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특집> 끌려간 소년-소녀병들은 지금…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3.06.19 11:12:33
  • 호수 14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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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년, 그들은 버려졌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6‧25전쟁 발발 73주년. 현재 한국은 전쟁의 참사를 찾아볼 수 없다. 박물관 정도 가야 확인할 수 있을까? 참사가 현실서 사라지듯, 같이 사라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6‧25전쟁 참전 소년-소녀병이다. 이제 이들도 백발 성성한 노인이 됐다. 이렇게 긴 세월이 흘렀지만, 소년-소녀병들은 6‧25전쟁 참전병으로 인정받기가 힘든 상황이다.

1950년 6월25일 일요일 새벽 4시. 한국의 역사를 가르는 6‧25전쟁이 발발했다. 6‧25전쟁은 북한이 기습적으로 한국을 침공하면서 발발됐다. 미국과 중국이 참전해 세계적 대규모 전쟁이 될 뻔했으나, 1953년 7월27일 오후 9시에 체결된 ‘한국휴전협정’에 따라 일단락됐다. 세계적 대규모 전쟁을 피했다 뿐이지, 6‧25전쟁은 한국이 치른 전쟁 중 가장 피해가 큰 전쟁이다.

“끌려가…”
강제 징병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한국군 전사자 13만8000명과 민간인 사망자 24만5000명, 피난민 651만명으로, 베트남 전쟁이나 2차 세계대전에 비해 6‧25전쟁은 민간인 사망자 비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을 정도로 처참한 전쟁이었다.

전쟁으로 발생한 이재민도 1000만여명이 넘었다. 이는 전체 인구 절반 이상이 피해를 본 것으로 가족을 잃거나 헤어진 사람들은 지금도 고통을 받고 있다. 

재산 피해는 추산이 어려울 정도다. 북한군에 밀려 마지막 교두보로 삼았던 부산을 제외한 전 국토가 초토화됐다. 국내 제조업의 42%가 파괴됐고, 군사작전에 이용될 수 있는 도로뿐만 아니라 철도, 교량, 항만, 학교 등은 물론 개인 가옥도 대부분 파괴됐다.


6‧25전쟁으로 집을 잃거나 고향을 떠난 피란민은 거처를 마련하기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미군 부대서 나오는 포장지와 통조림 깡통 등을 모아 엮어서 판잣집을 지어 살았다. 당시 대부분 국민은 우방국이 원조한 구호 식량과 나무껍질, 풀뿌리로 연명했다. 

음식물 찌꺼기를 모아서 끓인 꿀꿀이죽이 피란민의 주요 영양 공급원이었다. 어린아이들은 초콜릿을 얻기 위해 미군 병사의 꽁무니를 따라다녔고, 시장에나 거리에서는 담배를 팔거나 구걸하는 아이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피해 규모를 비교할 순 없으나, 가장 큰 피해를 본 이는 6‧25전쟁 소년-소녀병이었다. 소년-소녀병은 18세 미만의 미성년자 군인이나 이들로 이뤄진 군대를 뜻한다. 이런 이유로 학생 때 자진해서 군에 입대한 학도의용병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10대에 전쟁 참여…지금도 강제 징집 논란
UN “미성년자 군사 목적 동원은 절대 금지”

하지만 학도의용병은 학생 신분으로 자진해 지원한 비정규군으로, 그 업적과 존재를 인정받았지만 소년-소녀병은 아니다.

소년-소녀병은 병역의무를 지우면 절대 안 되는 17세 이하의 아동임에도 현역병으로 징집돼 군번을 부여받아 정규군으로 참전했다. 국방부 군적에 남아 있는 인원만 무려 3만여명에 달한다. 그 속에는 소녀군도 500명이나 포함돼있다.

