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으로’ 줄섰던 판·검사 말로

알면서도 매달린 썩은 동아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특정 직군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것은 외풍에 휘둘리지 말고 중립성을 최대한 지켜달라는 의미다. 특히 자신의 판단에 따라 타인의 인생이 좌지우지될 정도의 영향력이라면 더더욱 공정성을 지켜야 한다. 

주변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고 중립을 지키는 일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양쪽 모두에게 미움을 받을 수도 있고 유혹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다 눈을 딱 감고 한쪽으로 치우치는 경우도 많다. 문제는 한쪽에 줄을 대면 언젠가는 그 줄이 ‘썩은 동아줄’로 바뀔 수도 있다는 점이다. 

심판 역할
버린 판사?

최근 한 판사의 중립성 논란이 화두로 떠올랐다. 시작은 국민의힘 정진석 의원의 명예훼손 혐의에 대한 1심 판결이다. 지난 10일, 서울중앙지법 형사5단독 박병곤 판사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정 의원에게 징역 6개월을 선고했다.

검찰 구형은 벌금 500만원으로, 법조계에서는 이례적으로 과한 형량이 나왔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앞서 정 의원은 2017년 9월 자신의 SNS에 “노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씨와 아들이 박연차씨로부터 수백만달러의 금품 뇌물을 받은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은 뒤 부부싸움 끝에 권씨는 가출하고 그날 밤 혼자 남은 노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라고 적었다.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의 유족이 고소한 지 5년 만인 지난해 9월 벌금 500만원에 약식기소했지만 법원은 11월 사건을 정식 재판에 회부했다. 

재판부는 “유력 정치인인 피고인의 글 내용은 거짓으로, 진실이라 믿을만한 합당한 근거도 없었다”며 “악의적이거나 매우 경솔한 공격에 해당하고 그 맥락이나 상황을 고려했을 때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보호받을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거칠고 단정적인 표현의 글로 노 전 대통령 부부의 명예가 심각하게 훼손됐다”며 “당시 노 전 대통령 부부가 공적 인물이라 보기 어려웠으며 공적 관심사나 정부 정책 결정과 관련된 사항도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이후 박 판사의 정치적 성향이 드러나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박 판사가 재직 중 작성한 정치 관련 글이 단초를 제공했다. 판사의 정치 성향이 사건 형량에 영향을 미쳤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특히 박 판사가 판사에 임용된 이후 SNS에 올렸던 정치 관련 글을 모두 삭제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파장이 눈덩이처럼 커졌다. 

박 판사 본인도 자신이 쓴 글이 논란이 될 것을 알았던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정진석 사건으로 편향성 논란
‘사법부 정치화’ 폭탄 터졌나

실제로 박 판사는 정 의원에 대한 1심 선고 다음 날인 지난 11일 휴가를 갔다. 이어 15일 오후 3시30분경 자신의 SNS 계정을 비공개로 전환했다. 또 지난 4월에는 법조인의 프로필을 관리하는 ‘한국법조인대관’ 운영사 측에 자신의 등재 정보를 삭제해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 판사는 지난해 3월 대선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낙선하자 “이틀 정도 소주 한 잔하고 울분을 터뜨리고 절망도 하고 슬퍼도 했다가 사흘째부터는 일어나야 한다”는 글을 올렸다. 그보다 앞서 2021년 4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서 민주당 박영선 후보가 낙선했을 때에도 ‘승패는 언제나 있을 수 있다. 피를 흘릴지언정 눈물은 흘리지 않는다’는 내용의 드라마 장면을 캡처해 게재했다. 

박 판사가 고교·대학 재학 때부터 판사 임용 후까지 SNS 등에 쓴 글은 주로 현 여권을 비판하고 야권을 옹호하는 내용이다. 논란의 불씨가 생긴 지점은 박 판사가 임용 후에 올린 글이다. 법조계서 박 판사가 처음부터 정치 관련 사건을 맡지 말았어야 한다는 이유가 나오는 것도 이 대목 때문이다. 

눈여겨볼 부분은 김명수 대법원장의 임기와 맞물린 법원의 기류 변화다. 박 판사 논란에 대해 법원은 ‘임용 전에 쓴 글’이라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박 판사는 고3 때인 2003년 10월 한 인터넷 사이트에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이 (노무현)대통령의 탄핵을 주장하고 싶으면 불법 자금으로 국회의원을 해 처먹은 대다수의 의원들이 먼저 의원직을 사퇴하는 것이 옳다”는 글을 올린 바 있다. 

