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초대석> 22년간 쏟아낸 조우진의 건강한 투혼

“무게감·책임감이 늘 짓눌렀어요”

[일요시사 취재2팀] 함상범 기자 = 충무로에 ‘일찍 일어나는 새가 이경영’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다작’의 아이콘인 그는 너무 많은 작품에 출연한 탓에 ‘또경영’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지겨움이 느껴질 정도의 출연 횟수는 출중한 연기력이 있기에 가능하다. 김의성, 배성우를 거쳐 조우진도 ‘다작 배우’ 계보에 속했다. 그 역시 ‘또우진’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런 조우진이 한 작품에만 몰두했다. 영화 포스터에 자신의 얼굴을 대문짝만하게 걸었다. 신작 <발신제한>을 통해서다.

1997년, 한 집 걸러 한 집이 파산했던 그 시절, 대구에 살던 한 가정의 가세도 기울었다. IMF 외환위기의 거센 풍랑에 휘말린 탓이다. 갑작스럽게 생존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 고등학생에게 대학교 입학은 언감생심으로 다가왔다. 대학에 가지 못할 정도로 학업 성적이 뒤떨어진 건 아니었다. 다만 입학금을 마련하지 못했을 뿐이다. 

‘피 끓는 청춘’
일생일대 결심

이 고등학생은 일생일대의 결심을 한다. 1999년 20세가 되던 해, 고향인 대구에서 단돈 50만원을 들고 상경하는 것. 가족의 만류를 뿌리치고다. ‘이왕 집안의 가세가 기울어 도움받지 못하는 거 내가 하고 싶은 걸 해보자’는 의지가 작동했다. 

20세 청년은 ‘나는 누구인가?’라고 자문했다. 그 답을 찾기 위해 선택한 직업이 연기자다. 직업적 특성상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이 평가받아서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개똥철학’으로 보이지만, 얼마나 치열한 고민 끝에 나온 답안이었을까.

연기를 택한 시점부터 ‘피 끓는 청춘’은 고생길로 접어든다. 그저 막연하기만 했던 꿈이 한 영화의 주인공으로 실현되는 데까지 걸린 기간은 무려 22년이다. 


연고도 없는 타지의 땅에서 연극과 입학을 목표로 삼았다. 고등학교 시절 방송반에서 비교적 정확한 발음과 발성을 했다는 것 말고는 연기에 관한 트레이닝이 전무했던 그에게 연극과의 벽은 높았다. 첫해 낙방하자마자 극단에 입단해 연기를 학습했다.

결국, 2000년 서울예대 연극과에 입학했다. 

1000년이 끝나고 1000년이 시작되는 불안의 시대에 그 역시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 연극 <마지막 포옹>을 시작으로 막연한 꿈의 첫발을 내디뎠다. 어렵게 뗀 첫발 뒤엔 끝이 보이지 않는 천릿길이 있었다.

세상은 그에게 기회를 쉽게 주지 않았다. 어렵게 따낸 배역은 이름 없는 ‘범인2’이나 ‘행인5’였다. 캐스팅됐다는 말을 듣고 현장에 갔는데, 다른 사람이 자신의 역할을 꿰차고 자신이 외운 대사로 연기를 하고 있었던 적도 있었다.

이를 보고도 무명의 배우는 아무런 저항 없이 되돌아왔다. 소주 두 병으로 쓰라린 고통을 잊으려 했다. 

시간이 흘러 영화 <내부자들>에서 “여! 썰고, 여 하나 썰고… 거기 말고 여 썰으라고!”라는 대사로 스크린을 썰어버리며, 조우진이라는 세 글자를 알렸다. <마지막 포옹>을 시작으로 배우로서 이름을 찾기까지 15년을 버텼다.

국내 연기력 ‘원투펀치’로 불리는 이병헌마저 ‘영화의 성패와 상관없이 이 배우는 회자되겠구나’라는 직감이 들 정도로 강렬한 인상이었다. 영화의 흥행 덕에 그는 ‘여썰고좌’라는 기분 좋은 별명도 얻게 된다. 그로부터 조우진의 시계는 바삐 흘러간다. 


