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숫가 산책 ⑤화순 세량지

여름 향기 그윽한 곳

저수지는 흐르는 물을 저장해 필요할 때 사용하는 인공적인 수리 시설이다. 물이 넉넉하니 자연스레 주변으로 나무와 풀이 우거지고, 바람이 없는 날에는 잔잔한 수면이 거울처럼 하늘을 담아낸다. 언제부턴가 그 서정적인 풍경을 찾는 이들이 늘면서 관광지로 입소문 난 저수지가 여럿 있다. 가장 유명한 저수지를 꼽으라면 단연 화순의 세량지 아닐까. 한국을 넘어 2012년 미국 뉴스 전문 방송국 CNN까지 ‘한국에서 꼭 가봐야 할 50곳’으로 선정했다니, 그 빼어난 경치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세량지는 농업용수를 공급할 목적으로 1969년에 준공했다. 둑을 의미하는 세량제로도 불린다. 유효 저수량 5만4000t이고, 이 물을 받아 농사짓는 땅이 3만3000㎡에 이른다. 샘이 있는 마을이라고 ‘새암골’로 불리던 이곳 주민에게 더없이 귀한 물이다. 흙을 쌓아 올린 둑은 길이 50m에 높이 10m 남짓. 호수 호(湖) 자를 붙일 만큼 드넓은 저수지와 비교하면 그리 큰 규모는 아니다. 이 작은 저수지가 먼 나라까지 이름을 알린 계기는 산벚나무 꽃이 흐드러진 봄날 아침에 촬영한 사진 몇 장 덕분이다.

유명 출사지

이제 막 새어 들기 시작한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연둣빛 잎사귀와 연분홍 꽃잎. 이 풍경이 고스란히 비친 물낯 위로 하얀 물안개가 새치름히 피어오른다. 이 신비스럽고도 몽환적인 찰나를 카메라에 담으려고 해마다 봄이면 아침 일찍부터 전국에서 사진가가 몰려든다. 벚꽃이 활짝 핀 사나흘 동안 하루 1000명씩 다녀가는 곳이라, 지난해와 올봄에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전국에서 유일하게 단체 출사를 금했다. 출사지로 워낙 명성이 높다 보니, 한때 이곳에 공동묘지를 조성하려던 계획도 사진 동호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의 거센 항의 끝에 무산됐다. 세량지의 가치를 재발견한 것도, 지켜낸 것도 사진의 힘이다.

세량지의 매력이 봄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꽃이 지고 사진가의 발길이 뜸해지는 초여름이면 평화로운 물가를 호젓하게 즐기기 적당하다. 둑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아름답지만, 저수지 왼쪽에 자리한 전망대에서 세량지를 물들인 짙푸른 녹음을 가까이 감상할 수 있다. 

세량지 주변으로 약 800m 둘레길이 있는데, 봄날의 싱그러움보다 한층 깊어진 초록빛이 걷는 내내 눈을 맑게 해준다. 조금만 허리를 굽히면 노란색과 흰색 들꽃이 생명력을 뽐내고, 시원한 산그늘이 청량함을 더한다. 곳곳에 의자가 있어 마음껏 게으름을 피워도 좋다. 여름 향기 그윽한 세량지둘레길은 대부분 완만한 흙길이라, 어르신은 물론 아이와 함께 걷기에 부담 없다.


혹여 이 길이 너무 짧게 느껴진다면 세량지 오른쪽 산자락을 따라 이어지는 벚꽃누리길에 즐기기에 도전하자. 총길이 4km 트레킹 코스로, 느티나무와 아까시나무 줄기가 맞닿아 부둥켜안은 듯한 사랑 나무(연리지)도 만날 수 있다. 역시 완만한 흙길이라 세량리 주민들이 아침저녁으로 찾는 산책 코스다.

세량지로 향하는 길목에 조성된 생태공원도 놓치지 말아야겠다. 한낮의 무더위를 시원하게 날리는 분수대와 정자, 연못 둘레를 따라 놓인 덱이 산책의 여운을 되새기게 한다. 2019년부터 마을 주민들이 여름을 상징하는 노란 해바라기도 심었다. 키는 제각각이어도 바람에 일렁이는 황금빛 물결이 한여름 정취를 만끽하기에 제격이다. 여름에 세량지를 챙겨봐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 셈이다.

