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기업문화는 10년 전만 해도 꽤 안정적이었다. 공채로 입사해 대리, 과장, 부장으로 승진하고, 능력이 인정되면 임원을 거쳐 대표이사까지 되는 틀에서 형성된 문화였다.
그래서 기업마다 오랜 기간 동안 전사적으로 쌓아온 독특하고 전통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기업뿐만 아니라 정치도 한 정당서 초선, 재선을 거쳐 다선 의원이 되고 나중엔 국회의장이나 대통령까지 되는 안정적인 문화였다.
그런데 올해 대기업의 대표이사 선임과 정당의 인재 영입의 면면을 보니, 기업은 글로벌을 내세우며 한 번도 근무한 적이 없는 외부 인사를 대거 영입했고, 정당은 총선 승리를 구실로 정치와 전혀 무관한 비정치인을 영입했다.
이는 우리나라 기업과 정치가 목표를 추구하고 있지만,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며칠 전 만난 대기업 팀장은 “우리는 타 기업에 비해 공채 순혈주의가 강해 내부 승진만 고집해왔던 문화인데, IPO(기업공개) 추진과 글로벌 역량 강화를 위해 대표이사를 외부서 영입한다는 소문이 나자, 임원과 간부급 직원들이 흔들리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도 대표이사를 목표로 열심히 일해 왔는데 이제 포기해야겠다”고 귀띔하기도 했다.
지난주 만났던 중견기업 부장도 “전 직원들이 똘똘 뭉쳐 회사를 키워놓으면, 사장은 회사를 상장시킨다는 명분으로 외부 인사를 본부장급 임원으로 영입하지만, 그들이 자기 사람을 데려와 회사를 다 망쳐놓고 나간다“고 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 기업의 공채 순혈주의 인사시스템이 10년 전부터 무너지더니 이제 외부 혼혈주의가 극에 달한 느낌이다.
기업의 일은 대표이사나 임원이 아닌, 직원이 한다. 대표이사나 임원은 기업이 추구하는 방향을 잡고, 직원들이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주면 된다.
대기업의 경우 기업의 방향도 지주회사서 결정하니 대표이사는 공채로 입사해 수십년 동안 근무하면서 기업문화를 잘 아는 자가 적격이다.
그런데도 외부서 데려온다는 건 그만큼 기업이 불안하다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대표이사가 내부 승진으로 발탁되면 기업이 흔들릴 이유가 없다.
그러나 외부서 영입되면 당장 새 대표이사에 줄을 서기 위한 자들이 생기기 마련이고, 새 대표이사가 조직이나 업무 프로세스를 바꾸기라도 하면 새 체제가 자리 잡을 때까지 기업은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한다.
더 문제는 새 대표이사가 임원이나 직원으로부터 왕따 당하면 엄청난 손실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물론 기업이 대내외 경영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외부 전문가를 영입하는 방법이 틀렸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부분의 기업이 이미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상황서 굳이 외부서 데려올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만약 외부 인사를 영입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자문위원이나 고문으로 데려오면 된다. 우리나라가 세계경제를 주름잡기 위해 구글 회장이나 해외 경제전문가를 장관으로 영입할 수 없듯이 기업도 외부 인사 영입을 조심해야 한다.
최근 우리나라 정치도 정치와 전혀 상관없는 검찰총장을 영입해 대통령으로 세웠고, 정치와 각을 세워왔던 장관을 비대위원장으로 세우고 총선을 맡기고 있다.
국민의힘 얘기다.
군사정권 이후 최소한 한 정당서 몇 년이라도 몸담아 온 정치인 중 대통령이 나왔다는 점을 생각할 때 안정적이지 못한 국민의힘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더불어민주당은 현재까지도 민주당의 적을 가진 인사가 대선후보가 됐고, 현재도 총선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그래서 국민의힘보다 정치문화가 안정적인 편이다.
다만 양대 정당이 똑같이 총선 승리를 위해 정치 경력과 상관없이 당선 가능성이 높은 자만 영입하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한 지역서 4년 동안 총선을 준비해온 정치인을 외면하고 외부 인사를 영입한다는 자체가 불안한 정당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과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 중 뭐가 어울리는 정치 현실인지 모르겠지만, 유권자를 혼란스럽게 하는 건 사실이다.
경선을 하면 되는 데 정당 대표가 ‘전략공천’이라는 미명하에 자기 입맛에 맞는 외부 인사를 데려다 놓는 게 문제다.
기업도 대표이사를 선임할 때 최소한 내부 승진 대상자와 외부 영입 인사를 투표로 정하면 잡음이 없을 텐데 지주사서 회장이 마음대로 정한다는 게 문제다.
당연히 여러 검증 시스템을 통해 정하겠지만, 그래도 대표이사는 회장의 대표이사가 아니라 전 직원의 대표이사이기에 전 직원의 의견이 반영돼야 한다는 의미다.
필자는 한 기업의 수장이 되려면 최소한 3년의 근무 경력은 있어야 하고, 한 정당의 총선을 위한 인재 영입 대상도 2∼3년 정도의 정당 활동을 했던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기업의 수장이 직원들을 잘 통솔할 수 있고, 정당의 영입 인재가 총선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문화나 정치문화는 회장이나 정당 대표가 마음대로 만들고 깨부수는 문화가 아닌, 전 직원이나 전 정당인이 다 함께 힘을 모아 오랜 기간 동안 쌓아온 문화다.
대표이사 승진을 눈앞에 두고 외부 인사에 의해 밀린 공채 출신 임원과 4년 동안 총선을 준비해왔지만 전략공천에 밀릴 위기에 놓여 있는 예비후보자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다.
기업이나 정치가 안정적이지 못한 국면을 극복하기 위해 외부 인사를 영입하다가 더 큰 화를 당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10년 전부터 순혈주의가 깨지고 혼혈주의가 등장하면서 생긴 손익이 얼마나 되는지 이제라도 따져봐야 한다.
※본 칼럼은 <일요시사>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