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사건 75주년 특집> 광주가 부러운 제주의 한탄

“여기는 딴 나라입니까?”

[일요시사 정치팀] 정인균 기자 = “동굴에 숨어있던 3살배기 어린아이는 한 토벌대 대원에게 양다리를 잡혀 그대로 바위에 내쳐졌다. 바위에 머리를 부딪힌 아기는 그 자리서 두개골이 박살 나 즉사할 수밖에 없었다.” 제주 4·3 사건 당시 일어난 ‘빌레못 동굴 학살 사건’ 중 일부 내용이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갓난아이는 영문도 모른 채 경찰에게 다리를 붙잡혔고, 본인의 몸보다 한참 큰 바위에 내쳐져 죽임을 당했다.

불과 74년 전, 제주도에선 이 같은 잔혹한 살인이 섬 곳곳서 일어났다. 4·3사건 기간 동안, 3만여명의 양민들이 소리 없이 죽어갔고, 유족들은 오랜 세월 그들의 억울한 죽음을 알릴 수도, 추모할 수도 없었다.

자주독립을 실현하지 못한 대한제국 현대사는 실로 비참했다. ‘남의 손’에 맡겨진 한반도는 곧장 절반으로 갈라졌고, 얼마 후 한국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어야 했다. 전쟁이 끝나도 비극은 이어졌다. 남한은 미국에 기대어, 북한은 소련에 기대어 저마다의 독재 역사를 써내려갔다.

75년의 
세월이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표방한 대한민국은 대통령선거를 통해 이승만 박사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 전 대통령은 민주적으로 대통령에 선출됐으나 임기 8년을 채운 시점부터 독재자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본인의 임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법 선거 등을 동원해 임기를 계속 늘리려 했다. 독재정치에 지친 국민들은 결국 들고 일어났고, 4·19 혁명을 통해 이 전 대통령을 하야시켰다. 


이후 박정희·전두환정권의 군부 쿠데타와 독재가 이어지며 대한민국의 완전한 민주화는 계속 지연됐다. 수많은 지식인과 시민은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이 과정서 많은 시민들이 고문을 받아 죽임을 당하거나 간첩으로 몰려 사형에 처해졌다.

온당하지 못한 정권하에서 벌어진 부당한 죽음은 아직도 그 억울함이 풀어지지 않고 있다. 사건 발생 당시 압도적으로 강했던 국가권력이 진실을 은폐하고, 관련자들을 색출해 입을 막아버린 탓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또한 1980년대엔 ‘광주 폭동’으로 불리며 사람들에게 잘못 알려진 세월이 있었다. 1980년 5월18일 벌어진 광주 사태는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이 운동권 대학생과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국가 단위의 사건이었다.

당시 집계에 따르면 10일에 걸친 광주 민주화운동 기간 동안 사망자는 166명, 행방불명자는 54명, 후유증 사망자는 376명이 나왔다. 부상자는 수천명으로 알려졌고, 그 외의 재산피해 등은 정확히 집계된 것이 없다. 사건을 두 눈으로 목격한 광주 사건의 생존자들은 아직도 정신적·신체적 후유증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이 사태가 대외에 폭동으로 알려진 점은 광주시민을 두고두고 괴롭혔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었던 전두환정부는 광주에 북한 세력이 들어와 폭동을 일으켰고, 그것을 특수부대가 진압했다고 언론에 알렸다.

왜곡된 선전을 들은 대한민국 국민은 실제로 광주 사건이 폭동인 줄만 알았고, 수많은 죽음 또한 간첩과 북한으로부터 사주받은 불순분자들이 죽은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광주 사태로부터 약 8년이 지난 후에야 진실은 바로 세워지게 됐다. 

1988년 노태우정부 산하의 민주화합추진위원회는 광주 폭동을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했고, 이후 국회 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구성돼 ‘5·18 민주화 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통과됐다. 광주 폭동이 ‘공식적인’ 민주화운동이 되기까지 꼬박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것이다.


제주 4·3사건을 기억하는 이들은 제주도의 사건 또한 광주민주화운동처럼 다시 ‘올바르게’ 세워지길 원한다. 처음부터 잘못 알려지게 된 제주 4·3사건을 사람들에게 다시 알려 피해자들의 억울함이 풀어지길 원하는 것이다. 제주 4·3사건의 진실이 덜 알려지게 된 데엔 제주도의 자주성과 섬의 지리적 특성이 한몫했다.

