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옥상옥 체제를 구축한 벽산그룹이 오너 가족회사 밀어주기를 좀처럼 끊지 못하고 있다. 내부거래를 통해 몸집을 키우고, 지배구조상에서 최상단을 점유하는 과정에서 논란이 거듭됐음에도 별반 달라질 게 없는 상황이다.
벽산그룹은 건축자재·도료·주방기기 등을 제조·판매하는 중견 기업집단이다. 고 김인득 창업주가 1951년 설립한 동양물산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62년 한국스레트공업주식회사(현 ㈜벽산) 인수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성공가도를 달린 벽산그룹은 1990년대 중반 30대 기업에 포함되기도 했다.
아, 옛날이여
지나간 영광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금융 위기는 벽산그룹에 치명타를 날렸다. 사세가 크게 위축됐고, 급기야 2014년 벽산건설 파산을 계기로 건설업에서 손을 떼야만 했다. 해당 과정을 거치며 계열사 18곳을 거느린 대기업이라는 위상은 사라졌고, 중견 기업집단으로 규모가 축소되기에 이르렀다.
지난해 3분기 기준 그룹에 소속된 국내 법인은 상장사 2곳(㈜벽산·하츠)과 비상장사 7곳(벽산페인트·벽산엘티씨엔터프라이즈·인주로지스·아이버티·비피시·다솔유알·인희) 등 총 9곳. 캐시카우 역할은 ㈜벽산과 하츠가 맡고 있다.
사업형 지주사인 ㈜벽산은 지난해 3분기까지 별도 기준 누적 매출 2586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동기(2103억원) 대비 470억원가량 증가한 수치다. 영업이익은 147억원으로 전년 동기(34억원) 대비 5배 가까이 늘었다.
㈜벽산은 2019년 38억원 영업손실을 내며 일시적 실적 부진을 겪었다. 전년 대규모 투자를 단행한 여파였다. 하지만 2020년 흑자 전환을 시작으로 실적 개선세가 두드러졌다. 대내외적 호재가 맞물린 영향이었다.
최근에는 전체 매출에서 60% 이상을 차지하는 건자재 부문이 힘을 내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물동량 증가로 물류센터 대규모 공급이 예정돼있는 만큼 단열재 수요가 늘어날 전망이다.
2008년 인수한 주방기기 업체 하츠의 활약도 눈여겨볼만하다. 하츠는 2021년 매출 1370억원을 올렸다. 전년(1250억원) 대비 9.7% 증가한 수치다. 하츠는 판매 실적 중 30% 이상이 건설사에서 발생하고 있다. 그룹에서 ㈜벽산을 뺀 나머지 계열사의 매출이 미미한 수준이기에 하츠의 존재감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속보이는
구조 개편
㈜벽산과 하츠가 주요 수익원이라면 벽산엘티씨엔터프라이즈는 지배구조상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다. 2010년 4월 설립된 벽산엘티씨엔터프라이즈는 건축자재와 난방장치 도매업을 영위한다.
다만 단순 사업회사라는 측면보다는 지주사인 ㈜벽산을 지배하는 ‘옥상옥’ 구조에서 존재의 의미를 부각시킨다. ㈜벽산을 벽산엘티씨엔터프라이즈가 지배하면서 그룹 지배구조의 큰 틀은 ‘벽산엘티씨엔터프라이즈→벽산→벽산페인트 등 기타 계열사’로 구성됐다.
해당 지배구조는 2020년 3월경 밑그림이 그려졌다. 이 무렵 ㈜벽산의 최대주주였던 김희철 벽산그룹 회장은 ㈜벽산 주식 603만5840주를 담보권실행을 사유로 처분하면서 주요 주주명단에서 제외됐다. 김 회장이 처분한 주식 가운데 430만1357주는 벽산엘티씨엔터프라이즈로 향했다.
얼마 후 벽산엘티씨엔터프라이즈는 주식 양수도 계약을 통해 320만주를 추가 획득하며 지분율을 4.96%에서 9.63%로 끌어올렸다. 이를 통해 벽산엘티씨엔터프라이즈는 ㈜벽산 최대주주로 급부상했다. 비슷한 시기에 오너 3세인 김성식 ㈜벽산 대표이사 사장의 지분은 2.58%에서 5.20%로 증가했다.
