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왕 꿈꾼 마약상 이야기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3.11.14 08:19:29
  • 호수 14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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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으로 들어간 교도소서 더 배웠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마약 밀매를 시작한 것은 순전히 돈 때문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해 고등학교도 중퇴했으니 돈 버는 것에 목숨을 걸었다. 교도소서 만난 마약 밀매상은 예수였고, 마약은 복음이었다. 복음을 전파한 나는 천문학적 돈을 벌었지만, 인생의 허무함에 빠진 것도 그때부터다.

“참 끊기 어려운 게 마약이다. 아주 운이 좋고 예외적인 가정 외에는 집안에 누군가 마약을 하고 있다고 보면 될 정도로 그 숫자가 많다. 아들이 마약을 한 후 처벌받고 다시 마약에 손 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람의 힘으로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부터 치료가 시작된다.”

구하기 쉽고
팔기도 쉽다

남경필 전 경기도지사의 말이다. 그의 말처럼, 한국서 마약은 특별한 이슈가 아니다. 하루에 한 번씩은 일반인이 마약을 복용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과거에는 연예인이나 특수한 사람이 마약을 복용했다고 한다면, 이제는 일반인도 마약을 구매하기 쉽다.

아무리 정부가 마약을 엄정 단속하겠다고 해도, 실상은 인터넷에 마약을 검색만 해도 마약 밀매자의 SNS와 쉽게 연결된다.

대검찰청은 지난 7월5일 <2022년 마약류 범죄백서>를 발간하고 지난해 마약사범이 2018년 1만2163명 대비 45.8%p 늘었다고 밝혔다. 이 기간 30대 이하 마약사범은 5257명서 1만988명으로 109%p 급증했다. 외국인 사범도 948명서 2573명으로 171.4%p나 늘었다.


마약류별로는 ▲마약사범 2551명(13.9%) ▲향정(신종마약 포함)사범 1만2035명(65.4%) ▲대마사범 3809명(20.7%) 등이다.

마약 압수량도 2018년 415㎏서 지난해 804.5㎏으로 93.9%p 늘었다. 2021년 필로폰 404㎏와 코카인 400㎏ 밀수 적발에 따라 압수량이 급격히 증가한 것으로 풀이된다.

압수된 주요 마약류로는 필로폰 등 향정이 616.2㎏으로 전체 마약류 압수량의 76.6%를 차지했다. 국내서 주로 유통·사용되는 필로폰 압수량은 175.4kg(21.8%)로 집계됐다. 야바 압수량은 2018년 8.5kg서 지난해 167.6kg으로 무려 1871%p 증가했다. MDMA 압수량은 2.8kg서 42.17kg으로 1406%p 폭증했다.

범죄 유형 분석 결과 다크웹 등을 이용한 인터넷 마약 유통이 확대된 것으로 파악됐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나 다크웹에 마약류 판매 광고를 게시하고 구매자가 나타나면 가상화폐로 대금을 받고 이후 ‘던지기’ 방식으로 매매하는 형태다.

가난 벗어나기 위해 위험한 선택
적발 피하려고 항문·두피에 투약

그렇다면 마약 밀매는 어떤 과정으로 시작될까? 이에 대해서는 ‘마약 밀매서 탈출한 회복자들의 실존 체험 속에 나타난 내러티브 탐구’(논문 저자 유숙경)에 자세히 기재돼있다. 이 논문엔 마약 밀매 및 투약을 10년간 한 A(54세)씨가 등장한다.

A씨는 2남1녀 중 장남으로 어린 시절 식사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했다. A씨의 아버지는 화물트럭 운전기사였지만 화물 운송 중 사고가 나서 어머니가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이후 술로 소일하던 아버지는 40대 중반에 급성 알코올중독으로 인한 간암으로 사망했다.