UN은 미성년자를 군사적 목적으로 동원하는 것을 ‘가혹한 형태의 아동노동’으로 판단해 엄격히 금지한다. 중대한 인격침해라는 것이다. 국제노동기구(ILO)의 협약서도 이를 금지하고 있다. 18세 미만을 소년-소녀병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6‧25전쟁 때 소년, 소년들은 어떻게 징집된 것일까? 15세에 대구서 중학교를 다니다 6‧25전쟁이 시작된 지 불과 2달 만에 징집된 생존 소년병 윤한수씨는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윤씨는 “(학교에 온 군인들이)‘제군들, 장교나 일반 병사로도 지원해서 모두 가거라, 나라가 이리 위중하다’며 징집을 권유했는데 법률적으로 우리는 병역의무를 이행할 나이가 안됐으니까, 그건 이제 설사 지원한다고 해도 안 받아 주는 게 원칙”이라며 “그런데 자고 나면 학생이 하나씩 없어졌다. 그때 방위군, 경찰관들이 와서 강제로 데리고 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전쟁 탓에 평범한 학생들이 강제적으로 군인이 된 것이다. 당시 윤씨는 키 160㎝가 안 됐다. 이때부터 책가방 대신 24㎏ 군장을 들어야 했다. 총 쏘는 법도 몰랐던 윤씨는 지옥 같은 전쟁터에 내던져졌다.

그리고 
버려지다

윤씨는 “전쟁터서 다친 아이들을 들것에 담고 내려왔다. 생명이 붙어 있는 놈들은 고함을 지르며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몸 전체에 소름이 끼쳤다. 나도 곧 저리될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어린 소년병에게 담력을 키운다며 실험을 했다. 실험은 제네바 협정에 의해 포로를 잡으면 즉결심판 같은 것을 못 시키는데 즉결심판을 시켰다. 그 즉결심판 처형 사수를 소년병에게 시켰다. 나는 총 쏘는데 안 맞았다”며 “떨려서 잘 안 봤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고, 좌우간 내가 그걸 했다. 너무 무서웠다. 이 기억은 평생 잊지 못한다”고 하소연했다.

6‧25전쟁 당시 무려 1만2000명의 소년병이 가장 치열하고 위험했던 낙동강 방어선 전투 최전선에 투입됐다. 이때 전체 소년병 3만명 가운데 10%인 3000명이 전사했다.

6‧25전쟁 소녀병이었던 김명자씨는 이후 한국 최초의 여군이 됐다. 김씨는 한 방송 프로에 나와 “6‧25전쟁 당시 소녀 첩보원으로 활동했다. 16세에 군대에 들어가서 3년7개월 있다가 왔다. 어느 날 갑자기 비행기가 와서 폭탄이 떨어지면서 사람이 많이 죽었다”며 “난리가 났었다. 그때 여군을 모집했다. 우리 동네서 여자만 20명이고 다른 동네 합쳐서 40명 넘게 트럭을 타고 갔다. 죽을 각오로 간 거다. 가서 싸우다 살면 살고, 죽으면 죽고. 정말 죽으러 간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씨는 특수부대서 활동했다.

잊혀져 가는
그들의 고통

그는 “켈로 8240부대였고, 작전명이 ‘래빗’이었다. 당시에는 이게 뭔지 몰랐다. 중3이 ‘켈로’가 뭔지 어떻게 아느냐. 아군서 파악하지 못한 걸 보고 알리는 일이었다. 첩보활동이라 비밀을 알아와야 했다. 각자 맡은 게 다르기 때문에 서로가 맡은 임무는 비밀이었다”며 “나는 먼 곳으로 파견돼 100리, 200리를 걸어갔다. 산속이니 엄청 힘들었다. 치마저고리 입고 고무신 신고 다녔다. 겨울에는 발이 얼어서 말도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렇게 하다가 도중에 시체도 못 찾고 죽는 사람이 허다했다. 50명 모집해서 나처럼 임무를 하다 30명쯤 죽으면 또 가서 모집했다. 나는 죽으러 왔는데 왜 살고 살려고 바둥댄 사람들은 다 죽었다. 울적하면서도 슬프고 이게 인생인가 싶었다. 떠난 동료들이 생각나 잠도 못 잔다”고 토로했다.


