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구로 지역주택조합 240억 사기 의혹 전말

‘판박이 먹튀’ 꼬리 잡힌 지주택 빠꼼이

[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구로 5동에 ‘지역주택조합’을 세우겠다며 피해자들을 유인, 돈을 편취한 혐의를 받는 류모 대표. 그는 진행 중인 재판에서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주장의 신빙성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 그가 서울 모처에서 벌인 또 다른 사건이 드러나면서다. 두 사건의 양상은 그야말로 ‘판박이’. 계획된 범죄라는 의견에 힘이 실리는 이유다.

서울남부지방검찰청(이하 남부지검)은 지난해 11월18일 구속영장을 발부해 류 대표와 전 조합장 이모씨 등 2명을 잡아들이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 함께 피소된 한모씨도 같이 재판에 넘겼다. 이들에게는 사기·횡령·배임 등의 혐의가 적용됐다. 류 대표에게 적용된 법 조항은 19개에 달한다.

사기 혐의
구속 재판

<일요시사>는 남부지검이 작성한 사건의 공소장 전문을 입수했다. 공소장에 따르면, 류 대표는 2015년 당시 구로 5동 532번지 일대에서 8년간 지지부진하게 진행돼온 일대 개발 사업권을 인수했다. 이 과정에서 기존 사업자가 일부 주민에게 받아놨던 ‘지역개발 동의서’도 함께 넘겨받았다.

이 동의서에는 단순히 ‘부동산을 지역주택조합 방식으로 개발하는 것에 동의한다’는 내용만 담겨있다. ‘토지 사용 권한을 넘기겠다’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주택법에서 조합설립 인가의 요건이 되는 ‘토지 사용권원 확보’의 근거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피고인들은 이 동의서를 토지 사용권원 확보 서류로 둔갑시켜 조합원들을 속였다. 이 동의서 작성 비율과 국공유지·도로 비율 등을 합친 수치가 토지 사용권원 확보율인 것처럼 꾸민 뒤 “토지 확보가 거의 완료됐다. 조만간 착공해 2020년쯤에는 입주 가능하다”는 허위사실을 퍼트리는 수법이었다. 


이들이 조합원들에게 이 같은 내용이 담긴 안내장을 발송한 때는 2017년. 당시 실제로 확보된 토지 사용권원 확보율은 28%에 불과했다. 심지어 토지 구매율은 전체 토지의 3%를 채 넘지 못했다. 이 같은 진행 상황은 꽤 시간이 흐른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남부지검은 공소장에 “(피고인들은)별다른 자금도 없고, 사업 추진을 위한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계획도 없었다”며 “이들이 직접 설계·승인한 각종 용역계약 구조에 의하면 조합원들에게 1·2차 계약금을 모두 지급받는다고 하더라도, 여러 수수료를 빼고 나면 사업 추진을 위한 필수 사업비 확보가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적었다.

이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피해자 477명을 기망해 조합 가입 계약금 명목으로 239억6950만원을 편취했다”고 지적했다.

피해자들은 실제 피해 규모가 2배에 달한다고 주장한다. 한 피해자는 “총 조합원 수가 1000명 이상”이라며 “고소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의 피해까지 포함하면 총 피해 금액은 470억원으로 추산된다”고 말했다.

남부지검에 따르면 류 대표는 빼돌린 투자금 일부로 회사 운영비를 충당했다. 투자금·마사회 마권 구입 등 개인 목적으로도 사용했다. 또 돈을 빼돌리고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토지매입 용역비 부당 지출, 부지 매매대금 부풀리기 등 5가지 유형의 업무상 배임 행위를 저지른 혐의를 받고 있다.

주된 세탁 창구는 토지 용역회사였던 것으로 파악됐다. 토지 용역계약을 체결하고 3개월 뒤, 류 대표가 용역회사를 차명으로 인수해 실질적으로 운영했다. 이후 용역회사가 토지매입 및 동의율을 부풀려 용역 대금을 청구하면, 조합장이 승인해주는 방식이었다.

