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우리의 공통점은 맛있는 식사와 술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지난해 11월17일(현지시각)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윤석열 대통령과 정상회담 뒤 나눈 말이다. 이날 두 정상은 원만한 한일 관계를 약속했지만, 서로의 입지가 원만하지 않다. 식사와 술을 좋아하는 것 외에도 두 정상이 겪고 있는 정치적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가 겪고 있는 정치적 흐름은 비슷하다. 정확히는 선거 이후에 일어난 일이 같은 틀에서 찍어낸 붕어빵 같다. 둘의 행보가 겹치기 시작한 것은 선거를 기점으로 시작된다. 시작은 지난달 10일, 22대 총선을 치렀던 윤 대통령부터다. 4·10 총선 투표율은 67.0%를 기록하며 32년 만에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똑같은
발걸음
거대 양당인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각각 ‘심판론’을 내세우면서 지지층을 결집시켰기 때문이다. 심판론은 야당에게 힘을 실어줬고, 결국 여당은 참패했다. 지역구서 90석가량 건지는 데 그쳤고, 지역구와 비례대표를 합쳐도 4년 전과 비슷한 규모였다.
특히 민주당은 수도권 최대 승부처로 꼽혔던 중성동갑·을, 영등포갑·을, 광진갑·을, 강동갑·을, 마포을, 동작갑 등 이른바 한강벨트 격전지에 깃발을 꼽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텃밭인 호남(광주 8석, 전남 10석, 전북 10석)과 제주 3석을 모두 차지했고, 중원인 충청권서도 28석 중 21석을 확보했다.
영남·강원권을 제외한 모든 지역구서 보인 압도적 우위를 바탕으로 민주당은 지역구 의석으로만 단독 과반인 161석을 확보했다. 이는 지난 21대 총선 지역구 163석과 비슷한 규모다.
이에 반해 국민의힘 수도권 의석은 19석에 그쳤다. 서울의 경우, 전통적 강세 지역인 강남 3구를 수성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동작을을 탈환하고 마포갑과 도봉갑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뒀지만, 11석이라는 성적표에 빛이 바랬다. 인천(2석)은 지난 총선과 같았고, 경기(6석)는 오히려 1석 줄었다.
충청권서도 대전과 세종은 지난 총선에 이어 단 한 석도 가져오지 못했고, 충북도 3석으로 지난 총선과 같았다. 충남은 지난 총선보다 2석 줄어든 3석에 그쳤다. 대구, 경북의 25석을 모두 차지하고, 다른 격전지인 부산·울산·경남서 40석 중 34석을 확보하는 등 그나마 영남권을 지켜낸 것은 위안거리였다.
국민의힘 지역구는 90석으로, 지난 총선(84석)보다 다소 늘었지만, 민주당에 견주기 어렵다. 이번 총선 결과는 일본 중의원 보궐선거 결과와 흡사하다. 공통점은 둘 다 ‘정권심판’의 성질을 띤다는 점이다.
지난달 28일 일본 3개 지역서 실시된 중의원 보궐선거서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이 모두 이겼다. 집권당인 자유민주당이 재보궐선거서 1석도 확보하지 못한 것은 스가 요시히데 전 일본 총리가 내각을 이끌던 2021년 4월 이후 3년 만이다.
일, 비자금 스캔들 ‘보수 전멸’
한, 채 상병 사망사건이 ‘시작’
이로써 기시다 후미오 정권이 위기에 몰렸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도쿄 15구, 혼슈 서부 시마네 1구, 규슈 나가사키 3구 중의원 의원을 뽑는 이날 보궐선거서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 후보가 모두 승리했다. 자유민주당은 선거구 3곳 중 2곳에는 아예 후보를 내지 못했고 소선구제가 도입된 1996년 이후 자유민주당이 무패를 자랑해 ‘보수 왕국’으로 불린 시마네 1구에만 유일하게 후보를 냈으나 패배했다.
이번 선거에서는 여야 1대1 구도로 치러진 시마네 1구가 가장 큰 관심을 받았다. 자유민주당은 시마네 1구에 재무 관료 출신인 니시코리 노리마사를 공천했고 입헌민주당은 가메이 아키코 전 의원을 내세웠다. 양당은 이곳서 치열한 유세전을 벌였고 특히 다른 선거구에 후보를 내지 않은 자유민주당은 시마네 1구에 사활을 걸었다.
기시다 총리도 선거 고시 이후 두 차례 시마네현을 방문해 지지를 호소했다.
