편적 가치로

한강은 2014년 <소년이 온다> 출간 당시 소설을 집필하는 내내 ‘압도적인 고통’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열두세 살 무렵 아버지가 건넨 사진첩을 보고 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을 간접적으로 목격한 것이 계기가 됐다. 계엄군의 총에 맞아 참혹하게 변한 시신, 그리고 그들을 위해 헌혈을 하려 병원 앞에 모인 시민들.

한강은 그 모습을 양립할 수 없는 숙제처럼 느꼈다고 했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폭력과 또 인간이 인간을 위해 망설임 없이 나서는 광경은 한강에게 수수께끼로 남았다. ‘이 소설을 통과하지 않고는 어디로도 갈 수 없다고 느꼈다’는 그는 <소년이 온다>에 그 질문에 대해 고민한 흔적을 담았다. 

한림원은 “한강은 자신이 자란 도시 광주서 1980년에 벌어진 역사적 사건을 정치적 배경으로 삼는다”며 “소설은 희생자에게 목소리를 부여하고 잔혹한 현실을 생생히 그려낸 ‘증인 문학’이라는 장르에 접근해간다”고 <소년이 온다>에 대해 논평했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사건을 소재로 경하, 인선, 인선의 어머니인 정심 등 세 여자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경하가 인선이 기르던 앵무새의 죽음과 맞물려 환영을 보는 마지막 부분은 폭발적인 흡인력을 자랑한다. 폭설이 내리는 제주서 인선의 집에 고립된 경하가 정심의 과거사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부분은 ‘고통스러운 애도’를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2021년 한강은 간담회서 “지극한 사랑에 관한 소설”이라고 <작별하지 않는다>를 정의했다. 그러면서 “<소년이 온다>를 쓴 이후 나의 삶은 이전과 다른 것이 됐다. 이 소설을 쓰면서는 이상하게도 나 자신이 많이 회복됐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지난해 11월 프랑스 메디치 외국문학상을 수상했다. 메디치상은 페미나상, 공쿠르, 르노도상과 함께 프랑스 4대 문학상의 하나로 한국 작가 작품이 이 상을 받은 건 한강이 처음이었다. 

인간 폭력성
집요한 탐구

한림원은 “(<작별하지 않는다>는)1940년대 후반 한국 제주서 벌어진 학살 사건의 그림자를 들춘다”며 “압축적이고 정확한 이미지로 과거가 현재에 미치는 영향뿐 아니라 집단 망각에 빠진 상태를 드러내려고 끈질기게 시도한다”고 논평했다. 또 “악몽 같은 이미지, 진실을 말하려는 증언 문학 사이를 독창적으로 오간다”고 덧붙였다.

<채식주의자>는 한강의 세 번째 장편소설로 2004년 계간 <창작과비평>에 처음 소개됐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등 소설 3편을 하나로 연결한 연작 소설집이다. 영혜가 육식을 거부하면서 생기는 주변 인물과의 마찰을 다뤘다. 인간의 폭력적 본성을 집요하게 탐구한 작품이라는 평을 받는다.

한강은 <채식주의자>로 2016년 영국인 번역가 데버러 스미스와 함께 비영연방 작가의 번역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했다. 심사위원장인 영국 <인디펜던트> 문학 선임기자 보이드 턴킨은 “잊혀지지 않는 강력하고 근원적 소설”이라며 “정교하고 충격적인 이야기로 아름다움과 공포의 기묘한 조화를 보여줬다”고 논평했다. 

한강은 “<채식주의자>를 쓰는 것은 인간에 대해 내게 끊임없이 질문하는 과정이었다”며 “가능한한 그 질문 속에 오래 있으려 했다. 그것은 종종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었지만 최대한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이려 했다”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그러면서 “깊이 잠든 한국에 감사드린다”며 한국의 독자에게도 인사를 남겼다. 

맨부커상, 메디치상 등 굵직한 문학상을 휩쓸며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거듭난 한강은 이번 수상으로 ‘한국 최초’ ‘아시아 여성 최초’ 노벨문학상의 주인공이 됐다. 1970년 11월 광주서 태어난 한강은 서울 풍문여고,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3년 계간 <문학과 사회> 겨울호에 시로 등단한 그는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붉은 닻>으로 당선돼 소설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한강의 부친은 <아제아제 바라아제>의 작가 한승원, 오빠인 한동림도 등단한 소설가로 알려져 있다. 이른바 문인 집안서 자란 한강은 어린 시절부터 책과 밀접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노벨위원회와 진행한 전화 인터뷰서도 “어릴 때부터 번역서뿐 아니라 한국어로 된 책을 읽으며 자랐다”며 “나는 한국 문학과 함께 자랐다고 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출판업계
대박났다

한강은 노벨문학상 수상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진행하지 않았다. 당초 그의 작품을 출간한 출판사 문학동네, 창비, 문학과지성사는 합동 기자회견을 조율했지만 작가가 끝내 고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한강의 부친 한승원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서 “딸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이 치열해서 날마다 주검이 실려 나가는데 무슨 잔치를 하겠느냐면서 기자회견을 안 하기로 했다더라”고 밝혔다. 

