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퍼주고 까인 윤석열정부 후폭풍

수출, 역사, 독도… 다 뺏기나

[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분명 ‘가는 말’은 고왔다. 윤석열정부는 ‘오는 말’도 고울 것으로 예상했지만, 아니었다. 일본 정부는 한일 정상회담 이후에도 태도 변화가 없다. 교역 정상화는 요원하다. 역사관과 영유권 인식은 여전히 퇴행적이다. 과거에 멈춘 일본 탓에 난감한 건 “미래로 가자”던 윤정부다. 국민 반발이 거세지는 가운데, 야당도 총공세에 나선 형국이다. 

“한일관계를 미래지향적으로 전환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됐다는 평가가 한일 양국은 물론이고 국제사회서도 공통되게 나오고 있다.” “한국 정부가 한일관계서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가 됐고 국제관계서도 주도적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일본인 마음을 여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지 않았나 생각한다.”

밝은 미래
어디로?

지난달 19일 대통령실은 한일 정상회담 성과에 대해 이같이 자평했다. 대통령실이 그린 ‘밝은 미래’는 불과 아흐레 만에 그 색이 바랬다. 지난달 28일 일본 문부과학성 교과서 검정심의회를 통과한 초등학교 역사 교과서 내용이 알려지면서다.

일본의 한반도 가해 역사에 관한 기술 일부가 개악됐다. 해당 교과서들은 내년부터 사용될 예정이다.

개정 교과서에선 조선·한국인이 겪은 고통에 관한 서술이 대거 삭제됐다. 이를테면 ‘일본문교출판’의 2019년 검정 교과서는 임진왜란을 설명한 대목에서 “조선 국토가 황폐해지고, 많은 조선인이 희생됐다”고 적었다.


반면 이번에는 “천하(일본)통일을 달성한 히데요시는 다음으로 중국(당시 명)을 정복하려고 두 차례에 걸쳐 중국을 따르고 있던 조선에 대군을 보냈다. 그러나 조선서 전쟁이 잘 진행되지 않아 큰 피해가 날 뿐이었다”고 서술했다.

과거엔 ‘피침략자’인 조선의 피해 상황에 주안점을 뒀지만, 이번엔 ‘침략자’인 왜군 피해에 초점을 맞춰 내용을 작성한 셈이다. 가해 사실을 부정·희석하려는 의도가 담겼다는 풀이가 나온다. 

한일 강제병합, 태평양전쟁 등 일본의 치부로 여겨지는 근현대사에서는 더 많은 내용이 삭제·변경됐다.

앞서 ‘도쿄서적’은 한일 강제병합 과정을 두고 “식민지가 된 조선의 학교에선 일본어 교육이 시작되는 한편, 조선의 역사는 가르치지 않아 사람들의 자긍심이 깊이 상처받게 됐다”고 기술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일본어 교육이 시작되는 한편, 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가르치는 것은 엄격히 제한됐다”고 비교적 간략히 적었다. 조선인의 민족적 상실감을 직접 언급한 부분이 빠졌다. 도쿄서적은 시장 점유율 과반을 차지한 출판사다. 

일 교과서 역사 왜곡 강화…“뒤통수” 비판 
독도 영유권 주장도 한술 더…외교부 항의

일본문교출판은 1923년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에 관한 기술 내용을 삭제했다. 이외에도 출판사들은 전쟁기간 자행된 조선인 징병과 강제징용에 대해서도 순화된 표현을 다수 채택했다.


반면 이들은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해서는 더욱 강경한 입장을 담았다. 기존에 독도를 ‘일본 영토’나 ‘일본 고유영토’로 섞어 지칭하던 것을 이번에 ‘일본 고유영토’로 통일했다.

일본문교출판은 6학년 사회 교과서(2019년 검정본)에서 ‘일본 영토’라고 적었지만, 이번에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수정했다. 이는 ‘독도는 역사상 한 번도 다른 나라 영토였던 적이 없다’는 일본 정부의 억지 주장이 더욱 명확히 관철된 결과다.

실제로 출판사 측은 수정 배경으로 “(일본 영토란 표현을)아동이 오해할 우려가 있어 ‘고유’란 표현을 추가했다”고 밝혔다.