고등학교 시절 A씨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등록금이 매번 밀렸다. 담임교사는 친구들 앞에서 “너 때문에 회의 때마다 혼난다”고 머리를 때리고 망신을 줬다. 결국 A씨는 고등학교 2학년 1학기에 자퇴했다.

지옥 같은 고등학교를 벗어난 그는 동네 선배 소개로 룸살롱 웨이터로 취직했다. 이때 우연히 룸살롱 여종업원이 필로폰을 줬고, 이때부터 인생이 180도 바뀌었다.

A씨에게 마약은 가난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마약 밀매자가 되기 위해 처음 필로폰을 준 룸살롱 여종업원에게 부탁해 마약 공급책을 소개받았다. 마약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고, A씨는 20대 초반에 양복을 입고 그랜저를 몰고 다녔다. 

A씨는 “예수가 이 땅에 온 것은 복음이라고 성경에 배웠지만, 당시 나를 구원한 것은 마약이었다. 마약 공급원을 아는 건 힘들었지만 간절하니 길이 열렸다”며 “집이 부자인 것도 아니고, 공부도 못하니 오직 마약밖에 없었다. 이 불행한 삶을 한 방에 해결하는 복음”이라고 말했다.

A씨는 고등학교를 중퇴해서 방위 보충역 판정을 받았다. 집에 거주하면서 군부대, 예비군 중대를 보조하는 일이었다. 방위가 좋은 것은 저녁에 개인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때 A씨는 마약을 하러 다녔다. 그때마다 그는 ‘너희가 아무리 대대장, 사단장이어도 군인 한 달 월급을 나는 한 번에 번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웨이터부터…
10년의 악몽

그가 마약을 판매했던 첫 번째 고객은 유흥업소 여성이었다. 필로폰을 ‘살 빼는 약’ ‘피로회복제’로 속여 팔았다. 단골 고객에게는 단속을 피하는 방법도 알려줬다. 당시 유흥업소서 마약 사용 여부를 경찰이 단속할 때는 ‘팔뚝 주사 자국’이 있는지가 가장 중요했다.

마약을 공급하면서 A씨는 본인이 원하는 술을 받기도 했다. “나는 마약을 주고 시바스리갈 12년산을 받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12년산이 최고였다”고 말했다.

A씨는 20대 초반에 마약으로 큰돈을 벌었지만,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마약을 공급하던 상선이 경찰에 검거되면서 그도 함께 체포되면서 교도소로 향해야 했다. 하지만 마약 밀매에 대한 죄책감과 후회는 없었다. A씨에게 교도소는 ‘적발되지 않고 마약을 밀매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장소였던 탓이다.

애초에 그의 꿈은 마약 최초 공급자인 상선과 직거래하는 것이었는데, 교도소에선 다양한 마약상을 만날 수 있었다.

A씨는 “마약이 나한테 내려오기까지 몇 단계를 거쳤는지 모른다. 도매상이 있고 소매상이 있는 유통구조와 똑같다”며 “서너 단계 내려오면 내게 떨어지는 돈이 별로 없다. 경찰서에서 조사받고 검사 앞에 끌려간 다음에 교도소에 갔다. 불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나는 대학교 가는 기분이었다. 어차피 약쟁이는 교도소에 다 있다고, 거기에 가야 마약 밀매 거물을 만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초범이었던 A씨는 가벼운 형벌을 받았다. 마약 판매 횟수와 액수를 줄였기 때문이다. 교도소에는 향정신성의약품관리법에 따라 필로폰, 대마초, 본드 흡입자를 다른 수감자와 분리 수감했다. 


교도소서 1년을 보낸 A씨는 이 시간이 마약상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이라고 표현한다. 이때 만난 거물 마약상은 지적이고 기품있어 보이는 40대 중반의 방장이었다.

