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사건 75주년 특집> 광주가 부러운 제주의 한탄

“여기는 딴 나라입니까?”

[일요시사 정치팀] 정인균 기자 = “동굴에 숨어있던 3살배기 어린아이는 한 토벌대 대원에게 양다리를 잡혀 그대로 바위에 내쳐졌다. 바위에 머리를 부딪힌 아기는 그 자리서 두개골이 박살 나 즉사할 수밖에 없었다.” 제주 4·3 사건 당시 일어난 ‘빌레못 동굴 학살 사건’ 중 일부 내용이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갓난아이는 영문도 모른 채 경찰에게 다리를 붙잡혔고, 본인의 몸보다 한참 큰 바위에 내쳐져 죽임을 당했다.

불과 74년 전, 제주도에선 이 같은 잔혹한 살인이 섬 곳곳서 일어났다. 4·3사건 기간 동안, 3만여명의 양민들이 소리 없이 죽어갔고, 유족들은 오랜 세월 그들의 억울한 죽음을 알릴 수도, 추모할 수도 없었다.

자주독립을 실현하지 못한 대한제국 현대사는 실로 비참했다. ‘남의 손’에 맡겨진 한반도는 곧장 절반으로 갈라졌고, 얼마 후 한국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어야 했다. 전쟁이 끝나도 비극은 이어졌다. 남한은 미국에 기대어, 북한은 소련에 기대어 저마다의 독재 역사를 써내려갔다.

75년의 
세월이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표방한 대한민국은 대통령선거를 통해 이승만 박사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 전 대통령은 민주적으로 대통령에 선출됐으나 임기 8년을 채운 시점부터 독재자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본인의 임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법 선거 등을 동원해 임기를 계속 늘리려 했다. 독재정치에 지친 국민들은 결국 들고 일어났고, 4·19 혁명을 통해 이 전 대통령을 하야시켰다. 


이후 박정희·전두환정권의 군부 쿠데타와 독재가 이어지며 대한민국의 완전한 민주화는 계속 지연됐다. 수많은 지식인과 시민은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이 과정서 많은 시민들이 고문을 받아 죽임을 당하거나 간첩으로 몰려 사형에 처해졌다.

온당하지 못한 정권하에서 벌어진 부당한 죽음은 아직도 그 억울함이 풀어지지 않고 있다. 사건 발생 당시 압도적으로 강했던 국가권력이 진실을 은폐하고, 관련자들을 색출해 입을 막아버린 탓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또한 1980년대엔 ‘광주 폭동’으로 불리며 사람들에게 잘못 알려진 세월이 있었다. 1980년 5월18일 벌어진 광주 사태는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이 운동권 대학생과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국가 단위의 사건이었다.

당시 집계에 따르면 10일에 걸친 광주 민주화운동 기간 동안 사망자는 166명, 행방불명자는 54명, 후유증 사망자는 376명이 나왔다. 부상자는 수천명으로 알려졌고, 그 외의 재산피해 등은 정확히 집계된 것이 없다. 사건을 두 눈으로 목격한 광주 사건의 생존자들은 아직도 정신적·신체적 후유증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이 사태가 대외에 폭동으로 알려진 점은 광주시민을 두고두고 괴롭혔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었던 전두환정부는 광주에 북한 세력이 들어와 폭동을 일으켰고, 그것을 특수부대가 진압했다고 언론에 알렸다.

왜곡된 선전을 들은 대한민국 국민은 실제로 광주 사건이 폭동인 줄만 알았고, 수많은 죽음 또한 간첩과 북한으로부터 사주받은 불순분자들이 죽은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광주 사태로부터 약 8년이 지난 후에야 진실은 바로 세워지게 됐다. 

1988년 노태우정부 산하의 민주화합추진위원회는 광주 폭동을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했고, 이후 국회 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구성돼 ‘5·18 민주화 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통과됐다. 광주 폭동이 ‘공식적인’ 민주화운동이 되기까지 꼬박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것이다.


제주 4·3사건을 기억하는 이들은 제주도의 사건 또한 광주민주화운동처럼 다시 ‘올바르게’ 세워지길 원한다. 처음부터 잘못 알려지게 된 제주 4·3사건을 사람들에게 다시 알려 피해자들의 억울함이 풀어지길 원하는 것이다. 제주 4·3사건의 진실이 덜 알려지게 된 데엔 제주도의 자주성과 섬의 지리적 특성이 한몫했다.

