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권 잠룡들의 예능 나들이 손익계산서

웃기는 정치인 무조건 좋을까

[일요시사 취재2팀] 함상범 기자 = 대한민국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있다. 20대 대통령을 가리기 위한 각 당의 경선이 치열하게 진행 중이다. 모든 후보가 정책을 바탕으로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그 과정에서 상대 후보를 공격하거나 상대 후보의 공격에 방어한다. 때론 인상을 붉히는 일도 발생한다. 선거의 승패를 가르는 건 이성보다 정서다 보니 공방을 하는 중에도 이미지 관리에 신경 써야 한다.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기에 가장 좋은 플랫폼은 예능 출연이다. 차기 유력 대권후보들이 예능 나들이에 나서고 있다. 

총과 칼을 들고 국민을 통치하던 군부 독재 시절만 하더라도, 국가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정치인이 TV 프로그램에서 코미디언과 웃음을 나누는 일은 상상할 수 없었다. 당시만 해도 방송사에 보도 지침을 내리는 주인에겐 아마 격에 맞지 않는 행위라고 판단했을 공산이 크다. 

선거철 
통과의례

전두환 전 대통령의 6·29 선언 뒤 직선제가 실현되고, 민주 정권이 돼서도 마찬가지였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정치인은 없었다. 최초의 연결고리는 1996년 MBC <이경규가 간다>였다. 

새벽 3시가 넘는 마라톤 회의 끝에 당시 DJ(고 김대중 전 대통령)를 만나기로 한 <이경규가 간다>의 이경규는 출근하는 DJ 맞아 갑작스럽게 인터뷰를 진행한다.

흔쾌히 ‘합시다’라고 수락한 뒤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72세의 DJ는 가장 좋아하는 가수로 서태지를 언급하고, 고 이희호 여사와 공원을 산책하는 등 특유의 소탈한 모습과 탈권위를 보이면서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당시 시청률은 40%가 넘을 정도로 화제성이 강했다.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2007년 고 노무현 대통령은 MBC <느낌표>에 권양숙 여사와 함께 출연해 대중과 직접 소통했다. 권 여사와 첫 만남부터 데이트를 이어가게 된 이야기,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했다는 사연과 이를 통해 연설하러 다니면서 큰 효과를 받았다는 추억 등을 유머러스하게 풀어냈다. 

아무리 예능이라 하더라도 대통령과의 만남이다 보니, MC들도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청와대 주요 인사들이 방청객을 차지하고 있는 모습도 생경한 풍경이다. 그럼에도 신비주의에 둘러싸인 정치인의 사적인 영역이 드러나면서 당시에는 어마어마한 화제가 됐을 뿐 아니라 정권의 지지율에도 적잖은 효과가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정치인이 예능에 출연하는 건 국가적 이벤트에 해당하는 사안이었다. 국정을 처리하느라 바쁜 정치인들이 예능에서 소탈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 개개인에게 효과적인지 의문이었을 뿐 아니라, 방송사 역시 이 같은 기획에 미진했다.

대통령과 같은 인물이 아니고서는 정치인이 굳이 나올 이유가 없었다.

그러한 인식을 바꾼 대표적인 인물은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다. 의사부터 공대 교수까지 거친 특이한 이력이 있던 안 대표가 MBC <황금어장-무릎팍도사>에 출연하면서 예능과 정치의 연결고리가 끈끈해졌다.

당시 연예인 신변잡기식 방송에서 벗어나 사회 저명인사의 출연을 통해 프로그램의 변화를 꾀하던 <무릎팍도사>의 눈에 안 대표가 눈에 띈 것.

제작진은 2008년부터 안 대표에게 섭외를 제안했다. 당시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안 대표는 강연과 인터뷰가 물밀 듯이 쏟아졌고, 카이스트 석좌교수로서 강의를 우선순위로 둬 “제안은 감사하지만, 적절치 않은 상황”이라며 출연을 고사했다.


<이경규가 간다>부터 <집사부일체>까지
정치와 예능 사이에 얽힌 연결고리는?