큰돈은
벌었지만…

교도소 생활에 관해 A씨는 “거물 마약상은 정말 선생님 스타일이었다. 양복을 입으면 아무도 마약 장사를 하는지 모르지만 마약에는 박사였다”며 “마약 지식뿐만 아니라 공급 조직도 꿰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징역 6년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어 “교도소와 일반 사회가 다른 점이 있다. 교도소는 죄가 크면 클수록 대우를 받는다. 징역 6개월은 금방 출소하니 대우도 못 받으니 거물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했다”며 “내가 사는 길은 저 사람을 붙잡는 것으로, 마약이 내게 복음이라면 이 사람은 예수님, 하나님이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목적은 달성했다. A씨는 출소하기 일주일 전, 마약을 안전하고 지속해서 공급해줄 수 있는 상선의 연락처를 받았다. 남은 일주일간은 마약 판매 비법을 집중적으로 교육받았다. 교도소서 A씨는 전문적인 마약 밀매상이 되는 준비를 했던 것이다.

출소 후 A씨는 마약 구매 고객을 소매자로 만들면서 자신은 도매자가 됐다. 수익은 천문학적으로 늘었고, 은행 VIP가 돼 돈을 맡기면 일반 창구가 아닌 지점장실로 안내됐다. 모든 일을 처리해 주는 직원도 생겼다.


차는 그랜저에서 벤츠 S 클래스로 바꿨다. 기사까지 둔 그는 말 그대로 ‘사장님’이 됐다. 어디를 가든 대우가 달랐다. 이런 A씨의 인생이 바뀐 것은 결혼이었다. 

A씨는 대형 할인점 매장관리 직원인 연하의 아내를 만났다. A씨는 아내에게 자신을 능력 있는 부동산 분양회사 직원이라고 소개했다. 동년배들은 도저히 만질 수 없는 거금을 가질 수 있는 명분이 필요했다. 작은 사무실을 얻어 부동산 회사 간판을 달아 사장 명함을 찍기도 했다. 

거짓말하면서까지 결혼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A씨는 “마약 장수, 약쟁이가 결혼을 해선 안 됐다. 내가 욕심을 부렸다. 부모한테 제대로 된 사랑을 못 받았으니까 한이 맺혔나 보다. 내가 자식한테 사랑해 주는 부모가 되고 싶었다. 이런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애가 안 생겼다”고 설명했다.

교도소서 만난 거물급 판매상
일주일간 판매 비법 전수받아

그렇다고 결혼생활이 불행했던 건 아니었다. A씨의 아내는 부모를 모시자고 했다. A씨의 부모님과 형제는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었는데, 아내가 먼저 부모님과 형제를 찾아 빨래도 해주고 반찬도 가져다줬다. 건강이 안 좋은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을 가기도 했다.

행복이 깨진 것은 A씨가 마약상이라는 것을 들킨 뒤였다. A씨는 재범으로 체포돼 중형을 받게 됐다. 그러나 A씨에게 중요한 것은 중형을 받는 것보다 아내에게 자신이 마약상이라는 사실을 감추는 것이었다.

남편이 마약 밀매로 돈을 번다는 것을 안 A씨의 아내는 교도소에 들어가자 결국 극단적 선택을 했다. 이때 A씨는 처음으로 인생의 허무와 한계를 느꼈다. 돈만 많이 벌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상황이 바뀌었다. 

처음 교도소 수감은 안전하고 확실한 공급 루트를 확보하고 마약 밀매상으로 성장하고자 하는 계획이 있었다면, 두 번째 수감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계기가 됐다.

A씨는 “교도소에 수감될 때 아내한테 ‘나를 잊어라. 재산 남은 것은 네가 가져가서 새 출발해라’고 했다. 그 뒤 수감돼 아내가 죽은 소식을 들었을 때 공포를 느낀 건 아니다. 그냥 내 삶이 끔찍하고 후회스러웠다. 두 번째 교도소는 인생 학교였다. 징역을 몇 년 받아도 억울해하지 않고 회개하고 살겠다는 각오를 했다”고 소회했다.