사기·배임 혐의…피해 금액 470억 추산
결백? 다른 조합서도 사기 치다 쫓겨나 


류 대표는 혐의 대부분을 부인하고 있다. 류 대표 측 법률대리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사업 과정에서 개인적인 편취나 배임 등은 없었다”며 “오해가 발생한 부분이 있는데, 마침 사업 지연 책임을 지울 ‘희생양’을 찾던 조합원들이 류 대표를 찍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는 “류 대표는 조합원들이 낸 사업비가 모자라자, 자신이 받을 몫인 업무 대행비까지 대여해가며 사업을 이어나갔다”며 “이 업계에서 용역회사로 뒷돈을 빼돌리는 일이 빈번한 것은 안다. 하지만 류 대표는 사업비가 모자라서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용역회사를) 인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류 대표는 여전히 사업을 정상화할 의지가 있다”고 강조했다. 검찰이 제시한 류 대표의 횡령·배임 내역에 대해서는 “검찰 측의 일방적인 주장”이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이 같은 류 대표 측 주장과 배치되는 과거 행적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일요시사>는 류 대표가 서울 모처의 ‘A동’에서 벌인 다른 지역주택조합 사업 경과를 추적했다. 취재 결과, 류 대표가 A동에서도 구로 5동 지역주택조합 사업(이하 ‘구로 사업’)과 유사한 수법으로 범행을 저지른 정황이 드러났다. 류 대표 주장의 모순점도 여럿 발견됐다. 사정 당국 역시 이를 인지하고 이미 수사에 착수했다.

구로 5동처럼, A동에도 답보상태에 놓인 지역주택조합 사업 하나가 들어서 있었다. 2003년 처음 조합 설립 인가를 받고 2010년 들어 조합변경 인가를 한 차례 승인받은 게 활동의 전부였다. 류 대표는 2017년 초를 전후로 사업을 넘겨받았다. 1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판박이’ 사업을 하나 더 벌인 셈이다.

1년 전과 다른 점은 딱 하나였다. 사업 자금을 끌어올 만한 곳이 바로 있었다는 점이었다.

앞서 류 대표는 막상 구로 사업을 인수하고도 초기 사업자금이 없어 애를 먹었다. 결국 1년이 지나 한씨가 투자처를 연결해준 뒤에야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당시 류 대표가 받은 투자금은 약 20억원으로 알려졌다.

류 대표는 2016년 9월 업무대행사를 세우고, 그해 11월부터 본격적으로 조합원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몇 달 지나지 않은 2017년 초에는 토지 용역회사와 A동 사업을 연이어 인수했다.

그런데 이때 류 대표가 두 건이나 되는 인수자금을 어디서 마련해왔는지가 의문으로 남는다. 류 대표의 주장이 모두 사실이라면, 당시 그는 인수자금을 확보할 여력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희생양? 
혐의 부인

류 대표는 앞서 “투자금과 업무 대행비 등 회사의 각종 재원은 만성 적자 상태에 놓인 조합을 유지하는 데 투입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류 대표가 두 인수 건을 모두 무상으로 마무리한 것이 아닌 이상, 자금을 끌어올 구멍은 조합비와 회사 수익금 단 두 곳뿐이었다. 


“조합비를 빼돌리지 않았다” “업무 대행비도 챙기지 못했다”는 두 주장 중 적어도 한 가지는 사실과 다를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이 나온다.

실제로 류 대표 고소에 참여한 구로 조합원들은 검찰이 공소장에서 언급한 ‘빼돌린 조합금’이 A동 사업 인수자금으로 흘러들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또 류 대표는 사업을 넘겨받은 직후부터 구로 사업 초창기와 유사한 수법을 활용해 A동 조합원을 모집해나갔다. 그는 이번에도 허위사실까지 퍼트리면서 홍보에 열을 올렸다. 하지만 류 대표는 A동에서도 사업을 진행할 의지를 크게 보이지 않았다.

그가 A동 사업을 맡은 지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진전 사항이 전무한 것이 그 방증이다.