집요한 <무릎팍도사> 제작진은 1년이 지난 후에도 꾸준히 출연을 요청했다. 당시 회사 임원들조차 출연을 막았다는 후문이다. 연예인들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에 안 대표(당시 박사)가 나가면 희화화될 수 있다는 게 논리였다.

반대로 카이스트 학생들은 출연을 반겼고, 안 대표는 고민 끝에 출연을 결심했다. 그렇게 역사적인 방송이 만들어진 것. 

방송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특이한 이력의 안 대표가 살아온 길과 진정성 있는 이야기에 찬사가 이어졌다. 

안철수 신드롬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였다. 당시 정치권에 혐오를 느끼던 국민은 새로운 인물론을 부각하며 안 대표를 정치권으로 호출했다. 2011년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안 대표의 지지율은 50%가 넘었다. 정치권에 발을 담그지도 않은 신인에게 이러한 지지를 보내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현상이었다. 

당시 변호사이자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였던 고 박원순 서울시장과 단일화한 이후 그를 향한 국민의 지지는 더욱 강해졌다. 가히 예능이 배출한 정치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정치권에서 끊임없이 하락세를 거듭했고, 최근 서울시장 선거 경선 과정에서 오세훈 서울시장에 패배하는 등 지금에야 그에 대한 지지가 예년만큼은 아니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의 존재감은 정치권에 중요하게 작동한다.

안 대표의 삶이 예능 프로그램 출연 이후 완전히 달라진 것을 미뤄봤을 때 예능이 정치인에게 어떤 효과를 주는지 분명히 알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비슷한 시기 팟캐스트의 시초인 <나는 꼼수다>의 역할도 정치와 예능이 끈끈해지는 데 일조한 프로그램이다. 당시 진보진영의 정치인들은 <나는 꼼수다>에 나와 정책적 기조를 설명하는 것은 물론 권력에 대한 가치관, 개인사를 털어놓고, 때로는 첨예한 논란에 적극 해명하기도 했다. 

“계파가 누가 있냐” “리더십 부재에 대한 평가에 어떻게 생각하느냐” “꼭 당신이 이 직책을 맡아야 하느냐” 등 후보가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거침없이 던졌다. 당황하면서도 유려하게 넘어가는 장면에서 팬덤이 생기기도 했다. 진보진영 인사들이 대중에 각인되는 계기가 됐다. 

예능이
낳았다

진보진영에서 강세를 보인 팟캐스트 대안 언론의 서포트를 받은 사람들은 국회에 진입하는 등 새로운 형태의 정치가 시작됐다.


아울러 JTBC <썰전>도 정치가 대중의 일상에 스며들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MC 김구라를 중심으로 진보와 보수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토론 과정은 그 어떤 예능 프로그램보다 박진감이 있었다. 서로 의견이 나뉘어 싸우다가도 국가의 중차대한 문제 앞에서 화합하는 장면은 정치의 묘미를 전달하는 대목이기도 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정치와 예능이 결합된 방송 프로그램으로 대표적인 예다. 

2012년 당시 후보였던 박근혜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이 SBS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에 출연했다. 당시 보수 진영 후보였던 박 전 대통령은 중학교 시절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사진을 공개했고, 문 대통령은 특전사 시절 사진을 공유하며, 격파 시범을 선보이기도 했다. 

각각 친근하고 소탈하거나, 강하고 믿음직스러운 이미지를 연출했다. 예능이 정치인의 이미지 제고에 활용됐다. 

이후에는 국내 중요한 선거가 있을 때마다 정치인이나 혹은 유력 후보의 예능 진출은 통과의례가 됐다. 지방선거나 총선 등 국내 굵직한 선거에서 예능에서 편안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방송사나 정치인으로서 이득이 되는 것이 많다는 판단에서다. 

실제로 국민의힘 나경원 전 국민의힘 의원과 더불어민주당 후보였던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지난 4월 재보궐선거를 3개월 앞두고 TV조선 <아내의 맛>에 출연했다. 또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성남시장 시절 SBS <동상이몽2>에 출연해 남편 이재명의 민낯을 드러내기도 했다. 