영화 <발신제한> 통해 첫 단독주연
“무게감·책임감, 늘 나를 짓눌렀다”

그에게 주어지는 역할엔 성역이 없었다. 누구보다 비열한 악의 화신이었다가, 타인을 배려하는 데 도가 튼 선한 사람도 됐다. 범죄자를 잡는 정의로운 인물에서 부조리의 극치로도 치달았다.

부유한 삶을 살다가도, 권력의 최약체가 되어 가족의 죽음에 뜬 눈으로 피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때로는 매우 지혜롭고 민첩한데, 어디에서는 무능하고 나태했으며, 그저 얕잡아보고 싶을 정도로 무식한 적도 있었다.

조우진의 필모그래피에는 레퍼런스가 없다. 

연기의 스펙트럼만 따지면 육각형의 스펙을 가진 배우라 해도 무방하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천재와 둔재를 오고 가는 중에 언제나 제작진의 기대를 넘는 연기력을 보였다. 너무 많이 작품에 참여해 ‘또우진’으로 불릴지언정, 연기력에서 흠결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주인공을 해도 충분히 능력을 발휘할 배우였지만, 충무로 관계자들은 그를 조연으로만 소모했다. 한국 영화계의 불찰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에게 첫 주연의 기회를 마련해준 <발신제한> 제작진의 혜안조차도 늦은 감이 있다.

조우진 역시 조연이 자신에게 맞는 옷이라고 생각했다. 주인공으로 하자는 말에 겁부터 냈다고 한다. 시나리오가 딱히 싫지 않았음에도 고사부터 했다. 소속사 대표의 “그래도 제작진 한 번 만나봤으면 좋겠다”는 권유마저 거부하지는 못해 <발신제한>의 김창주 감독을 만난 것이다. 

“시나리오를 읽고 겁부터 났던 건, 제가 잘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컸기 때문이에요. 만듦새나 역할이 마음에 드냐 안 드냐는 차후의 문제였어요. 제가 해내기 쉽지 않은 감정선으로 느꼈어요. 안 할 생각이었죠. 그러다 김 감독님을 만난 거죠. 눈을 봤는데 열정이 들끓고 있었어요. 손을 덥석 잡았어요. 그 뜨거운 눈빛에 감동했어요. 다른 관계자분들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날 ‘저 불구덩이 같이 뛰어듭시다’라고 했었어요.”

육각형
스펙트럼

스페인 영화 <레트리뷰션: 응징의 날>의 리메이크 버전인 <발신제한>은 국내 관객들에게는 익숙한 면이 있다. 영화 <폰 부스>나 <스피드>, 한국 영화로는 <더 테러 라이브>와 닮아있다. 거론된 영화들의 공통점은 주인공이 이름 모를 범죄자로부터 전화로 조종당한다는 것과 역할의 비중이 90% 이상에 다다른다는 데 있다. 

<폰 부스>의 콜린 파렐과 <스피드>의 키아누 리브스, <더 테러 라이브>의 하정우가 그랬듯, 조우진도 이야기의 90% 이상을 혼자 끌고 나가야 했다. 

“영화를 보니까 제일 먼저 든 생각이 ‘왜 이렇게 많이 나오나’였어요. 거의 모든 신에 제가 나오죠.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려고 했는데, 역시나 실패했습니다. 감정이입을 하지 않고 자평을 제대로 해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됐어요. 감독님께서 애 많이 쓰신 것 같아요. 제 연기에 대한 자평은 영화를 몇 번 더 봐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공을 좀 더 키워야겠죠.”


영화에서 조우진이 맡은 성규는 VIP 고객만 관리하는 부산의 은행센터장이다. 출근길에 고등학생과 초등학생 아이를 태우고 출근하는 길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온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들려오는 이야기가 무시무시하다.

다짜고짜 차 안에 폭탄이 있으며 내리는 순간 폭파된다는 것. 전화를 건 남성은 이를 빌미로 수십억원을 요구한다. 

이 와중에 후배 직원(전석호 분)이 협박을 받았다고 전화를 건다. 꺼림칙한 기분은 점점 공포가 된다. 아내와 같이 있던 후배를 만나 대화를 시도하는 도중 후배의 아내가 급한 성격을 못 이기고 차에서 내린다. 그 즉시 후배의 차가 폭발한다.

예언이 현실이 된 순간부터 성규는 테러범의 조종에 따를 수밖에 없다. 