관련 시각자료의 활용도 늘었다. 독도를 일본 지도에 포함시키는 방식이 주로 활용됐다.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로 표기하고, 일본의 배타적경제수역(EEZ)과 영해에 끼워 넣었다. 울릉도와 독도 사이에 경계선을 긋기도 했다.

자화자찬
열흘 만에…

한국인의 ‘역린’과도 같은 과거사 왜곡과 독도 영유권 주장이 동시에 이뤄졌다. 그간 국내 여론의 포화 속에서 일본을 두둔하는 듯한 자세를 취해왔던 정부도 이번만큼은 달랐다.

이날 오후 외교부는 구마가이 나오키 일본 대사 대리를 초치해 항의했다. 외교부는 “사적·지리적·국제법적으로 명백한 우리 고유의 영토인 독도에 대한 부당한 주장이 담긴 교과서를 일본이 또다시 검정 통과시킨 데 대해 강력히 항의한다”며 “독도에 대한 일본의 어떠한 주장도 수용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대통령실도 “대한민국 주권과 영토에 관해서는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취지의 별도 입장을 냈다.

하지만 여론의 분노는 금세 정부 책임론으로 옮겨붙었다. 윤정부가 ‘통 큰 양보’를 하고도 일본 측 태도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퍼주기만 하고, 받은 건 없다’는 비판이다. 며칠간 외교 성과를 자화자찬하던 여당과 정부 관계자들의 발언도 역풍을 부추겼다.

외교 전문가들의 혹평도 잇따랐다. 강창일 전 주일대사는 지난달 29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한일 외교에 대한 소견을 전했다.

강 전 대사는 전날 일본의 행보를 겨냥해 “화답은커녕 우리 뒤통수를 친 꼴”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한국 정부는 일본에 대해서 제대로 몰라서 잘못을 저질렀다”고 꼬집었다. 일본 사회의 특성을 고려하면 먼저 양보하는 정부 전략이 적절치 않았다는 주장이다. 

미래·주도 외치던 정부, 명분 실종에 난감
화이트리스트 복원도 요원…실리마저 놓칠라


그는 “일본 사회는 점점 더 우경화되고 있다. 그리고 자민당(일본 여당)도 그 세력들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며 “우리가 통 크게 대승적 결단을 내렸다고 했을 때, 이 사람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때렸더니 말 잘 듣는다’ 이런 식으로 인식을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들은)‘심하게 욕했더니 말 잘 듣더라’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겠나”라며 “그런 것(특징)을 면밀히 파악해서 대책을 냈어야 했는데 너무 쉽게 생각하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든다”고 설명했다.

설상가상으로 정부가 양보 명분으로 삼은 교역 규제 완화도 난항을 겪는 모양새다. 당초 양국은 정상회담서 교역 정상화에 뜻을 모았다. 이에 일본은 2019년 8월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한 것을 원상회복 하기로 했다.

한국 역시 같은 해 9월부로 일본을 화이트리스트서 배제한 것을 복구하고, 세계무역기구(WTO)에 일본을 제소한 건 역시 취하하기로 했다. 화이트리스트는 수출 절차 간소화 혜택을 주는 ‘백색국가’ 명단을 의미한다.

그런데 일본 측은 회담 이후 미온적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니시무라 야스토시 일본 경제산업상은 지난달 22일 기자회견서 “한국의 화이트리스트 복원을 신중히 판단하겠다”고 발언했다.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복원에는 시행령 개정 등 비교적 복잡한 절차가 요구되는데, 일본은 지금까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반면 우리 정부는 이미 복구 절차에 돌입했다. WTO 제소는 취하했고,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복귀 관련 고시 개정안은 지난달 23일부터 오는 12일까지 행정예고된 상태다.


정부는 이번에도 ‘선 조치 후 관찰’ 전략을 택했다. 대통령실은 지난달 27일 “우리 측이 할 수 있는 조치를 우리가 먼저 하고 그다음에 일본 측이 어떤 조치를 할지 지켜보겠다”고 밝혔다.

일각에선 지난달 말처럼 또다시 ‘뒤통수’를 맞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양보를 고수하는 정부 전략에 대한 불신도 점차 커지는 분위기다.