마치 구로 사업처럼, 토지 확보율은 여전히 한 자릿수에 멈춰 있다. 가뭄에 콩 나듯이 확보한 땅들은 ‘전시용’으로 의심받고 있다. 조합원들 사이에서 “우리가 현장을 찾았을 때, 땅 곳곳을 확보하는 중으로 착각하도록 조금씩 사둔 게 아니냐”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이에 관해 류 대표는 “2017년부터 땅값이 급등해 사지 못한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 중이다. 아울러 관련 인가 승인이나 규제 해제도 이뤄낸 게 없다. 심지어는 류 대표가 토지 성격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는지조차 미지수다.


국토부가 제공하는 ‘토지e음’ 서비스에 따르면 A동 사업 부지는 ‘제2종 7층 일반 주거지역’으로 분류돼있다. 용어 그대로 지상 7층 이하의 건축만 허용되는 땅이라는 의미다. 일반적으로 저층 주거환경 보호·난개발 방지 등이 필요한 지역에 설정되는, 일종의 제한 장치다.

지난해 말에 들어서야 요건을 충족하는 경우에 한해서 층수 제한을 25층까지 높일 수 있게 됐다.

류 대표는 이 땅에 30층 이상의 고층 아파트 단지를 짓겠다며 조합원들을 불러 모았다. 계획대로 지으려면 제3종 일반 주거지역으로 용도 변경하는 게 필수적이다. 하지만 류 대표와 업무대행사는 지난 5년 동안 용도 변경은커녕 조합변경 인가조차 통과시키지 못했다.

관할 구청에 문의해봤다. 구청 관계자는 “해당 지역은 2010년 조합 변경 인가 승인 이후 변동사항이 없었다”며 “2018년 한 차례 변경 인가 요청이 들어온 적은 있지만 반려됐다”고 밝혔다.

류 대표의 ‘30층 아파트’ 계획이 허가받을 수 있을지도 물었다. 이 관계자는 “우선 30층 사업 계획을 전달받은 바 없다. 반려된 2018년 요청도 2010년 인가와 동일한 18층짜리 사업 계획을 제시했다”며 “이전에 검토한 바 없어 즉답은 어렵지만, 무조건 통과할 수 있다는 보장은 당연히 없다”고 답했다.

한편 류 대표가 당시 사업 계획을 굳이 18층에 맞춰 제시한 배경은 땅 용도를 제2종 일반 주거지역으로 혼동했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제2종 일반 주거지역에 18층 층수 제한이 있었다. 종전에 제2종 일반 주거지역에서 지을 수 있었던 최고 층수를 써낸 셈이다.

류 대표가 A동 사업을 처음 맡은 때가 2017년이다. 최소 1년 이상을 땅 용도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제도 변경도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업을 진행해왔다는 게 된다.

다만 층수 혼동 문제가 조합 인가 반려의 주된 이유는 아니었다.

짜고 친 정황
의도된 한탕

구청 관계자는 “조합 설립·변경 인가에서, 사업 계획은 참고만 한다”며 “조합 인가 승인과 사업 계획 승인은 별개의 문제다. 조합 인가 승인을 우선 받고, 사업 계획 승인은 차후에 따로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설령 그때 류 대표가 30층짜리 사업 계획을 제시했더라도 조합 변경 절차에만 문제가 없었다면 변경 인가가 승인됐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류 대표가 A동 사업을 맡은 후 사업은 사실상 일시정지됐다. 반면 조합 재정은 ‘밑 빠진 독’이 됐다. 각종 운영비와 수수료가 계속 빠져나간 탓이다. 그동안 꾸준히 제 몫을 챙기왔던 류 대표의 업무대행사와 조합 사무실 등은 지난해 류 대표가 구속된 뒤 연락이 두절됐다.

A동 조합도 구로 사업처럼 류 대표로 인해 최소 100억대의 손실을 본 것으로 알려졌다. 공소장에도 “류 대표가 구로와 A동 사업비를 수표로 인출해 보관하다 횡령했다”고 명시돼있다. 구로 사건 공소장에서 일부 확인되는 A동 조합 피해 금액만 집계해봐도 최소 15억원 수준이다.

불안감을 느낀 일부 조합원은 ‘보장증서’를 근거로 투자금을 회수하려 했다.

