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권의 <대통령의 뒷모습>은 실화 기반의 시사 에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재임 시절을 다뤘다. 서울 해방촌 무지개 하숙집에 사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당시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른다. 작가는 무명작가·사이비 교주·모창가수·탈북민 등 우리 사회 낯선 일원의 입을 통해 과거 정권을 비판하고, 그 안에 현 정권의 모습까지 투영한다.
바야흐로 봄이 가까웠다. 아직 꽃샘바람이 꽤 불었지만 버들개지와 개나리는 떨면서도 점차 화사한 기운을 내뿜었다. 선덕여왕보다 더 멋진 역사의 히로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여대통령은 의외로 잦은 해외순방으로 업무를 시작해 계속 이어나갔다.
전직 대통령의 사리사욕 추구에 지쳐빠진 국민들은 민족 중흥의 영웅 박정희 대통령의 영애인 근혜에게 일말의 기대를 걸었다. 적어도 자기 탐욕에 빠져 나라를 거덜내진 않으리라는 소망이랄까.
자기 목표
물론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지만, 사상 최초의 여대통령은 단정해 뵈는 외모와 부드러운 언행으로, 파렴치범인 전직자에 지친 국민들로 하여금 모종의 기대감을 품게 만드는 바가 없지 않았다.
아마 목련 같은 이미지를 느끼는 국민도 있었으리라. 백목련… 순결해 보이되 얼마 못 가 곧 누추해져 추락하는 꽃. 아무튼 희망과 우려와 소망을 교차케 했다고나 할까.
미국보다 중국을 먼저 방문한 것도 화제가 됐다. 이제 새로운 북방정책으로 아메리카의 똘마니 신세에서 벗어나 민족 자존할 수도 있으리란 작은 꿈을 꾸게 했다.
시진핑 주석과 함께 한 공식 석상에서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해 찬탄을 불러일으켰다는 뉴스는 나중에 사실이 아닌 과장된 헛소리로 밝혀졌다.
아마 그 무렵 이른바 ‘통일 대박론’이 나오지 않았는가 싶다. 아버지 대통령의 유훈을 받들어 딸 대통령이 선언한지라 대중들은 호응했다. 하지만 맹점이 없지 않았다.
통일이 한민족의 미래에 좋다는 건 일부 이기적인 족속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국민이 동의하겠으나 문제는 그 방법이리라.
이웃 간에 담장을 터서 서로 한 집안처럼 교류하려 해도 믿음과 어느 정도 동질성이 필요할 텐데, 오래도록 적대적으로 앙앙대고 있는 상황이라면 어떻겠는가.
아마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쌀 몇 가마니에 자기네 집과 족보와 추억 어린 방을 종속적인 상황 아래 내던지진 않을 터이다. 인격과 가격[家格]을 존중해 주어야 하리라.
어쨌든 북한은 하나의 나라이다. 괴상스럽든 기괴하든. ‘통일대박론’이란 건 자기들 나름대로 하나의 국가를 이루어 살아가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통째로 삼켜 버리겠다는 배짱이며 심보다.
아버지 대통령 같은 북진 통일론은 아닐지라도 자기네가 늘 주창하던 글로벌 시대의 에티켓은 아니다. 북한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싸가지 말아먹은 자본주의 광녀의 야욕으로 관측되지 않겠는가.
가마솥에 펄펄 삶아서 온 인민이 뜯어 먹어도 모자란다는 유언비어도 휴전선을 넘어왔다지. 같은 민족끼리 잡아먹으려고 광분하기보다, 최소한 일본국이나 러시아를 대하는 만큼의 예의는 갖춰야 하지 않을까.
인간 생활의 기본. 독재는 그걸 부정. 국가와 국가 간의 예의마저 무시. 아빠 대통령보다 더 무지한 딸. 그걸 억지로 극복해 보려고 그 시대 그 당시 아빠보다 더 늙은 입으로 문득 통일대박론을 꺼내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되새겨 보건대 여러모로 이상스러운 점이 없지 않았다.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비유하자면 허니문 기간인데, 하얀 요 위에 붉고 푸른 최고급 태극 문양 이불을 덮곤 행복 지향적인 합궁을 추구하진 않을망정 웬 뜬금없는 여성 상위 체위만 고집하느냐며 비웃는 시덥잖은 난봉꾼마저 있었다.
혹시 최순실의 아비인 최 머시기 사이비 목사와의 로맨스로 인해 그 자의 조종을 받는 게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하는 지식인도 보였다.
최 머시기 사이비 목사가 죽었으므로 현재 그의 딸(최순실)이 대물림 받아 막후에서 대통령을 조종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예측까지 나아갔다.
박 전 대통령, 해외 순방으로 임기 시작
‘통일 대박론’ 내걸었지만…문제는 방법
하지만 일부 국민은 그럴 리가 있겠냐고 광분하며 그 지식인을 현대식 돌(댓글 따위)로 쳐 죽여 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태극기 부대의 극렬분자들은 집 안까지 막 쳐들어가 협박하며 땡깡을 부렸다.