끌까지 
믿을까

정치권에선 한일관계에 대한 공방이 전면전으로 비화되고 있다. 여당은 일본 정부의 행보를 규탄하며 ‘정부 책임 덜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고, 야당은 국정조사까지 꺼내 들며 연일 공세 수위를 높이고 있다.

국민의힘 주호영 원내대표는 지난달 28일 국회서 열린 원내대책회의 이후 기자들과 만나 일본 교과서 검정에 대한 입장을 내비쳤다. 주 원내대표는 “일본의 잘못”이라며 “그게 무슨 한일정상회담 결과가 잘못돼 그렇다는 것은 인과관계가 전혀 없는 사항”이라고 선을 그었다.

송언석 원내수석부대표는 회의서 “역사 왜곡은 한일관계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한일 정상회담으로 양국이 관계 정상화에 물꼬를 텄는데, 새로운 변화에 대한 기대에 찬물을 끼얹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송 부대표는 “일본은 한일관계를 정상화하려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역사적 결단을 다시 한번 깊이 되새겨야 한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더불어민주당은 대통령 비판에 초점을 맞췄다.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면 즉각 일본에 사과를 촉구해야 한다”는 논리로 정부 압박에 나섰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이날 오전 경남 보궐선거 지원 유세에 참석해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교과서에 쓴다고 해도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 달라’고 말했던 대통령이 있었다”며 “이번에도 독도 이야기를 상대방은 했다는데 이쪽은 감감무소식”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교과서에 싣는다고 하면 ‘무슨 소리하냐’고 박차고 나와야 하는 것이 대한민국 대통령 아니냐”고 반문했다.

여 “일본 규탄” 야 “굴종 외교”
한일 정상회담 성과 다시 도마 위

박홍근 원내대표는 원내대책회의서 “윤 대통령이 피해 당사자, 다수 국민의 반대를 무릅써가며 독단과 오만으로 강행한 강제동원 제3자 배상 굴욕안의 대가가 바로 이것이었느냐”고 따져 물었고, 박성준 대변인은 “이것이 윤석열 대통령이 주장한 미래지향적 한일관계인가”라고 꼬집었다.

이어 박 대변인은 “여당 지도부는 더욱 한심하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한일정상회담의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윤 대통령의 굴종외교를 감싸기에 급급하다”면서 “윤 대통령은 일본의 적반하장에 대해 어찌할 것인지 답해야 한다”고 논평했다.

민주당은 한일 외교 전반에 걸친 국정조사를 추진하고 있다. 29일 ‘일제 강제동원 굴욕 해법 및 굴종적 한일정상회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요구서’를 제출했다. 

국정조사 범위로는 ▲제3자 변제안과 구상권 포기 과정 문제 ▲방일 중 독도·위안부 문제 거론 여부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제한 조치 해제 요구 여부 ▲WTO(세계무역기구) 제소 철회 과정 ▲지소미아(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정상화 문제 ▲화이트리스트 복원 이유 등이 거론됐다.

민주당은 국정조사와 동시에 관련 상임위서 개별·합동 청문회도 개최할 계획이다. 안팎으로 수세에 몰린 정부에게, 전문가는 ‘강단 있는 대응’과 ‘새로운 대책 모색’을 돌파구로 제시한다. 

강 전 대사는 “통 큰 양보만 계속하는 정부이니까 (이번에도)아무 문제 안 삼을 줄 알았는데 어저께 초치한 건 잘했다”며 “이것으로 끝나면 안 된다. 윤석열정부가 가다듬고 새로운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에이 설마∼”
감싸기 급급

그는 윤 대통령이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를 만나 ‘근린제국조항’ 부활을 요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근린제국조항은 ‘인근 아시아 여러 나라와의 관계에 관한 근현대의 역사적 사실에는 국제 이해와 국제 협조의 견지서 필요한 배려가 있어야 할 것’이라는 일본 문부과학성의 교과서 검정 기준 규정이다. 

일본의 역사 왜곡 자체 검열을 이끌어낼 조항으로 불렸지만, 현재는 일본 강경보수파의 반발로 유명무실화된 상태다. 윤 대통령 요청에 따라 해당 조항이 부활한다면, 성난 국내 여론의 반발도 잠재울 수 있을 것이란 관측이다.

