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끝나지 않은 신드롬 배우 이성민

‘연기의 신’ 전성기는 지금부터!

[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흥행가도를 달리던 JTBC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이 시원찮은 결말과 함께 종영했다. 아쉬운 목소리가 커질수록, 극에서 조기 퇴장한 이성민을 향한 찬사도 덩달아 커졌다. 이성민은 엄청난 내공이 담긴 연기를 선보이며 화제의 중심에 섰다. 항간에서는 벌써 “연기대상은 따놓은 당상”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성민은 지난달 말 종영한 JTBC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순양그룹의 총수 ‘진양철’을 연기했다. 실제 나이보다 20세 이상 많은 노인으로 분해 인상적인 연기를 펼치며 안방극장을 사로잡았다. 이성민은 어느덧 연기파 배우의 대표주자로 자리 잡았다. 그 뒤에는 긴 무명 생활과 꿈을 향한 뚝심이 있다. 

접었던
배우의 꿈

이성민은 1968년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도촌리에서 태어나 인근 도시인 영주시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왔다. 이성민은 스스로 생각해도 어렸을 때 자신이 연기자로서의 소질이 부족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고등학교 때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 당시 시민회관에서 단체 관람한 연극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심을 굳힌 이성민은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지원했다. 하지만 교수들에겐 무시를 당하기 일쑤였고, 가족들은 강력하게 반대했다. 영화를 아주 좋아하던 그의 아버지 역시 다르지 않았다.

부친은 그가 대학원서를 내던 시절 같이 냉면을 먹자고 부른 뒤 “네가 연기를 좋아하는 건 알지만 너는 아니다. 차라리 공부를 더 해서 좋은 대학 다시 가라. 용돈을 줄 테니 여행이라도 다녀오라”며 그의 면전에서 원서를 찢어버렸다. 결국 이성민은 일단 배우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재수생이 된 이성민은 또다시 배우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소백산 철쭉제를 구경하러 갔다가 하필 연극 단원 모집 포스터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이성민은 이를 통해 비교적 인구가 적은 영주시에서도 극단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결국 이성민은 “이 정도는 공부와 병행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극단으로 향했다.

그는 극단에서 여러 작품을 새로 접하는 등 시야를 넓힐 수 있었다. 집에는 말할 수 없었지만 그는 극단 선배들의 뒤를 항상 따라다니며 극단 생활에 모든 것을 걸었다. 당시 이성민은 생애 처음으로 무대에 설 수 있었다. 그에 따르면 첫 대사는 루퍼트 부르크의 작품 <리투아니아>의 “잘 먹었습니다. 아주 잘 먹었어요”였다. 

하지만 은밀한 이중생활은 금새 들통나고 말았다. 독서실 사감이 어느 날 독서실을 찾은 그의 어머니에게 그가 “공부는 전혀 안 하고 매일 밤 셔터를 열고 들어온다. 몰래 극단 생활을 하고 있다”고 폭로하면서다. 결국 이성민은 어머니의 추궁을 견디지 못하고 공연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토한다.

집안은 또다시 뒤집혔다. 고모까지 찾아와 연극 생활을 만류할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그는 “마지막 공연까지만 하고 군대를 다녀와 다시 공부하겠다”고 가족들과 약속했다. 배우의 꿈을 또다시 포기한 것이다.

하지만 이성민은 이미 한 번 올라선 무대를 군 생활 중에도 잊을 수 없었다. 결국 한 연출가가 “대구로 오면 담뱃값은 주고 밥은 먹여주겠다”고 제안하자, 전역한 지 일주일 만에 단돈 7만원을 들고 대구로 향했다. 이때가 1991년, 그의 나이 스물넷이었다. 

타지 생활은 쉽지 않았다. 당시 이성민은 텅 빈 쪽방에서 지내는 등 끊임없이 생활고에 시달렸다. 쪽방에는 가구도, 가재도구도, 심지어 방충망도 없었다. 오직 대본과 커피포트뿐이었다. 밥값도 제대로 챙겨받지 못해 끼니를 거르는 일이 잦았다. 당시 이성민은 낯선 타지에서 외롭고 굶주려 혼자 베개를 껴안고 많이 울었다고 한다. 