‘한국에서 꼭 가봐야 할 50곳’ 선정
빼어난 경치로 입소문 난 관광지

산책한 뒤에는 시원한 커피 한 잔이 간절해지는 계절이다. 세량지에서 자동차로 가면 20분 거리에 있는 소아르갤러리는 전시장과 카페가 어우러진 복합 문화 공간이다. 지역의 청년 작가와 왕성하게 활동하는 중견작가들이 다양한 기획전과 초대전을 선보인다.
커피 한 잔에 마음을 울리는 미술 작품과 아기자기한 정원, 마치 숲속에 들어온 것처럼 싱싱하고 향기로운 온실까지 무료로 만나볼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삼조다.

얼마 전 MBC 예능 프로그램 〈손현주의 간이역〉에 등장해 화제를 모은 능주역도 멀지 않다. 1930년에 영업을 시작한 능주역은 삼각 지붕과 담박한 외벽이 기차역 특유의 낭만을 불러일으킨다. 프로그램에서는 발권 업무를 하는 장면이 나왔지만, 실제로는 열차에 올라 승무원에게 승차권을 구입해야 한다. 야간과 주말엔 역무원이 근무하지 않는다. 플랫폼에는 예능 프로그램 촬영 당시 배우들이 직접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린 능주역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운주사

세량지와 함께 화순8경에 꼽히는 운주사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운주사 앞에는 늘 ‘천불천탑’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조선 시대 지리서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이 산자락에 불상 1000기와 불탑 1000기가 있었단다. 안타깝게도 세월의 부침 속에 지금은 석탑 21기와 석불 80여기만 남았다. 다른 사찰에서 보기 어려운 등을 맞댄 석불(화순 운주사 석조불감, 보물 797호)이나 승려의 밥그릇인 발우를 쌓아 올린 것 같은 원형 석탑 등 다채로운 석불과 석탑이 있어 흥미롭다. 미처 세우지 못한 거대한 와불도 사찰의 오묘함을 더한다.

 


<여행 정보>
당일 여행 코스
세량지→소아르갤러리→능주역→운주사

1박2일 여행 코스
첫째 날: 세량지→소아르갤러리→능주역→영벽정 
둘째 날: 세계유산 화순고인돌유적→운주사→화순동복연둔리숲정이 

관련 웹 사이트 주소
- 화순군 문화관광 www.hwasun.go.kr/culture
- 소아르갤러리 blog.naver.com/soarartmuseum
- 운주사 www.unjusa.kr

문의 전화
- 화순군청 관광진흥과 061)379-3501~7
- 소아르갤러리 061)371-8585
- 능주역 1544-7788
- 운주사 061)374-0660 

대중교통
[버스] 서울-화순, 센트럴시티터미널에서 하루 2회(09:00, 15:30) 운행, 약 4시간15분 소요. 화순시외버스공용정류장에서 택시 이용, 세량지까지 약 15분 소요. 
*문의: 센트럴시티터미널 02)6282-0114 고속버스통합예매 www.kobus.co.kr 화순시외버스공용정류장 061)374-2254 
[기차] 용산역-화순역, 무궁화호 하루 1회(08:45) 운행, 약 5시간 소요. 화순역에서 택시 이용, 세량지까지 약 10분 소요. 
*문의: 레츠코레일 www.letskorail.com, 1544-7788

자가운전
경부고속도로→천안 JC에서 광주·전주·세종 방면→논산 JC에서 광주·익산 방면→산월 IC에서 무안광주고속도로·제2순환도로 방면→송암톨게이트→효덕교차로에서 목포·광주대학교 방면→효덕로 방면 우회전→세량지 방면 우회전→세량지

숙박 정보
- 양동호 가옥(한국관광 품질인증업소): 화순군 도곡면 달아실길, 010-8611-8650
- 금호화순리조트: 백아면 옥리길, 061)372-8000
- 도곡원네스스파·리조트: 도곡면 온천1길, 061)374-7600
- 아델캐슬풀빌라: 도곡면 지강로, 010-9203-9939

식당 정보
- 색동두부집(색동두부·포두부보쌈): 도곡면 지강로, 061)375-5066 
- 수림정(굴비백반): 화순읍 진각로, 061)374-6560
- 사평다슬기수제비(다슬기수제비·다슬기탕): 화순읍 서양로, 061) 372-6004

주변 볼거리
백아산하늘다리, 규봉암, 무등산양떼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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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여발 사법 전쟁 ‘끝까지 간다’