<발신제한>은 초반부터 속도를 낸다. 성규 가족이 차에 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걸려오면서부터 내달리기 시작한다. 첫 폭탄이 터진 뒤부터 불안과 공포가 급격히 솟구친다. 극한 상황에 몰린 성규는 질주한다. 정체 모를 테러범과의 줄다리기 중에 성규를 범인으로 인식한 경찰까지 더해지며 목줄은 점점 조여진다. 

극도의
스트레스


작품 속 조우진은 거의 모든 분량을 차 안에서 연기한다. 그가 활용할 수 있는 부위는 상체 뿐이다. 움직임이 제한돼있다. 표정과 눈빛, 팔의 제스처 정도로만 관객을 설득해야 한다. 대부분이 바스트샷이다. 카메라와 인물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 감정이 훤히 보인다.

인물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된다는 건, 표정이나 감정이 상황과 조금만 어긋나도 몰입이 깨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배우에게 있어서는 최악의 조건이다. 이제껏 해본 적 없는 미션이 조우진에게 주어진 것.

조우진은 인터뷰 내내 밀도를 중시했다.

“정확한 감정표현보다도 중요했던 건 작품 내의 밀도였어요. 비슷한 감정이지만 세분화하면 다른 포인트가 있어요. 긴장감의 정도가 상황마다 다르죠. 과하지 않고, 또 약하지 않게 나오길 바랐어요. 관객들이 보기 어렵지 않게 연기하려고 했죠. 정확보다 적확하게 하려고 했어요.”

쉽지 않은 임무였다. 혈압약을 챙겨 먹어야 할 정도로 압박감이 심했다. 단독주연의 무게감은 이전 작품에서의 책임감과는 결이 달랐다. 극도의 스트레스가 그를 짓눌렀다.

“빠른 속도로 장면이 확확 바뀌는데 그 순간이 주는 서스펜스를 표현하고 싶었어요. 여러 상황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찰나를 건져야 하는 작품이었어요. 기술로 메우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봤어요. 이 상황에 저를 빠뜨리려고 했어요. 거기서 전해진 느낌을 표현하고자 한 거죠. 살면서 이런 스트레스와 긴장감을 느끼면서 산 적이 없었어요. 인생 최대의 고비를 넘기면, 더 큰 고비가 찾아왔어요. 부담을 갖고 상황에 빠뜨리다 보니까 정신이 혼미해진 적도 있었어요.”

“고비 넘기면 찾아온 더 큰 고비”
“계속 꿈을 꾸며 살아도 되겠어요”

막중한 책임을 온전한 연기로 표현하고자 했던 그의 욕망이 스크린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된다. 누구나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은행센터장의 품격이 전해지면서도 전사에 담긴 성규 개인의 삶이 자연스럽게 표현된다.

가족들을 위해 일한다는 명분으로 가족을 소홀히 했던 아버지의 모습이나, 센터장으로 오기까지 꼭 옳지만은 않게 살아온 성규의 성격적 특성이 은연중에 드러난다. 이 같은 무의식적 감정선이 켜켜이 쌓이다가 후반부에는 적잖은 감동으로 밀려온다. 강력한 난제를 준수하게 풀어냈다. 

“한일전을 앞둔 스포츠 선수들의 마음이 어떨지 생각하게 됐어요. 성규라는 인물을 표현하기 위한 상황에서 매 테이크마다 질문이 쏟아졌어요. 연기하기 위해 뭘 연구하고 담아내야 할지에 많은 생각을 했죠. 제가 잘한 건 아닌 것 같아요. 그저 센 영화가 나온 것 같아요.”

촬영 현장에서 감독이 아버지라면, 주연배우는 엄마의 역할을 한다. 스태프들과 친밀하게 지내면서 힘든 점을 들어주고 분위기를 부드럽게 끄는 몫이 생긴다.

멀티캐스팅인 경우엔 이 몫이 줄어드는데 <발신제한>처럼 인물의 수가 적은 작품이면 현장 분위기를 편안하게 만드는 임무가 주연배우에게 집중된다. 연기자로서 맡은 소임을 수행하기도 벅찬 일인데, 단독주연을 처음 맡은 조우진에겐 무거운 짐이었다.