하지만 현직 신분으로 쓴 글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자 상황이 변하는 모양새다. 대법원은 박 판사의 SNS 글에 대한 사실관계를 확인 중이라고 밝혔다. 법원의 고심은 깊어지는 모양새다. 특히 김명수 대법원장의 임기가 한 달가량 남은 상황서 판사의 정치적 편향성 논란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법원 내부에서도 곤혹스러워하는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기류 바뀐
법원 내부

정치적 중립, 사법부 독립 등 법원을 둘러싼 이슈에 불씨를 던져줄 수 있기 때문. 

일각에서는 ‘김명수 코트’의 문제점이 박 판사 논란으로 폭발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 대법원장은 윤석열 대통령(당시 서울중앙지검장-검찰총장)과 함께 문재인정부의 ‘파격 인사’를 논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인물이다. 사법 농단 사건 등으로 뒤숭숭했던 사법부 분위기를 쇄신해야 한다는 기대를 등에 업고 임기를 시작했다. 

다음 달 24일로 임기를 마치는 김 대법원장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인 쪽으로 기운다. 특히 ‘법원의 정치화’를 가속했다는 지적이 많다. 진보 성향 판사 모임인 우리법연구회,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이 요직에 중용됐고 재판 소요 기간이나 판결에 있어서 현 야권 인사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의혹과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실제 정치 관련 사건에 대한 법원 판결이 나올 때마다 법관의 성향을 문제 삼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공정성과 중립성을 배경으로 독립성을 지켜나가야 하는 사법부로선 뼈아픈 지적이다. 법원 내부에서는 ‘사법부 정치화’의 굴레를 벗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구성원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윤 대통령이 지명하는 차기 대법원장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일각에서는 사법부가 검찰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된다. 문재인정부서 검찰은 적폐 청산의 선봉장이면서 개혁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이 과정서 ‘친정부’ 검사가 크게 득세해 ‘검찰 정치화’ 논란이 불거졌다.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 시기에는 ‘추미애 라인’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휘둘린 검찰
인사로 명암


특히 윤 대통령이 검찰총장으로 재임하던 시기 문정부와의 갈등이 극에 달하면서 검사의 명운이 크게 갈렸다. 이른바 친정부 라인에 섰던 검사는 요직을 꿰찼고 윤석열 라인으로 분류됐던 검사는 좌천을 피하지 못했다. 인사 때마다 유례없는 관심이 쏟아질 정도로 검찰에 대한 주목도가 높았던 시기였다. 

이 시기 가장 많은 관심을 받았던 검사 가운데 한 명이 이성윤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이다. 이 연구위원은 문재인 전 대통령과 경희대 동문이다. 문정부 들어 ▲대검찰청 반부패강력부장 ▲법무부 검찰국장 ▲서울중앙지검장 등 검찰 요직 ‘빅4’ 중 3자리를 거칠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이 연구위원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조사 과정에서 공수처장의 관용차를 이용해 ‘황제 조사’ 논란에 휘말렸고,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불법 출국금지 무마 의혹 사건에 연루된 상황서도 자리를 지키다가 결국 한직인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으로 밀려났다.

현재는 김 전 차관 불법 출금 수사 무마 의혹과 관련해 재판을 받고 있다.

박은정 광주지검 중요경제범죄조사단 부장검사와 그의 남편 이종근 법무법인 계단 대표변호사는 각각 수원지검 성남지청장, 서울서부지검장을 지냈다. 이들 부부는 대표적인 친정부 ‘반 윤석열’ 인사로 손꼽혔다. 하지만 현재는 수사를 받거나 한직으로 좌천됐다가 검복을 벗을 상황에 놓였다.

박 부장검사는 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연루된 성남FC 불법 후원금 사건과 관련해 수사 무마 의혹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다. 대선을 한 달 앞두고 불거진 사건으로 박 부장검사가 이 대표를 위해 수사를 의도적으로 지연시키려 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해당 사건은 박하영 당시 성남지청 차장검사가 검찰 내부망에 글을 올리고 사의 표명을 하면서 확산됐다.

‘친정부’ 성향의 검사 좌천길 
조만간 대법원장 교체 물갈이?

여기에 박 부장검사는 법무부 감찰담당관 재직 때 ‘채널A 사건’과 관련해 한동훈 법무부 장관(당시 검사장)을 감찰한다는 명분으로 확보한 법무부·대검 자료를 윤 대통령(당시 검찰총장) 감찰을 심의하던 법무부 감찰위원회에 무단 제공한 혐의로도 수사를 받고 있다.

사의를 표명했지만 공수처 수사를 받고 있어 수리되진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임은정 대구지검 중요경제범죄조사단 부장검사는 윤 대통령과 가장 날카롭게 각을 세운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검찰 관련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조직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아 국민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특히 문정부 시기 조직의 수장인 윤 대통령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며 갈등을 빚어왔다.

