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김서정 기자 = 제약회사나 의료기기 회사가 의료인에게 리베이트를 주는 경우 제공자와 수수자 모두 처벌되는 리베이트 쌍벌제는 시행된 지 오래다. 그동안 경찰, 검찰, 공정거래위원회를 통해 적발된 많은 제약회사와 의료기기 회사, 의료인들이 형사 처벌과 행정처분을 받았지만, 의료계의 리베이트 관행은 근절되지 않고 있다. 특히 최근 ‘쪽지 처방’이 단속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어 우회적 리베이트의 수단으로 부상 중이다.
2016년 5월 서울 서부지방검찰청 식품의약조사부는 전국의 병·의원 의사 등에게 수십억원의 리베이트를 제공한 제약회사 파마킹의 대표를 약사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불법
회사는 2010년 1월부터 2014년 8월까지 영업사원을 동원해 현금, 상품권 등 총 56억원 상당의 리베이트를 제공했다. 회사로부터 뒷돈을 챙긴 의사 270여명도 검거됐다. 2년 뒤 대법원은 의료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의사 조씨 등 3명에 대해 벌금 400만~1500만원 및 추징금 850만~35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파마킹 영업사원으로부터 의약품 채택·처방 유도 등 판매 촉진을 목적으로 제공되는 금전인 리베이트를 반복적으로 수수한 바, 계속된 범죄 의도를 가지고 일정 기간 계속 행한 것이므로 의료법 위반죄의 포괄일죄에 해당한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파마킹 사건은 의료계 리베이트의 전형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의료인과 제약회사 간의 리베이트는 새로운 의약품이나 의료기기를 처방하면 이를 유지, 증대하는 조건의 대가를 받는 형태로 이뤄졌다.
과거 기존의 제약회사에서는 병원이나 약국 등의 부서 회식비를 지원하기 위해 신용카드를 빌려주거나, 접대성 경비를 외형상 제품설명회 경비로 처리했다. 또 매달 처방금액의 일정 비율을 따로 지급하거나, 의료인의 학회 참석 시 관광경비를 지원, 의사들의 사적 모임의 경비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리베이트가 이뤄졌다.
하지만 의료계 리베이트 논란이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자 시장조사 업체 등 제3자를 통해 설문조사를 진행하고 응답비를 받는 등 보다 우회적인 방법을 통해 리베이트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중 최근 리베이트에 사용된 ‘쪽지 처방’은 현행법상 리베이트로 처벌이 불가능해 법망을 빠져 나가는 방법으로 더욱 부각됐다. 쪽지 처방이란 의사가 환자에게 처방 없이도 살 수 있는 건강기능식품이나 일반의약품 등을 별도의 종이에 기재해 알려주거나 발행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의사가 판매 수익을 받는 조건으로 특정 영양제 등을 수기로 처방하는 것을 말한다. 환자가 해당 제품을 반드시 구매해야 한다고 오인할 수 있어 문제라는 지적이 있었다.
약사 절반 경험한 뒷거래 의혹
의료법상 리베이트 처벌 불가
건강기능식품과 일반의약품등은 소비자가 의사 처방 없이 제품을 고를 수 있지만 소비자들은 의사가 처방을 내렸으니 별다른 이견 없이 해당 제품을 구매하게 된다는 점에서 오해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의약품 시장은 의약품의 기능과 효능에 관한 정보를 비용 부담자인 환자보다 이를 처방하는 의료인이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 정보의 비대칭성이 있다. 소비자는 구매 가격 전체를 지불하지 않고 건강보험이 적용된 일부 금액을 지급한다. 따라서 가격 또한 천차만별이다.
한 업계 전문가는 “이런 행위가 소비자에게 오인을 유발하고 소비자의 제품 선택권을 제한하는 부당한 고객유인 행위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쪽지 처방이 단속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의료진에게 뒷돈이 주어지는 형태의 리베이트 의혹에도 현행 의료법상 의료행위에 포함돼 의료진을 처벌할 수 없다.