“모든 스태프가 저만 보고 있더라고요. 첫 단독주연일 뿐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책임지는 인물이잖아요. 스태프들에게 보람을 느낄 수 있게 하자는 마음으로 임했어요. 최대한 많이 소통하려고 했어요. 작품 외적으로 스태프들에게 침투하려고 했어요. 여러 선배가 소통하는 모습을 어깨너머로 배웠는데, 거기서 오는 행복감이 컸어요.”

비록 더디기는 했지만, 적지 않은 연기 경험을 가진 그는 인터뷰 현장에서조차 비장했다. 콘서트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처럼 한 마디 한 마디를 꼭꼭 씹어 말했다. 그의 대답에는 자신의 연기가 부족하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몸에 밴 겸손으로 느껴졌다. 연기에만큼은 스스로 가혹다는 것이 분명히 전달됐다. 

“좋은 배우가 되고 싶어서인가 봐요. 그렇게 거창하지는 않아요. 제게 잣대가 높은 건, 그렇게 높여놔야 그 잣대에 못 미치더라도 관객들을 설득하는 수준에 닿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에요. 정신병적인 수준은 아닌 거 같아요. 작품에 맞는, 그리고 인물에게 맞는 연기를 더도 덜도 아니게 하는 게 좋은 배우인 것 같아요. 분량이나 비중에 상관없이요.”

1999년 50만원을 들고 상경한 지 22년 만에 단독주연이라는 타이틀로 대중 앞에 섰다. 타인으로부터 평가받고 싶어했던 20세 청년의 꿈은 이뤄진 것일까. 앞서 그는 기적이라는 말로 속내를 전하기도 했었다.

꿈, 동경…
지금도 기적

“꿈, 동경이란 단어로 지금까지 버텨왔어요. 포스터 나온 걸 보면서 눈물이 많이 나왔어요. 갑자기 오열하듯 쏟아지더라고요. 홍보하는 지금도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조우진 기특해’ 이런 건 아니에요. ‘계속 꿈을 꾸며 살아도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드네요. 주어진 작품에 매진하면서 그렇게 살고 싶어요. 이제껏 그래왔든 건강하게 투혼을 발휘하면서요.”

<intellybeast@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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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머외 쿠팡’ 막가는 싸가지 행보