대신 한강은 출판사 창비를 통해 “수상 소식을 알리는 연락을 처음 받고는 놀랐고 전화를 끊고 나자 천천히 현실감과 감동이 느껴졌다. 수상자로 선정해주신 것에 감사드린다. 하루 동안 거대한 파도처럼 따뜻한 축하의 마음들이 전해져온 것도 저를 놀라게 했다.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는 짤막한 서면 소감을 전했다. 

공식 반응 없이 두문불출하던 한강은 최근 한 시상식을 통해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지난 17일 서울 강남구 아이파크타워 포니정홀서 열린 제18회 포니정 혁신상 시상식에 참석했다. 포니정 재단은 지난달 19일 제18회 포니정 혁신상 수상자로 한강을 선정한 바 있다. 

이날 시상식서 한강은 포니정 혁신상 수상소감을 발표하기에 앞서 양해를 구한 뒤 노벨상 관련 소감을 말했다. 그는 “노벨위원회서 수상 통보를 막 받았을 때는 사실 현실감이 들지 않아서 그저 침착하게 대화를 나누려고만 했다”며 “전화를 끊고 언론 보도까지 확인하자 그때에야 현실감이 들었다”고 했다. 수상 당일 밤 조용히 자축했다고도 덧붙였다. 


그러면서 “저는 제가 쓰는 글을 통해 세상과 연결되는 사람이니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계속 써가면서 책 속에서 독자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차기작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한강은 “지금은 올봄부터 써온 소설 한 편을 완성하려고 애써보고 있다”면서 “바라건대 내년 상반기에 신작으로 만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소설을 완성하는 시점을 스스로 예측하면 늘 틀리곤 했기에 정확한 시기를 확정지어 말씀드리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뒤이어 밝힌 포니정 혁신상 수상소감에서는 “쓰고 싶은 소설을 마음속에서 굴리는 시간”을 가장 좋아하는 일로 꼽았다. 한강은 “약 한 달 뒤 저는 만 54세가 된다. 작가들의 황금기가 보통 50세에서 60세라고 가정한다면 6년이 남은 셈”이라며 “일단 앞으로 6년 동안은 지금 마음속에서 굴리고 있는 책 세 권을 쓰는 일에 몰두하고 싶다”고 밝혔다. 

독자와 주변 관계자, 지인에 대한 감사도 잊지 않았다.

기자회견은 극구 고사
포니정 시상식에 등장

한강은 “지난 30년의 시간 동안 저의 책들과 연결되어주신 소중한 문학 독자들께, 어려움 속에서 문학 출판을 이어가고 계시는 모든 출판계 종사자 여러분과 서점인들께, 그리고 동료, 선후배 작가들께 감사를 전한다. 가족과 친구들에게는 다정한 인사를 건넨다”고 말했다. 

한강은 “나의 일상이 이전과 그리 달라지지 않기를 믿고 바란다”고 했지만 국내는 ‘한강 열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들썩이고 있다. 특히 출판업계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작품을 ‘원서’로 읽으려는 독자들의 쇄도에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

여기에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 직후부터 치솟기 시작한 한강 작품의 주문량을 맞추느라 인쇄업체도 덩달아 난리가 났다. 

실제 서점가에서는 노벨문학상 수상 후 6일 만에 한강 작가의 책이 누적 100만부 넘게 팔렸다. ‘날개 돋친 듯 팔린다’는 말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교보문고·예스24·알라딘 등 시장점유율을 90% 가까이 차지하는 서점 3곳에서 각각 36만부, 43만2000부, 24만부를 판매했다.

<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 <작별하지 않는다>를 비롯해 전 작품이 고르게 팔려나가는 중이라고 한다. 

출판업계는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서 시작된 독서 열풍이 정착되길 바라고 있다. 한국 성인 가운데 절반이 1년에 책을 1권도 읽지 않는 극악의 독서율이 개선됐으면 하는 기대감도 보인다. 유통업계도 노벨문학상 특수에 기대 ‘한강 마케팅’에 올라타는 모양새다. 기획전, 낭독회, 작품해설 등 다양한 루트로 한강의 작품을 경험할 방법을 고심하는 중이다. 