특히 한명숙 전 국무총리 수사 모해위증 교사 사건과 관련해서는 최근까지 법정 공방을 벌였다. 임 부장검사는 해당 사건서 자신이 배제된 것을 두고 윤 대통령이 수사를 방해하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했다. 공수처가 사건을 정식 입건했고 임 부장검사는 참고인 자격으로 조사도 받았다. 

공수처는 수개월 동안의 수사 끝에 윤 대통령을 불기소 처분했다. 임 부장검사 측은 서울고등법원에 재정신청 했지만 기각됐고 지난해 8월 대법원 역시 최종 기각했다. 재정신청은 수사기관의 처분에 불복한 고소·고발인이 다시 한번 법원의 판단을 구하는 절차다.

임 부장검사는 최근에도 검찰 특수활동비 등에 대해 “검사들의 용돈”이라고 지적하는 등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과거에 비해 파급력이 많이 줄어들었다는 말이 나온다.

검찰은 정권교체 이후 친(문재인)정부 검사로 분류됐던 검사가 대거 좌천되는 등 물갈이가 진행됐다. 윤석열 라인으로 불리며 수차례 좌천됐던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깜짝 발탁되는 등 자리 역전 현상이 일어났다.

대법원장의
마지막 결정?

법원은 국내서 가장 보수적인 집단으로 꼽힌다. 정부 성향에 따라 휘둘릴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검찰과 비교했을 때 독립성 수준도 높은 편이다. 일각에선 ‘법원판 물갈이’에 박 판사 사건이 도화선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김명수 코트’서 이른바 라인을 탔던 판사의 거취가 화두로 떠오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김 대법원장은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하는’ 퇴임 직전 상태다. 줄을 댔던 판사의 운명도 한 달 남짓 남았을 수 있다.  