실제로 A씨는 교도소에 있는 4년 동안 종교활동을 빠지지 않고 참가했다. 안타깝게도 이 기간 A씨의 어머니는 그가 마약으로 교도소에 들어간 사실도 모른 채 작고했다. 

문제는 출소한 뒤였다. 마약 밀매 경력이 있으니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없었다. 이때 실수한 것이, 바로 다시 유흥업소를 찾았던 것이었다. A씨는 다시 마약을 복용하고 팔다가 다시 교도소에 재수감됐고, 그나마 운이 좋게 징역 4년형을 받았다. 

3번째 출소 후 A씨는 마약에 손을 대지 않기 위해 마약과 관계된 사람은 물론, 장소도 모두 멀리했다. 현금 1800만원을 들고 세상과의 단절을 위해 서너 가구만 있는 강원도 산골 오지 폐촌으로 향했다. 

감옥만
들락날락 

그는 폐촌서도 야생 대마초의 유혹을 받았다. 대마에 빠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A씨는 바로 짐을 쌌지만,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그때 교도소 수감 시절, 호의를 베풀어줬던 목사가 떠올랐다.

A씨는 해당 목사가 은퇴 후 기도원을 운영하다가 현재 중풍과 치매 노인을 돌보는 요양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A씨는 “여기서 노인 똥 닦고 몸을 씻어주고 있으면 내가 선해지는 것 같다. 사람은 유혹에 약하다. 이기려고 하면 절대 안 된다. 도망가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 도망 온 것”이라고 소회했다.

<alswn@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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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 정청래 인싸 플랜