독재 속에 죽어간 억울한 피해자들
비교적 덜 알려진 사건…그 이유는?

제주도는 오랜 세월 육지로부터 천대받아오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때는 조정서 밉보인 정치인들이 유배 오는, 고립된 지역으로 전국에 알려졌다. 제주도민들은 나름대로 철마다 각종 공물과 부역 등을 조정에 바쳤지만, 조정으로부터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아보지 못했다.

이 같은 대우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까지 이어졌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군부는 제주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해 군수물자와 전투기 등을 숨겨놓는 일종의 군사 거점으로 사용했다. 연합군은 그런 제주도를 일본의 군사시설로 인식했고, 주요 폭격지에 포함시켰다.

당시 벌어진 연합군의 수많은 포격과 일제의 약탈 흔적은 아직도 제주도 곳곳에 남아있다.

1945년 8월15일, 고통받던 제주도민들에게 드디어 해방의 날이 찾아왔다. 사람들은 거리로 뛰어나와 해방의 기쁨을 맛봤고, 곧 해방군이 내려와 일제를 몰아내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나 해방군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제주도가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바람에 미군이 한 달이나 늦게 군대를 보냈기 때문이다. 한 달간 제주도민들은 더욱 심해진 일제의 약탈을 견뎌야 했고, 부당한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야 했다. 이때 만들어진 게 ‘제주도 인민위원회’다. 

1945년 9월, 제주도에 도착한 미군은 다시 한번 제주도민들을 실망시켰다. 도민들에게 약탈을 서슴지 않았던 친일파들을 주요 요직에 다시 등용한 것이다. ‘사회주의 확장’을 막기에만 급급했던 미군은 친일 세력을 완전히 내치지 못했고, 이를 지켜본 도민들은 미군에게 큰 불만을 갖게 됐다.

그러던 중 ‘3·1 발포’ 사태가 터지게 됐다. 3·1절 기념행사를 갖기 위해 제주북초등학교 인근에는 3만명의 시민이 모였다. 좁은 골목에 수만명의 시민이 모이자 경찰은 긴장하게 됐고, 수백명의 경찰이 경비에 투입됐다.

그러나 현장은 매우 밀집됐고, 훈련되지 못한 경찰의 경비는 오히려 방해만 됐다. 복잡한 상황이 이어지던 중 결국 한 경찰의 기마에 어린아이가 치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어린아이를 치고 간 경찰은 그대로 ‘뺑소니’를 친 채 행렬 속으로 도망갔고, 이를 지켜본 시민들은 그런 경찰에게 돌을 던지며 따라갔다.

비참한
현대사

당시 경찰에 대한 반감이 깊었던 도민들이 하나둘 돌팔매질에 합류하며 사태는 더욱 커지게 됐다. 경찰 지도부는 이를 진압하라며 시위대에 발포를 허가했고, 6명의 무고한 시민이 경찰의 총격에 목숨을 잃었다. 이때 사망한 사람 중에는 한살배기 젖먹이도 있었고, 아이를 지키려던 21세의 젊은 여성도 있었다.


6명의 시민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자 제주도민들은 경찰과 미군부에 대한 반감이 더욱 심해졌고, 제주도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이들에 대한 저항운동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3·1 발포사건에 대해 조직적으로 저항하기 위해 제주도민은 ‘3·10 총파업’을 단행했다. 166개 단체와 자영업자, 경찰, 기자, 공무원 등 총 4만여명의 인원이 파업에 참여하며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3·10 파업’을 지켜본 미군과 경찰 간부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더욱 큰 공권력을 동원하기로 결정했다. 응원 경찰을 제주도에 더욱 부르게 된 것이다.

이때 들어온 무리 중엔 악명 높은 ‘서북청년회’도 있었다. 서북청년회는 말 그대로 한반도의 서북부서 살던 인물들로 사회주의 세력에게 재산을 모두 뺏겨 북한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던 집단이었다.

당시 미군부와 경찰 책임자들은 이들에게 ‘좌익 세력을 토벌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들은 제주도에 도착해 무차별적인 검거와 고문을 이어나갔다. 