류 대표가 구로·A동 조합원들에게 나눠줬던 보장증서에는 “신탁기관이 안전하고 투명하게 자금을 관리하겠다” “사업 계획 미승인이 확정될 경우, 납부한 분담금 전액을 돌려주겠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법조계에서는 조합원들이 보장증서를 근거로 투자금을 회수받기는 어려울 것으로 진단한다. 구로와 A동 모두 관련 안건이 총회에서 논의된 적 없어 보장증서의 법적 효력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

지역주택조합 관련 민사소송을 여러 번 맡아봤다는 한 변호사는 “이 같은 내용의 보장증서가 법적 효력을 가지려면 단체법에 근거해 조합 총회에서 결의를 받아야 한다”며 “이미 지역주택조합 관련 사건에서 비슷한 증서들의 법적 효력을 인정하지 않았던 판례가 많다”고 전했다.

“안전하게 관리하겠다”던 조합 신탁 예치금도 무사하지 못했다. 조합장들의 묵인·동조 속에서 류 대표는 자금을 사실상 독단적으로 활용했다. 업무대행사를 감시·견제해야 할 조합장들은 알고 봤더니 류 대표와 ‘한패’였다.

구로 사업 전 조합장 이씨와 A동 사업 조합장 한씨는 모두 직책을 맡기 전부터 류 대표와 친분이 있었다. 이윽고 이들은 류 대표 뜻에 따라 움직이는 ‘낙하산’ 조합장이 됐다.

마권 구입 등 개인적 용도로 사용
은폐 위해 대금 부풀리기 등 동원

이들이 처음 마주한 시기는 2015년으로 류 대표가 구로 5동을 찾았을 때였다. 당시 이씨와 한씨는 구로 5동 주민으로, 류 대표 이전에 지역개발사업을 추진해오던 ‘지역개발주민 협의회’ 소속이었다. 일명 ‘지역개발 동의서’를 받고 다닌 장본인들이었다.

이들은 류 대표가 구로 사업을 인수했을 때부터 그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씨는 지역개발주민 협의회 회장을 역임했던 이력을 살려 구로 조합 추진위원회 위원장·조합장 등을 맡았다. 그는 류 대표가 차린 업무대행사와 조합 간의 용역·대리사무 계약 등 굵직굵직한 사안을 일사천리로 통과시켰다.

이씨가 조합원들에게 류 대표의 비위 사실을 은폐하려 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한 구로 사업 피해자는 “이씨는 미진한 사업 진행 상황에 의구심을 느낀 조합원들이 정보공개를 청구했음에도 마땅한 이유 없이 이를 뭉갰다”며 “결국 대법원까지 법적 다툼이 이어졌고, 이씨는 벌금형과 자격박탈에 처해졌다”고 주장했다.

한씨는 2016년에는 구로에서 토지 용역 작업을 하다가, 2017년 A동 사업으로 넘어가 조합장이 됐다. A동 조합원들은 이들의 관계를 뒤늦게 알고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긴 꼴”이라며 허탈해했다.

또 조합장들은 수사 과정에서 스스로를 ‘바지 조합장’이라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특정 건에 대해)왜 도장을 찍어준 것이냐”는 추궁에 “조합장 도장은 류 대표가 가지고 다녔다. 본인 마음대로 찍고 다녀서 잘 모르겠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A동 조합원들도 류 대표와 사업 관계자들에 대한 고소·고발 절차를 마쳤다. 현재 관할 경찰서에서 수사 중이다. 한 A동 조합원은 “압수수색도 2번이나 진행됐고 수사도 잘 진행 중이라고 전달받았다”며 “혐의 입증은 문제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이들은 류 대표와 한씨의 수사 결과와 상관없이 이들을 사업에서 몰아내기로 했다. 사업을 다시 본 궤도로 올려놓기 위해서다. 이들은 과반수의 의견을 모아 총회를 열고, 관련 안건을 처리할 계획을 세웠다.

한씨가 총회 소집을 거부하면서 시일이 조금 더 소요됐다. 법원에서는 일단 조합장의 손을 들어줬다. 조합 규약에 따르면, 총회 소집 요구 정족수는 과반수가 아닌 3분의 2 이상이라는 게 이유였다.