그때만 해도 미래 상황이 어찌 전개될지 몰랐으므로 태극기 부대가 아닌 일반 국민들도 여대통령에 대해 모종의 기대감을 지녔던 성싶다. 이전의 쥐박이 쌍놈 대통령에게 당한 허망함과 배신감까지 희망의 불쏘시개 구실을 조금쯤 하지 않았는가 싶다.
아무튼 통일대박론은 일단 논리적이기보다 허황스러운 포퓰리즘, 이를테면 로또 복권에 곧 당첨된 듯이 허풍떠는 짓거리로 인식됐다. 선거의 여왕 시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정말로 여대통령은 해외 순방을 자주 나다니기 시작했다. 처음 한동안은 그걸 국민들도 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던 성싶다. 아니, 오히려 외교는 내팽개친 채 국내에서 사대강 사업을 억지로 벌이며 사리사욕이나 챙긴 전직 쥐 대통령의 파렴치한 짓에 분노한 국민들은 신선한 미래성 비전을 느끼기도 했다.
영국의 대처 여사보다 더 예쁘고 지조와 강단을 갖췄을 뿐 아니라 선덕여왕 이미지마저 겸비했으므로 열광적인 남자 스토커도 적지 않았다.
그중 특히 허경영씨는 공개적으로 청혼을 했고, 한 발 더 나가 박정희 대통령 생존 당시 이미 사위로 점지 받아 영애 근혜와 약혼까지 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정치적인 계산이 깔렸는진 몰라도 꽤나 정열적이었다.
믿는 사람도 있었다.
그 정도면 백마(혹은 흑마) 탄 기사라고 할 만할 텐데도 우리 여대통령은 의외로 매정스레 지켜보더니 급기야 허위사실 날조로 고소해 버렸다. 만약 허 본좌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여 결혼했다면 어찌 되었을지 궁금하다.
혹시 새로운 국면이 펼쳐졌을까, 아니면…?
여러 가지 상상이 가능하겠지만 공적으로 표명하는 건 삼가야 할 듯싶다. 다만 한 가지, 과연 줏대 혹은 고집이 무척 센 그녀를 허본좌가 초능력을 발휘해 잘 제어했을지 반대로 꽉 쥐어 잡혀 삐에로처럼 전락했을지는 여전히 약간 궁금하다.
어쨌든 간혹 티격태격 싸움을 할지언정 차츰 음양 기운이 조화돼 좀 부드러워지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그러운 기회는 무산되고 그녀는 유아독존 속에서 음기만 더욱 강해져 가는 모양새였다.
음양오행적인 관점에서 북쪽은 음이 강하고 남쪽은 양이 성하다는데, 취임식 때 오방색을 활용해 화려 찬란스러운 퍼포먼스를 펼치고는 그것이 상징하는 의미는 별로 생각해 보지 않은 모양이었다.
항간에 떠도는 유언비어처럼 정말 최순실이란 마녀가 주술적으로 활용해 펼친 것일까?
그러운 세상이었지만 하숙생들의 일상생활은 큰 변화 없이 강물처럼 때론 파도치며 흘러갔다. 어차피 한 하숙생이 나가면 다른 신입생이 들어오니까.
또한 대통령의 권력이 아무리 대단할지언정 물결은 잠시 바꿀 수 있을지 몰라도 깊은 흐름은 다른 법칙을 따르는지 어쩐지….
하숙이란 말은 약간 낭만적인 풍미도 있지만 현시대엔 좀 구차스러운 느낌을 준다. 하숙 전성시대는 지나갔다. 이제 인생은 나그네 길이 아니라 빌딩의 주인으로 군림해야 살맛이 나는 시대다. 하숙이란 낱말 자체가 일본인이 지어냈는지 한자 단어인지 모르되, 암튼 본채 아래쪽의 허접한 숙소란 뜻이 아니겠는가.
하숙 식당의 하루는 새벽 5시쯤이면 서서히 막이 열리기 시작한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새로운 무대. 물론 기울어진 무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터이지만, 하숙에선 불평만 하기보다 발 빠르게 움직이는 게 상책이다.
그래야만 서울 중심부의 기울어진 시멘트 아스팔트 위에서나마 잘났든 못났든 자기 꿈과 목표를 향해 반 발짝 한 걸음쯤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리라.
자기 탐욕
아니다. 아무리 버둥거려 봤자 멈췄거나 후퇴하기도 하고, 빈둥빈둥 빤질거리던 놈이 어느 날 갑자기 날개를 단 듯 날아올라 떠나 버리는 곳이 하숙이다. 물론 그 이후에 어찌 됐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면에서 한국 사회와 좀 닮았다 해도 되리라.
<다음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