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세의 골프 인문학> 골프 대중화를 장려한 대통령

해방 후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골프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1949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1주년 기념 축하 연회장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배석한 주한 외교 사절들에게 인사말을 건넨다.

 

일본까지 가야 했던 해방 직후
이승만이 앞장선 골프장 건설

“휴일에는 어떻게 소일들을 하십니까?” 외교관들이 이구동성으로 같은 대답을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미국 대사관 관계자들의 목소리가 이때다 싶어 더 높아졌다. “한국에는 단 한 군데의 골프장도 없어 일본 오키나와 미군기지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고 옵니다.”

혜안

말인즉슨, 한국에 골프장이 없어 외교관들이 가까운 일본에서 골프를 치고 온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오키나와도 미군이 주둔할 당시 미군들에 의해 지어진 골프장이었으며, 한국이야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일제 치하에 있었음을 모르는 바도 아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심기가 불편한 것은 당연했다. 그는 옆에 있던 총무처장에게 구두 지시를 한다. “한국에도 당장 골프장을 건설하세요.” 이승만의 즉각적인 지시로 한국의 골프장 건설은 지체 없이 전개됐다.


대한민국이 해방된 지 꼭 4년이 지났지만, 남북이 대처한 상황을 감안할 때,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우방 외교관들이 주말마다 자리를 비우게 되면 힘의 공백이 생기고, 이는 곧 북한에게 남침의 여지를 제공할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골프장은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그렇게 지어지기 시작됐다.

물론 한국의 골프장이 1949년 처음 세워진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는 일본보다도 5년이나 이른 1897년 원산항 인근에 영국 세관원들이 6홀짜리 골프장을 만들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일제 강점기인 1921년 일본인들에 의해 용산의 효창원 코스도 만들어졌고, 영친왕도 이곳에서 골프를 즐긴 것으로 기록돼 있다. 1924년 이 골프장은 청량리로 이전하면서 ‘경성골프클럽’으로 불리게 된다.

 

3년 뒤 다시 현재의 어린이대공원 자리로 옮겨 군자리 골프코스로 명명된 뒤 비로소 한국 골프의 기초인 서울컨트리클럽이 태동된다. 이후로 평양, 원산, 부산, 대구 등 전국에 골프장이 만들어졌으나, 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일본에 의해 모두 비행장이나 신병 훈련장으로 대치되는 바람에 한국 내에는 골프장이 단 한 곳도 존재하지 않은 것이었다.

정부 관계자들은 곧바로 코스 복구에 착수했다. 은행에서 200만환을 대출받아 군자리 골프장의 복원 작업에 들어갔다.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들도 장비를 지원하면서 9개월 만인 1950년 5월 비로소 군자리 골프장이 원래 모습을 찾았다.

이제 주한 외교사절들은 골프를 하러 번거롭게 일본을 오가지 않아도 됐다. 이승만 대통령의 앞을 내다보는 혜안이었을까. 외교관들의 공백에 대한 그의 우려가 현실이 된 것은 군자리 코스가 복원된 지 정확히 한 달 뒤였다.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었던 6·25전쟁이 터진 것이었다. 북한이 남침을 하던 그날 새벽에 정부 고관들은 군자리에서 골프를 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만약 외교관들이나 한국 관료들이 1950년 6월25일 새벽에 오키나와로 원정 골프를 떠났다고 가정한다면, 한국 근대사의 흐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뿌리내리기 시작한 골프 문화
박정희 시대에 여성 캐디 등장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전쟁은 3년 뒤 휴전되면서 군자리 골프장은 다시 복구 작업에 들어가 1954년 재개장을 하게 됐다. 군자리 코스는 정치와 관련된 로비 장소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외교 사절들과 미 장성들, 고위 정치인들이 모여 골프를 치면서 모든 대한민국의 외교는 군자리 골프장에서 해결되다시피 했다.

물론 이승만 대통령은 연로했던 탓에 골프를 직접 칠 수는 없었지만, 한국 아마추어 골프대회를 여는 등 골프를 장려했다. 한국 초대 대통령의 골프 사랑으로 인해 한국의 골프는 명맥을 유지하면서 다음 세대를 맞이한다.

박정희 역시 골프를 장려한 대통령이었다. 1966년 4월 육군사관학교를 방문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태릉 인근에 골프장 건설을 지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미래의 인재들이 골프를 모르면 나라 망신”이라고 했다. 해외 순방을 다니면서 그는 나름대로 골프에 대한 긍정적인 측면을 발견했다. 타국 정상들과 외교적 골프를 치면서 특별히 느낀 감정으로 그는 군 장성들에게도 골프를 권장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말 한마디는 법이었다. 골프장 건설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군이 동원됐다. 사단 공병대가 땅을 파면서 시작한 골프장은 착공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18홀이 완공됐다. 그야말로 속전속결의 군인정신으로 지은 일사천리의 육군사관학교 골프장이었다. 코스는 사관학교답게 매홀마다 1사단, 2사단 등 사단 고유 마크를 새겨놓고 군대식 이름을 붙였다.