‘아웃사이더’ 정청래 인싸 플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독주가 이어지고 있다. 당원의 명령인 개혁을 완수하기 위한 질주다. 당의 ‘아웃사이더’였던 그가 당을 휘어잡기까지 수많은 당원이 등을 밀어줬다. 비주류에서 주류 ‘인싸’로 자리 잡기 위한 정 대표의 다음 스텝이 주목된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행보가 매섭다. 윤석열정부에서 막힌 과제를 해치우는 동시에 공약이었던 각종 개혁을 빠르게 완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정 대표는 같은 당 박찬대 의원보다 덜 알려졌다는 평이 나오지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이하 법사위) 위원장으로서 보여준 ‘사이다’ 면모가 주목받으면서 강성 지지층의 환호를 받았다. 정청래가 걸어온 길 비주류였던 그가 당 대표가 되기까지의 여정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21대 국회 때는 이재명 대표 체제에서 수석 최고위원을 지냈고, 22대 국회에선 법사위원장으로서 국민의힘에 호통을 치며 유튜브 단골 주제가 됐다. 당시 정 대표는 국민의힘이 반대하는 쟁점 법안을 밀어붙이고 상대편 의원과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인기를 끌었다. 그동안 정 대표는 언론 대신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유튜브 등 SNS를 통해 지지자와 직접 소통해 왔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보다 주목도가 떨어진다는 평이 나오지만 팬덤 정치에 최적화된 모습을 보여줬다. 정 대표는 최근에도 자신을 둘러싼 의혹과 청-명 프레임에 대해 직접 입장을 밝혔다. 그는 SNS에 ‘언론의 자유와 횡포 그리고 언론의 게으름의 관성’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조국 전 대표의 사면·복권을 놓고 일부 언론에서 ‘정청래 견제론’을 말한다.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근거 없는 주장일뿐더러 사실도 아니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바로 반박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이어 “정청래는 김어준이 밀고, 박찬대는 이재명 대통령이 밀었다는 식의 가짜 뉴스가 이 논리의 출발”이라며 “어심이 명심을 이겼다는 황당한 주장, 그러니 정청래가 이재명 대통령과 싸울 것이란 가짜 뉴스에 속지 말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이재명 대통령과 각을 세울 일이 1도 없다. 당정대가 한 몸처럼 움직여 반드시 이재명정부를 성공시킬 생각이 100(이다)”이라고 덧붙였다. 계파 갈등 프레임이 씌워질 조짐이 보이자 이를 사전에 차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정 대표의 정치적 뿌리를 따지자면 친노(친 노무현)에 가깝다. 그러나 문재인 전 정부서는 친문(친 문재인), 이재명 대표 체제에서는 친명(친 이재명)으로 분류되는 등 계파색이 비교적 옅은 편이다. 1989년 미국 대사관저 점거 농성을 주도한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은 등 학생 운동권 출신이지만, 대표 운동권인 민주당 86 그룹과의 친분을 공개적으로 과시하지 않았다. 따라서 정 대표는 당의 주류보다 비주류에 가깝다는 게 여의도에 떠도는 평이다. 친문? 친명? 오히려 ‘계파 청산파’ “잘못된 586 문화 배운 97도 청산” 전당대회가 한참이던 당시 한 민주당 의원은 “사석에서 만난 정 의원은 아주 뚝심 있는 사람이었다. 박찬대 의원은 특유의 재치로 호감을 얻는 편이라면 정 의원은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할 말은 제대로 하는 캐릭터”라며 “그래서 계파를 분류하기 어려운 것 같다. 나만의 길을 가는 것 같으면서도 한번 정한 길은 꺾지 않고 걷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오히려 정 대표는 ‘계파 청산’을 외치는 인물이다. 그는 당 대표 후보이던 당시 “국민께서 비판하시는 586의 운동권 문화는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라디오에 출연해서는 “계파는 당을 좀먹는 독약”이라며 강도 높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정파와 노선은 필요하지만, 계파는 없어져야 한다. 저 스스로 계파에 가입하지 않고, 그런 데서도 저는 안 불러준다”고 말했다. 이어 “저는 586의 질서, 운동권의 수직적 관계가 싫었다. 그런 분들과 몰려 다니는 게 너무 비생산적”이라며 “586의 안 좋은 문화를 따라 배운, 너무 빨리 늙어버린 97 세대들의 그런 것도 청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대표가 민주당의 수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원들의 요구를 파악해 발 빠르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8·2 전당대회에서 정 대표는 당선 이후 “이 대통령이 대통령이 된 것은 민주당 주류가 바뀌었단 뜻이고, 민주당에서 정청래가 대표가 됐다는 것은 당의 주인인 당원들이 당의 운명을 결정하는 시대가 왔다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해석했다. 