서북청년회의 폭거를 견디다 폭발한 제주도민들은 1948년 4월3일 남로당 제주도당의 주도 아래 하나로 뭉치게 됐고 결국 ‘경찰과 서청의 탄압중지’와 ‘단독선거’ 등을 주장하며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이것이 제주 4·3 사건의 대략적인 전개 과정이다.


일반 시민들로 이뤄진 무장대는 결국 중앙정부서 파견한 토벌대로부터 피의 보복을 당하게 된다. 중앙정부와 미군정의 눈에는 모든 제주도민들이 사회주의 세력에 세뇌된 폭도 세력으로 보였고, 도민들은 제주지역 곳곳서 죽임을 당했다.

1954년에 가서야 멈춘 학살은 약 3만명의 사망자를 냈다. 당시 제주 인구가 30만여명이었으니, 약 7년간 제주도민의 약 10%가 제주 4·3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셈이다. 

지난 70년간 제주도에 있었던 이 비극은 대외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사건 자체가 너무 오래된 탓이기도 하고, 당시 비극을 겪은 유가족이 수십년의 세월 동안 입 밖에 내놓지 않은 탓이기도 하다. 유가족은 ‘연좌제’에 대한 공포 때문에 해당 사실을 대외에 알릴 수 없었다고 전한다.

강병삼 제주시장도 제주 4·3 사건의 유가족이다. 강 시장의 큰아버지는 당시 4·3 사건에 휘말려 감옥에 체포된 뒤, 서울로 이송돼 행방불명됐다.

반복되는
기대·실망

강 시장은 <일요시사>와의 인터뷰서 “아버지의 형님이 제주 사건이 벌어진 당시 토벌대에 끌려가 돌아오지 못하셨다”고 담담하게 운을 뗀 뒤 “아버지에게 전해 듣기로는 (토벌대가 큰아버지에게)어느 학교에 모이라고 했다더라. 그런데 당시 ‘모이면 죽는다’는 소문이 퍼져 있어 큰아버지는 그대로 산으로 들어가셨다”고 말했다.

이어 “그랬는데 (토벌대 측에서)사면해준다고 산에서 내려오라고 거짓말했고, 큰아버지를 포함해 그때 내려간 사람들은 전무 죽임을 당하거나 그대로 형무소로 끌려갔다. 큰아버지는 마포 형무소에 도착했다는 편지를 보냈지만, 그 이후 소식은 아직도 접하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강 시장은 이 같은 큰아버지에 관한 사연도 본인이 20대 후반이 된 후에야 부친에게 전해 들었다고 한다. 그는 군부 독재가 계속되는 상황서 4·3 사건 유가족이 쉽게 이 문제를 공론화시킬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마 그런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연좌제가 무서워서 가족관계를 다르게 신고하는 경우도 허다했다”며 “그런 세월이 매우 오래 지나게 됐으니 아직도 4·3 사건을 잘 모르는 이가 많은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제주4·3 평화재단’ 관계자 또한 비슷한 이야기를 전했다.

재단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전화 통화서 “광주민주화운동은 제주 사건보다 40년 뒤에 일어난 비교적 최근 사건이다. 그런 사건도 바로잡는 데 10년이 걸렸는데, 75년 전 사건을 바로잡는 데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겠느냐”고 반문했다.

연좌제 공포로 지워진 진실
끊임없이 싸워가는 도민들

이어 “김대중 대통령이 발의한 ‘제주 4·3 사건 특별법’ 이후에야 본격적인 법제화 노력이 시작됐다.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강 시장과 재단 관계자는 제주 4·3 사건 전국화의 또 다른 장애물로 극우 단체의 과도한 폄훼 시위를 들었다. 강 시장은 “현재 여기 제주도 곳곳에 현수막이 걸려 있다. 4·3 사건을 폄훼하려는 시도들이 있는 것”이라며 “그 사람들이 이른바 빨갱이 폭동이며 4·3 사건의 전국화를 방해하고 있다. 특정 개인일 때도 있고 정당일 때도 있다”고 전했다.

