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마약 밀매를 시작한 것은 순전히 돈 때문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해 고등학교도 중퇴했으니 돈 버는 것에 목숨을 걸었다. 교도소서 만난 마약 밀매상은 예수였고, 마약은 복음이었다. 복음을 전파한 나는 천문학적 돈을 벌었지만, 인생의 허무함에 빠진 것도 그때부터다.
“참 끊기 어려운 게 마약이다. 아주 운이 좋고 예외적인 가정 외에는 집안에 누군가 마약을 하고 있다고 보면 될 정도로 그 숫자가 많다. 아들이 마약을 한 후 처벌받고 다시 마약에 손 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람의 힘으로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부터 치료가 시작된다.”
구하기 쉽고
팔기도 쉽다
남경필 전 경기도지사의 말이다. 그의 말처럼, 한국서 마약은 특별한 이슈가 아니다. 하루에 한 번씩은 일반인이 마약을 복용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과거에는 연예인이나 특수한 사람이 마약을 복용했다고 한다면, 이제는 일반인도 마약을 구매하기 쉽다.
아무리 정부가 마약을 엄정 단속하겠다고 해도, 실상은 인터넷에 마약을 검색만 해도 마약 밀매자의 SNS와 쉽게 연결된다.
대검찰청은 지난 7월5일 <2022년 마약류 범죄백서>를 발간하고 지난해 마약사범이 2018년 1만2163명 대비 45.8%p 늘었다고 밝혔다. 이 기간 30대 이하 마약사범은 5257명서 1만988명으로 109%p 급증했다. 외국인 사범도 948명서 2573명으로 171.4%p나 늘었다.
마약류별로는 ▲마약사범 2551명(13.9%) ▲향정(신종마약 포함)사범 1만2035명(65.4%) ▲대마사범 3809명(20.7%) 등이다.
마약 압수량도 2018년 415㎏서 지난해 804.5㎏으로 93.9%p 늘었다. 2021년 필로폰 404㎏와 코카인 400㎏ 밀수 적발에 따라 압수량이 급격히 증가한 것으로 풀이된다.
압수된 주요 마약류로는 필로폰 등 향정이 616.2㎏으로 전체 마약류 압수량의 76.6%를 차지했다. 국내서 주로 유통·사용되는 필로폰 압수량은 175.4kg(21.8%)로 집계됐다. 야바 압수량은 2018년 8.5kg서 지난해 167.6kg으로 무려 1871%p 증가했다. MDMA 압수량은 2.8kg서 42.17kg으로 1406%p 폭증했다.
범죄 유형 분석 결과 다크웹 등을 이용한 인터넷 마약 유통이 확대된 것으로 파악됐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나 다크웹에 마약류 판매 광고를 게시하고 구매자가 나타나면 가상화폐로 대금을 받고 이후 ‘던지기’ 방식으로 매매하는 형태다.
가난 벗어나기 위해 위험한 선택
적발 피하려고 항문·두피에 투약
그렇다면 마약 밀매는 어떤 과정으로 시작될까? 이에 대해서는 ‘마약 밀매서 탈출한 회복자들의 실존 체험 속에 나타난 내러티브 탐구’(논문 저자 유숙경)에 자세히 기재돼있다. 이 논문엔 마약 밀매 및 투약을 10년간 한 A(54세)씨가 등장한다.
A씨는 2남1녀 중 장남으로 어린 시절 식사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했다. A씨의 아버지는 화물트럭 운전기사였지만 화물 운송 중 사고가 나서 어머니가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이후 술로 소일하던 아버지는 40대 중반에 급성 알코올중독으로 인한 간암으로 사망했다.
고등학교 시절 A씨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등록금이 매번 밀렸다. 담임교사는 친구들 앞에서 “너 때문에 회의 때마다 혼난다”고 머리를 때리고 망신을 줬다. 결국 A씨는 고등학교 2학년 1학기에 자퇴했다.
지옥 같은 고등학교를 벗어난 그는 동네 선배 소개로 룸살롱 웨이터로 취직했다. 이때 우연히 룸살롱 여종업원이 필로폰을 줬고, 이때부터 인생이 180도 바뀌었다.
A씨에게 마약은 가난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마약 밀매자가 되기 위해 처음 필로폰을 준 룸살롱 여종업원에게 부탁해 마약 공급책을 소개받았다. 마약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고, A씨는 20대 초반에 양복을 입고 그랜저를 몰고 다녔다.