약국 약사들은 쪽지 처방 품목이 아닌 동일 성분 혹은 함량이 더 높은 제품을 추천해도 의사의 말을 신뢰하는 환자로 인해 해당 제품을 건넬 수밖에 없다고 현 상황에 대해 지적한다.
환자는 의사의 말을 절대적으로 믿고 해당 제품 외에는 구매하지 않기 때문에 약국은 사실상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과거 지속적인 리베이트 의혹에도 현행 의료법상 리베이트로 처벌받는 대상은 의약품과 의료기기에만 국한됐다.
실제 올해 3월 공정거래법 위반으로 적발된 ‘쪽지 처방’에도 의료진은 처벌을 피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쪽지 처방을 쓰라고 산부인과 병원에 요청한 에프앤디넷에 대해 ‘위계에 의한 고객 유인’으로 소비자의 선택권을 제한했다며 시정명령과 과징금 7200만원 부과했다.
지난 2011년 9월부터 2019년 8월까지 거래 중인 산부인과 의료인이 자사 제품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소비자가 처방받도록 유도한 에프앤디넷은 이를 위해 계약을 맺을 때 병원에 50% 수준의 판매수익을 보장하는 조건과 함께 자사의 제품만 취급하라는 독점판매 조항을 넣었다.
떠오르는 뒷돈 거래 수단
단속 사각지대서 관행화
당시 회사와 관련된 병원의 의료인은 내원한 산모 등에게 임신 준비기부터 임신 4개월까지는 ‘닥터 맘스 엽산’을 추천한다는 내용 등이 적힌 종이를 주고 병원 내 설치된 건강기능식품판매장으로 안내했다.
2019년 8월 공정위 조사 이후 회사는 쪽지 처방에서 자사 제품명을 지우고 영양소만 기재하도록 시정했다. 하지만 당시 판매수익의 절반을 전달받은 의료진은 처벌받지 않았다.
당시 공정위는 “쪽지 처방을 스스로 시정하고 재발을 방지하도록 유도하겠다”고 밝혔다. 이 같은 논란에도 쪽지 처방은 여전히 업계 관행으로 널리 행해지고 있다는 설문조사가 나왔다.
더불어민주당 김원이 의원이 올해 10월 대한약사회와 함께 전국의 약사 2079명을 대상으로 쪽지 처방에 대한 인식조사를 한 결과 최근 5년 이내 병‧의원으로부터 쪽지 처방을 받아본 적 있다는 약사는 559명으로 나타났다.
본인이 경험한 적은 없으나 들은 적 있다고 답한 응답자는 25.6%에 이르는 527명이었다. 조사 대상으로 한 약사의 절반 이상이 쪽지 처방을 직접 경험하거나 들어본 적이 있다고 답한 것이다.
이에 국회는 의료법상 리베이트를 처벌할 수 있는 법안을 추진해야 한다고 정부에 대안을 촉구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의약품 리베이트를 두고 대립하고 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의약품 리베이트는 가격 할인과 같은 통상적인 리베이트와는 달리 환자가 리베이트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의료인이나 의료기관만 그 혜택을 받는다”며 “리베이트 쌍벌제 등으로 의약품 리베이트를 규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리베이트 관행은 근절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리베이트 관행이 근절되지 못하면 리베이트로 제공되는 제약회사들의 비용은 의약품의 가격에 전가되어 결과적으로 국민과 건강보험 재정에 부담을 주게 될 소지가 있다”고 우려했다.
한편 공정위는 올해 6월 한국건강기능식품협회와 함께 건강기능식품 ‘쪽지 처방’ 자진신고 센터를 운영했다. 당시 공정위는 “올해 안에 건강기능식품 분야 공정경쟁 규약을 제정해 관련 시장에서 공정한 거래 관행이 정착될 수 있게 하겠다”고 밝혔다.
뒷돈
김 의원은 지난달 7일, 정부에 대안을 촉구하면서 “쪽지 처방을 대가로 의료진이 뒷돈을 받을 경우 의료법상 리베이트로 처벌하는 법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