박정희는 골프에 애착을 가지면서 직접 골프를 즐긴 대통령이었다. 골프 실력은 100타를 겨우 깨는 핸디캡 24 수준이었지만, 스윙에 꽤나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1962년부터 원로였던 한장상 프로에게 레슨을 받으면서 장충동 공관에 길이 15m, 폭 10m 간이 연습장을 만들 정도로 골프에 심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골프를 치는 동안 경호는 삼엄했다. 라운딩을 할 때는 언제나 관할 경찰서에서 소속 형사들이 숲속에 잠복하면서 18홀까지 따라다녔다. 대통령 바로 옆에는 경호 총책임자가 그림자처럼 붙어 있었고, 일정 거리를 유지한 곳에는 2명의 경호원이 함께했다고 한다.

물론 페어웨이 앞뒤에서도 10여명의 경호원이 호위를 했다. 이런 삼엄한 경비 속에서 대통령은 스윙을 한 뒤 골프채를 캐디에게 주지 않고, 총을 메듯 어깨에 메고 걸어가면서 푸른 잔디를 걷는 재미가 좋다며 감탄했다고 한다.

애착

박정희식 골프는 이랬다. 앞뒤 조는 절대 있으면 안 됨, 퍼팅은 단 한 번만 함, 티샷이 잘못되면 무조건 다시 침, 캐디는 무조건 최고로 예쁜 여자여야 함.

주변 경호원들에 따르면 국가 원수가 퍼팅을 하려고 계속 머리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비굴해 보이고 품위가 없다고 생각했다. 또 당시까지만 해도 캐디는 모두 남자였으나, 1967년 태릉의 육사 전용 코스가 개장되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전용 캐디는 가장 예쁘고 센스 있는 여성이 담당을 했다.