해당 프로그램은 관찰 예능으로 토크쇼와는 달리 집안에서의 사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정치인의 일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에서 대중은 해당 인물의 매력을 느낀다는 반응을 보였다. 대중의 반응이 크자 미디어 비평 전문가들은 대중을 호도한다며 비판했다.

대중의 눈
못 속인다

예능에서 짜여진 모습을 실제로 믿는 대중이 많다면서 위험성이 높다는 게 요지였다.

최근에는 정치인의 예능 출연이 예전만큼 높은 파급력을 갖지는 못하고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지지율이 급반등 된다거나, 정치적 논란이 완벽하게 해소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 

이미 대중이 정치인의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을 분리하는 인식이 생겼기 때문에, 안철수 대표나 DJ와 같은 드라마틱한 효과를 보지는 못한다는 의미다. 기존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는 데만 효과를 본다는 주장이 나온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과거 이명박 전 대통령의 국밥 영상과 같은 효과를 보는 시대는 지나갔다. 국민 대다수가 정치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정치인의 공과 사를 구분해내는 능력이 생겼다”며 “현재 예능 출연은 각 후보의 인기를 검증하는 차원이다. 엄청난 효과를 보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말했다. 

한창 경선 과정이 진행되고 있는 최근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 이재명·이낙연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SBS <집사부일체>에 출연했다. 검찰총장 출신인 윤 후보는 밥을 직접 해주는 형님 리더십을 부각시켰고, 각종 논란에서도 호탕하게 넘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비교적 순한 이미지인 <집사부일체> 패널의 공격에 웃음으로 대응했다. 

언변에 능하지 않은 윤 후보는 현안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과거 검사가 되는 과정과 검찰 시절의 모습, 평소 생활 등 인간 윤석열을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 게스트에 따라 장소와 내용 모든 것이 바뀌는 <집사부일체>의 윤석열 편은 관찰 예능이 더러 섞인 SBS <돌싱포맨>과 비슷한 형태의 포맷이었다. 

반대로 이재명 후보는 논란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집이 아닌 새로운 공간에서 <집사부일체> 패널과 만난 이 후보는 각종 논란에 해명하는 시간으로 할애했다. 현 후보 중 가장 의혹 거리가 많은 그는 <집사부일체>를 해명의 기회로 만들려는 의지가 엿보였다. 

“약점 보완에 매력 어필도 쉬워”
“결정 못한 지지자 얻을 기회도”

직설적인 화법을 갖고 있고, 언변에 화려한 그가 어떤 형태로 예능을 활용하려 했는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재명 후보의 <집사부일체>는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나 tvN <유퀴즈 온더 블록>과 같은 토크쇼 형태였다. 

이낙연 후보는 유일하게 아내 김숙희씨와 함께 나왔다. <집사부일체> 패널과 식사를 하면서 평소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데 주력했다. 유머감각 면에서 단점이 있는 이 후보에게 편안함을 주면서 재미의 영역을 아내를 통해 만들어낸 것.

정덕현 평론가는 “<집사부일체>의 포맷을 보면서 각 후보가 어떤 면을 부각시키려 하고 숨기려 하는지 각각의 장단점을 읽을 기회가 됐다”며 “윤 후보는 리더십을 드러내고,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려 했고, 이 후보는 의혹을 정면돌파하는 데 중점을 뒀다. 이낙연 후보는 인간적인 면모의 보완에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정치인의 예능 출연은 일종의 팬 서비스 형태로 변화했다. 선거철 표를 달라고 국민을 만나고 다니는 것의 또 다른 형태”라며 “예능 출연이 화제성 면에서 약간의 효과는 있겠지만, 대세를 바꿀 정도로 큰 역할은 하지 못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치와 예능 간에는 이해관계가 정확히 맞물린다. 정치인들은 자신이 약점이라 생각하는 부분을 방송을 통해 보완할 수 있으며, 전문 방송인의 립 서비스를 받으면 대중에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정치인과 연예인이 비슷한 성질을 가진 직업군이라는 점으로 봤을 때, 정치인에게 있어 예능 출연은 실보다 득이 크다.

이로 인해 경쟁후보가 나오는 방송에 자신이 나오지 못하면 심하게 반발하는 경우도 생긴다.