정치권도 말을 얹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한강의 수상 당일 “대한민국 문학 사상 위대한 업적이자 온 국민이 기뻐할 국가적 경사”라며 “작가님께서는 우리 현대사의 아픈 상처를 위대한 문학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는 내용의 글을 SNS에 게재했다.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도 SNS에 글을 올려 “한강 작가님을 그분의 책이 아니라 오래전 EBS 오디오북 진행자로서 처음 접했었다. 조용하면서도 꾹꾹 눌러 말하는 목소리가 참 좋아서 아직도 가끔 듣는다”면서 “오늘 기분 좋게 한강 작가님이 진행하는 EBS 오디오북 파일을 들어야겠다. 이런 날도 오는군요”라고 축하를 전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굴곡진 현대사를 문학으로 치유한 노벨문학상 수상을 국민과 함께 축하한다”면서 “고단한 삶을 견디고 계실 국민들께 큰 위로가 되길 기원한다”고 페이스북에 올렸다.

한마음 
한뜻으로

한국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온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에 이어 두 번째다. 수년 전부터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예상하고 기대한 사람들은 있었지만, 그들 역시 ‘지금일 줄은 몰랐다’고 입을 모은다. 한강의 수상이 문학계에 미친 파급력은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다. 한·중·일 3국 중 한국만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없어 문학적인 면에서 ‘아시아의 변방’ 취급을 받던 일도 과거가 됐다. 한국을 넘어 세계의 한강이 된 작가가 해낸 일이다.


<jsjang@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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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머외 쿠팡’ 막가는 싸가지 행보