독재 속에 죽어간 억울한 피해자들
비교적 덜 알려진 사건…그 이유는?

제주도는 오랜 세월 육지로부터 천대받아오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때는 조정서 밉보인 정치인들이 유배 오는, 고립된 지역으로 전국에 알려졌다. 제주도민들은 나름대로 철마다 각종 공물과 부역 등을 조정에 바쳤지만, 조정으로부터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아보지 못했다.

이 같은 대우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까지 이어졌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군부는 제주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해 군수물자와 전투기 등을 숨겨놓는 일종의 군사 거점으로 사용했다. 연합군은 그런 제주도를 일본의 군사시설로 인식했고, 주요 폭격지에 포함시켰다.

당시 벌어진 연합군의 수많은 포격과 일제의 약탈 흔적은 아직도 제주도 곳곳에 남아있다.

1945년 8월15일, 고통받던 제주도민들에게 드디어 해방의 날이 찾아왔다. 사람들은 거리로 뛰어나와 해방의 기쁨을 맛봤고, 곧 해방군이 내려와 일제를 몰아내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나 해방군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제주도가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바람에 미군이 한 달이나 늦게 군대를 보냈기 때문이다. 한 달간 제주도민들은 더욱 심해진 일제의 약탈을 견뎌야 했고, 부당한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야 했다. 이때 만들어진 게 ‘제주도 인민위원회’다. 

1945년 9월, 제주도에 도착한 미군은 다시 한번 제주도민들을 실망시켰다. 도민들에게 약탈을 서슴지 않았던 친일파들을 주요 요직에 다시 등용한 것이다. ‘사회주의 확장’을 막기에만 급급했던 미군은 친일 세력을 완전히 내치지 못했고, 이를 지켜본 도민들은 미군에게 큰 불만을 갖게 됐다.

그러던 중 ‘3·1 발포’ 사태가 터지게 됐다. 3·1절 기념행사를 갖기 위해 제주북초등학교 인근에는 3만명의 시민이 모였다. 좁은 골목에 수만명의 시민이 모이자 경찰은 긴장하게 됐고, 수백명의 경찰이 경비에 투입됐다.

그러나 현장은 매우 밀집됐고, 훈련되지 못한 경찰의 경비는 오히려 방해만 됐다. 복잡한 상황이 이어지던 중 결국 한 경찰의 기마에 어린아이가 치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어린아이를 치고 간 경찰은 그대로 ‘뺑소니’를 친 채 행렬 속으로 도망갔고, 이를 지켜본 시민들은 그런 경찰에게 돌을 던지며 따라갔다.

비참한
현대사

당시 경찰에 대한 반감이 깊었던 도민들이 하나둘 돌팔매질에 합류하며 사태는 더욱 커지게 됐다. 경찰 지도부는 이를 진압하라며 시위대에 발포를 허가했고, 6명의 무고한 시민이 경찰의 총격에 목숨을 잃었다. 이때 사망한 사람 중에는 한살배기 젖먹이도 있었고, 아이를 지키려던 21세의 젊은 여성도 있었다.


6명의 시민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자 제주도민들은 경찰과 미군부에 대한 반감이 더욱 심해졌고, 제주도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이들에 대한 저항운동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3·1 발포사건에 대해 조직적으로 저항하기 위해 제주도민은 ‘3·10 총파업’을 단행했다. 166개 단체와 자영업자, 경찰, 기자, 공무원 등 총 4만여명의 인원이 파업에 참여하며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3·10 파업’을 지켜본 미군과 경찰 간부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더욱 큰 공권력을 동원하기로 결정했다. 응원 경찰을 제주도에 더욱 부르게 된 것이다.

이때 들어온 무리 중엔 악명 높은 ‘서북청년회’도 있었다. 서북청년회는 말 그대로 한반도의 서북부서 살던 인물들로 사회주의 세력에게 재산을 모두 뺏겨 북한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던 집단이었다.

당시 미군부와 경찰 책임자들은 이들에게 ‘좌익 세력을 토벌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들은 제주도에 도착해 무차별적인 검거와 고문을 이어나갔다. 

서북청년회의 폭거를 견디다 폭발한 제주도민들은 1948년 4월3일 남로당 제주도당의 주도 아래 하나로 뭉치게 됐고 결국 ‘경찰과 서청의 탄압중지’와 ‘단독선거’ 등을 주장하며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이것이 제주 4·3 사건의 대략적인 전개 과정이다.