거여발 사법 전쟁 ‘끝까지 간다’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회 문턱을 넘은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이 사법부를 강타했다. 검찰은 1999년 특별검사제 도입 이후 권한을 조금씩 잃다가 올해 해체가 결정됐다. 검찰이 26년 전 느끼다가 현실이 된 불안을 이젠 사법부가 느낄 차례일지도 모른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범여권이 지난 24일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대법원은 지난 18일 “내란 사건만 맡는 전담재판부를 만들어 운영한다”는 취지의 예규 제정 방침을 밝혔다. 특별재판부 영장전담 법관 하지만 민주당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같은 날 논평을 통해 ‘24일 처리 방침’을 밝혔다. 이날 법안 처리는 이미 예고된 결과였다. 박 대변인은 지난 21일 오전 기자 간담회에서도 “민주당은 국회 본회의에서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을 예정대로 처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당이 원래 처리하려던 법안은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법’이었다. 이 법안이 통과됐다면, 12·3 비상계엄 관련 재판을 맡을 특별재판부가 설치되고, 영장 심사를 맡을 특별영장 전담 법관이 따로 배정됐을 것이다. 이들은 국회·판사회의·대한변호사협회가 3명씩 추천한 위원으로 구성되는 9인 규모의 추천위원회의 2배수 추천과 대법원장의 임명을 거칠 예정이었다. 아울러 상고심에선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임명했던 대법관은 모두 제척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에 대해선 각계에서 위헌 논란을 제기했다. 그러자 민주당은 지난 16일 내용을 대폭 수정했다. 명칭도 특별재판부에서 전담재판부로 바뀌었다. 전담재판부 후보추천위원회는 법무부 장관·헌법재판소 사무처장 등 외부 인사를 제외한 후 법관으로만 구성될 예정이다. 추천위원회에 들어갈 법관 중엔 각급 판사회의·전국법관대표자회의가 포함된다. 전담재판부에 소속될 법관은 추천위원회·대법관회의를 거쳐 대법원장이 임명한다. 윤석열 전 대통령 등 12·3 비상계엄 주요 연루자들은 이미 형사재판 제1심을 받고 있다. 전담재판부는 항소심부터 맡을 예정이다. 대법원은 민주당의 공세에 맞서 반격에 나섰다. 대법원은 지난 18일 대법관 행정회의를 열어 ‘국가적 중요 사건에 대한 전담재판부 설치 및 심리 절차에 관한 예규’를 제정하기로 했다. 여기엔 “형법상 내란·외환죄와 군형법상 반란죄 사건을 전담해 집중 심리하는 전담재판부를 설치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된다. 대법원이 규정하는 전담재판부는 무작위 배당을 거쳐 사건을 배당받을 재판부가 지정되는 방식이다. 전담재판부로 지정된 재판부가 원래 맡던 재판은 다른 재판부로 재배당된다. 예규엔 “해당 재판부는 이후 내란·외환과 관련 없는 새로운 사건은 맡지 않는다”는 규정이 포함됐다. 하지만 민주당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박 대변인은 “사법부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왜 이렇게 늦게 했느냐”며 “왜 그동안 국민을 불안과 혼란에 빠뜨렸느냐”고 비판했다. 이어 “국회의 입법권을 대법원의 예규 제정에 맞춰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내란 전담재판부 신설이 갖는 ‘진짜 함의’ 대법원 예규 제정…반격 혹은 타협안 제시 민주당 정청래 대표도 같은 날 최고위원회의 중 “대법원이 헐레벌떡 자체 안이라고 내놨다”며 “더 일찍 해야 하지 않았느냐. ‘조희대 사법부’답다는 생각이 든다”고 비판했다. 국내 헌정사에서 특별재판부는 단 2회만 설치됐다. 제헌헌법 부칙엔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돼있었다. 이후 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 등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를 설치했다. 반민특위엔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가 설치됐다. 특별검찰부는 검찰총장 등 9명으로 구성됐고, 특별재판부는 ▲국회의원 5명 ▲법조인 6명 ▲사회 저명 인사 5명 등 총 16명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국회가 선출했다. 두 번째 특별재판부는 1960년 4·19 혁명 이후 개정된 제4차 개정 헌법을 근거로 설치됐다. 당시 개정 헌법엔 “3·15 부정선거 및 4·19 혁명 관련자들과 관련된 형사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특별재판소와 특별검찰부를 둘 수 있다”는 취지의 부칙이 포함돼있었다. 이후 설치된 특별재판부는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 제정을 거쳐 설치됐다. 민주당조차 ‘특별재판부’를 ‘전담재판부’로 수위를 낮춰 처리했다는 이유로 내란 특별재판부에 대해 불거진 위헌 시비를 거론한다. 