‘검머외 쿠팡’ 막가는 싸가지 행보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고객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쿠팡의 태도가 도마 위에 올랐다. 현재까지 대응만 봐서는 국민은 물론, 정부와도 전면전을 벌일 기세다. 새어나간 정보의 범위와 규모가 ‘역대급’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최악의 사태임에도 불구하고 쿠팡의 고개는 꺾일 줄 모르고 있다. 일각에서는 ‘뭘 믿고 저러나’ 소리가 나오는 중이다. 쿠팡의 고객 개인정보 유출 사건, 이른바 쿠팡 사태가 점입가경이다. 사태가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수습은커녕 국민의 화만 돋우고 있다. 쿠팡의 대응 태도가 미지근한 수준을 넘어 뻔뻔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 김범석 의장은 모습을 비추지 않고 보상안은 꼼수로 가득하다. 국민을 조롱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한 달 만에 고개 숙여 지난해 11월 말 3370만명에 이르는 쿠팡 고객의 개인정보가 ‘탈탈’ 털렸다. 앞서 쿠팡은 4500여건의 고객 정보가 유출됐다고 정부 당국에 신고했지만 2주 만에 그 수치는 7500배까지 늘어났다. 전 국민의 65% 수준이며 지난해 4월 SKT 개인정보 유출 사태 범위(2300만명)를 훌쩍 넘는 사태였다. 쿠팡은 이커머스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갖고 있다. 대형마트 등이 규제에 막혀 뒷걸음질 칠 때 쿠팡은 로켓배송으로 시장을 싹쓸이했다. 전날 저녁에 주문해도 새벽이면 물건이 문 앞에 와 있는 총알 배송에 소비자는 쿠팡으로 몰렸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비판을 받던 물류센터는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이번 사태는 아이러니하게도 쿠팡이 국민의 실생활에 얼마나 스며들어있는지를 바로 보여줬다. 쿠팡 사태가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글로벌 투자은행 JP모건은 “쿠팡이 경쟁자가 없는 시장 지위를 누리고 있고 한국 고객이 데이터 유출에 덜 민감해 보인다”며 “잠재적 고객의 이탈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놨다. 그래서일까? 쿠팡은 역대 최악의 정보 유출 사태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도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대통령이 언급하고 정부 차원의 TF가 꾸려졌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힘겨루기’를 하는 태도를 보이는 중이다. 최근에는 정부의 반박에도 자체 조사 결과를 고집하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보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쿠팡은 지난달 25일 ‘정보 유출자는 3300만개 계정에 접근했으나 실제 저장한 정보는 3000여개에 불과하며 제3자 유출 정황은 없는 등 피해가 미미하다’는 내용의 자체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면서 “(유출자는)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언론 보도를 접한 이후 저장했던 정보를 모두 삭제하고 범죄에 사용한 노트북을 파손해 하천에 던졌다”고 주장했다. 쿠팡은 “잠수부들이 벽돌에 담긴 쿠팡 가방에 든 노트북을 하천에서 회수했고 유출자가 클라우드 계정에 등록한 일련번호와 해당 노트북의 일련번호가 일치하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어 “범행에 사용된 PC 와 노트북 등 모든 장치를 회수해 안전하게 확보했고 글로벌 보안업체들의 조사 결과도 진술 내용과 같았다”고 설명했다. 국내에서 매출 90% 나오는데 정보 유출 태도·대응 낙제점 쿠팡이 발표한 대로라면 고객 정보 유출 피해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다. 또 유출자와 접촉해 장치를 확보했으니 추가 피해는 없다. 전체적으로 사건이 축소되는 것이다. 쿠팡의 발표에 정부는 강하게 반발했다. 쿠팡의 조사 내용은 사전에 정부와 어떤 논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됐다는 설명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하 과기부)는 “정보 유출 종류와 규모, 경위 등은 민관합동조사단이 조사 중인 사안”이라며 “쿠팡이 발표한 내용은 조사단에 의해 확인된 바 없다”고 밝혔다.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과도 “쿠팡 측이 제출한 진술서와 노트북 등 증거물을 분석 중”이라며 “사실관계를 면밀하게 확인하겠다”고 했다. 논란이 계속되자 쿠팡은 정부의 지시를 받아 조사를 진행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경찰은 사전 협의가 없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사실관계가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 쿠팡은 지난달 26일 내놓은 입장문에서 “정부의 지시에 따라 수주간 진행한 조사였다”고 선을 그었다. 같은 달 9일 정부가 쿠팡 측에 유출자와 접촉할 것을 제안했고 14일 쿠팡은 유출자를 처음 만난 뒤 해당 사실을 정부에 보고했으며 16일에는 정부 지시에 따라 유출자의 데스크톱과 하드드라이브를 정부에 제공했다는 게 쿠팡 측 주장이다. 하지만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도 “쿠팡의 입장문 형식의 보도자료에서 정부와 협력했다는 내용 중 일부 국정원으로 추정되는 부분도 사실과 다르거나 왜곡된 부분이 있다”고 반박했다. 쿠팡이 자체 조사와 관련해 정부와 사실 공방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김범석 쿠팡 의장이 사건 발생 한 달여 만에 사과했다. 그동안 박대준 전 대표가 청문회 등에서 뭇매를 맞고 있는 동안에도 김 의장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정부의 압박이 거세지자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이다. 5만원 상당 속사정은? 김 의장은 지난달 28일 “쿠팡의 창업자이자 이사회 의장으로서, 쿠팡 전체 임직원을 대표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이어 “저희의 책임으로 발생한 이번 데이터 유출로 인해 많은 분께서 자신의 개인정보가 안전하지 않다는 두려움과 불안을 느꼈고 사고 초기부터 명확하게 직접적으로 소통하지 못한 점으로 인해 큰 좌절감과 실망을 안겨 드렸다”며 “사고 직후 미흡했던 초기 대응과 소통 부족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김 의장은 한 달 만에야 입을 연 부분에 대해 “무엇보다 제 사과가 늦었다”면서 “모든 사실이 확인된 이후에 공개적으로 소통하고 사과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돌이켜보면 이는 잘못된 판단”이라고 고개를 숙였다. 