재단 관계자도 “소위 극우 세력이라고 하는 곳에서 지속적으로 폄훼하고 있다. 올해는 특히 4·3 사건 학살의 한 축이었던 서북청년단이 4월3일 추념식 행사장 인근서 집회를 하겠다고 하는 등 역사왜곡 행위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또 사건 생존 당사자들이 하나둘 세상을 등지고 있는 점도 사건을 전국으로 알리는 데 큰 저해요소로 꼽힌다. 4·3 사건의 전국화, 법제화가 1년, 2년 지연될 때마다 법정에 나와 생생한 증언을 해줄 생존 피해자들이 계속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강 시장은 “4·3 사건의 생존 피해자분들의 연세가 많아서 자료를 더 확보하고 기록을 남겨놔야 한다”며 “그러기 위해선 지속적인 교육도 필요하다. 지금 제주대학교 쪽과 제주도청이 협의해 청년 세대에 제주 4·3 사건을 교육하고 그런 사람들을 키우는 일을 진행하려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지속적인 교육과 홍보는 제주 4·3 평화재단서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분야 중 하나다.

재단 관계자는 “4·3 사건의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평화와 인권의 기억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또 이제는 4·3 당시 제주도민들이 가졌던 열망이 무엇인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며 “지금의 시각이 아닌 당대의 시각서 한반도의 분단을 반대했던 목소리를 잊어선 안 되며 이를 다음 세대의 기억으로 가져가야 한다”고 전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7년 제주 4·3 사건 위령제에 참석해 대통령으로선 최초로 제주도민에게 사과의 뜻을 전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 자리서 “오랜 세월 말로 다 할 수 없는 억울함을 가슴에 감추고 고통을 견뎌오신 유가족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몇몇 4·3 사건 피해자와 유가족은 바닥에 엎드려 통곡했고, 눈물을 훔치며 노 전 대통령에게 박수로 화답했다.

드러나는
진실들

2019년 1월17일에는 제주지방법원이 제주 4·3 사건 생존 군사재판 수형인 18명에게 공소 기각 판결을 내려 사실상 무죄를 선고했다. 제주 사건 관련한 최초의 무죄 판결이었다.

연좌제에 대한 두려움으로, 극우 세력의 지속적인 폄훼 공작으로 가려져 있었던 제주 4·3 사건의 진실이 이제 세상 밖에 나오려 한다. 오래된 세월 만큼 그 과정이 쉽지는 않겠지만, 제주도민들은 지금도 광범위한 홍보 및 교육과 끈질긴 법정 싸움으로 이 싸움을 이겨내려 하고 있다.
 

<ingyun@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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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승자박’ 정청래 리더십 위기