자유민주당 후보를 누른 가메이 당선인은 “보수 왕국이라고 하는 시마네현서 이번 (선거)결과는 큰 메시지가 돼 기시다 정권에 닿을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입헌민주당 후보는 불륜 파문을 겪은 베스트셀러 <오체불만족> 저자 오토타케 히로타다를 비롯해 후보 9명이 경쟁한 도쿄 15구, 야당 후보끼리 양자 대결을 펼친 나가사키 3구서도 각각 승리했다.
자유민주당이 ‘보궐선거 전패’라는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들면서, 주요 언론들의 여론조사에서 기시다 내각은 큰 타격을 받게 됐다고 현지 언론은 분석했다.
4·10 총선과 일본 중의원 보궐선거 이후 두 정상의 지지율은 바닥으로 내려갔다. 윤 대통령은 총선이 끝난 직후 지지율이 2주 전 대비(4·10 총선) 11%p 내린 27%로 나타났다. 취임 후 전국지표조사(NBS) 조사 기준 역대 최저치다.
기시다 총리도 마찬가지다. 일본 <요미우리 신문> 여론조사 결과 지지율이 25%로 지난달과 비슷한 수준으로 나왔고, <아사히> 26%, <마이니치 신문> 조사도 22%를 기록했다.
선거 후도
같은 행보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기시다 측근 기하라 세이지 간사장 대리는 “지금 정권교체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위기의식을 드러냈다. 이날 기하라 간사장 발언에 대해 <교도통신>은 “당세가 침체하는 현상에 위기감을 표명한 것”이라고 짚었다.
이는 6개월 넘게 이어진 ‘비자금 스캔들’ 사건에 발목을 잡힌 것으로 분석된다. 자유민주당 내에는 ‘파벌’로 불리는 여러 개의 정책 집단들이 존재한다. 기시다 총리만 해도 탈퇴는 했지만 본인 이름을 딴 ‘기시다파(고치정책연구회)’ 소속으로 총리가 됐다.
파벌을 운영하려면 정치자금이 필요하고 모금을 위한 행사, 소위 파티를 연다.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입장권을 사야 한다. 파티권(입장권) 가격은 1장당 2만엔이었다. 개인이나 기업이 행사에 참석하면 이들 입장권 수익은 모두 파벌의 정치자금 수입이 되는 것이다.
파벌은 파티를 통해 수입이 생길 경우 관련 법에 따라 이를 회계장부에 적어야 한다. 문제가 된 것은 이 수입 일부를 회계장부에 적지 않고 자금을 모금한 일부 의원에게 돌려줬다는 것.
예를 들어 A 의원이 판매를 할당받은 파티권이 100장이라고 하면, 이보다 많은 150장을 판매했을 때 50장만큼의 금액을 회계장부에 기록하지 않고 해당 의원에게 돌려준 식이다. 회계장부에 누락된 금액은 사용에 따른 영수증이 필요 없기 때문에 의원들이 비자금 형태로 마음대로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가 가장 심했던 파벌이 고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속했던 ‘아베파(세이와정책연구회)’고, 총리가 소속됐던 기사다파도 포함했다. 도쿄지방검찰청 특수부가 즉각 수사에 나서 자유민주당 6개 파벌 중 최소 3곳에 문제가 있다는 의견을 냈다.
자유민주당 부패 의혹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도 비자금 문제는 일본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자유민주당은 부랴부랴 기시다 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정치쇄신본부를 만들고 파벌 해체를 포함한 다양한 대책을 내놨다. 우선 2018~2022년 5년간 정치 자금 6억7503만엔(약 61억원)을 비자금으로 만든 아베파가 결성 45년 만에 파벌 해산을 선언했다.
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가 1979년 만든 아베파는 소속 의원 98명을 보유한 자민당 내 최대 파벌이다. 기시다파(46명)와 ‘니카이파(시스이카이·38명)’ 또한 파벌 해체를 밝혔다.
결국 자유민주당이 비자금 조성 문제에 관련된 소속 의원 39명에게 탈당 권고, 공천 배제 등의 징계를 내렸다.
패배한
보수 왕국
자유민주당은 지난달 4일 당 규율위원회를 열어 정치자금규정법 위반 사건에 연루됐던 아베파‧니카이파 소속 의원 39명에 대한 징계를 결정했다. 2018년서 2022년까지 5년간 파벌 파티 수익금을 돌려받은 후 정치자금 장부에 기재하지 않은 금액이 500만엔(약 4450만원) 이상인 의원들이 징계 대상이다.
39명은 아베파·니카이파 소속 의원 전체 83명의 약 절반 정도에 달하는 수다. 기시다 총리는 지난 3월26~27일 아베파 간부 4명에게 비자금 사건에 대한 해명을 들은 뒤 “반성이 부족하다. 신뢰 회복을 위해 당의 절차를 거쳐 엄하게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처벌 수위는 당내 역할이나 금액에 따라 결정됐다. 아베파의 핵심 간부로 비자금 사건에 책임이 큰 시오노야 류, 시모무라 하쿠분, 니시무라 야스토시, 세코 히로시게 의원은 ‘제명’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탈당 권고’ 징계를 받았다.