그는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끓인 물에 커피 프림을 풀고 남은 마가린 조각과 설탕을 부어 죽을 만들어 마셨다. 1000원어치 떡볶이를 주문할 때도 국물을 더 달라고 사정해 떡볶이 국물로 배를 채웠다. 그는 밤새도록 쓰린 속을 달래야 했다.

그럼에도 연극에 대한 열정은 여전했다. 이성민은 “누가 연극 포스터를 붙이라고 시키면 한 장도 빠짐없이 붙였다. 손가락이 쓰릴 정도로 힘들게 1만장의 포스터를 붙여본 적이 있다”고 회상했다. 훗날 주연으로 열연한 드라마 <골든타임>에 빗대 자신의 인생 골든타임은 직접 포스터를 붙이던 20대 시절이라고 밝혔다.

<재벌집 막내아들> 종영 후에도…
뇌리에 박힌 ‘진양철’…열연 찬사

이성민은 극단 활동을 이어가다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이성민이 출연하던 연극 <B언소>의 안무가 제자였다. 이성민은 아내를 만난 이후 2001년 전국 연극제에서 <돼지사냥>으로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하는 등 겹경사를 누렸다. 

2002년 이성민은 서른다섯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부인과 딸을 대구에 둔 채로 홀로 상경했다. 앞으로 배우의 길을 쭉 걸을 것인데, 한 번쯤은 대한민국 연극계의 중심인 대학로에서 자신의 실력을 검증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주변에서도 서울로 가 보라는 조언이 이어졌다.

당시 이성민은 가족에게 “3년만 도전해보고 안 되면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형편은 여전히 좋지 못했던 터라, 서울살이도 쉽지 않았다. 이성민은 1주일에 한 번씩 대구로 내려와 아내에게 10만원의 용돈을 받아갔다. 여기서 차비·교통카드 충전·담뱃값으로 빼면 남는 게 없었다.

교통비를 아끼려 동대구역에서 당시 집이 있던 시지동까지 2시간이 넘도록 걸어 다녔다. 이성민은 혹시라도 일자리를 잃으면 곧바로 돈을 벌 생각으로 택시·대리운전회사 전화번호를 적어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고 한다.

극단 ‘차이무’ 소속으로 <B언소> <돼지사냥> <거기> 등의 연극에 출연하던 이성민은 영화계에도 발을 들였다. 시작은 단역부터였다. 이성민은 2004년 영화 <맹부삼천지교>서 ‘사채 조폭1’역으로 출연했다. 그런데 단역, 조연 출연만으로도 이성민의 진가를 알아보는 이들이 생겨났다.

<맹부삼천지교에> 함께 출연했던 손현주는 그에게 단막극 출연을 추천했다. 드라마 <오 필승 봉순영>의 주연 안재욱은 이성민이 연극 시간을 이유로 ‘박 검품장’역을 고사하자 본인의 스케줄을 조정하면서까지 이성민을 배려했다.

가족과 약속한 3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하지만 이성민은 그때까지도 무명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성민은 고민 끝에 서울에 남기로 결심한다. 지방인 대구 출신의 배우도 연기 실력이 뛰어나면 전국적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선례를 만들겠다는 다짐 때문이었다. 가족들도 그와 뜻을 모아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어려운 형편은 여전했다. 어렸던 딸이 유난히 고기를 좋아했었는데, 이성민은 1000원대의 대패삼겹살밖에 사줄 수 없었다. 그때의 아픈 기억이 지금까지 남아있다고 한다. 

단역서
주연으로


이성민은 2005년 <말아톤> 등 여러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했지만 상당수가 편집됐다. 2006년에는 차이무 출신 배우들이 힘을 합쳐 만든 영화 <비단구두>서 인간적인 조폭 ‘성철’역을 맡아 열연했다. 영화계의 이목을 끌긴 했지만 저예산 영화의 한계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는 못했다.