A씨는 “예수가 이 땅에 온 것은 복음이라고 성경에 배웠지만, 당시 나를 구원한 것은 마약이었다. 마약 공급원을 아는 건 힘들었지만 간절하니 길이 열렸다”며 “집이 부자인 것도 아니고, 공부도 못하니 오직 마약밖에 없었다. 이 불행한 삶을 한 방에 해결하는 복음”이라고 말했다.
A씨는 고등학교를 중퇴해서 방위 보충역 판정을 받았다. 집에 거주하면서 군부대, 예비군 중대를 보조하는 일이었다. 방위가 좋은 것은 저녁에 개인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때 A씨는 마약을 하러 다녔다. 그때마다 그는 ‘너희가 아무리 대대장, 사단장이어도 군인 한 달 월급을 나는 한 번에 번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웨이터부터…
10년의 악몽
그가 마약을 판매했던 첫 번째 고객은 유흥업소 여성이었다. 필로폰을 ‘살 빼는 약’ ‘피로회복제’로 속여 팔았다. 단골 고객에게는 단속을 피하는 방법도 알려줬다. 당시 유흥업소서 마약 사용 여부를 경찰이 단속할 때는 ‘팔뚝 주사 자국’이 있는지가 가장 중요했다.
마약을 공급하면서 A씨는 본인이 원하는 술을 받기도 했다. “나는 마약을 주고 시바스리갈 12년산을 받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12년산이 최고였다”고 말했다.
A씨는 20대 초반에 마약으로 큰돈을 벌었지만,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마약을 공급하던 상선이 경찰에 검거되면서 그도 함께 체포되면서 교도소로 향해야 했다. 하지만 마약 밀매에 대한 죄책감과 후회는 없었다. A씨에게 교도소는 ‘적발되지 않고 마약을 밀매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장소였던 탓이다.
애초에 그의 꿈은 마약 최초 공급자인 상선과 직거래하는 것이었는데, 교도소에선 다양한 마약상을 만날 수 있었다.
A씨는 “마약이 나한테 내려오기까지 몇 단계를 거쳤는지 모른다. 도매상이 있고 소매상이 있는 유통구조와 똑같다”며 “서너 단계 내려오면 내게 떨어지는 돈이 별로 없다. 경찰서에서 조사받고 검사 앞에 끌려간 다음에 교도소에 갔다. 불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나는 대학교 가는 기분이었다. 어차피 약쟁이는 교도소에 다 있다고, 거기에 가야 마약 밀매 거물을 만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초범이었던 A씨는 가벼운 형벌을 받았다. 마약 판매 횟수와 액수를 줄였기 때문이다. 교도소에는 향정신성의약품관리법에 따라 필로폰, 대마초, 본드 흡입자를 다른 수감자와 분리 수감했다.
교도소서 1년을 보낸 A씨는 이 시간이 마약상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이라고 표현한다. 이때 만난 거물 마약상은 지적이고 기품있어 보이는 40대 중반의 방장이었다.
큰돈은
벌었지만…
교도소 생활에 관해 A씨는 “거물 마약상은 정말 선생님 스타일이었다. 양복을 입으면 아무도 마약 장사를 하는지 모르지만 마약에는 박사였다”며 “마약 지식뿐만 아니라 공급 조직도 꿰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징역 6년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어 “교도소와 일반 사회가 다른 점이 있다. 교도소는 죄가 크면 클수록 대우를 받는다. 징역 6개월은 금방 출소하니 대우도 못 받으니 거물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했다”며 “내가 사는 길은 저 사람을 붙잡는 것으로, 마약이 내게 복음이라면 이 사람은 예수님, 하나님이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목적은 달성했다. A씨는 출소하기 일주일 전, 마약을 안전하고 지속해서 공급해줄 수 있는 상선의 연락처를 받았다. 남은 일주일간은 마약 판매 비법을 집중적으로 교육받았다. 교도소서 A씨는 전문적인 마약 밀매상이 되는 준비를 했던 것이다.
출소 후 A씨는 마약 구매 고객을 소매자로 만들면서 자신은 도매자가 됐다. 수익은 천문학적으로 늘었고, 은행 VIP가 돼 돈을 맡기면 일반 창구가 아닌 지점장실로 안내됐다. 모든 일을 처리해 주는 직원도 생겼다.