나머지 의원들은 미기재 금액 규모에 따라 ‘당원 자격정지’ ‘선거 공천 제외’ ‘당 직무 정지’ 등의 징계를 받았다.
이 사건의 여파로 기시다 내각 지지율은 정권 퇴진 위기 수준인 10~20%대에 머물고 있다. 결국 처벌 강화로 여론을 잠재우려 시도했지만 실패한 셈이다.
반면 윤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도가 떨어진 배경은 일본의 상황보다 훨씬 복잡하다. 기시다 총리는 한 가지 사건으로 지지율이 떨어졌지만, 윤 대통령은 여러 가지 사건이 중첩돼있는 데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여당의 실책과 실언이 계속됐기 때문이다.
문제의 시작은 지난해 7월19일에 있었던 해병대 채 상병 사망 사건부터다. 여름 폭우 사태 피해를 입은 경북 예천 지역에 복구 및 지원 목적으로 제1사단 신속기동부대가 투입됐고, 작전에 투입됐던 채 상병이 “살려주세요”를 외치며 급류에 떠내려가 사망했다.
이후 수사마저 문제였다. 해병대 수사단은 수사 결과를 최종 결재권자인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 및 결재 후, 경상북도 경찰청으로 이첩했다. 당시 국방부 장관은 결재 이후 ‘경찰 이첩 보류’를 지시했지만, 국방부 법무관리관 등은 “관련자의 혐의 사실을 삭제하라”는 등의 해병대 수사단에게 지시한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기, 정상외교 후 지지율 ↑
윤, 첫 공식회담 후 지지율 ↓
이어 국방부 검찰단은 수사 서류를 경찰로부터 법적 근거 없이 회수하는 등의 행위를 했고, 수사단장인 박정훈 대령에 대해 집단항명수괴 혐의로 보직해임하고 입건하는 등 수사외압을 행사했다는 의혹도 함께 받고 있다.
쟁점은 ▲박정훈 대령에게 내린 것이 수사외압인지 ▲수사외압이라면 그 주체는 누구며 형사 처벌할 대상인 것인지’ 등이다.
게다가 윤 대통령이 채 상병 사망 사고서 수사외압을 행사했다는 의혹으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 피의자로 입건돼 출국금지 조치를 받았던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을 주호주대사로 임명했다는 점도 뇌관으로 작용했다.
또 윤 대통령은 마트서 대파 가격이 875원인 것을 보고 “합리적인 가격”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해당 마트가 윤 대통령 방문 시점에 맞춰 할인한 것이냐는 의혹과 함께 민생 현실과 동떨어진 발언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밖에도 2000명 의대 학생 증원 문제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으로 지지율이 폭락하기도 했다.
이런 시점서 한국과 일본은 모두 ‘정권 심판’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먼저 기시다 총리는 퇴진 움직임까지 나왔지만, 현재 표면적인 움직임은 없다. 오히려 자위대 역할을 키우기 위한 헌법 개정을 시도 중이지만, 낮은 지지율로 부정적인 반응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곧 반등이 있었다. 지난달 미국 국빈 방문과 일본 황금연휴 기간 프랑스, 브라질, 파라과이 순방 등, 활발한 정상외교 활동을 바탕으로 기시다 총리 지지율이 7%p 올라 29.8%를 나타냈다. 이번 달 예상되는 한중일 정상회담 성과로 지지율 반전에 힘을 쓸 거라는 예측이 나온다.
윤 대통령의 경우, 채 상병 사망사건에 윤 대통령의 관여가 확인될 경우, 바로 탄핵 사유가 될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는 <CBS 라디오>서 “윤 대통령이 특검법을 거부할 것이라고 본다. 윤 대통령의 심복이라고 하는 이시원 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관의 사건 관여가 나왔지 않느냐? 이 말은 뭐냐면 (사건이)대통령 자신의 일로 직결된다는 걸 대통령 자신이 알고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금은
갈림길
조 대표는 “이런 것과 관련해 윤 대통령의 관여가 확인되면 이건 바로 탄핵 사유가 된다. 윤 대통령은 이걸 너무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채 상병 특검법을 막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 같은 악재 속에 윤 대통령의 지지도는 1.6%p 감소한 26.7%을 기록했다(지난 8일 기준). 낮은 지지율을 의식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와의 첫 공식 회담을 진행했지만, 이렇다 할 긍정적인 지지율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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