방송사 입장에서도 나쁠 것은 없다. ‘뜨거운 감자’인 유력 정치인이 방송에 나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화제성을 가질 뿐 아니라 시청률도 크게 오른다. 방송 후에는 수많은 시사프로그램에 방송 장면을 바탕으로 리뷰하는 방송도 급격히 늘어나, 프로그램 홍보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새로운 시청자를 흡수하는 새로운 기회다. 

팬 서비스
립 서비스

한 방송 관계자는 “비록 예년만큼 효과를 보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정치와 예능은 서로 윈윈 전략을 짜나가고 있다. 굵직한 선거를 앞둔 정치인의 예능 출연은 이어질 전망”이라며 “다만 정치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대중을 호도하는 식의 역기능은 보완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intellybeast@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집사부’ 못 간 홍준표 왜?
 
정치인들의 예능 출연이 물밀 듯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홍준표 국민의 힘 대선 후보도 예능에 출연해 일상을 드러냈다. 

앞서 정치권에서는 지상파 방송인 SBS <집사부일체>에 보수 진영의 윤석열 후보, 진보 진영의 이재명‧이낙연 후보만 출연하는 것에 대해 홍준표 후보가 서운해할 것으로 점쳤다.

그런 상황에 홍 후보는 TV조선 <와이프 카드 쓰는 남자>(이하 <와카남>)으로 반전을 꾀했다.