<jeongun15@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후쿠시마 오염수 이해” 일본 보도 진실은?

일본의 한 언론이 지난달 17일, 윤석열 대통령이 스가 요시히데 전 일본 총리를 만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에 대해 “한국 국민의 이해를 구해나가겠다”고 말했다며 지난달 29일 보도했다.

반면 대통령실은 “근거 없는 오보”라면서 논란 차단에 나섰다.

이달 일본 <교도통신>은 한일관계 소식통을 인용해 “방일 중이던 윤 대통령과 스가 전 총리의 접견에 동석한 누카가 후키시로 전 일한의원연맹 회장이 한국 정부에 오염수 방류에 대한 이해와 2011년 원전 사고 이후 시행해온 일본산 수산물 수입 금지 조치를 철회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교도통신>은 보도에서 “윤 대통령이 ‘문재인 전 정권은 이해하는 것을 피해온 것 같다’며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국 국민의 이해를 구해나가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했다.

해당 보도가 국내로도 전해지면서 파장이 일었다.

이에 대통령실은 “근거 없는 오보”라고 보도 내용을 일축했다.

지난달 30일 MBC 보도에 따르면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한일 간 정서적 문제가 있기 때문에 별도의 과학적 조사가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라며 “국민의 안전과 건강을 위협하는 일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조했다.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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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계 캄보디아’ 정부 뒷북 내막