이날 전당대회를 “예전에는 당원들이 국회의원 눈치를 봤지만, 이제는 국회의원들이 당원 눈치를 봐야 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민주당의 민주화’가 드디어 그 깃발을 높이 든 8·2 전당대회”라고 자평하기도 했다. 이처럼 정 대표를 탄탄히 받쳐주는 건 여의도 인맥이 아닌 당원이었다. 정 대표는 이들을 대주주 삼아 힘을 키워 주류로 자리 잡고 있다. 최근에는 당원권에 힘을 쏟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평당원 최고위원’ 선출을 시도하는가 하면 당원 주권 정당 실현을 강조하기 위해 ‘대의원 1인1표제’를 띄우기도 했다. 대의원 1인1표제는 당원들의 권한을 대폭 향상하는 방안이다. 정 대표는 지난 18일 열린 국회 당원주권 정당특위 출범식에서 “10년 넘게 당원주권정당, 1인1표를 주장해 왔지만, 아직까지도 열리지 않았다”며 “헌법에서 얘기하고 있는 평등 선거가 민주당에서도 구현이 될 수 있도록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3대 개혁 풀가동 이어 “대한민국 헌법에는 평등 선거가 명시돼있고, 많은 선거에서 1인1표가 행사되지만 유독 더불어민주당에선 누구는 1표, 누구는 17표를 행사한다”며 “헌법적으로 보나 상식적으로 보나 매우 부끄러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재명정부가 국민주권시대를 강조하는 만큼 이에 발맞추기 위해서라도 민주당은 권리당원의 권리를 보장하고 상징적인 ‘1인1표’ 시대를 반드시 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밖에도 정 대표는 당헌·당규 개정을 비롯한 ▲평당원 선출 준비 지원 ▲연말 당원 콘서트 지원 등을 약속했다. 당원의 힘이 커질 수록 정 대표의 정치적 입지도 넓어진다. 정 대표는 연일 국민의힘 때리기에 집중하며 당원으로부터 지지를 받았고, 민주당의 목표로 3대 개혁 완수를 내걸었다. 이는 비주류였던 자신의 정체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전략으로도 읽힌다. 이 대통령이 ‘사이다’ 발언으로 당권까지 올랐다면 정 대표는 각종 특위를 띄우며 거침없는 개혁가의 모습을 굳히겠다는 것이다. 정 대표는 강성 지지층의 요구에 따라 검찰개혁에 속도를 내고 있다. 검찰청을 폐지하는 대신 가칭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과 공소청을 신설하는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다음 달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정 대표는 지난달 21일 의원총회에서 이 대통령과 당 지도부의 만찬 회동을 언급하며 “검찰청 폐지, 공소청·중수청 설립을 담은 정부조직법을 9월 내 본회의에서 처리하자고 당과 대통령실이 입장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그는 “약속드린대로 추석 귀향길 뉴스에서 ‘검찰청은 폐지됐다’ ‘검찰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는 기쁜 소식을 국민 여러분께 전해드릴 수 있도록 당에선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임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된 추미애 의원 역시 “법사위원장 선출은 검찰과 언론, 사법개혁 과제를 완수하라는 국민의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며 전폭적으로 힘을 실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위원회도 속속들이 들어섰다. 우선 민주당은 ‘국민주권 검찰정상화 특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정 대표는 출범식 및 1차 회의에 참석해 “지금의 시대적 과제는 내란 종식, 내란 척결, 이정부 성공에 있다”며 “가장 시급히 해야 할 개혁 중 개혁이 검찰개혁”이라며 “개혁도 골든타임을 놓친다면 저항이 거세져서 좌초되고 말 것이기 때문에 시기가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특위의 주요 과제로는 ▲수사·기소 완전 분리 ▲국민 주권 실현 및 민생 뒷받침 등을 제시했다. 새로운 구심점 이어 언론개혁특별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언론 보도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추석 전까지 도입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언론의 허위·조작 보도에 대해 피해자에게 손해액의 최대 5배 배상을 의무화하는 법적 장치다. 언론뿐만 아니라 ‘유튜버’도 포함하는 안이 논의되는 것으로 전해진다. ‘국민중심 사법개혁특별위원회’도 출범했다. 정 대표는 “대법관의 증원과 추천 방식을 변경하는 내용의 사법개혁안을 추석 전까지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구석구석 눈도장을 찍기 위한 지역별 공략에도 나섰다. 