꾸준히 이어진 장남 밀어주기
내부거래로 올라선 최상단
벽산엘티씨엔터프라이즈는 지난해 3분 기준 ㈜벽산 지분율을 12.42%로 끌어올린 상태다. 특수관계인의 지분율 총합은 29.30%로 집계됐다. 특수관계인에 이름을 올린 개인 및 법인 13인 중 오너 일가는 김 사장을 포함한 8인이다. 한때 ㈜벽산 최대주주였던 김 회장은 주식을 모두 털어낸 상태다.
㈜벽산 최대주주가 변경되는 과정은 승계 작업의 일환으로 풀이된다. 벽산그룹은 이미 오너 2세인 김 회장이 2014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상태였고, 김 사장이 경영 전반을 이끌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벽산 최대주주로 올라선 벽산엘티씨엔터프라이즈는 오너 일가의 가족회사라는 점이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벽산엘티씨엔터프라이즈는 오너 일가가 지분 100%를 보유 중이다. 김 회장의 장남인 김 사장과 차남인 김찬식 ㈜벽산 부사장을 비롯해 김 사장의 세 자녀인 주리·태인·태현씨 등 총 5명이 지분을 20%씩 쥐고 있다.
벽산엘티씨엔터프라이즈가 ㈜벽산의 최대주주로 올라설 수 있었던 건 활발한 내부거래 덕분이었다. 벽산엘티씨엔터프라이즈는 그간 그룹계열사에서 일감을 받아 몸집을 불렸다. 설립 3년째인 2013년에는 총매출 343억원 가운데 323억원을 계열사로부터 올려 내부거래율이 94.18%에 달했다.
예고된
밀어주기
이후에도 벽산엘티씨엔터프라이즈의 내부거래율은 ▲2014년 96.22% ▲2015년 95.39% ▲2016년 94.23% ▲2017년 90.02% ▲2018년 97.22% ▲2019년 93.69% 등 꾸준히 90%를 상회했다. 최근까지도 내부거래율은 감소하지 않고 있다.
2020년 내부거래 비중은 96.69%에 달했고, 이듬해에도 전체 매출 380억원 중 97.44%에 해당하는 371억원을 그룹계열사와의 거래를 통해 올렸다.
내부거래를 통해 몸집을 키우고, 이를 통해 그룹 지배구조상에서 최상단을 점유한 벽산엘티씨엔터프라이즈 지난 행적은 생각지 못한 논란거리를 만들었다. 지난해 8월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은 서울 중구 벽산그룹 사옥에 인력을 투입해 세무 관련 자료들을 예치했다. ‘기업 저승사자’로 불리는 조사4국은 탈세 또는 비자금 조성 혐의 등에 대한 특별 세무조사를 전담하는 부서다.
당시 업계에서는 국세청 조사가 내부거래를 통한 부의 대물림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가 이어졌다. 당연히 내부거래를 통해 실적을 올렸던 벽산엘티씨엔터프라이즈가 논란의 중심에 섰다.
다만 내부거래에 대한 끊이지 않는 뒷말과 별개로, 벽산엘티씨엔터프라이즈가 ㈜벽산을 지배하는 위치로 올라선 이후 김 사장을 축으로 하는 그룹의 승계 작업은 사실상 끝났다고 봐도 무리는 아니다. 실제로 김 사장은 그룹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 중이다.
도사린
위험요소
김 사장은 1967년생으로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졸업 후 하버드대에서 MBA 과정을 마쳤으며, 보스턴 컨설팅 그룹을 거쳐 2000년 ㈜벽산에서 전략총괄 전무를 맡았다. 2005년 ㈜벽산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하츠에서도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하츠는 2008년 벽산그룹에 인수됐을 무렵 김 대표와 유세종 전 벽산건설 부회장으로 이뤄진 각자 대표이사 체제를 꾸렸지만, 2009년부터 김 사장 단독 대표체제를 이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