그래도 이성민은 이후 각종 영화와 드라마에서 조연으로 발돋움했다. <대왕세종>의 집현전 학사 최만리, <고고70>의 팝 칼럼니스트, <부당거래>의 부장검사 역할 등을 맡았다. 

이성민은 박찬욱 감독의 <박쥐>에 출연할 기회를 잡았다. 이전에 <밀양>서 호흡을 맞췄던 송강호가 그를 직접 추천했다. 그런데 이성민은 오디션장에서 “송강호와 친하냐”는 질문에 “안 친하다”고 대답했다. 결국 그 대답 때문인지 이성민은 오디션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훗날 송강호가 “왜 친하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이성민은 “솔직히 친한 건 아니었지 않느냐”고 답했다 한다. 

그래도 이성민은 점차 시청자들에게 눈도장을 찍어가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2010년 MBC 드라마 <파스타>의 레스토랑 바지사장 설준석역이었다. 이성민은 극 중에서 얄밉긴 해도 쉽게 미워할 수 없는 매력적인 악역 연기를 선보였다.

그 뒤엔 드라마 <글로리아> <내 마음이 들리니>, 영화 <작은 연못>, 연극 <늘근 도둑 이야기> 등에 잇달아 출연했다.


2011년에는 KBS 2TV 드라마 <브레인>에서 권력욕에 찌든 의사 고재학역을 맡았다. MBC 드라마 <마이 프린세스>에선 정의로운 척하면서 자기 잇속 챙기기에 열중하는 대통령 이영찬역으로 분했다.

주로 얄미운 악역을 많이 연기하던 이성민은 2012년 MBC 드라마 <더킹 투하츠>에서 이미지 변신에 성공한다. 당시 그는 주인공(이승기)의 형이자 전임 국왕인 이재강역을 열연해 호평받았다.

몇 달 뒤 방영된 MBC 드라마 <골든타임>에서는 외상전문의 최인혁역을 맡았다. 비중만 놓고 보면 사실상 주연급에 가까웠다. 이성민은 같은 의사 역할이었던 <브레인>의 고재학과는 달라진 의사 연기를 선보일 생각에 체중을 7㎏나 감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촬영 때 신을 운동화를 이전부터 질질 끌고 다니는 등 응급실 의사의 실상을 최대한 살리려 노력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결국 이성민은 <골든타임>에서 대중들에게 주연급 배우로 당당히 인정받았다.

미생 출연
배우 정점

2013년 말 개봉한 영화 <변호인>에서 주인공 송우석 변호사(송강호)의 고교 동창이자 부산지역 신문사 사회부 기자인 이윤택역을 연기했다. 조연이지만 나름 적지 않은 출연 비중을 보였다. 같은 시기 방영한 MBC 드라마 <미스코리아>에서는 화장품 회사 사장 김형준(이선균)으로부터 빚을 받아내려 쫓아다니는 퇴물 조폭 정선생역을 맡았다.

이성민은 2014년 tvN 드라마 <미생>에 출연하면서 배우 생활의 정점을 찍었다. 오상식역으로 출연해 실감나는 직장인 연기로 시청자들의 찬사를 받았다. 이성민은 <미생> 출연으로 2015년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남자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했다. 2016년 tvN10 Awards에서도 같은 배역으로 남자배우상을 수상했다.

이성민은 2016년 초 개봉한 <로봇, 소리>에서 첫 영화 주연을 맡았다. 2018년엔 영화 <공작>으로 생전 처음 칸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았다. 수상 복도 따랐다. 이성민은 이 작품으로 부일영화상, 대종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디렉터스컷 어워즈서 남우주연상을 휩쓸었다.

2019년 제55회 백상예술대상에서도 영화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을 받았다.

2020년 개봉한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연기력으로 또다시 극찬을 받았다. 극 중 이성민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연기했다. 처음 캐스팅 때는 외관상 전혀 닮지 않은 탓에 부정적인 반응도 감지됐지만, 낮게 깔리는 경북 사투리와 열연을 통해 반전 평가를 이끌어냈다.