이 같은 트라우마로 소년-소녀병들은 일생을 고통 속에서 보낸다. 이유는 참혹한 전투서 동료들을 두고 혼자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소년병 참전자로 강제 징집된 장성곤씨는 3주간의 훈련을 받고 곧바로 전투에 투입됐다. 장씨는 “바로 시체를 넘고 다니는 그런 상황이었다. 지금까지도 그 광경이 뇌리에 박혀서 떠나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전투 중 머리에 포탄 파편을 맞는 등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남은 건 정신적‧물질적 상처뿐이다.

그는 “피해는 말도 못한다. 거지가 됐다. 당연히 학업을 못 했는데, (군대에)3~4년 있다가 나오니까 다른 사람들은 졸업을 했다. 우리는 군에 갔다 왔기 때문에 졸업장이 없으니 대학을 가지 못했다”고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자고 일어나면 사라진 동네 아이들
“폭탄 떨어져 죽고, 총 쏴서 죽이고”

이런 상황 속에 ‘6‧25전쟁 참전 소년-소녀병 명예선양법이 더 이상 미뤄지면 안 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소년-소녀병이 나라 존망 위기서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 집중 투입되는 등 희생됐지만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바른미래당 전 유승민 의원이 19·20대에 걸쳐 두 차례 ‘6‧25전쟁 참전 소년-소녀병 보상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으나 끝내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21대 국회서도 국민의힘 강대식·임병헌 의원이 2020년과 지난 3월 각각 관련 법안을 대표 발의했지만 현재 국회 국방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 계류돼있다.

이 법안의 목적은 ‘6‧25전쟁 당시 병역의무 대상 연령이 아닌데도 징집 또는 소집돼 참전한 소년-소녀병 및 그 유가족의 특별한 희생과 공헌에 합당하게 예우하고 지원하기 위한 것’이다.

해당 법안에는 ▲소년-소녀병 및 그 유족에 대한 위로금 지급 등에 관한 사항을 심의‧의결하기 위해 국방부 장관 소속으로 소년-소녀병 위로금 지급심의위원회를 설치 ▲6‧25전쟁 당시 병역의무 대상 연령이 아닌데 참전해 희생한 소년-소녀병과 그 유족에 대한 예우에 관한 사항을 규정 ▲소년-소녀병의 희생을 보상하기 위해 소년-소녀병 또는 그 유족에게 위로금 지급 ▲위로금 지급 심사를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 위원회가 검증 또는 조사를 할 수 있도록 함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소년-소녀병을 추모하고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한 추모비 및 추모기념관 건립 등 기념사업을 추진하도록 함 등의 내용이 들어가 있다.

임 의원은 “소년-소녀병들의 특별한 희생과 공헌에 합당한 예우가 시급하다. 소년-소녀병들의 명예회복은 물론 국민의 애국정신을 고취시키는 데 일익이 될 것인 만큼 조속한 법안 통과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강 의원은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친 어린 소년-소녀병들이 이제는 백발의 노인이 됐다. 남은 분도 2000여명이 되지 않는다. 21대 국회에서는 반드시 6‧25전쟁 참전 소년-소녀병들의 헌신과 희생에 대한 합당한 예우가 이뤄질 수 있도록 여야가 한마음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정부 조사기관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소년-소녀병 강제징집 사건을 조사하기로 결정했다. 만 17세 미만 소년-소녀들이 강제 징집되는 과정서 인권침해가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늦었지만…
시작된 조사

정영훈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국 국장은 “아동 소년병에 대해 법적 근거 없이 입대 혹은 징집시켜서 군 복무를 시킨 점은 인권을 침해한 것으로 봐 조사 개시를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진실규명 신청인인 하경환 변호사는 “지금이라도 대통령께서, 국무총리께서, 국방부 장관께서 어르신들을 직접 찾아뵙고 ‘너무나 죄송하고 감사하다’ 이 말씀을 꼭 드려주셨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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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인터뷰> ‘의장 오른팔’ 홍경의, 지금 조총련을 말하다