여성들로부터 좋지 못한 지지율을 얻는 그는 <와카남>에서 아내와의 러브스토리를 풀고 설거지를 하는 등 가정적인 이미지를 드러냈다. 그는 “여성분들이 오해를 좀 풀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지속적으로 약점으로 거론된 여성 표심을 잡기 위한 방송 출연이었다고 평가했다. <와카남> 시청률은 1부 5.6%, 2부 4.6%로 기존 방송보다 소폭 상승했다. <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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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구성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수장이 반년 만에 끌려 내려왔다. 막말에 가까운 강한 발언과 제멋대로인 행보가 탄핵을 불렀다. 강성 수장이 물러나면서 변화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인가, 더 높은 벽이 쌓일 것인가.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전 회장이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지난 5월 취임 이후 6개월 만으로 의협 역사상 2번째, 최단기간 내 불명예 퇴진한 회장이 됐다. 첫 번째는 2014년 4월 임기 1년여를 앞두고 탄핵당한 노환규 전 회장이다. 두 번째 최단기간 의협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임 전 회장의 불신임안을 처리했다. 참석 의원 224명 가운데 170명(75.9%)이 찬성했다. 반대는 50명, 기권 4명이다. 전체 대의원 249명 가운데 224명(91.1%)이 표결에 참여했다. 의협 정관에 따르면, 회장 불신임안은 제적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고, 출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지난 3월 임 전 회장은 선거서 유효 투표수 3만3084표 중 2만1646표를 받아 당선됐다. 65.43%의 압도적인 지지다. 의협 회장 선거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로 의정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치러졌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정부가 ‘2000명’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의협 회원들은 강성 중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임 전 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임 전 회장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임 전 회장의 언행은 사사건건 도마 위에 올랐다. SNS에 올린 글, 공식 석상서 했던 발언 등이 막말 논란으로 번졌고, 단식투쟁 등의 행보는 ‘쇼’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비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의료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임 전 회장이 8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고스란히 탄핵 사유가 됐다. 의협 회원 사이에서는 임 전 회장이 SNS로 막말과 실언을 해 의사단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임 회장이 전공의 지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비방 글을 올린 시도의사회 임원에게 고소 취하 대가로 1억원을 요구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 인물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은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을 겨냥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개소리”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환자를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현택, 6개월 만에 탄핵당해 막말 논란·의대 증원 못 막아 또 2021년 한 의사가 80대 환자에게 ‘맥페란’ 주사제를 투여한 뒤 부작용이 나타나 기소된 재판에 대해서도 도 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맥페란 재판’ 항소심서 판사가 1심의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해당 의사의 항소를 기각하자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글을 SNS에 올린 것이다. 임 전 회장의 발언에 법원은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와 관련해 기각·각하 결정을 내린 재판장이 ‘회유’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도 입길에 올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결정을 내린 다음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고법 판사들이 차후 승진으로 법원장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었는데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그런 통로가 막혀서 이분이 아마 어느 정도 대법관에 대한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말했다. 서울고법은 법원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해당 단체장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성 발언은 재판장의 명예와 인격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면서 “사법부 독립에 관한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침해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다.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막지 못한 점,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지 못한 점이 탄핵 사유로 꼽혔다. 임 전 회장은 총회를 앞두고 의사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재신임을 호소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회장을 탄핵한 의협은 비대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 13일 새로운 회장 선거 전까지 단체를 이끌 비대위원장을 뽑았다. 그 결과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이 1차 투표서 총 유효 투표수 233표 중 123표(52.8%)를 얻어 과반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임기는 내년 1월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다. 뒤늦게 호소했지만…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의료 파탄이란 시한폭탄을 장착해놨다”며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정부는 먼저 시한폭탄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입장과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비대위 운영서 소외돼왔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전 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비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의협의 투쟁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일각에서는 의협의 이번 행보를 의정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강성 회장을 필두로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던 이전 모습서 벗어나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이전보다 더 수위 높은 대정부 투쟁이 예상된다는 의견으로 갈리는 중이다. 후자의 배경에는 대전협이 있다. 앞서 박단 비대위원장 등 전공의 70여명은 전날 의협 대의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박형욱 교수를 추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공개 지지 의사를 드러냈다. 대의원회서도 박단 비대위원장의 공개 지지에 대해 경고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전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형욱 비대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전공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의협과 대전협의 공조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양측의 교류가 정부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당선 소감부터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의정 갈등서 줄곧 선봉에 선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라는 요구사항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 적이 없다. 전공의의 행보는 의대생, 의대 교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력 커진 전공의 단체 의료계가 전공의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전협은 지난 11일 출범했던 여야의정협의체(이하 협의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협의체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불참하고 의료계에서는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만 참석하는 등 ‘반쪽 출범’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협의체의 운영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다음 달 22~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박단 비대위원장은 협의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협의체가 첫발을 뗀 11일 SNS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전공의와 의대생, 당사자 없이 대화나 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한 대표는 2025년 의대 모집 정지와 업무개시명령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밝히시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어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면 한동훈의 ‘여야의정 협의체’ 역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의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와 결국 같은 결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특위는 의료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의협 주도로 구성한 범의료계 특별위원회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해당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파행 운영되다 지난 7월 해체됐다. 정부는 협의체서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진정성 있게 검토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1일 협의체서 의료계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자율성 보장, 추가 합격 제한 등을 통한 2025학년도 의대 선발 인원 축소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지난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마주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활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협과 전공의 등 다른 의료계 단체의 참여를 호소했다. 박단 공개 지지 새 비대위원장 강경 투쟁이냐 VS 노선 변화냐 의료계 내부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향후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0)’ 상태다. 임 전 회장과 박단 비대위원장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다.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등 ‘(임 전 회장과)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실제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요청하면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대전협 두 단체가 향후 상호 연대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임 전 회장의 탄핵안 가결 직후 박 비대위원장이 “결국 모든 길은 바른 길로”라는 내용의 SNS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임 전 회장이 박단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반격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 전 회장은 탄핵 사흘 만에 닫았던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열고 “박단과 그 뒤에서 박단을 배후 조종해 왔던 자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 의사 회원들에게 아주 상세히 밝히겠다”며 박단 비대위원장을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의협 대의원회 비대위원장과 의협 회장 선거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면서 “박단이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 모든 권한과 책임하에 의료 농단을 해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유가 어떻든 회장 취임 전부터 탄핵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넘어간 것 자체가 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또 의협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협 대의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의 사원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원총회는 민법에 규정된 사단법인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이다. 의협 최고의결기구로 알려진 대의원총회보다 상위에 있고 정관의 규정으로 폐지할 수 없다. 사원총회는 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총 사원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해 청구하는 경우 소집될 수 있다. 반격 시작 내부 갈등? 올해 2월 시작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온갖 말이 오갔지만 되짚어보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평행선 상황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의료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