비판과 질책을 겸허히 받아들인다고도 했다. 하지만 자체 조사 논란에 대해서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김 의장은 “쿠팡은 조사 초기부터 정부에 전면적으로 협력해 왔다”며 “일련의 과정에서 많은 오정보가 확산하는 상황에서도 정부의 ‘기밀 유지’ 요청을 엄격히 준수했다”고 주장했다. 김 의장의 사과는 국회 6개 상임위원회가 참여하는 대규모 연석 청문회를 이틀 앞두고 나왔다. 정부가 범부처 TF를 과기부 총리 산하로 확대하고 다각도로 압수수색과 조사를 진행하는 등 대응 수위를 높이는 상황에 압박을 느꼈을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그러나 사과와는 별개로 김 의장은 청문회에 불출석하겠다고 밝혔다. 김 의장뿐만 아니라 동생인 김유석 쿠팡 부사장, 강한승 전 쿠팡 대표 등이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하면서 쿠팡에 대한 부정적 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여기에 쿠팡이 내놓은 보상안도 도마 위에 올랐다. 쿠팡은 지난달 29일 고객 정보 유출 사태와 관련해 총 1조6850억원 규모의 보상안을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전체적으로 보면 1인당 5만원 상당이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뜯어보면 쿠팡의 ‘꼼수’가 보인다. 청문회는 나 몰라라 보상안은 ▲쿠팡 전 상품 구매 이용권 5000원 ▲쿠팡이츠 5000원 ▲쿠팡트래블 2만원 ▲명품 플랫폼 알럭스 2만원 등으로 구성됐다. 소비자들은 보상금의 상당 부분이 쿠팡트래블과 알럭스 등 평소 이용 빈도가 낮은 서비스 이용권 위주로 구성된 점을 지적했다. 실제 이번 보상안을 통해 쿠팡트래블과 알럭스를 처음 알게 됐다는 소비자도 있다. 시민단체도 쿠팡의 보상안에 반발했다. 참여연대는 “1인당 5만원 보상이라고 했지만 현금이 아닌 구매 이용권으로 사실상 강제 소비를 유도하는 방식”이라며 “보상이 아니라 매출 확대를 위한 마케팅에 불과하다”는 내용의 논평을 발표했다. 쿠팡의 행보는 사사건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국민을 조롱하고 정부를 기만하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쿠팡이 미국 시장에 상장한 기업이지만 매출 대부분을 우리나라에서 벌어들이는 상황인데도 이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에 분노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회원 탈퇴, 보상안 거부, 집단소송 참여 움직임이 거세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심지어 이재명 대통령도 쿠팡 사태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했다. 이 대통령은 쿠팡 사태가 일어나고 사흘 뒤인 지난달 2일 “쿠팡 때문에 국민의 걱정이 많다”면서 “사고 원인을 규명하고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면서 “관계부처는 해외 사례를 참고해 과징금을 강화하고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도 현실화하는 등 실질적인 실효적 대책에 나서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뒤늦은 사과·꼼수 보상안 도마 위에 이래서 정치권 인사 영입했나? 의혹 12일에도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반복되는 것에 대해 “경제 제재가 너무 약해서 규정 위반을 밥 먹듯이 한다”며 “앞으로는 규정을 위반해 국민에게 피해를 주면 엄청난 경제 제재를 당해서 ‘회사가 망한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규정을 위반하면 난리가 나야 하는 것 아니냐”며 “그런데 위반해도 태도를 보면 ‘그래서 어쩔 건데’ 이런 느낌이 든다”고 지적했다. 정부도 쿠팡에 강력하게 경고하며 전방위 대응을 예고했다. 실제로 같은 달 29일, 배경훈 부총리 겸 과기부 장관 주재로 ‘쿠팡 사태 범정부TF’ 회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과기부와 경찰청, 개인정보위원회, 금융위원회 등은 역할을 분담해 신속한 조사를 진행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배 부총리는 “쿠팡이 국내 고객 정보 3000만건 이상을 유출한 것은 명백한 국내법 위반 사항으로 정부는 쿠팡이 관련 법령을 위반한 사실이 확인될 경우, 다른 기업과 동일하게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조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상황에 따라서는 영업정지 여부도 판단할 것으로 보인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압박에도 쿠팡이 연달아 이상한 행보를 보이자 ‘믿는 구석’이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다. 그 정도로 쿠팡의 현재 대응 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일각에서는 쿠팡이 미국 기업인 것에 주목하고 있다. 미국 증시가 쿠팡의 모든 결정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라는 것이다. 실제 쿠팡이 자체 조사 결과를 발표한 다음 날 미국 뉴욕 증시에서 쿠팡의 주가는 6% 급등했다. 국내에서는 쿠팡의 ‘셀프 조사’에 분통을 터트리고 있는데 미국 시장에는 호재로 작용한 것이다. 쿠팡이 정치·국회 인사를 대거 영입한 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정치권 인사를 영입해 쿠팡 관련 각종 논란을 틀어막고 있다는 의혹이다. 해당 의혹은 ‘강력 경고’ ‘전방위적 대응’ 등의 수사를 사용하고 있지만 실제 조사는 흐지부지될 것이라는 관측이 조심스럽게 나오는 배경으로도 꼽힌다. 변죽 울리다 무사통과? 실제 최근 원내대표직에서 사퇴한 더불어민주당 김병기 의원이 국정감사를 한 달여 앞둔 시점에 박대준 전 쿠팡 대표 및 대관 총괄과 오찬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쿠팡이 일용직 퇴직금 미지급 사건에서 검찰 외압 의혹, 물류센터·배송 기사의 과로 및 산재 사망 문제가 제기된 상황이었던 만큼 적절성 논란이 불거졌다. 김 의원은 그달 16일 자신의 SNS에 “공개 일정이고 적어도 5명이 (함께) 식사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만남보다 대화의 내용이 중요한 것 아니냐? 참고로 지난해 7월16일 쿠팡 물류센터도 방문했었다”고 적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