차는 그랜저에서 벤츠 S 클래스로 바꿨다. 기사까지 둔 그는 말 그대로 ‘사장님’이 됐다. 어디를 가든 대우가 달랐다. 이런 A씨의 인생이 바뀐 것은 결혼이었다.
A씨는 대형 할인점 매장관리 직원인 연하의 아내를 만났다. A씨는 아내에게 자신을 능력 있는 부동산 분양회사 직원이라고 소개했다. 동년배들은 도저히 만질 수 없는 거금을 가질 수 있는 명분이 필요했다. 작은 사무실을 얻어 부동산 회사 간판을 달아 사장 명함을 찍기도 했다.
거짓말하면서까지 결혼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A씨는 “마약 장수, 약쟁이가 결혼을 해선 안 됐다. 내가 욕심을 부렸다. 부모한테 제대로 된 사랑을 못 받았으니까 한이 맺혔나 보다. 내가 자식한테 사랑해 주는 부모가 되고 싶었다. 이런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애가 안 생겼다”고 설명했다.
교도소서 만난 거물급 판매상
일주일간 판매 비법 전수받아
그렇다고 결혼생활이 불행했던 건 아니었다. A씨의 아내는 부모를 모시자고 했다. A씨의 부모님과 형제는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었는데, 아내가 먼저 부모님과 형제를 찾아 빨래도 해주고 반찬도 가져다줬다. 건강이 안 좋은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을 가기도 했다.
행복이 깨진 것은 A씨가 마약상이라는 것을 들킨 뒤였다. A씨는 재범으로 체포돼 중형을 받게 됐다. 그러나 A씨에게 중요한 것은 중형을 받는 것보다 아내에게 자신이 마약상이라는 사실을 감추는 것이었다.
남편이 마약 밀매로 돈을 번다는 것을 안 A씨의 아내는 교도소에 들어가자 결국 극단적 선택을 했다. 이때 A씨는 처음으로 인생의 허무와 한계를 느꼈다. 돈만 많이 벌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상황이 바뀌었다.
처음 교도소 수감은 안전하고 확실한 공급 루트를 확보하고 마약 밀매상으로 성장하고자 하는 계획이 있었다면, 두 번째 수감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계기가 됐다.
A씨는 “교도소에 수감될 때 아내한테 ‘나를 잊어라. 재산 남은 것은 네가 가져가서 새 출발해라’고 했다. 그 뒤 수감돼 아내가 죽은 소식을 들었을 때 공포를 느낀 건 아니다. 그냥 내 삶이 끔찍하고 후회스러웠다. 두 번째 교도소는 인생 학교였다. 징역을 몇 년 받아도 억울해하지 않고 회개하고 살겠다는 각오를 했다”고 소회했다.
실제로 A씨는 교도소에 있는 4년 동안 종교활동을 빠지지 않고 참가했다. 안타깝게도 이 기간 A씨의 어머니는 그가 마약으로 교도소에 들어간 사실도 모른 채 작고했다.
문제는 출소한 뒤였다. 마약 밀매 경력이 있으니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없었다. 이때 실수한 것이, 바로 다시 유흥업소를 찾았던 것이었다. A씨는 다시 마약을 복용하고 팔다가 다시 교도소에 재수감됐고, 그나마 운이 좋게 징역 4년형을 받았다.
3번째 출소 후 A씨는 마약에 손을 대지 않기 위해 마약과 관계된 사람은 물론, 장소도 모두 멀리했다. 현금 1800만원을 들고 세상과의 단절을 위해 서너 가구만 있는 강원도 산골 오지 폐촌으로 향했다.
감옥만
들락날락
그는 폐촌서도 야생 대마초의 유혹을 받았다. 대마에 빠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A씨는 바로 짐을 쌌지만,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그때 교도소 수감 시절, 호의를 베풀어줬던 목사가 떠올랐다.
A씨는 해당 목사가 은퇴 후 기도원을 운영하다가 현재 중풍과 치매 노인을 돌보는 요양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A씨는 “여기서 노인 똥 닦고 몸을 씻어주고 있으면 내가 선해지는 것 같다. 사람은 유혹에 약하다. 이기려고 하면 절대 안 된다. 도망가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 도망 온 것”이라고 소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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