지난 21일 호남발전특별위원회를 출범시키고 “다들 대한민국 민주화에 대해서 호남이 기여한 바가 지대하다는데, 국가는 ‘호남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답을 이제 할 때가 되지 않았나”라고 꼬집었다. 정 대표는 “호남만 발전시키면 되겠느냐”며 영남발전특위도 띄웠다. 이는 내년 6월에 있을 지방선거를 대비해 대구·경북 등의 표밭을 다지기 위함으로 풀이된다. 광폭 행보를 보이는 정 대표를 구심점으로 신흥 세력이 탄생할 것이란 관측이 제기된다. 정 대표는 계파 정치와 거리를 두겠다고 거듭 밝혔지만, 권력자의 주변에 사람이 모이는 것은 당연하다는 해석이다. 정 대표의 편에 선 동료 의원들에게도 시선이 쏠린다. 전당대회에서 정 대표를 공식적으로 지지했거나 개혁 선봉에 함께 섰던 의원 등이다. 정 대표가 당권 도전을 선언한 국회 기자회견장에는 장경태·최기상·문정복·임오경·양문석 의원 등이 자리했다. 여의도 이야기를 종합하면, 정 대표는 ‘당원 중심 정당’ 철학에 부합하는 인사로 장 의원을 꼽았다. 현재 장 의원은 평단원 최고위원 선출 절차를 위한 특위위원장을 맡고 있다. 최민희 의원은 정 대표를 공개 지지한 인물이다. 당시 정 대표가 수박 논란에 휩싸였을 당시 최 의원은 “심하게 비난받는 정청래 후보를 지켜보면 짠하다”며 “비난에도 역비난하지 않고 여전히 유쾌·상쾌하게 선거운동하는 정 후보를 격하게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 밖에도 한민수·김영환·이성윤 의원은 경선 유세 현장에 함께하며 힘을 실어줬다. 왼쪽으로 붙는 민주당…좁아지는 공간 강성 지지층 등에 업고 개혁가의 길로 개혁가의 길을 걷는 정 대표의 존재감이 커지자 일각에서는 조기 대선을 거치며 ‘중도 보수론’으로 넓혀놨던 민주당의 정치 공간이 다시 좁아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 대표의 강경한 태도가 민주당의 기조가 된다면 야당과의 협치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평이다. 실제 정 대표는 “악수는 사람하고만 한다”며 국민의힘을 척결 대상으로 대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6주기 추모식에서 정 대표는 국민의힘 송언석 비상대책위원장(이하 비대위원장)과 악수는커녕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다. 송 비대위원장 역시 적대감을 드러내면서 그야말로 ‘국회 빙하기’ 시대가 열렸다. 여당인 민주당은 좌우를 넓게 아우르는 정당이 돼야 앞으로 다가올 선거에서 유리한 구도를 유지할 수 있다. 지금처럼 국민의힘이 보수로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왼쪽은 조국혁신당, 진보당 등에 맡겨둔 채 중도 보수를 자처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당원의 힘으로 대표가 된 만큼 그는 개혁을 완수하기까지 지금과 같은 태도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민주당 상임고문단도 “집권여당은 당원만 바라보고 정치를 해선 안 된다”며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는 당 상임고문단 간담회에서 “정당의 주인은 당원이어야 한다는 데 공감한다”면서도 “우리 국민은 당원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문희상 전 국회의장도 “내란의 뿌리를 뽑기 위해 전광석화처럼, 폭풍처럼 몰아쳐 처리하겠다는 대목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과유불급이다. 의욕이 앞서 결과를 내는 게 지리멸렬한 것보다는 훨씬 나으나, 지나치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또 다른 민주당으로 민주당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포스트 이재명’ ‘이재명 키즈’가 아닌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 대표가 민주당의 새로운 길을 열어야 당이 계속해서 순환하는 등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어 “민주당의 주류는 강성 지지층이다. 당원이 당을 좌지우지하는데 그들의 숫자가 얼마가 되든 목소리가 커 여론을 만드는 것”이라며 “이 주류의 흐름에 올라탄 사람이 정 대표다. 이 대통령이 대표이던 때와는 다른 모습의 민주당을 보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아직 남은 정 견제 세력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가 SNS에 올렸다 곧바로 삭제한 게시글이 화제다. 민주당은 지난달 19~20일 양일간 경주를 찾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준비 상황을 점검했는데 정 대표가 마치 천마총 금관을 쓰고 있는 듯한 착시 사진이 문제가 된 것이다. 정 대표가 금관을 직접 착용한 것은 아니지만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시에 왕 노릇을 한다” “벌써 왕인 것처럼 군다” 등 거친 비판이 쏟아졌다. 현재 해당 사진은 삭제됐지만 8·2 전당대회 때 불거진 박찬대 의원과의 앙금이 아직 남은 게 아니냐는 뒷말이 나온 이유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