‘자승자박’ 정청래 리더십 위기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리더십이 위기다. 1인1표제가 통과된 이후 힘을 받나 싶더니, 조국혁신당과의 합당 문제와 2차 종합특검 후보 논란 등 악재가 겹치면서 연임에 적신호가 켜졌다. 이재명 대통령도 시시각각 리더십 시험대에 올랐지만 결국 대권가도의 길을 걸었다. 정 대표도 무사히 ‘이재명의 길’을 걸을 수 있을까? 지난 10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조국혁신당(이하 혁신당)과의 합당 논의를 ‘일시 중지’하기로 결론지었다. 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의원총회서 민주당 의원들은 대체로 지방선거 전 합당 추진을 중단하자는 의견을 낸 것으로 전해진다. 충분한 논의 없이 합당을 띄워 당을 혼란스럽게 하고, 당·청 관계까지 어색해진 만큼 ‘정청래 책임론’이 불거지면서 리더십은 타격을 입게 됐다. 더 좁아진 운신의 폭 이날 정 대표는 국회에서 비공개 최고위원회의를 연 뒤 브리핑에서 “오늘 민주당 긴급 최고위와 함께 지방선거 전에 합당 논의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대신 지방선거 후 통합을 추진하기 위한 ‘연대와 통합을 위한 추진준비위원회(이하 통합추진준비위)’ 구성을 결정하고, 혁신당에도 준비위를 구성할 것을 제안했다. 정 대표는 “당 대표로서 혁신당과 통합을 제안한 것은 오직 지방선거 승리와 이재명정부의 성공을 위한 충정이었다”며 “그러나 통합 제안이 당 안팎에서 많은 우려와 걱정을 가져왔고, 통합을 통한 상승 작용 또한 어려움에 처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여러 자리에서 의원들의 말씀을 경청했고 민주당 지지층 여론조사 지표도 꼼꼼히 살피는 과정에서 더 이상 혼란을 막아야 한다는 당 안팎의 여론을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당을 혼란케 한 점에 대해서도 사과했다. 정 대표는 “그동안 통합 과정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은 저의 부족함 때문”이라며 “국민 여러분과 민주당 당원들, 혁신당 당원들께 사과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당초 이달 13일 입장을 밝히겠다던 혁신당은 날짜를 앞당겨 지난 11일 긴급 최고위원회를 열고 사안에 대해 입을 열었다. 혁신당 조국 대표는 통합추진준비위 구성에 동의하며 6월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열어뒀다. 민주당을 향한 뼈있는 말도 이어졌다. 조 대표가 “선거 후에는 통합의 의미가 무엇인지 확인하고 내용과 방식에 대한 논의를 책임감 있게 이어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그동안 혁신당은 민주당에 흡수되는 방법을 피하고자 했던 만큼 합치는 방식에 대한 합의점을 찾는 것이 합당의 최대 과제로 남아있다. 조 대표는 “양당 간 회동이 이뤄지면 먼저 민주당이 제안한 연대가 지방선거에서의 연대인지 아니면 추상적 구호로서의 연대인지 확인해야 한다”며 “지방선거 연대가 맞다면 추진준비위에서 그 원칙과 방법을 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모든 과정에서 양당은 상호 신뢰와 존중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며 “특정 정치인 개인과 계파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면 반드시 역효과가 난다. 국민과 양당 당원께 또다시 실망을 드리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제동 걸린 민주당-혁신당 합당…다음 복안은? ‘쌍방울 변호인’까지…제대로 꽂힌 ‘2연타’ 조 대표는 정 대표의 사과를 수용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조 대표는 “정 대표께서 혁신당 당원에게 표명한 사과를 받아들인다”며 “혁신당 당원은 당으로 향해지는 비방과 모욕에 큰 상처를 입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고 밝혔다. 혁신당 박병언 선임대변인도 회견 후 기자들과 만나 “(민주당이) 단순히 연대라고만 표현했는데 우당 간 레토릭적 연대를 의미하는지, 실질적으로 두 당이 지선을 치러낸다는 선거 연대인지 분명히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며 민주당의 답변을 요구했다. 앞서 민주당은 합당이 아닌 ‘지선 이후 통합’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민주당의 답변에 따라 향후 당의 대응이 달라질 것으로 풀이된다. 합당 논의가 중지되면서 당이 숨 고르기에 들어가나 싶더니 2차 종합특검으로 추천된 전준철 변호사가 새로운 불씨가 됐다. 민주당이 추천한 전 변호사는 2023년 ‘불법 대북 송금 사건’으로 구속 기소된 김성태 전 쌍방울 회장 등의 변호인으로 선임된 인물이다. 1심 이후 사임했지만, 친명(친 이재명)계에서는 “이재명 죽이기” “제2의 체포동의안 사태” 등 격하게 반발했다. 친청(친 정청래)계로 분류되는 이성윤 최고위원이 전 변호사를 추천하면서 반발이 더욱 거세졌다는 해석이 나온다. 전 변호사는 검사 시절 김건희 주가조작 사건, 한동훈 채널A 사건 등을 담당했다. 