일반 시민들로 이뤄진 무장대는 결국 중앙정부서 파견한 토벌대로부터 피의 보복을 당하게 된다. 중앙정부와 미군정의 눈에는 모든 제주도민들이 사회주의 세력에 세뇌된 폭도 세력으로 보였고, 도민들은 제주지역 곳곳서 죽임을 당했다.

1954년에 가서야 멈춘 학살은 약 3만명의 사망자를 냈다. 당시 제주 인구가 30만여명이었으니, 약 7년간 제주도민의 약 10%가 제주 4·3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셈이다. 

지난 70년간 제주도에 있었던 이 비극은 대외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사건 자체가 너무 오래된 탓이기도 하고, 당시 비극을 겪은 유가족이 수십년의 세월 동안 입 밖에 내놓지 않은 탓이기도 하다. 유가족은 ‘연좌제’에 대한 공포 때문에 해당 사실을 대외에 알릴 수 없었다고 전한다.

강병삼 제주시장도 제주 4·3 사건의 유가족이다. 강 시장의 큰아버지는 당시 4·3 사건에 휘말려 감옥에 체포된 뒤, 서울로 이송돼 행방불명됐다.

반복되는
기대·실망

강 시장은 <일요시사>와의 인터뷰서 “아버지의 형님이 제주 사건이 벌어진 당시 토벌대에 끌려가 돌아오지 못하셨다”고 담담하게 운을 뗀 뒤 “아버지에게 전해 듣기로는 (토벌대가 큰아버지에게)어느 학교에 모이라고 했다더라. 그런데 당시 ‘모이면 죽는다’는 소문이 퍼져 있어 큰아버지는 그대로 산으로 들어가셨다”고 말했다.

이어 “그랬는데 (토벌대 측에서)사면해준다고 산에서 내려오라고 거짓말했고, 큰아버지를 포함해 그때 내려간 사람들은 전무 죽임을 당하거나 그대로 형무소로 끌려갔다. 큰아버지는 마포 형무소에 도착했다는 편지를 보냈지만, 그 이후 소식은 아직도 접하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강 시장은 이 같은 큰아버지에 관한 사연도 본인이 20대 후반이 된 후에야 부친에게 전해 들었다고 한다. 그는 군부 독재가 계속되는 상황서 4·3 사건 유가족이 쉽게 이 문제를 공론화시킬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마 그런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연좌제가 무서워서 가족관계를 다르게 신고하는 경우도 허다했다”며 “그런 세월이 매우 오래 지나게 됐으니 아직도 4·3 사건을 잘 모르는 이가 많은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제주4·3 평화재단’ 관계자 또한 비슷한 이야기를 전했다.

재단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전화 통화서 “광주민주화운동은 제주 사건보다 40년 뒤에 일어난 비교적 최근 사건이다. 그런 사건도 바로잡는 데 10년이 걸렸는데, 75년 전 사건을 바로잡는 데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겠느냐”고 반문했다.

연좌제 공포로 지워진 진실
끊임없이 싸워가는 도민들

이어 “김대중 대통령이 발의한 ‘제주 4·3 사건 특별법’ 이후에야 본격적인 법제화 노력이 시작됐다.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강 시장과 재단 관계자는 제주 4·3 사건 전국화의 또 다른 장애물로 극우 단체의 과도한 폄훼 시위를 들었다. 강 시장은 “현재 여기 제주도 곳곳에 현수막이 걸려 있다. 4·3 사건을 폄훼하려는 시도들이 있는 것”이라며 “그 사람들이 이른바 빨갱이 폭동이며 4·3 사건의 전국화를 방해하고 있다. 특정 개인일 때도 있고 정당일 때도 있다”고 전했다.

재단 관계자도 “소위 극우 세력이라고 하는 곳에서 지속적으로 폄훼하고 있다. 올해는 특히 4·3 사건 학살의 한 축이었던 서북청년단이 4월3일 추념식 행사장 인근서 집회를 하겠다고 하는 등 역사왜곡 행위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또 사건 생존 당사자들이 하나둘 세상을 등지고 있는 점도 사건을 전국으로 알리는 데 큰 저해요소로 꼽힌다. 4·3 사건의 전국화, 법제화가 1년, 2년 지연될 때마다 법정에 나와 생생한 증언을 해줄 생존 피해자들이 계속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강 시장은 “4·3 사건의 생존 피해자분들의 연세가 많아서 자료를 더 확보하고 기록을 남겨놔야 한다”며 “그러기 위해선 지속적인 교육도 필요하다. 지금 제주대학교 쪽과 제주도청이 협의해 청년 세대에 제주 4·3 사건을 교육하고 그런 사람들을 키우는 일을 진행하려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지속적인 교육과 홍보는 제주 4·3 평화재단서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분야 중 하나다.