[단독 인터뷰] ‘의장 오른팔’ 홍경의, 지금 조총련을 말하다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김성민 기자 = 일본에는 약 수십만명의 재일동포들이 살고 있다. 이들 중 약 2만명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나 계열 단체에 몸담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중 ‘조선적’으로 분류돼 무국적자인 이들도 있다. 일본서 이들은 ‘눈엣가시’다. 어딜 가나 차별과 혐오로 둘러싸일 수밖에 없다. <일요시사>는 일본 현지서 조총련 간부 출신과 복수의 재일동포들을 만나 조총련의 상황을 들어봤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하 조총련)는 일본서 북한 정부를 대변하는 역할을 한다. 결성된 지 65년이 넘었으나 구성원이 2만5000여명 이하로 줄면서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북한 경제가 어려워진 데 이어 조총련에 등을 돌리기 시작한 이들이 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구성원들이 감내해야 하는 대북제재 압박 수위가 날이 갈수록 세지고 있다는 것이다. 퇴색된 위상 결집력 약화 홍경의 Free 2 Move(이하 F2M) 공동대표는 조총련 간부 출신이다. 과거 조총련 실세인 허종만 의장을 법적으로 보좌하며 10년 가까이 ‘브레인’ 역할을 담당했다. 북한을 수십차례 방문해 인권탄압 등을 지켜보기도 했다. 2000년 초, 홍 대표는 조총련 내부서 민주화 활동을 벌였다는 이유로 제명당해 인권단체인 F2M을 설립했다. 지난 15일 일본 오사카 현지서 <일요시사>와 만난 홍 대표는 조총련의 위상이 과거와는 달라졌다고 강조했다. 실제 지난 2018년 12월 기준 무국적자로 분류되는 ‘조선적’은 2만9559명이었으나 현재는 약 2만2000명 정도라고 한다. 지난 1965년 한·일 국교 수립 이후 일본에 거주하는 교포들의 생활 환경은 분열됐다. 먼저, 일본 당국은 국적을 취득하지 않고 있는 이들을 1947년 미군정 당시 편의상 만든 임시 국적인 조선적으로 분류했다. 현재 재일교포 중 대한민국 국적자는 41만여명이다. 조선적에 속한 이들은 해방 이후 분단된 조국 어느 한 편에 속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의 무관심 속에 북한 정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조총련과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굳어졌다. 현재 조총련 산하 학교로 알려진 조선학교는 해방 직후 조선말을 가르쳐야 한다는 1세대 재일동포들의 열망으로 시작됐다. 조선학교는 유엔군 최고사령부(GHQ) 군정과 일본 정부에 의해 한때 폐쇄됐다가 1950년대 중반 이후 재개됐다. 북한은 지난 1957년부터 교육지원에 나섰으나 한국 정부는 지원 요청을 거절했다. 조선학교는 조선적 인구 감소와 함께 줄어들어 2018년 기준 64개교, 7000여명의 학생이 남았다. 조선학교는 일본 전역에 유치원·초급·중급·고급학교가 있고, 대학은 도쿄에 조선대학교가 있다. 조총련 법적브레인 역할…20번 넘게 북한 출입 대북송금·마약 유통 행위 인권탄압 직접 확인 일본 내에는 3대 세습을 강행하는 김씨 일가의 독재정권을 지지하는 조선적 재일동포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여전히 존재한다. 다만, 남북 간 사상 대립이 과거보다 유연해지고 일본 귀화 혹은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 사례가 많아지면서 조선적 규모도 적어지는 추세다. 홍 대표는 “재일동포 새세대들이 과거처럼 국적이나 민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재일동포 사회도 4세나 5세들이 다수를 차지하면서 일본인과 국제결혼 등을 통해 일본으로 귀화를 택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조총련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해마다 수억달러의 자금을 북한에 송금했다. 