<jsjang@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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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선택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했다. 내란의 밤이 지나고 탄핵의 강을 건너 마침내 대선 정국까지 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계엄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날 오후 10시 무렵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예산안 관련 긴급 발표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정보지가 돌았다. 얼마 뒤 정장 복장으로 대통령실 브리핑룸 카메라 앞에 나타난 윤 전 대통령은 다소 격양된 어투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 걸어간 자멸의 길 민주당이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봉쇄됐고 헬기를 타고 도착한 무장 군인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국회 밖에서는 시민이, 안에서는 야당 보좌진들이 군인과 대치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입장을 냈다. 한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전 대표는 탄핵을 찬성한다는 의미의 ‘찬탄파’로 찍혀 친윤(친 윤석열)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당시 이재명 대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국회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란 사태가 지나고 난 뒤 이 대통령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실시간 방송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이어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비상 의총을 소집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으로 의총을 소집했다가 10분 뒤 장소를 여의도 당사로 옮겼다. 그리고 약 20분 뒤 다시 국회 예결위장으로 바꿨다. 이는 현재 추 전 원내대표가 받는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과 연결된다. 다음 날 새벽인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국회경비대가 국회 출입을 통제하자 담을 넘어서 국회로 진입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결의안 상정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국회에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으나 통보가 없었고, 이는 대통령의 귀책사유”라며 “우리는 그와 관계없이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결의안은 여야 의원 19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국회 본청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철수했고 이로써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세 시간 만에 무효가 됐다. 비상계엄의 끝은 탄핵 정국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6당은 계엄이 해제된 당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하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를 진행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추인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점 등을 의식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 피의자로 썩은줄 알면서도 못 놓는 윤 동아줄 이날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탄핵을 반대하는 ‘반탄파’의 친윤계와 찬탄파 친한(친 한동훈)계로 당원들이 갈라서면서 내부 총질이 시작된 것이다. 당초 한 전 대표 역시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비상계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두 계파의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나흘 뒤인 7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국회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탄핵이 상정됐지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가 불참하면서 투표가 불성립된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은 김예지, 김상욱, 안철수 의원뿐이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 10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본회의장으로 와줄 것을 요구했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일주일 뒤인 14일 국회에 상정됐다. 당시 국민의힘은 “표결 참석을 제안한다”면서도 탄핵 반대 당론을 유지했다. 결국 300명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표 8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공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넘어갔고 긴 진통 끝에 지난 4월4일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현직 대통령의 파면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에서는 이변 없이 이재명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섰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전히 찬탄파와 반탄파가 대립했고 어느 날 늦은 밤을 틈타 ‘대선후보 날치기’를 시도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청산’을 앞세웠다. 이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상 경제 대응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약속하는 등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내란 세력의 죄는 단호하게 벌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선거는 내란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을 강조하며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심판론을 부각시켰다. 두 번의 선거 강경파만 남았다 6·3 조기 대선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하면서 2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로 이 후보가 8.27%p 차이로 앞섰다. 계엄 극복과 내란 청산을 외친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한 점 또한 보수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 당시 앞장서서 윤 전 대통령을 엄호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에 따른 역풍을 우려하던 당 의원에게 자신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서 반대한 점을 언급하며 “나는 끝까지 갔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윤상현 의리 있어 좋아’(라고 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와도 다 찍어줬다”고 말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대선 투표 직전까지 윤 전 대통령에게 단호히 탈당을 요구하지 못했다. 김 후보는 “대통령 탈당(여부)은 본인 뜻”이라며 “자기가(국민의힘이)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도리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친윤계를 비롯한 중진 의원의 지역구가 보수의 심장인 TK(대구·경북)임을 고려했을 때, 윤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핵심 지지층을 놓는 것과 같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서도 반탄파인 장동혁 후보가 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장 후보는 탄핵 정국 당시 극우 색채가 짙은 탄핵 반대 집회를 찾아가 강성 지지층에게 표심을 구애하는가 하면 찬탄파들을 향해 “내부 총질 세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선 직후에는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강경 노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장 대표는 지난 9월 장외투쟁을 통해 이정부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조국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당 지도부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역을 돌며 여론전을 통해 반격에 나설 기회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내란 옹호 대선 불복 세력의 장외‘투정’”이라고 비꽜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받아 대표로 당선된 정청래 대표는 “윤어게인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며 국민의힘 청산을 강조했다. 강경파인 정 대표와 장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회는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면충돌 치킨 게임 계엄 1년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내란 세력 척결’에 국민의힘이 ‘내란 팔이’라고 맞불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강경파 의원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민주당은 그때마다 계엄 카드를 꺼내며 “내란 옹호 세력과 협치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내란 팔이라는 단어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메시지로 시작됐다. 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특검 연장은 오로지 내란 정국을 연장하려는 민주당의 정략일 뿐”이라며 “내란팔이 없이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도, 국정을 책임질 정책 능력도 없으니 이 지경”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 주도로 ‘더 센 특검법’이 통과하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 의원은 “에라잇, 맨날 내란, 내란하다 보면 국민들도 결국 지쳐버릴 것”이라며 “소위 내란 약발도 곧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계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없이 여전히 민주당 뒷다리만 잡는 게 국민의힘”이라며 “내란팔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를 돌아보시라. 윤 전 대통령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뛰어간 것이며 극우 집회에서 마이크를 든 것까지, 사과의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지겹다’는 경솔한 표현은 국민께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3일 계엄 1년 메시지를 통해 양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정당해산 심판을 꺼내든 반면, 국민의힘은 메시지 톤을 놓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달 26일 “내일(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추 전 원내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이하 의총) 장소를 여러번 변경하며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의총 장소를 국회 밖으로 공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계엄 해제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며 거듭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경파만 살아남은 포스트 탄핵 여의도 계엄 1년 메시지, 여야 모두 주목 국민의힘 내에서는 메시지의 세기를 놓고 충돌 조짐이 보인다. 강성 지지층을 의식한 지도부는 강경 메시지를 주장한 반면, 원내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사과를 포함한 톤다운된 메시지를 요구하는 등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초선인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지난해 극한 여야 대립 속에 다수 야당(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건 국가 발전이나 국민통합, 보수 정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무모하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1년 동안 국민의힘이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등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규명되면 사과와 반성은 당연한 일”이라며 “단순히 사과와 반성으로만 끝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계엄이 지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보이는 양상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결 과제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고, 이 대통령은 ‘내란 청산’을 주장했다. 사면초가인 국민의힘 상황 역시 10년 전 탄핵 후폭풍을 직면하고 분열한 새누리당과 닮아있다. 이듬해 6월 지방선거가 예정된 점까지, 지금의 여야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할지 이목이 쏠린다. 당시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간판까지 교체했지만 2018년 지방선거에 참패하면서 국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은 CBS 라디오에서 ‘중도층 등 외연 확장을 위해 계엄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투표율을 55%에서 60% 정도로 봤을 때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오히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한다”고 분석했다. 김 최고위원은 “정치 고관여층보다는 정치 무관심층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보수는 아직도 분열돼있고 내부 싸움도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이동해 갔을 때 벌어질 손실도 굉장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선거에 직면하면 중도층 포섭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하지만, 아직 당이 불안정한 만큼 중심이 되는 지지층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데자뷔? 비상계엄 사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 우리 숙명인데 그분들이 탈당했다고 해서 벗어나 지겠느냐”며 “자꾸 절연, 절연하는데 인연이 끊기겠느냐.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회성 사과로 과거 잘못을 끊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보다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쉽게 사과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사과하는 모습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이런 정치를 해나가고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겠다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