특히 김규평(이병헌)과 5·16군사정변 당시 새벽 한강 다리에서의 일화를 회상하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김규평이 한강다리를 건너지 않았더라면 어땠을지 질문을 던질 때 미세한 표정변화를 표현하는 연기가 두고두고 회자됐다.

지난해 초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소년심판>에서 주연 강원중역을 맡았다. 가족에게 비정하면서도 아들에게 죄책감을 가지는, 동시에 공천에 떨어질까 노심초사하는 입체적인 모습을 잘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오랜 무명 생활 견딘 ‘대기만성형’
올 개봉 영화 3편…대세 이어갈까?

지난해 말 <재벌집 막내아들> 진양철역을 맡으며 연기력이 극에 다다랐다는 평가를 받았다. 가족까지 내칠 정도로 자신이 일군 회사에 집착하는 재벌 1세대 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면서 시청자들의 극찬을 받았다. 

본인의 출신을 잘 살린 경상도 사투리와 노인 특유의 탁한 목소리를 성공적으로 구사하면서 캐릭터에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이성민이 극을 힘있게 이끌어가던 만큼, ‘진양철’이 퇴장한 이후 드라마의 몰입감이 순식간에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시청자 사이에서 돌았다.

드라마 전체로 보면 비극이지만, 이성민 개인에게는 이만한 찬사가 없었을 것이다.

이성민은 지난해 29일 JTBC <뉴스룸>에 출연해 <재벌집 막내아들> 종영 이후 첫 인터뷰를 가졌다. 앵커가 “다시 태어나면 배우는 안 할 거라는 얘기는 왜 자꾸 하는 건가”라고 묻자 그는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 난 다른 일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많은 배우가 아르바이트 등 여러가지 일을 했다고 하지 않느냐”고 답했다.

그러면서 “내 삶이 가끔 불쌍할 때가 있다. 다른 삶을 잘 몰라서 다시 태어난다면 배우는 그만하고 싶다. 다양한 직업, 다양한 모험을 해보지 못했다”고 부연했다.

이성민은 진양철을 연기하면서 가장 중점을 둔 부분에 대해 “내 연령대의 역할이 아니다 보니 나이를 연기하는 게 가장 신경쓰였다”고 털어놨다. 이어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에게 방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제일 우선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시청자를 설득하는 힘의 원천은 배우의 힘보다 시나리오의 공”이라며 자신을 향한 찬사에도 겸손함을 보였다.

실감나는 경상도 사투리 연기에 대해 “이번 작품은 거의 애드리브가 없었다. 고향 친구들이 연락해 ‘네 애드리브 아니냐’고 묻던데 대본이 그 정도로 완벽했다”며 “작가님 남편이 경상도 분이라서 고증했다고 하더라. 그 당시 분들이 쓰는 단어를 잘 써줘서 감탄하면서 연기했다”고 말했다.

앵커가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늘 취해 있지 말라는 그 대사 같으신 분이라고 오늘 느꼈다”고 소감을 전하자, 그는 “그러려고 오늘도 정신 차리자고 주문을 건다. 내년에도 많은 관객을 만났으면 좋겠고, 새해 3월에 조진웅 배우와 찍은 영화 <대외비>를 개봉한다. 그 때 다시 뵀으면 좋겠다. 내년에 소원 꼭 다 이루레이”라고 덕담을 건넸다.

앞으로
더 기대

올해는 이성민이 출연한 영화 3편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이성민은 <대외비>에 이어 <핸섬가이즈> <서울의 봄>으로 극장가 복귀에 나선다. 대표적인 ‘다작’ 배우답게, 드라마 활동도 이어간다. 이성민은 현재 디즈니플러스 시리즈 <형사록2> 촬영에 열중하고 있으며 드라마 <운수 오진 날> 출연도 확정지었다.


<jeongun15@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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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