‘마계 캄보디아’ 정부 뒷북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캄보디아 대학생 피살 사건에 대한 정부의 뒷북 대응에 논란이 일고 있다.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급증했음에도 침묵한 것이다. <일요시사>가 최초 보도했던 보이스피싱 원조 김미영 팀장 탈옥 사건에 이어 주무부처의 소극 행정이 지속되고 있는 셈이다. 정부는 급히 대책을 마련 중이지만 ‘코리안데스크’가 능사는 아니라는 분석이 나온다. 캄보디아 당국에 구금된 한국인은 수백명이다. 스캠(사기) 산업에 연루된 수만 1000여명으로 추산된다. 일부는 불법행위라는 걸 알면서도 발을 들였다. 문제는 구금 시설에서 빠져나오려다가 인신매매를 당하거나 살해당하는 일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정부는 여러 사건을 인지했음에도 그저 피해자들에게 “기다리라”고만 했다. 감금 한국인 그들은 왜?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지난 15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한국인 대상 범죄 피해가 확산하는 캄보디아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앞서 정부는 지난 1월부터 8월까지 현지 공관에 접수된 감금 관련 신고는 약 330건, 외교부 공관 신고를 포함하면 약 550건인 것으로 파악했다. 대다수 사안이 처리된 가운데 현재 처리 중인 신고 건은 70여건이라고 위 실장은 설명했다. 위 실장은 “정부 차원에서 여러 대처를 하고 있지만, 캄보디아 내에서 범죄 대응은 본질적으로 캄보디아 주권 사안이기 때문에 우리가 대응하는 데 일정한 한계가 있다”며 “우리 국민 중 불법행위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발적으로 발을 들인 경우도 많다”고 설명했다. 최근 현지에서 고문당해 숨진 대학생의 시신 운구가 지연된 상황과 관련해서는 “유가족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공동 부검을 요구한 것과 관련이 있다”며 “캄보디아 측에서는 공동 부검이 흔치 않기 때문에 소화하려면 내부 절차가 있고, 내부 절차가 진행되는 데 시간이 소요됐다”고 부연했다. 위 실장은 현지 당국에 구금된 한국인 60명 송환 계획과 관련해서는 “빠른 시일 내 그분들을 서둘러서 데려오려는 입장”이라며 “항공편도 다 준비됐다”고 말했다. 돈이 급한 한국인들은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글을 보고 동남아로 향한다. 태국이나 라오스 및 캄보디아 국경지대서 피싱 조직에 납치당하면 빠져나오기 쉽지 않다. 현지 당국에 신고한다고 해도 오히려 살해 협박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캄보디아는 필리핀처럼 현지 수사기관 및 공무원들과 범죄조직 사이의 비리가 만연하다. 범죄조직 아지트를 당국이 확인해도 눈감아주는 경우가 다반사다. 현지 코리안데스크 있으나마나 똑같다? 유족·피해자에 “기다려라” 황당 대응 한 경찰 관계자는 “수감 중인 한국인이 다른 조직에 팔려가 인신매매가 벌어지거나 탈출을 시도하면 살해당하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캄보디아 피싱 조직은 대부분 중국계 갱단인 ‘흑사회’로 구성돼있다. 이들은 캄보디아 고위 공무원들에게 우리나라 돈 수억원을 상납한다. 매수된 공무원은 구속된 조직원을 빼주는 것은 물론, 경찰 급습 시점을 사전에 알려주기도 한다. 캄보디아 피싱 조직이 드러나기 시작한 건 필리핀과 태국에 주둔했던 흑사회 간부들이 캄보디아에 자리 잡기 시작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피싱 조직에 몸담았던 한 관계자는 “필리핀과 태국은 자본주의 국가다. 아무리 부패와 비리가 심해도 공산주의와 독재 국가 체제인 캄보디아보다 심하지 않다”며 “중국 갱단은 원래 필리핀에 자리 잡았다. 마약, 도박 범죄 등으로 여러 번 언급되자 4~5년 전부터 캄보디아에 모여들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캄보디아는 필리핀보다 공무원을 매수하는 비용이 싸다. 경찰관 한 명을 매수해 자신의 인터폴 수배 여부를 확인하는 등 수사 정보를 알기 위한 비용이 한국 돈으로 100만원이면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한국인 대상 범죄 급증에 대한 대책으로 캄보디아 ‘코리안데스크(한인 사건 전담반)’ 설치를 추진 중이다. 지난 10일 조현 외교부 장관이 쿠언폰러타낙 주한 캄보디아 대사를 외교부 청사로 불러 항의했다. 영사협의회에서도 코리안데스크 설치 협력을 요청하기도 했다. 경찰청도 최근 캄보디아와의 양자 협의에서 이를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코리안데스크는 경찰 협력관과 달리 대사관 등 외교 채널을 거치지 않고 현지 경찰과 소통할 수 있어 합동 수사에 용이하다. 국외도피사범을 추적하거나 한국인 범죄 피해를 파악할 때 교민 사회 등에서 관련 내용을 수집해 현지 경찰관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수사를 돕는다. 실종, 살해… 뒤늦게 논의 현지 경찰관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 국제형사사법공조나 인터폴(국제형사경찰기구) 등을 통한 공식 요청보다 빠르게 현지 수사가 가능하다. 필리핀에서 코리안데스크는 한국인을 상대로 자행된 청부살인 등 강력 사건 해결에 큰 역할을 했다. 캄보디아 공권력을 신뢰하기 어렵고 현지 치안이 열악한 점 등을 고려해볼 때 최우선 해결책으로 꼽히는 이유다. 