재단 관계자는 “4·3 사건의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평화와 인권의 기억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또 이제는 4·3 당시 제주도민들이 가졌던 열망이 무엇인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며 “지금의 시각이 아닌 당대의 시각서 한반도의 분단을 반대했던 목소리를 잊어선 안 되며 이를 다음 세대의 기억으로 가져가야 한다”고 전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7년 제주 4·3 사건 위령제에 참석해 대통령으로선 최초로 제주도민에게 사과의 뜻을 전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 자리서 “오랜 세월 말로 다 할 수 없는 억울함을 가슴에 감추고 고통을 견뎌오신 유가족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몇몇 4·3 사건 피해자와 유가족은 바닥에 엎드려 통곡했고, 눈물을 훔치며 노 전 대통령에게 박수로 화답했다.

드러나는
진실들

2019년 1월17일에는 제주지방법원이 제주 4·3 사건 생존 군사재판 수형인 18명에게 공소 기각 판결을 내려 사실상 무죄를 선고했다. 제주 사건 관련한 최초의 무죄 판결이었다.

연좌제에 대한 두려움으로, 극우 세력의 지속적인 폄훼 공작으로 가려져 있었던 제주 4·3 사건의 진실이 이제 세상 밖에 나오려 한다. 오래된 세월 만큼 그 과정이 쉽지는 않겠지만, 제주도민들은 지금도 광범위한 홍보 및 교육과 끈질긴 법정 싸움으로 이 싸움을 이겨내려 하고 있다.
 

<ingyun@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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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년 만에 해체’ 검찰 분해 전조