한덕수 전 의장은 국회에 해당되는 최고인민회의 의원의 고위급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조총련계 기업들의 몰락, 일본 정부의 대북 제재와 감시, 탄압 강화 등으로 쇠락하기 시작했다. 북한 당국이 예전처럼 조총련을 대우하지 않는 이유다. 실제로 허 의장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면담을 신청했으나 거절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총련은 조직 운영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규모 채무로 인해 법적 권리를 내세울 수 없어 많은 본부 건물이 경매로 매각돼 협소한 장소로 이전되기도 했다. 특히 일본 정부가 북한과의 갈등을 겪으면서 조선학교를 고교 무상화 대상서 제외해 학교도 감소 추세에 접어들었다. 조총련 본부 역시 상황은 다르지 않다. 도쿄에 위치한 본부서 근무하는 사람은 수십명이지만, 급여가 지급되지 않아 부업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북한 정부는 경제적 위기에 봉착했을 때 조총련을 통해 불시에 필요한 자금을 ‘애국운동’으로 해결했다. 외화벌이 마이너스 예시로 대형 여객선 ‘만경봉 92호’와 ‘삼지연호’ 등이 있다. 일본 사행산업의 대표 격인 파친코도 조총련의 주요 사업 중 하나다. 홍 대표는 “1990년대부터 파친코를 통해 재정적 기반을 구축해 왔다. 조총련이 직접 운영한 파친코도 있으나 코로나 사태 이후 완전히 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는 사실상 폐교된 조선학교 부지나 학교 자체를 일본 기업에 매각한다. 부동산 사업의 일환으로 활동자금을 마련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며 “대부분 조선학교가 인적이 드문 곳이 아닌 도심에 있다. 일본 기업들이 기를 쓰고 매수하려고 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그는 “실제 조총련이 지난해 도쿄 중심지에 있는 조선학교를 이용해 700억원대 부동산 사업을 벌였다. 일본 당국이 행정적 지도권을 갖고 있어 조총련이 수백억원대 이익을 볼 수는 없지만 조총련 산하 부동산 회사 소속 관계자들이 수수료를 떼먹고 산다”고 주장했다. 홍 대표는 “일본 버블경제 당시 허 의장이 조총련 산하 금융기관인 조선은행을 통해 융자 받고 대북송금을 진행했다. 이때의 채권이 한국 원화로 따지면 5000억원에 육박하는 금액이었다. 일본의 경제 몰락 이후 조선은행도 빚을 졌다. 조총련 본부 건물 대부분은 융자의 저당으로 잡혀 있어 경매 등으로 소유권을 잃었다”며 “조총련 상근 직원들의 명의를 악용해 조선은행서 융자를 받아낸 경우도 존재한다”고 했다. 북한은 그간 내부서 생산한 금을 비롯한 희금속과 마약을 공개·비공개 경로를 통해 일본으로 반출한 후 외화로 전환해 반입했다. 희금속은, 함경남도 허천군에 위치한 상농광산이 대표적이다. 해마다 조총련에 보내는 교육원조비 명목 자금을 대기 위해 이 광산이 활용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을 비롯한 국제시장서 아주 인기가 높은 것으로 알려진 금은 조총련으로 먼저 유입돼 일부가 교육비로 활용되고, 대부분은 김 위원장 비자금 조성을 위해 다시 현금으로 반환된다. 보위부서 마약 지령 북한은 조총련 계열 동포들을 통해 일본에 대량의 마약을 유통하는 방법으로 자금을 확보하기도 했다. 북한의 만경봉호, 삼지연호, 청천강호 등 중앙당 6부(이하 작전부)가 운영하는 선박이 맡아 수행했지만, 대북 제재 이후에는 일부 민간 상선과 물고기 가공 및 운반선(1000t급 정도)을 통해 반입시켰다. 