국제 앰네스티는 지난 6월 보고서에서 캄보디아 내 범죄 산업이 성행한 원인이 “조직범죄와 부패한 공권력의 결합 구조”에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보·수사기관 안팎에서는 무의미한 조치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캄보디아 당국이 국제 공조에 소극적이기도 하지만 코리안데스크는 수사 권한이 없다는 게 핵심이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경찰청은 최근까지 캄보디아 당국에 20건의 국제 공조를 요청했으나 절반도 되지 않는 답변을 받았다. 특히 캄보디아 당국이 코리안데스크 설치를 세 차례 거부하기도 한 것으로 파악됐다. 코리안데스크 출신 한 경찰은 “필리핀은 우리나라 정부가 집요하게 압박해 코리안데스크를 설치한 이후 현지 경찰과의 협조가 가능해졌다. 협조가 된다고 해도 범죄자 송환이나 사건 조사가 이뤄지는 경우는 절반도 안 된다. 캄보디아는 더 힘들 것”이라고 평가했다. 경찰 파견 무의미? 이 경찰은 “정부 차원에서 강하게 압박을 넣어야 한다. 외교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국물도 없다’는 식의 각오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코리안데스크 설치가 불발될 경우의 수가 존재하는 만큼 경찰관 직무 파견 확대가 현실적 대안으로 거론된다. 파견 경찰관을 선발한 뒤 1년 단위로 재발령을 거쳐 최대 2~3년간 현지에서 근무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단기간에 경찰 주재관을 늘리는 게 쉽지 않은 게 이유다. 2021년 11월 가나 해군은 한국인이 승선한 어선을 위해 안전조치를 하고 있다. 선례도 있다. 앞서 정부는 러시아, 아르헨티나 등에 경찰 인력을 직무 파견했다. 2020년엔 가나 대사관에 해양경찰관을 직무 파견했다. 서아프리카 해역에 해적이 출몰하면서 한국인 선원 13명이 납치된 데 따른 조치였다. 정부는 외교 채널을 통해 가나 부처에 공식적으로 도움을 청하는 동시에 파견 경찰은 물밑에서 움직였다. 현지 해군, 경찰 관계자를 지속해 접촉하며 설득을 이어갔고, 가나에 주재하는 타국 외교 사절과도 교류하며 정보를 공유했다. 또 가나가 필요로 하는 컴퓨터 등 기자재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방식으로 호감을 얻으며 협의를 이어갔다고 한다. 이는 결국 가나 해군이 투입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소극 행정을 일삼는 우리 정부도 문제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위성곤 의원이 외교부와 행정안전부 등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행안부는 지난해 주캄보디아 대사관 경찰 주재관을 증원해달라는 외교부의 요청을 불승인했다. ‘해외 도주’ 황하나 프놈펜 잠적 단독 확인 인터폴·경찰 수배 피하려 피싱조직 연루설도 당시 행안부는 외교부 증원 요청을 불승인한 이유에 대해 “사건 발생 등 업무량 증가가 인력 증원 필요 수준에 못 미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캄보디아에서 발생한 한인 범죄 피해는 2022년 81건에서 2023년 134건, 지난해 348건으로 급증했다. 올해 상반기까지 확인된 범죄 피해는 303건에 달한다. 현재 주캄보디아 한국 대사관에서 근무 중인 경찰은 주재관 1명과 협력관 2명 등 총 3명이다. 그나마 이렇게 늘어난 인력도 애초 경찰 주재관 1명만 있다가 지난해 10월과 지난달 직무 파견 형태로 협력관을 1명씩 추가 투입한 데 따른 것이다. 위 의원은 “캄보디아에서 우리 국민이 잇따라 납치·감금 피해를 당하고 있음에도 당시 윤석열정부가 경찰 주재관 증원을 외면한 것은 명백한 잘못”이라며 “국민 안전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조차 거부한 이유를 이번 국정감사에서 반드시 따져 묻겠다”고 강조했다. 캄보디아는 범죄자들에게 천국이다. 필리핀에서 송환되지 않거나 자유롭게 탈옥해 붙잡히지 않은 텔레그램 ‘마약왕 전세계’ 박왕열과 보이스피싱 원조 김미영 팀장 박정훈 등이 그렇다. 국내에서 수차례 마약 사건의 중심에 섰던 황하나씨도 이들의 수법을 활용 중인 것으로 보인다. <일요시사>는 지난해부터 황씨가 인터폴 수배 대상에 오르자 태국과 필리핀, 캄보디아 등을 오간 사실을 확인하고 취재해 왔다. 실제로 황씨는 지난해 3월 <일요시사>와 전화 통화에서 “지금 태국에 있는데, 아파서 병원에 왔다.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황씨는 수년 전부터 화류계에 몸담거나 연예계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재벌가에 연결하는 일종의 브로커를 담당했다. 그로 인해 마약을 강제로 투약당하거나 피해 본 인물이 있을 정도다. 국내에서의 생활이 어려워진 황씨가 캄보디아에서 브로커 역할을 이어가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범죄자 천국 악당 은신처 인터폴에 체포되지 않으려 캄보디아 피싱 조직에 한국인 여성들을 공급한다는 것이다. 실제 캄보디아 공항에 도착한 한국인 20~30대 여성들은 납치된 이후 여권과 휴대전화를 빼앗겨 범죄 단지 ‘웬치’에 감금된다. 이 여성들은 대부분 유흥업소로 끌려간 것으로 알려졌다. ‘웬치’에는 현재 한국인 1000명 이상이 거주 중이다. 다만 이들의 범죄 연루 여부는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상황이다.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