결국 조합원들은 이달 초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다시 확보했다. 법원에도 다시 총회 소집 요구 의사를 전했다. 요건을 충족했으니, 총회 개최와 류 대표 ‘축출’은 사실상 시간문제가 됐다.

사업 정상화
물갈이 예고

한 조합원은 “류 대표는 애초에 사업을 정상적으로 진행하려는 의지가 없었다”며 “총회가 열리는 대로 바로 쫓아낼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어 “류 대표가 빼돌린 것으로 보이는 사업 자금만 잘 회수되면 사업을 정상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며 “우리는 류 대표 처벌보다도 사업 정상화에 방점을 두고 모든 노력을 쏟을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jeongun15@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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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분오열’ 의료계 내분 내막

‘사분오열’ 의료계 내분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뚝심인가, 고집인가? 의대 정원 확대에 대한 대통령의 뜻이 확고해도 너무 확고하다. 겉으로는 유연한 대처를 언급하면서 ‘2000명’이라는 수치는 굽히지 않을 기세다. 강 대 강 대치에 나섰던 의료계는 우왕좌왕하는 모양새다. 의료계 내부의 의견을 모으는 일도 쉽지 않아 보인다. <일요시사>와 인터뷰한 지방의대 A 교수는 의과대학 정원 확대를 밀어붙이는 윤석열정부의 강경 기조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정규군은 수뇌부만 처리하면 와해되기 쉽다. 하지만 현재 의료계는 게릴라 방식으로 대응 중이다. 주동자를 찾기 어렵고 실제 주동자도 없다. 전공의, 의대생 모두 조직의 통제하에 움직이는 게 아니라 본능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 윤정부 입장에서는 협상 대상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일괄 협상에 따른 일괄 타결은 어렵다고 본다.” 2월 이후 평행선만 실제 의료계는 대학의사협회(의협),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전의교협),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학생협회(의대협) 등 여러 단체가 의대 정원 확대 정책에 개별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의대 정원 확대 반대’를 큰 틀로 하되 대응 방식이나 세부적인 요구사항은 각각 다른 상황이다. A 교수의 말대로 의료계는 현재 단일협의체가 없다. 협상테이블이 마련된다 해도 앞에 대표로 나설 사람이 없는 셈이다. 과거 의정갈등이 일어났을 때 주로 의협이 나서서 의료계 입장을 전달하고 대응을 이끌었다면 현재는 각개전투를 진행하고 있다. 이미 정부는 의협의 대표성에 대해 의문을 표한 상태다. 정부는 지난 2월 말 의협 대신 ‘대표성을 갖춘 협의체’를 구성해 의대 정원 확대 등에 대해 대화하자고 의료계에 요청했다. 의협이 전체 의사들의 대표성을 띠기 어렵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당시 주수호 의협 비상대책위원회 언론홍보위원장은 “의협 회원엔 전공의·봉직의 등 모든 직역이 포함돼있고 모든 직역이 배출한 대의원 총회 의결을 거쳐 만들어진 조직이 비대위”라며 “정부가 의협의 대표성을 부정하는 이유는 내부 분열을 조장하기 위함”이라고 반발했다. 의협은 의료법에 근거해 모든 의사가 가입하는 법정 단체지만 개원의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번 의정갈등 국면서 가장 선봉에 선 단체는 전공의가 모인 대전협이 꼽힌다. 전공의가 의대 정원 확대에 반발해 병원을 떠나는 등 집단 강경 투쟁에 나서면서 의정갈등에 불이 붙었다. 의대생은 집단 휴학으로 힘을 실었다. 