이때부터 한국 골프장에는 여성 캐디들이 등장하게 된다. 박정희는 크고 작은 골프대회를 주최하면서 골프 장려에 앞장섰던 대통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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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케이삼흥 사태가 대국민 사기극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피해자가 최소 1000여명, 피해액은 수천억원에 이르는 등 실체가 드러날수록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상황이다. 피해자들은 무엇에 홀려 돈을 넣었을까? 무엇이 그들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안겨줬을까? “징조도 없었어요. 2월까지는 돈이 잘 들어왔거든요. 3월25일하고 27일에 원금하고 배당금이 안 들어오면서 난리가 난 거죠.” <일요시사>와 연락이 닿은 한 케이삼흥 투자 피해자는 여전히 정신이 없는 듯했다. 이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에게도 투자를 권유했다고 한다. 현재 원망 그 이상의 감정을 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2월까진 괜찮았다 최근 케이삼흥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2021년 설립된 부동산 투자플랫폼업체 케이삼흥은 월 최소 2% 수익을 보장하겠다며 투자자를 끌어모았다. 연 단위로 따지면 24%의 고수익 투자상품인 셈이다. 피해자는 ‘정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의 말에 현혹된 것으로 보인다. 케이삼흥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개발 예정인 토지를 매입한 뒤 개발사업이 확정되면 소유권을 넘겨 보상금을 받는 방식으로 수익을 만들 수 있다고 홍보했다. ‘토지 보상 투자’라는 용어가 나왔다. 직급에 따라 수익금을 차등 지급하는 다단계 방식으로 업체를 운영해 전형적인 ‘다단계금융 사기’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번 사태서 의문이 제기된 부분은 횡령 등의 혐의로 복역한 경험이 있는 김현재 케이삼흥 회장이 어떻게 또다시 수천명에 이르는 투자자를 끌어모았는지다.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의 창시자로 불린다. 토지를 싼 가격에 사들인 뒤 개발 호재 등이 있다고 소문내 이를 쪼개 파는 방식으로 사기를 저질렀다. 이 과정서 투자금 200억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2006년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20여년이 지난 2021년 김 회장은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서울 등 전국에 7개 지점을 둔 케이삼흥은 언론 광고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통해 투자자를 모았다. 한 케이삼흥 직원에 따르면, 7개 지점서 일하는 직원은 300~350명가량이었다. 직원들은 이른바 가족·지인 영업을 통해 투자자를 모집했다. 월 2% 수익 약속에 수천명 투자 20년 전과 과정도 결과도 같다? 대부분의 직원은 중·장년층으로 인터넷 기사 등을 통해 공개된 김 회장의 과거를 잘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 회장의 사기 전과를 알고 있던 피해자 역시 “원래 무죄였다”거나 전직 대통령을 거론하는 김 회장의 말솜씨에 넘어갔다고 한다. 훈장, 공적비, 기부 기사 등은 김 회장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따박따박 통장에 찍히는 배당금은 김 회장에 대한 신뢰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투자금의 1.5~2%에 이르는 배당금이 매달 입금되고 계약에 따라 만기가 되면 원금이 들어오는 구조였다. 예를 들어 1000만원을 투자하고 3개월 만기로 계약을 맺었다면 1060만원을 돌려받게 되는 셈이다.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에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김 회장은 본인의 사재를 털어 부족한 부분을 메꾸고 있다고 직원들에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면서 직원들에게 더 열심히 일하라고(투자자를 모집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김 회장은 자신의 재산이 1조원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수익이 나기 전까지 자신의 돈으로 원금과 배당금을 일부 주고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꾸준히 원금과 배당금을 받은 대부분의 피해자는 더 많은 돈을 재투자했다. 피해액이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불어난 이유다. 하지만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방식의 사업구조는 자금 순환이 막히면서 결국 무너져 버렸다. 피해자는 지난 2월까지 원금과 배당금을 정상적으로 받았기에 케이삼흥 사태를 예측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 중장년층↑ 하지만 경고음은 분명히 존재했다. 회계법인은 케이삼흥에 대해 ‘감사 의견 거절’을 냈다. 감사 의견 거절은 ▲감사인이 감사보고서를 만드는 데 필요한 증거를 얻지 못해 재무제표 전체에 대한 의견 표명이 불가능할 때 ▲기업의 존립에 의문이 들 때 ▲감사인의 독립성 결여 등으로 회계 감사가 불가능한 상황에 제시한다. 기업 내부 사정이 심상찮다는 소리다. 케이삼흥의 경우 ‘회계연도의 현금흐름표 및 재무제표에 대한 주석을 받지 못했다’가 감사 의견 거절의 근거가 됐다. 그럼에도 수많은 피해자는 김 회장을 철석같이 믿었다. 오히려 정관계 인사를 잘 안다는 김 회장의 말이 피해자의 투자심리를 부추겼다. 과거에도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 사기로 검찰 조사를 받던 시기에 정관계 로비 의혹을 받은 바 있다. 당시 김 회장이 횡령한 돈 일부가 정치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정치권 등의 유력인사를 언급해 투자자의 믿음을 사는 김 회장의 수법은 이번 케이삼흥 사태서도 반복된 것으로 보인다. 한 피해자는 “(김 회장이)정치인 인맥이 많다는 말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 다양한 통로로 정보를 얻는 젊은 층에 비해 정보에 어두운 중‧장년층은 김 회장이 주장하는 인맥에 신뢰를 보냈다. 사기 전과 있는데도… <일요시사> 취재에 따르면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과의 친분도 주장했다. 강연 과정서 서울시 고위공무원의 직책을 언급하면서 그를 통해 협조 약속을 받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과정서 토지나 주택 등을 관리하는 공공기관의 이름도 등장한다. 투자자에게 수익금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김 회장은 “작년에는 부동산 경기 자체가 불투명하니까 1년 동안 거의 안했어요. 착공 들어가려면 제일 먼저 하는 게 보상 업무잖아요. 올해 작년 것까지 합쳐서 하고 있어요. 사업계획 세워놓은 것은 차질이 없다고 하니까”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공공기관,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을 말하면서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이)그걸 관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은 서울시서 주택, 재난안전 등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을)만나서 사업이 진행되면 케이삼흥 것을 우선적으로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했다. 토지 보상을 하는 과정서 케이삼흥에 우선적으로 협조한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김 회장은 ‘주진입도로’ 등을 언급하면서 “2단계든, 3단계든 관계없이 케이삼흥 것을 먼저 협조해주겠다고 그 약속까지 제가 다 받아냈으니까. 하반기에 보상 나오는 것은 확실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강연에 참석한 투자자들은 중간중간 호응하다가 김 회장의 말이 끝나자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정치인 인맥·훈장 자랑 당사자는 “처음 들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일요시사>에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확인을 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의 인물은 지난 8일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김현재라는 이름은 지금 처음 듣는다”고 전했다.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명도 이날 처음 들었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과는 사적 친분은 물론이고 전혀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현재 케이삼흥 사태는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서 수사하고 있다. 김 회장 등 케이삼흥 경영진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법)과 유사수신행위 규제법 위반 등의 혐의를 받는다. 지금까지 파악된 피해자와 피해액은 최소 규모로 시간이 가면 더 늘어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직원으로 불린 모집책이 가족이나 지인 등을 상대로 투자를 권유한 경우가 많아 가정이 파탄난 사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피해자 가운데 일부는 가족의 병원비 등을 투자금으로 넣은 경우도 있었다. 피해자들은 수사기관에 고소하거나 집회를 준비하는 등 개별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빠른 수사가 관건이라고 입을 모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자가 받는 정신적 고통이 커지기 때문이다. 실제 케이삼흥 사태와 같은 대형 사건서 투자금을 돌려받지 못하거나 투자를 권유한 사람에게 독촉을 받던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빠른 수사 피해 복구는? 한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 돈까지 다 끌어모아서 투자했다. 원금만이라도 제발 돌려받고 싶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직원이면서 동시에 투자자인 이 피해자는 5억원 이상을 투자금으로 넣었다고 고백했다. 김 회장의 입장을 듣기 위해 문자메시지, 전화 등을 통해 연락을 취했지만 닿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