이 최고위원은 “(전 변호사가) 윤석열·김건희 수사를 할 때 서슬 퍼런 윤 총장하에서도 결코 소신을 굽히지 않고 강직하게 수사했다”며 “이번 2차 종합특검의 중요성에 비춰 적임자로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정확한 팩트 확인 없이 전 변호사가 김성태 대북 송금 조작 의혹 사건을 변호했고, 그런 변호사를 추천함으로써 마치 정치적 음모가 있는 것처럼 의혹이 확산하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정·이 차이는? ‘윤정부에서 탄압을 받은 변호사’를 강조했지만, 민주당을 설득시킬 명분이 부족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러자 이 최고위원은 “이번 2차 종합특검 추천 과정에서 조금 더 세밀하게 살피지 못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앞으로는 더 세심히 살피겠다”고 사과했다. 정 대표도 거듭 고개를 숙였다. 정 대표는 해당 사태를 인사 검증 실패에 따른 ‘사고’로 규정하고 “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의 책임은 당 대표인 저에게 있다. 대단히 죄송하다”며 사과의 뜻을 밝혔다. 지도부가 진화에 나섰지만 사태는 이 최고위원을 향한 사퇴 압박으로 이어졌다. 이번 사태가 단순한 인사 사고가 아닌 정청래 체제를 향한 불만이 표면화된 결과라는 해석이 나온다. 합당 무산과 후보자 논란으로 정 대표의 리더십이 2연타를 맞으며 8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연임 가능성도 불투명해졌다. 정 대표는 직접 연임 여부를 밝히지 않았지만 1인1표제 등 당원의 힘을 강화하는 작업에 공을 들이며 대권주자로 나서기 위한 입지를 다지고 있다는 해석이 우세했다. 혁신당과의 합당 이후 지방선거를 승리로 이끈다면 공은 정 대표에게 돌아간다. 그 성과를 토대로 대표 연임에 성공한 뒤 차기 대권까지 밟는 이른바 ‘이재명의 길’을 염두에 뒀다는 것이다. 여의도가 바라본 이재명의 길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친문(친 문재인)계가 민주당을 꽉 쥐던, 시절 그는 한 줌의 계파도 없이 고군분투하며 기득권에 맞섰다. 온건파 사이에서 파격적인 개혁을 앞세워 당원들의 갈증을 해소했고, 이들을 ‘개딸(개혁의 딸)’로 묶어 본격적인 팬덤 정치에 나섰다. 당 대표 시절에는 대선에 출마하려는 대표의 사퇴 시한인 ‘대선 1년 전’에 예외를 두는 내용의 당헌을 바꾸면서 극심한 내홍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당시 이재명 대표는 자신 있게 뜻을 밀어붙였고 전당대회서 최종 득표율 85.4%로 연임에 성공했다. 리더십 심폐소생 권력의 정점에 선 이 대통령이 걸어온 길은 비주류에서 주류로 거듭나고 싶어하는 정치인들의 ‘롤모델’로 자리 잡았다. 정 대표는 그런 거친 이재명의 길 초입에 들어섰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사이다 화법’으로 지지 세력을 키우는 시도는 이 대통령과 매우 유사하다. 이 대통령도 성공하지 못했던 1인1표제를 정 대표는 해냈다”면서도 “서둘렀던 게 문제다. 합당도 시기가 적절하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어 “이 대통령은 당 대표이던 시절부터 모든 것이 순차적으로 맞아떨어졌다. 그때는 민주당이 야당이었고 윤석열·김건희라는 공공의 적이 있으니 친명과 비명(비 이재명)이 매일같이 싸워도 봉합할 명분이 충분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대통령과 정 대표의 차이는 측근의 유무다. 이 대통령은 성남시장일 때부터 함께해 온 이른바 ‘성남 라인’이 존재했고, 김현지 대통령비서실 제1부속실장 등 측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존재했다”며 “친청을 자처하는 의원들이 있지만 이들을 측근이라고는 볼 수 없다. 김어준·유승민 두 사람이 정 대표에게 영향을 주는 인물로 꼽히지만, 그들조차도 자기 정치에 당 대표를 쓰는 느낌이 든다. 누가 중심이고, 누가 휘둘리는지 알 수가 없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승부수를 던지지 않는 한 지방선거가 정 대표의 마지막 리더십 시험대가 될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린다. 지방선거에 사활을 걸어 ‘압승’을 끌어낸다면 무너진 리더십을 다지는 건 물론 8월 전당대회 출마 명분까지 얻을 수 있다. 당장은 정 대표가 타격을 받았지만 선거 국면을 통과하면서 과오가 희석되는 흐름에 기대를 건 셈이다. 민주당은 오는 4월 중순까지 모든 지방선거 공천을 마무리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다만 경선 규칙과 공천 룰 등을 두고 계파 간 갈등이 재점화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모든 권력에는 비판이 따르기 마련”이라는 한 정치권 관계자의 말처럼 반대 여론을 찬성 여론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리더십이 판가름 난다. 시계를 돌려 2024년 4월, 이 대통령 역시 당 대표이던 시절 공천 시즌을 앞두고 ‘비명횡사’ 논란에 휩싸였다. 현역 의원 의정평가 하위 20% 통보를 박은 이는 6명으로 모두 비명계였던 만큼 의원들 대다수가 ‘친명’을 내세워 마케팅을 이어갔다. 