유급 마지노선에 이른 대학들이 수업을 재개했지만 의대생은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집단사직에 나선 전공의가 여전히 버티고 있는 상황서 의대생의 복귀 가능성 역시 낮다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대통령실 1년 유예안 일축하면서도 ‘2000명 정원’ 논의 가능성 제시해 교육부에 따르면 지난달 31일 기준 학칙에 따른 형식적인 신청 요건을 지킨 의대생의 휴학 신청은 누적 1만242명으로 전체 의대 재학생 대비 54.5% 규모에 이른다. 의대생들의 집단 휴학과 수업 거부는 지난 2월부터 시작됐다. 대학 사이에선 이달 중순이 지나면 여름방학까지 총동원해도 유급을 막을 수 없다. 의대는 특정 수업서 3분의 1 또는 4분의 1 이상을 결석하면 낙제(F) 처리되고 F가 하나라도 나올 경우 유급이 되도록 학칙을 세워둔 곳이 많다. 전공의의 집단사직으로 병원 업무가 마비되고 일부 의료진에 업무가 과중되는 이른바 ‘의료대란’이 벌어졌다. 여기에 의대생의 집단 휴학은 의사 수급 부족 현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의료현장에 구멍이 생기면서 의사를 찾지 못해 환자가 사망하는 ‘응급실 뺑뺑이’ 사건도 일어났다. 문제는 정부의 태도다. 지난 2월6일 2025학년도 의대 입학 정원을 5058명으로 현행보다 2000명 늘리겠다고 발표한 이후부터 현재까지 요지부동 상태다. 정부는 2035년까지 1만명의 의사 인력을 확충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2006년 이후 19년 동안 동결됐던 의대 정원 확대를 예고한 것이다. 당시 보건복지부(이하 복지부)는 발표 당시 의료계와 소통한 결과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지난해 10월26일 ‘의대정원 확대 추진계획’을 발표한 이후 40개 대학으로부터 증원 수요와 교육역량에 대한 자료를 받았고 현장점검을 포함한 검증을 마쳤다고 밝혔다. 의료계를 비롯해 사회 각계각층과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했다는 점도 언급했다. 특히 정부는 의대 정원 확대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강조했다. 언론사 여론조사 등에서 의대 정원을 늘리는 문제에 대해 국민 10명 가운데 8명 이상이 ‘필요하다’고 응답한 것을 의미있게 언급했다. “흔들림 없는 의료개혁을 완수하겠다”는 정부의 입장에 국민의 응원을 지지대로 삼은 것이다. 요구 다른 의사단체 윤석열 대통령의 의지는 더 강했다. 윤 대통령은 지난 1일 ‘국민께 드리는 말씀’ 대국민담화서 “역대 정부들이 9번 싸워 9번 모두 졌고 의사들의 직역 카르텔은 더욱 공고해졌다”며 “이제는 결코 그런 실패를 반복할 여유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2000명이라는 숫자는 정부가 꼼꼼하게 계산해 산출한 최소한의 증원 규모”라며 “이를 결정하기까지 의사단체를 비롯한 의료계와 충분하고 광범위한 논의를 거쳤다”고 설명했다. 연구 결과를 들어 그 배경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윤 대통령은 “정부는 국책연구소 등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연구된 의사 인력 수급 체계를 검토했다. 수요 측면서 저출산 고령화와 같은 인구구조의 변화, 만성질환의 증가와 같은 질병구조의 변화, 소득 증가에 따른 의료수요 변화까지 반영했다”며 “어떤 방법론이더라도 지금부터 10년 후인 2035년에는 자연 증감분을 고려하고도 최소 1만명 이상의 의사가 부족하다는 결론은 동일하다”고 말했다. 의대 정원 확대 시기에 대해서도 정부는 가차없는 태도를 보인다. 대통령실은 지난 8일, 의협이 제안한 의대 증원 1년 유예안에 대해 “정부는 그간 검토한 바 없고 앞으로도 검토할 계획도 없다”고 밝혔다. 앞서 박민수 복지부 차관이 “내부 검토는 하겠고 현재로서 수용 여부를 말씀드리기 어렵다”고 내놓은 답변서 더 강경해진 입장이다. 대통령실은 1년 유예안을 받을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면서도 “만약 의료계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근거, 그리고 통일된 의견으로 제시한다면 논의할 가능성은 열어놓고 있다”며 “열린 마음으로 임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팔짱 낀 정부 공은 의료계로 일각에서는 정부는 초지일관 원론적인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현재로선 ‘2000명’이 정부와 의료계 간 대화의 장벽이 되고 있다. 