법원은 ‘무작위 전산 재판 배당’ 원칙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특정 재판부에 특정 재판을 배당한다”는 취지의 특별재판부에 대해선 기본적으로 위헌 시비가 불거질 가능성이 높다. 아직 헌법재판소가 관련 합헌·위헌 여부를 가린 적도 없다. 하지만 헌법 제27조는 “모든 국민은 헌법·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해 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재판 배당의 무작위성은 재판에 대한 외부의 부당한 압력·영향력으로부터 법관을 보호해 재판의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세운 원칙이다. 이는 위헌 시비가 불거진 핵심 이유였다. 그래서 과거엔 특별재판부를 설치하기 전에 개헌 과정 중 헌법 부칙에 그 근거를 규정했다. 헌법 부칙은 헌법 본문과 똑같은 효력을 가진다. 그래서 위헌 시비가 불거질 일은 없었다. 피해 가는 위헌 시비 하지만 위헌 시비를 피하려고 제시한 ‘내란 전담재판부’에 대해서도 논란이 이어졌다. 역설적으로 “기존 재판부 배당과 큰 차이가 없다”는 취지의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사법부는 이미 무작위 배당의 예외를 운용하고 있다. ▲특허법원 ▲서울행정법원 ▲지역별 가정법원 등 특정 분야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법원이 따로 설치돼있는 것도 무작위 배당의 예외다. 또 각급 법원은 이미 지식 재산·환경·의료 등 특정 전문 분야를 전담할 재판부를 분류한다. 법원장 재량에 따라, 재판장들과의 협의를 거쳐 특정 사건은 ‘적시 처리 필요 중요 사건’으로 분류해 특정 재판부에 배당해서 신속한 재판 진행을 추진한다. 기소된 사건이 이미 진행 중인 재판과 사실 관계·쟁점·피고인이 같으면, 이미 진행 중인 재판을 담당하는 재판에 배당한다. 물론 민주당이 거둘 수 있는 실익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정 대표는 민주당이 ‘특별’을 ‘전담’으로 바꿔가면서도 서둘러 개정안을 추진하는 이유를 분명히 짚었다. 그는 “조희대 대법원장의 사법부와 지귀연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의 재판부는 내란·외환 사건의 심리를 의도적으로 침대 축구하듯 질질 끌었다”며 “조 대법원장은 경고·조치를 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보다 못한 입법부가 나서기 전에 사법부가 진작 내란 전담재판부를 설치했다면, 지난 1년 동안 허송세월하는 것을 보면서 국민이 분통 터지는 상황은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대표의 주장 중 핵심 단어는 ‘조희대’와 ‘지귀연’이다. 민주당이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를 추진할 당시 민주당 전현희 최고위원은 지난 9월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지 부장판사를 지칭해 “재판의 공정성에 의구심을 갖도록 하는 인사들을 전보·징계한다면, 굳이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들기 위한 입법 조치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주장했다. 정 대표는 지난 15일 최고위원회의 도중 “조희대 사법부는 특검 수사 훼방꾼이 됐다”며 “조 대법원장이 지휘하는 대법원이 지난해 12월3일 내란에 동조한 건 아닌지 강한 의구심을 갖는다”고 지적했다. 사법행정사무를 총괄하는 조 대법원장의 권한 일부를 사실상 박탈하고, 지 부장판사를 내란 관련 재판에서 손 떼게 할 수 있다면, 민주당은 상당한 실익을 거둘 수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재판부 배당에 전국법관대표자회의를 개입시키는 것이다. 힘 실어준 진짜 이유? 전국법관대표자회의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당시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 이후인 지난 2018년 4월 “권한이 집중된 제왕적 대법원장을 견제하고, 법관의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를 갖고 설치됐다. 보수 진영 일각에선 이를 일컬어 “지나치게 민주당에 친화적”이라고 비판한다. 전국법관대표자회의 설치 직후 첫 의장으로 선출됐던 최기상 당시 서울북부지법 부장판사는 현재 민주당 의원이다. 전국법관대표자회의는 지난 9월 민주당이 주장한 의제 ‘대법관 증원론’을 포함한 상고심 제도 개선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어 “사법부는 대법관 증원안을 경청하고 자성해야 한다”는 취지로 보고서를 작성·공개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전국법관대표자회의를 일컬어 “민주당에 힘을 설어주기 위해 토론회를 개최한 게 아니냐”는 비판 목소리도 제기됐다. 대법원의 이재명 대통령에 대판 파기환송 판결에 대해서도, 정 대표는 지난 9월 전국법관대표자회의에 “조 대법원장 사퇴 권고 등 사법부에 대한 국민적 신뢰 회복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일각에선 “대법원의 예규 제정은 반격”이라고 해석한다. 