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울의 봄> 속 배경에는 ‘하나회’라는 조직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군내 최대 사조직이 될 수 있었을까요?
하나회의 시초는 지방 출신 장교들의 친목 모임이었는데요.
1951년 전두환, 노태우, 박병하, 김복동, 최성택 등 다섯명을 주축으로 조직한 ‘오인회’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멤버들은 각자 자신의 특성에 맞는 별명을 지었는데, 싸움을 잘하고 용맹하다는 용성 전두환, 주어진 임무를 칼같이 처리해 관성 노태우, 이들 중 임관 성적이 가장 좋을 정도로 머리가 뛰어난 려성 김복동,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해 혜성 최성택, 호탕한 성격에 남자다운 웅성 백운택으로 서로를 칭했습니다.
전두환 = 용성(勇星) 勇(날랠 용)
노태우 = 관성(冠星) 冠(갓 관)
김복동 = 려성(黎星) 黎(검을 려, 검을 여)
최성택 = 혜성(譿星) 譿(슬기로울 혜)
백운택 = 웅성(雄星) 雄(수컷 웅)
이들은 점차 인원을 늘려가고 있었는데, 결정적으로 세력이 커진 계기는 당시 서울대 ROTC 교관으로 있던 전두환이 5·16 군사정변을 지지하는 시위를 벌이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고 이후 대통령을 등에 업고 세력을 불려 나갔습니다.
당시 ‘하나회’는 가입만 하면 미래가 보장될 정도로 거대한 조직이었는데요.
때문에 가입을 위해선 철저한 심사와 서약식을 통과 해야만 멤버가 될 수 있었습니다.
또 자신들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배신자를 처단하는 조항도 있었는데요.
이는 마치 마피아들이나 하는 보복의 성질을 띠고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탈퇴를 막고 세를 불려 나가니 나중에는 300명이 넘는 거대 조직으로 성장했습니다.
‘하나회’가 가진 또 다른 특징으로는 군은 원래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데 그보다도 ‘하나회’의 명령을 우선시하는 그들만의 명령체계를 강조했습니다.
주요 요직 대부분을 하나회 출신으로 채우며 승진심사 때 선후배끼리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며 군 내부를 장악해 하나의 거대 카르텔을 만들었습니다.
하나회의 위기, 그리고 기회
하지만 막강한 권력의 가진 하나회에도 위험은 있었는데요.
1963년 7월, 전두환은 자신들의 앞길에 방해가 되는 인물 40명과 박정희정권의 2인자 김종필을 숙청하려다 실패하는 바람에 위기에 놓였는데요.
하지만 당시 하나회 멤버이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전속부관 손영길에 의해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피살당하고 합동수사본부가 꾸려지는데, 이때 수사본부장으로 전두환이 임명되면서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됩니다.
그리고 전두환과 하나회 멤버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12·12사태를 일으킵니다.
하나회의 몰락
당시 전두환은 자신은 장기 집권한 이승만, 박정희와는 다른 차별화된 대통령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7년 단임제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차기 대통령으로 노태우를 세워 상왕으로 군림하려는 속셈이 숨겨져 있었는데요.
그러나 대통령이 된 노태우는 곧바로 하나회서 전두환계 인사들을 숙청하고 권력을 차지했는데요.
그로 인해 두 파벌로 나뉜 하나회는 큰 혼란에 빠졌고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결국 1988년 4월 총선서 국민들은 야당의 손을 들어줬고 1993년 제14대 대통령으로 김영삼이 당선됐는데요.
그 사이 불안감을 느낀 노태우는 다시 전두환계 하나회 인사들을 끌어들여 군부를 장악해 김영삼을 견제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한 지 11일 만에 하나회를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업은 1년 2개월가량 걸렸고 결국 1994년 4월, 하나회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이처럼 수십년간 군부를 장악하고 권력을 휘둘러온 집단치곤 초라한 결말입니다.
그러나 하나회가 그동안 저질러온 만행들은 우리나라 역사에 큰 상처로 지금까지도 남아있습니다.
기획: 임동균
구성&편집: 임동균
일러스트: 정두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