정부는 2000명이라는 수치를 꿋꿋하게 고수하고 의료계는 2000명 백지화가 대화의 선결 조건이라는 뜻을 굽히지 않는 중이다. 정부든 의료계든 어느 한쪽이라도 구부려야 맞닿는 법인데 평행선만 그리는 모양새다. 이 와중에 의료계는 내분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정부가 의료계에 요구하는 ‘통일된 의견’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새 회장을 선출한 의협이 그 중심에 있는 상황이다. ‘강성’으로 꼽히는 임현택 의협 회장 당선인과 의협 비대위가 엇박자를 내고 있고 대전협의 박단 비대위원장도 의협 비대위와 갈등 조짐을 보이는 중이다. 현재 의협은 비대위원장과 차기 회장이 공존하는 상태다. 의협은 지난달 26일, 임 당선인을 차기 회장으로 선출했다. 임 당선인은 결선투표서 65%의 지지를 얻어 당선됐고 임기는 다음 달 1일부터다. 임 당선인의 등장으로 의협의 대정부 투쟁 수위가 올라갈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됐다. 임 당선인은 의대 정원 증원 철회를 비롯해 대통령의 사과와 책임자 파면을 요구하는 등 다른 의사단체에 비해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마찰음이 나온 건 ‘단일대오’를 구성하는 과정에서였다. 의협 비대위는 지난 7일, 기자회견서 전의교협, 대전협, 의대협 등과 함께 합동 기자회견을 이번주 안에 열겠다고 예고했다. 하지만 임 당선인이 이런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의협 비대위, 차기 회장·전공의 회장 갈등 삐걱거리는 단일대오에 대화 공전 가능성도 의협 회장직 인수위원회는 의협 비대위와 대의원회에 공문을 보내 임 당선인이 김택우 현 비대위원장 대신 의협 비대위원장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한 지붕 두 가족’ 상황의 의협 창구를 단일화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대전협 박 위원장도 의협 비대위와 불협화음을 내고 있다. 박 위원장은 자신의 SNS에 “의협 비대위 김택우 위원장, 전의교협 김창수 회장과 지속적으로 소통하고 있지만 합동 브리핑 진행에 합의한 적은 없다”고 적었다. 합동 기자회견은 일단 취소된 상태다. 박 위원장과 임 당선인의 갈등도 관심사다. 임 당선인은 지난 4일, 윤 대통령과 박 위원장의 비공개 만남에 불만을 드러냈다. 의협 비대위는 윤 대통령과 박 위원장의 만남을 ‘의미 있다’고 평가했지만 임 당선인은 SNS에 ‘내부의 적’을 운운하며 박 위원장을 강도 높게 비난하는 듯한 글을 남겼다. 박 위원장은 이 같은 보도 내용을 게시글에 공유하며 ‘유감’이라고 적었다. 전의교협은 의대 비대위에 힘을 실어주는 모양새다. 전의교협은 전국 40개 의과대학 교수협의회로 구성된 단체다. 김창수 전의교협 회장이 의협 비대위에 합류하면서 의료계 단일대오 구성이 빨라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통일된 의견을 내놓을 단일협의체 구성 속도에 따라 의정갈등의 타결 가능성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의협 비대위를 중심으로 단일대오를 구성하려던 시도가 임 당선인과 박 위원장의 행보로 삐걱거리면서 의료계 상황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여기에 협상테이블이 마련돼 정부와 의료계의 대화가 이뤄진다 해도 합의까지 가는 데는 하 세월이 걸릴 것이라는 의견이 만만찮다. 입장차가 그만큼 첨예하다는 뜻이다. 타결까지 첩첩산중 일각에서는 정부와 의료계 모두 환자에 대한 배려는 뒷전에 두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2월 이후 두 달 넘게 갈등이 계속되면서 환자들은 불편을 겪고 있고 일부 의료진은 업무 과중으로 그로기 상태에 빠졌다. 전공의가 떠난 병원은 매일 막대한 손해를 입고 있다. 정부와 의료계의 10번째 갈등이 어떤 결론으로 끝나느냐에 따라 의료계 지각변동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