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연재> 선감도 ①군사정권이 청소한 동심

  • 김영권 작가
  • 등록 2024.05.06 11:28:25
  • 호수 14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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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자기들만의 장난은 아니어야지.” 김영권의 <선감도>를 꿰뚫는 말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청춘을 빼앗긴 한 노인을 다뤘다. 군사정권에서 사회의 독초와 잡초를 뽑아낸다는 명분으로 강제로 한 노역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는 청춘을 뺏겨 늙지 못하는 ‘청춘노인’의 모습을 그려냈다.

세상의 억울한 사람들이여, 죽음을 꿈꾸되 자살은 잠시 후에 하라. 그대 마음속 깊이 천국이 있나니… <어느 생명의 메아리>. 볕이 따스한 마당 앞의 콘크리트 축담 위에 앉아 자칭 ‘청춘노인’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간혹 불어오는 꽃샘바람이 허연 머리카락을 흩날린다.

무서운 외섬 

“흠, 대통령이 도둑맞았다고 온 나라가 난리법석인데… 도둑질? 대체 누가 무엇을 도둑맞은 걸까? 이를테면…… 한쪽은 대한민국의 대통령 자리를…… 협잡질과 사이버 댓글 부정선거로 강탈당했다는 비분강개이고…… 다른 한쪽은 이미 당선된 여대통령의 권위와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채…… 종북 빨갱이 세력에 의해 훼손당하고 침탈당할 수도 있다는 울분이 아니야? 흐음, 내가 잘못 봤다면 미안…”

그는 숨이 가쁜지 가르릉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동안 헐떡거렸다.

“그녀의 아버지 시절에도 그랬었지. 시대는 변했다는데 어찌 그리 똑같은지… 내가 그 무서운 섬에서 고생할 때 그녀는 아마 예쁜 소녀였겠지. 흠, 이건 늙은이의 한갓 로맨티시즘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일단 당선이 된 상태니 기회는 한번 줘 봐야지 않을까? 설령 선거공약이 헛약속이 되더라도, 나 같은 사람은 노인연금 따윈 애초부터 받을 염이 없었다구. 내가 뭘 한 게 있어야지. 어린 거렁뱅이 시절부터 나 혼자 살아오기도 벅찼는걸.”


노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칭 ‘청춘노인’을 만난 건 지난 초겨울이었다. 지역 봉사단체가 진행한 독거노인 돕기 활동에 취재작가로 참여하게 된 인연이었다. 잃어버린 청춘이 아까워서, 몸은 늙었으되 마음만큼은 늙을 수가 없다고 중얼거렸다.

그는 처음엔 나를 무슨 스파이쯤으로 생각했는지 사적인 얘기를 가능하면 감추었다. 그리고 진갈색 안경을 쓴 눈으로 나를 살피며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그 후 가끔 술병을 사 들고 방문하여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는 사이에 차츰 그의 마음이 열려 오래 묵은 깊은 아픔을 전해 듣게 되었다.

“암튼 정치가 자기들만의 장난은 아니어야지. 그래, 그렇구말구. 세상엔 식물 같은 맘으로 동물의 상처를 앓고 지내는 국민들도 있으니… 그들에 대해서도 생각을 좀 해주었으면 좋겠어. 헛되이 빼앗겨 버린 청춘이 아깝잖게…”

그는 빈약한 머리에서 백발 한 올을 뽑아 지그시 바라보다가 쓴웃음을 흘렸다. 

바다는 푸르스름한 하늘 아래 잔잔히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해면은 끊임없이 파도를 일으키며 꿈틀거렸다. 마치 잠시라도 움직임을 멈추면 안 되는 천형(天刑)이라도 받은 거대한 생물처럼.


수평선을 향해 펼쳐진 드넓은 바다는 봄 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반짝였다. 물이랑 사이로 무수한 금빛 뱀들이 저마다 재주를 부리며 뛰노는 것만 같았다. 간혹 배고픈 갈매기가 수면을 향해 쏜살같이 내리꽂혔다가 헛물을 켜곤 힘겹게 날갯짓하며 날아올랐다.