이, 비주류서 180석 야당 대표로 지선 앞둔 대표님의 큰 그림은? 공천 갈등은 당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졌고 민주당이 패배했던 2012년 총선이 되풀이될 것이란 당내 우려가 커졌다. 하루가 멀다고 나오는 사퇴 요구에 이 대표는 “툭 하면 사퇴 요구를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런 식으로 사퇴하면 1년 내내 대표를 바꿔야 한다”며 오히려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친명과 비명 간의 갈등은 “환골탈태 과정에서 생기는 약간의 진통”으로 진단했다. 이 대표의 리더십이 총선의 최대 걸림돌로 여겨졌지만, 180석 공룡 야당을 탄생시키면서 여론을 뒤집었다. 정 대표 역시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합당 논란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지방선거 승리에 올인하겠다”며 반전의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기습 행동으로 당을 흔들지 종잡을 수 없어 잃어버린 신임을 되찾는 것이 지방선거를 앞둔 첫 번째 과제로 여겨진다. 정 대표는 ‘억울한 컷오프를 최소화하는 것’에 방점을 찍었다. 지난 11일에는 “공천 과정 전반의 불공정·불합리한 사례를 사전에 점검해 신뢰받는 공천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노력하겠다”며 공천신문고 구성 안건을 의결했다. 이날 민주당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민주당이 합당 과정에 여러 가지 내홍을 겪고 걱정을 끼쳐드렸지만 그런 와중에도 할 일은 빈틈없이 해왔다”며 “민주당은 공정한 경선을 통한 공천, 투명한 공천이 지방선거 승리의 요체임을 여러 차례 밝혀왔다. 당 대표의 이 같은 의지가 (공천신문고) 제도를 통해서 충실히 반영되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말한다”고 강조했다. 정 대표가 ‘이재명 모델’로 노선을 잡았지만 ‘제2의 ○○○’이라는 꼬리표가 오히려 발목을 잡을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대선을 앞두고 과감하게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은 이 대통령의 ‘중도 보수’ 전략까지 정 대표가 따라 할 수 있겠냐는 점에서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문재인 전 대통령에 실망한 사람들이 정권교체에 손을 들어줬다. 이 대통령이 임기를 마칠 때 즈음이면 정권 유지든 교체든 국민의 마음속에 새로운 잣대가 세워질 것”이라며 “시간이 걸리더라도 좌우 통합을 이뤄낼 지도자를 원할지, 지금보다 조금 더 강경한 지도자를 원할지는 현 정부에 달려 있다. 그 시대에 맞는, 또 국민이 원하는 사람이 차기 대권주자로 분류될 것”이라고 봤다. 신선한 뉴페이스? 이어 “이 대통령은 후임자를 키우지 않는다고 한다. 미래의 민주당은 당 대표도, 차기 대권주자도 ‘포스트 이재명’이 아닌 새로운 모델이 필요하다”며 “이 대통령의 행보가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이재명 그림자에만 메어서는 민주당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극단으로 치닫는 여야 갈등 지난 12일 이재명 대통령이 설을 앞두고 민생 회복과 국정 안정을 위한 초당적 협력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여야 대표를 오찬에 초대했지만, 약속 시간을 한 시간 앞두고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불참을 통보했다. 장 대표는 “(이번 회동이) 부부 싸움하고 둘이 화해하겠다고 옆집 아저씨 불러놓는 꼴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어 “오늘 회동에 가면 여야 합치를 위해 무슨 반찬을 내놨고, 쌀에 무슨 잡곡을 섞었고 그런 것들로 오늘 뉴스를 다 덮으려 할 것”이라며 “대한민국 사법시스템 무너지는 소리를 덮기 위해 여야 대표와 대통령이 악수하는 사진으로 모든 걸 다 덮으려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날 밤 민주당이 추진하는 이른바 ‘재판소원법’과 ‘대법관증원법’이 국민의힘 반발 속에 여당의 주도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를 통과한 것에 대한 불만을 표현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에 정청래 대표는 SNS를 통해 “국민과 대통령에 대한 예의는 눈곱만큼도 없는 국민의힘의 작태에 경악한다”며 “본인이 요청할 때는 언제고 약속 시간 직전에 이 무슨 결례인가. 국민의힘, 정말 ‘노답(답이 없음)’”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청와대도 “이번 회동은 국정 현안에 대한 소통과 협치를 위한 자리였다. 그런 취지를 살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데 깊은 아쉬움을 전했다”고 밝혔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