그 근거로는 “내란 전담재판부를 줄곧 반대하다가 갑자기 예규 제정을 밝힌 의도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는 점을 들었다. 민주당은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 외에도 기존 사법 체계를 모두 바꿀 만한 사법개혁안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대법원의 예규 제정에 대해선 “민주당의 공세를 적절한 선에서 수용해 더 큰 공세에 대비하려는 의도”라고 보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특별재판부’가 ‘전담재판부’로 바뀌었다고 해서 다른 사법개혁안 통과 시도가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법원으로선 기존 사법 체계를 모두 바꾸려는 민주당의 시도를 보면서 검찰이 해체되는 과정을 되새길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이미 민주당이 주도하는 사법개혁안 자체가 사실상 ‘기존 법원 해체’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 조금씩 권한 잃다 해체 결정 검 종착역은 헌재 최고법원 등극? 민주당 등 범여권이 검찰을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으로 분리해 완수했던 검찰 해체에 대해선 “헌법은 검찰 조직의 존재를 전제로 검찰총장의 존재를 규정했다”면서 위헌 논란을 제기하는 반대 측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범여권은 이를 강행했다. 큰 틀에서 보면, 검찰은 ▲특별검사제도 도입 ▲검경 수사권 조정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설치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 분리 등 과정을 거쳐 해체됐다. 최초의 특별검사(이하 특검)는 지난 1999년 김태정 전 검찰총장 부인에 대한 옷 로비 의혹과 한국조폐공사 노조 파업 유도 사건에 대해 진행됐던 최병모 특검이었다. 특검이 성립됐던 배경은 “검찰이 검찰총장의 부인이 연루된 사건을 제대로 수사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인 시선이었다. 아울러 당시 국회 구도는 여소야대였다. 한나라당은 “사건을 축소·은폐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흐름을 타고 강하게 밀어붙여 특검법 제정을 주도했다. 이후 현재까지 개별 특검법은 총 16개가 통과됐고, 상설 특검은 6회 추진됐다. 검찰로서는 1999년 최병모 특검 설치가 수사권·기소권 독점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현재까지 총 22회의 특검이 성립됐다는 것은 검찰에 대한 각계의 불신을 상징하는 중요 사실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검찰을 노리는 다음 단계는 검경 수사권 조정이었다. 최초의 검경 수사권 조정은 지난 2011년 진행됐다.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사법경찰관이 검사의 수사 지휘에 이의를 제기하는 재지휘 건의 제도 신설 등의 내용이 담긴 안을 대통령령으로 제정해 의결했다. 지난 2016년엔 ▲진경준 게이트 ▲정운호 게이트 ▲김형준 전 부장검사의 스폰서 의혹 ▲최순실 게이트 등이 연이어 발생해 검찰의 신뢰도에 대한 강한 문제 제기가 이어졌다. 이는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장기간 논의된 검경 수사권 논의로 연결된다. 공수처도 설치됐다. 민주당 집권 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사건을 강하게 기억하는 지지자들의 비원을 외면하긴 어려웠던 측면도 있었다. 그렇게 검찰은 서서히 권한을 빼앗겼다. 그러다가 지난 9월에 이르러 검찰은 내년부터 중대범죄수사청과 공소청으로 갈라질 운명에 처했다. 특히 중대범죄수사청은 행정안전부로 옮겨진다. 서서히 권한을 빼앗기다가 끝내 해체를 앞둔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민주당 등 범여권은 ▲법원행정처 폐지 ▲법 왜곡죄 도입 ▲대법관 증원 ▲재판소원 도입 등 사법개혁안을 시도하고 있다. 범여권이 사법개혁안을 모두 통과시킨다면, 사법부로서는 “검찰에 이어 사법부도 한순간에 와해된다”고 인식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한순간에 와해된다 법원행정처가 없어지면 대법원장의 권한이 줄어든다. 법 왜곡죄가 도입되면, 판사의 재판도 법적 처벌 범위 안에 포함될 위험에 노출된다. 대법관이 늘어나 대법관의 권위·희소 가치가 줄어든 후 재판은 헌법소원 제기 범위 안에 포함된다. 최종 종착지는 헌법재판소가 대법원을 제친 후 최상위 사법기관으로 규정될 순간임을 배제하기 어렵다. 지난 24일은 사법부가 느낄 법한 공포가 처음 피부에 와닿은 날이었을 수도 있다. 새해엔 민주당과 사법부의 전쟁이 더욱 거칠게 진행될지도 모른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