“사회 독초·잡초 뽑는다”
전국 부랑아들 일제 단속

저 멀리 바다와 하늘이 맞닿으려다 멀어져 가는 곳, 그 한 어름에서는 신기루인 양 짙푸른 바다의 화원이 아른거렸고, 거기서는 육지에서 필 수 없는 갖가지 기이한 꽃들이 아슴푸레 피어나는 듯싶기도 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면 그건 환상일 뿐이었다. 

마산포(瑪山浦)라는 조그마한 포구의 선착장에는 50톤급 배 한 척이 시동을 건 채 정박해 있었다. 옆구리에 ‘행운호’라고 붉은 페인트로 적혀 있는 낡은 운반선이었다.

갑판 쪽의 목재가 군데군데 썩어 들어가고, 뱃머리와 옆구리에 칠한 페인트도 벗겨져 누르칙칙한 녹이 잔뜩 슬어 있었다. 마치 폐선처럼 보여서 과연 망망대해를 제대로 항해할 수가 있을지 의심쩍을 정도였다.

잠시 후에 트럭 한 대가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도착했다. 카키색 장막이 쳐진 트럭 옆구리엔 ‘전국 부랑아 일제단속’이란 붉은 고딕체 글자가 찍힌 현수막이 붙어 바닷바람에 펄럭거렸다. 장막이 걷히자 꾀죄죄한 몰골의 인간 군상이 몸을 일으켜 튀어나왔다. 

겨울에 껴입었던 두꺼운 누더기 옷을 아직도 그대로 입고 있는 놈, 어디서 뺏겨 버렸는지 구멍이 숭숭 난 더러운 런닝구 하나만 달랑 걸친 놈 등 각양각색이었다.

“빨리빨리 움직여!”

표지가 검은 장부를 든 도청 직원이 소리쳤다. 그 양옆에는 카빈총을 든 경찰 두 명이 서서 추저분한 무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줄지어 선 부랑아들은 검은 장부를 든 사내의 지시에 의해 한 사람씩 차례차례 운반선으로 올라탔다. 조금만 굼뜨게 움직이면 경찰은 총구로 쿡쿡 찌르면서 쌍욕을 내질렀다. 

“개똥보다 못한 쓰레기 자식아! 시간이 아깝단 말야!”

쓰레기로 지목된 인간은 말없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자칫 잘못하다간 총알 세례는 아니라고 해도 개머리판이나 구둣발로 얻어맞기 십상이었다.


그곳 바다에까지 오기 전에 들렀던 경찰서나 도청에서도 그들은 실제로 인간 이하의 쓰레기로 취급받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인간 세계로부터 청소된 오물 같은 존재였다.

검은 장부

그들은 대부분 서울과 경기도 일대의 거리에서 일제단속에 걸려 끌려온 ‘부랑아’라는 이름의 청소년들이었다. 집도 부모도 없이 부평초처럼 떠돌며 살아가던 존재였다.

1961년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사정부는 사회의 독초와 잡초를 뽑아낸다는 명분 아래 부랑자와 노숙자들을 마구 잡아들였다.

그 당시는 일부 부유층은 물론 호의호식을 하며 살았지만 대부분의 서민들은 허리띠를 졸라맨 채 매일 허덕거렸다.

하층민들은 사회의 온갖 힘겨운 일과 더러운 일을 하면서 겨우 살아갔고 그들의 자식들은 집을 나와 떠돌기가 일쑤였다. 보릿고개 무렵엔 눈물을 머금은 채 자식을 팔기도 하고 내다 버리기도 했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김영권 작가는?]

경남 진주서 태어나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서 소설을 공부했다.

<농민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소>가 당선되고 <작가와 비평>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인간 낙엽> 3부작(선감도, 어린 북파공작원, 몽키하우스)과 <회색 구슬 속의 산 18번지 왕국: 형제복지원> <보리울의 달> <동상의 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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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