‘78년 만에 해체’ 검찰 분해 전조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검찰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한때 정부의 ‘칼’ 역할을 맡아 위세를 떨쳤던 검찰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면서 우리나라는 또 한 번 가보지 않은 길을 가게 됐다. 검찰청이 완전히 폐지되기까지 유예기간은 1년. 검찰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살펴봤다. 검찰은 새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그 쓰임새가 달라졌다. 개혁의 도구로 이용되기도 했고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한 적도 있다. 칼로 쓰이면서 동시에 고쳐야 할 기관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정부도 검찰의 존재 자체를 지우진 못했다. 견제 기관을 만들어 권한을 축소한 적은 있지만 ‘폐지’를 가시화한 적은 없었다는 뜻이다. 대통령 의지 당이 화답? 지난달 26일 검찰청을 폐지하고 기획재정부를 분리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개정안에 따라 검찰청은 설립 78년 만에 문을 닫게 됐다. 검찰청 업무 중 수사는 중대범죄수사청(이하 중수청), 기소는 공소청이 맡는다. 중수청은 행정안전부 장관, 공소청은 법무부 장관 소속으로 정해졌다. 검찰청 폐지와 중수청·공소청 설치에는 1년 유예기간을 두기로 했다. 지난달 30일 개정안이 국무회의에서 의결되면서 검찰청 폐지는 내년 10월로 정해졌다. 내년 10월1일에 법률안이 공포되고 이튿날인 10월2일 중수청·공소청이 설치되는 것이다. 문재인정부가 검찰의 권한을 줄이는 방향으로 검찰개혁을 본격화한 데 이어 이재명정부에서 검찰 폐지를 결정하면서 진보 정부의 숙원이 이뤄졌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이정부 출범 직후부터 검찰청을 폐지하겠다는 뜻을 드러냈다. 검찰의 수사‧기소 업무를 분리하고 수사권 등은 신설 기관으로 이관하겠다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가 취임한 이후부터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정 대표는 당 대표 선거 전부터 “추석 전 처리”를 공공연하게 말해왔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국무회의에서 “검찰이 되도 않는 것을 기소해 무죄를 받고 나면 면책하려고 항소하고, 상고하면서 국민한테 고통을 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형사소송법에 ‘10명의 범인을 놓쳐도 1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면 안 된다’는 말이 있다”며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 무죄추정의 원칙(으로 하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혹시 무죄거나 무혐의일 수 있으면 기소하지 말라는 것”이라며 “(검찰이) 마음에 안 들면 기소해서 고통을 주고 자기 편이면 죄가 명확한데도 봐주면서 기준이 다 무너졌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정성호 법무부 장관에게 “1심이 무죄라고 했는데 (검찰이) 무조건 항소해서 유죄로 바뀌면 타당한가”라며 “검찰이 1심에서 무죄 난 사건을 항소해서 유죄로 바뀔 가능성이 얼마나 되나”라고 물었다. 정부조직법 개정안 통과 내년 10월 폐지 확정돼 정 장관이 ‘5% 정도’라고 답하자 이 대통령은 “95%는 무죄를 한 번 더 확인하기 위해서 항소심으로 생고생한다는 말”이라며 “나중엔 무죄는 났는데 집안이 망했다, 이거 윤석열 대통령이 한 말 아닌가”라고 했다. 또 “국가가 왜 이리 국민한테 잔인한가”라며 “인류 수천년 역사에서 경험으로 정한 역사가 있다. 의심스러우면 피고인 이익으로 하라는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검찰청 폐지를 바라보는 정치권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린다. 검찰개혁을 숙원으로 여겼던 여권에선 일제히 ‘환영’의 뜻을 보였다. 반면 국민의힘은 민주당의 ‘일방 독주’라고 비판했다. 실제 정부조직법 개정안은 국민의힘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퇴장하면서 민주당 주도로 표결이 진행됐다. 민주당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정부조직법 개정안 본회의 의결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김대중 대통령님에게 사형을 구형했고 노무현 대통령님을 죽음으로까지 내몰았던 정권의 칼, 검찰은 이제 사라졌다”며 “역사적인 날이다. 검찰청이 78년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고 말했다. 박 대변인과 함께 기자간담회를 진행한 민주당 한정애 정책위의장은 “78년이라는 세월 사이 우린 여러 번에 걸친 개혁의 후퇴, 개혁의 좌절을 맛보기도 했다”며 “이제는 그 길을 다시 가지 않겠다고 하는 개혁 의지가 제대로 발현된 정부조직법”이라고 개정안을 평가했다. 표결에 불참한 국민의힘은 강하게 반발했다. 국민의힘 최보윤 수석대변인은 “이재명정권이 끝내 검찰청을 없앴다. 이는 간판을 바꾼 문제가 아니라 국민을 지켜주던 마지막 사법 안전망을 무너뜨린 폭거”라며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건 사회적 약자”라는 내용의 논평을 냈다. 그러면서 “그 공백은 가장 약한 곳에서부터 드러난다. 아동 학대, 장애인 대상 범죄, 노인 학대 사건은 피해자가 말문을 열기 어렵고 증거는 금세 사라진다”며 “예전에는 빠진 단서를 보완하고 잘못된 수사를 되돌릴 두 번째 기회가 있었지만 이제 그 문이 닫혔다”고 비판했다. 검사들은 집단 반발 하루아침에 조직이 사라지게 된 검찰 내부는 참담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노만석 검찰총장 직무대행은 정부조직법 개정안에 위헌 소지가 있다는 입장이다. 노 대행은 지난달 29일 검찰 구성원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78년간 국민과 함께해 온 검찰이 충분한 논의나 대비 없이 폐지되는 현실에 총장 직무대행으로서 매우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이어 “헌법상 명시된 검찰을 법률로 폐지하는 것은 위헌 소지가 있다”고 밝혔다. 