실제 지난 2000년대 중반 정찰국 소속 30대 남성이 마약 운반 지령을 받고 일본 조총련 계열 동포들에 전달한 후 약 3일간 체류하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당시 그는 북한 운반선의 기관실 엔진 아래 철통에 마약을 가착(용접)하고 도쿄 항구에 입항해 해양경찰 조사를 피했다. 이후 보트를 타고 접근한 조총련 관계자를 만나 마약을 전달하고 사례금 3000달러를 받았다고 폭로한 바 있다. 홍 대표는 “사례를 하나 들자면 90년 중반에 재일교포 5명 정도가 마약 유통 혐의로 구속된 적이 있다. 당시 일본 수사당국이 발견한 마약은 수십kg이었다. 체포됐던 한 관계자는 북한 보위부의 지시였다고 진술했다”며 “1990년대 무역사업을 하던 조총련 관계자들이 야쿠자를 끼고 마약을 팔아왔으나, 예나 지금이나 북한 정부 차원서 조총련에 조직적으로 마약을 유통하라고 직접 지시하지는 않는다. 북한의 활동 거점을 잃을 수 있는 그런 무모한 범죄행위는 시키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홍 대표는 “이런 북한과 조총련의 긴밀한 관계 때문에 내각정보조사실을 포함해 여러 일본 정보기관이 조총련 관계자들을 매수하고 포섭하려 안간힘을 쓴다”며 “일본 정보기관에 포섭된 것으로 의심받는 이들은 북한 보위부의 성격을 지닌 조총련 감사위원회 소속 직원들에게 미행과 감시를 당한다”고 말했다. 홍 대표는 북한 정부가 조총련을 과거처럼 대우하진 않지만, 관계를 포기하진 못한다고 단언했다. 일본과 북한 간 수교를 맺지 않은 상황서 관계까지 끊어버리면 외교·안보적 측면서 큰 손해기 때문이다. 홍 대표는 “일본 정부는 조총련을 통해 북한과 물밑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허 의장이 창구 역을 담당한다. 최근 조선대학교 학생 140명이 북한을 방문한 것도 무관치 않다”고 설명했다. 코로나 사태 이후 파친코 망하면서 자금난 “가족 못 본다” 북송 동포들 인질로 협박 그는 “재정위원장도 방문했다. 조총련 간부 활동자금을 관리하는 사람이다. 대북송금 등 경제 지원책에 대해 지시 받을 가능성이 있고 조총련이 얼마나 많은 외화를 확보했는지 윗선에 보고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방북 학생들이 1인당 500만엔이라는 큰돈을 들고 갔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 정도로 부유하지 않다. 학생 전부가 가족들을 만났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고 평가했다. 복수의 취재원들은 조선대 학생 일부만 가족을 만날 수 있게 허용됐고 친척의 자택을 방문하는 건 금지됐다고 전했다. 특히 일반 호텔이나 여관서의 생활도 금지됐다고 한다. 이동할 때는 조선대 관계자를 제외한 이들은 동행할 수 없다. 섣불리 이동하지 못할 정도로 경계를 철저히 해 외부와의 소통을 원천 차단한 셈이다. 홍 대표는 조선대 학생들이 방북했다고 해서 김 위원장에게 무조건적 충성을 각오했을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고 보고 있다. 홍 대표는 “조선학교와 조선대 학생의 절반 이상이 대한민국 국적자다. 무국적자인 이들도 일본 영주권을 갖고 있다. 단지 말과 역사를 배우기 위해서 조선학교를 다닌다. 물론 학내서 주체사상과 김정은 일가 찬양으로 가득한 교육이 진행되고 있으나 일상생활을 하면서 민주주의가 몸에 익는다. 현재 재일교포 10대와 20대는 정체성 혼란을 겪는 세대”라고 말했다. 한편, 조총련 내부에서는 북한 정부가 코로나 이후 일부 재일동포의 방북을 허용한 것을 두고 불만이 커지고 있다. 조총련 출신의 한 탈북민은 <일요시사>와의 인터뷰서 “북한 정부는 애초 재일동포를 지원할 생각이 없다. 그들이 가진 자원과 돈에만 관심이 있다”며 “아이들을 조선대학에 보내지 않겠다고 밝히는 부모들도 상당히 많다”고 했다. 포기는 못해 정체성 혼란 해당 관계자는 “북한 정부가 조총련을 포기하지 못하는 상황서 지원이라도 제대로 이뤄져야 하는데 그저 자금줄과 돈벌이 수단으로만 보기 때문에 희망이 없다고 느끼는 것”이라며 “일본이나 한국 국적을 취득하려는 학생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