역대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들도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명백한 위헌”이라면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들은 “헌법은 89조에서 검찰총장 임명에 대해, 또한 제12조와 제16조에서는 검사의 영장 청구권에 대해 명백히 규정하고 있다”며 “이런 규정은 헌법의 삼권분립의 원칙에 따라 정부의 준사법기관인 검찰청을 둔다는 것을 명백히 한 것이므로 이를 폐지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설명했다. 검사들 사이에서도 동요가 상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이정부 1호 법안인 3대 특검법을 통해 발동한 특검에 파견된 검사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상황이다. 법조계에 따르면 현재 3대 특검팀에는 110명의 검사와 99명의 검찰 수사관이 파견돼있다. 김건희 특검팀에는 40명, 내란 특검팀과 채 상병 특검팀에는 각각 56명, 14명의 검사가 근무하고 있다. 김건희 특검팀과 내란 특검팀에 파견된 검사 수를 보면 웬만한 일선 검찰청 검사 정원 규모와 비슷한 수준이다. 이 가운데 김건희 특검팀에 파견된 검사들이 “검찰청으로 복귀하겠다”고 요청한 사실이 드러났다. 정부조직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 국무회의 의결에 대한 집단 반발로 해석된다. 위헌 주장 헌재 가나 검사들은 지난달 30일 민중기 특검에게 입장문을 제출했다. 입장문에는 정부여당의 검찰개혁 핵심은 ‘수사와 기소의 분리’ ‘검찰의 직접 수사 금지’인데 특검에 검사들이 남는 건 모순이라는 취지의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여권이나 시민사회 단체 등에서는 ‘자업자득’이라는 의견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검찰이 정권의 입맛에 따라 칼을 휘두르면서 현재 상황을 자초했다는 지적이다. 권력의 방향에 따라 태도를 달리하는 검찰에게 수사권과 기소권을 동시에 줄 수 없다는 의지가 이번 정부조직법 개정안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는 설명이다. 실제 진보 정부에서는 오랜 시간 검찰의 권한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개혁을 시도해 왔다. 본격화된 것은 문정부 때부터지만, 그 시발점은 김대중·노무현정부 때라고 봐야 한다. 검·경 수사권 조정,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설립 등 검찰개혁의 핵심 방안들은 다 그 시기에 나왔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의 검찰개혁은 실패했다. 검찰의 반발이 대단했고 당시 정치권에 대한 전방위적인 수사를 진행하면서 이들의 위세도 엄청났다. 실질적인 검찰개혁이 이뤄진 건 문정부 들어서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검찰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커졌고 국민 여론도 정부에 힘을 더했다. 문정부에서 검찰은 ‘적폐 청산’의 칼로 기능하면서 동시에 개혁 대상으로 지목됐다. 검·경 수사권 조정이 이뤄졌고 공수처가 출범했다. 문제는 검찰개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내부 출혈이 상당했다는 점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박근혜정부에서 국가정보원 댓글 수사 이후 한직으로 좌천돼있던 윤석열 전 대통령을 서울중앙지검장, 검찰총장으로 연이어 영전시켰다. 진보 정부의 숙원 노·문 거쳐 결말 이는 향후 문정부를 뒤흔들었던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 간의 갈등, 윤 전 대통령의 대선 출마, 당선 등의 불씨가 됐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관련 의혹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을 떨구기도 했다. 조 전 장관의 뒤를 이어 취임한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은 윤 전 대통령과 정면으로 출동했다. ‘추·윤 대전’이라는 표현이 1년 내내 언론에 오르내릴 정도였다. 이 과정에서 검찰개혁은 흐지부지됐다. 법안이 급하게 처리되면서 ‘누더기’라는 지적이 잇따랐고 우여곡절 끝에 출범한 공수처는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했다. 특정 사건에 대한 수사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등을 두고 기관끼리 갈등을 빚는 일도 일어났다. 경찰에 수사가 몰리면서 재판이 지연되는 일도 벌어졌다. 문정부의 검찰개혁을 ‘반쪽짜리’라고 평가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이후 이정부는 아예 검찰청을 없애겠다는 뜻을 품고 임기를 시작했다. 대선후보 때는 물론 윤석열정부 시기 내내 ‘사법 리스크’에 시달렸던 이 대통령은 검찰에 대판 비판적인 시각을 줄곧 드러낸 바 있다. 그리고 이 대통령의 뜻은 민주당을 거쳐 법안을 통해 실현됐다. 물론 과제는 산적해 있다. 당장 보완수사권 문제를 두고 이견이 있고 중수청과 공소청을 어떻게 운영할지 세밀하게 구상되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검찰은 보완 수사권을 존치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검사가 경찰의 기록만 갖고 기소 여부를 판단하면 부실 기소, 불기소 남발 등으로 국민에게 피해가 돌아갈 수 있다는 게 주장의 배경이다. 또 검찰에 집중된 권한을 분산하기 위해 개혁을 진행했지만, 이 과정에서 또 다른 기관이 비대해지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실제 일각에서는 이름만 다른 ‘검찰’이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검찰이 정권의 칼로 기능했던 것처럼 다른 이름의 ‘칼’이 등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걱정이다. 산적한 과제 후폭풍 남아 검찰은 꽤 오랜 시간 외줄 위에 서 있던 상황이다. 이정부가 그 줄을 끊으면서 검찰은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검찰에 대한 경고는 늘 있었고 전조도 뚜렷했다. 이제 후속조치를 두고 정치권은 물론 사회가 시끄러워질 전망이다. 검찰 해체가 가져올 후폭풍은 국민에게 언제쯤 닿을 것인가.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