‘검머외 쿠팡’ 막가는 싸가지 행보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고객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쿠팡의 태도가 도마 위에 올랐다. 현재까지 대응만 봐서는 국민은 물론, 정부와도 전면전을 벌일 기세다. 새어나간 정보의 범위와 규모가 ‘역대급’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최악의 사태임에도 불구하고 쿠팡의 고개는 꺾일 줄 모르고 있다. 일각에서는 ‘뭘 믿고 저러나’ 소리가 나오는 중이다. 쿠팡의 고객 개인정보 유출 사건, 이른바 쿠팡 사태가 점입가경이다. 사태가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수습은커녕 국민의 화만 돋우고 있다. 쿠팡의 대응 태도가 미지근한 수준을 넘어 뻔뻔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 김범석 의장은 모습을 비추지 않고 보상안은 꼼수로 가득하다. 국민을 조롱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한 달 만에 고개 숙여 지난해 11월 말 3370만명에 이르는 쿠팡 고객의 개인정보가 ‘탈탈’ 털렸다. 앞서 쿠팡은 4500여건의 고객 정보가 유출됐다고 정부 당국에 신고했지만 2주 만에 그 수치는 7500배까지 늘어났다. 전 국민의 65% 수준이며 지난해 4월 SKT 개인정보 유출 사태 범위(2300만명)를 훌쩍 넘는 사태였다. 쿠팡은 이커머스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갖고 있다. 대형마트 등이 규제에 막혀 뒷걸음질 칠 때 쿠팡은 로켓배송으로 시장을 싹쓸이했다. 전날 저녁에 주문해도 새벽이면 물건이 문 앞에 와 있는 총알 배송에 소비자는 쿠팡으로 몰렸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비판을 받던 물류센터는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이번 사태는 아이러니하게도 쿠팡이 국민의 실생활에 얼마나 스며들어있는지를 바로 보여줬다. 쿠팡 사태가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글로벌 투자은행 JP모건은 “쿠팡이 경쟁자가 없는 시장 지위를 누리고 있고 한국 고객이 데이터 유출에 덜 민감해 보인다”며 “잠재적 고객의 이탈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놨다. 그래서일까? 쿠팡은 역대 최악의 정보 유출 사태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도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대통령이 언급하고 정부 차원의 TF가 꾸려졌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힘겨루기’를 하는 태도를 보이는 중이다. 최근에는 정부의 반박에도 자체 조사 결과를 고집하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보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쿠팡은 지난달 25일 ‘정보 유출자는 3300만개 계정에 접근했으나 실제 저장한 정보는 3000여개에 불과하며 제3자 유출 정황은 없는 등 피해가 미미하다’는 내용의 자체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면서 “(유출자는)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언론 보도를 접한 이후 저장했던 정보를 모두 삭제하고 범죄에 사용한 노트북을 파손해 하천에 던졌다”고 주장했다. 쿠팡은 “잠수부들이 벽돌에 담긴 쿠팡 가방에 든 노트북을 하천에서 회수했고 유출자가 클라우드 계정에 등록한 일련번호와 해당 노트북의 일련번호가 일치하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어 “범행에 사용된 PC 와 노트북 등 모든 장치를 회수해 안전하게 확보했고 글로벌 보안업체들의 조사 결과도 진술 내용과 같았다”고 설명했다. 국내에서 매출 90% 나오는데 정보 유출 태도·대응 낙제점 쿠팡이 발표한 대로라면 고객 정보 유출 피해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다. 또 유출자와 접촉해 장치를 확보했으니 추가 피해는 없다. 전체적으로 사건이 축소되는 것이다. 쿠팡의 발표에 정부는 강하게 반발했다. 쿠팡의 조사 내용은 사전에 정부와 어떤 논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됐다는 설명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하 과기부)는 “정보 유출 종류와 규모, 경위 등은 민관합동조사단이 조사 중인 사안”이라며 “쿠팡이 발표한 내용은 조사단에 의해 확인된 바 없다”고 밝혔다.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과도 “쿠팡 측이 제출한 진술서와 노트북 등 증거물을 분석 중”이라며 “사실관계를 면밀하게 확인하겠다”고 했다. 논란이 계속되자 쿠팡은 정부의 지시를 받아 조사를 진행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경찰은 사전 협의가 없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사실관계가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 쿠팡은 지난달 26일 내놓은 입장문에서 “정부의 지시에 따라 수주간 진행한 조사였다”고 선을 그었다. 같은 달 9일 정부가 쿠팡 측에 유출자와 접촉할 것을 제안했고 14일 쿠팡은 유출자를 처음 만난 뒤 해당 사실을 정부에 보고했으며 16일에는 정부 지시에 따라 유출자의 데스크톱과 하드드라이브를 정부에 제공했다는 게 쿠팡 측 주장이다. 하지만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도 “쿠팡의 입장문 형식의 보도자료에서 정부와 협력했다는 내용 중 일부 국정원으로 추정되는 부분도 사실과 다르거나 왜곡된 부분이 있다”고 반박했다. 쿠팡이 자체 조사와 관련해 정부와 사실 공방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김범석 쿠팡 의장이 사건 발생 한 달여 만에 사과했다. 그동안 박대준 전 대표가 청문회 등에서 뭇매를 맞고 있는 동안에도 김 의장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정부의 압박이 거세지자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이다. 5만원 상당 속사정은? 김 의장은 지난달 28일 “쿠팡의 창업자이자 이사회 의장으로서, 쿠팡 전체 임직원을 대표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이어 “저희의 책임으로 발생한 이번 데이터 유출로 인해 많은 분께서 자신의 개인정보가 안전하지 않다는 두려움과 불안을 느꼈고 사고 초기부터 명확하게 직접적으로 소통하지 못한 점으로 인해 큰 좌절감과 실망을 안겨 드렸다”며 “사고 직후 미흡했던 초기 대응과 소통 부족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김 의장은 한 달 만에야 입을 연 부분에 대해 “무엇보다 제 사과가 늦었다”면서 “모든 사실이 확인된 이후에 공개적으로 소통하고 사과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돌이켜보면 이는 잘못된 판단”이라고 고개를 숙였다. 비판과 질책을 겸허히 받아들인다고도 했다. 하지만 자체 조사 논란에 대해서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김 의장은 “쿠팡은 조사 초기부터 정부에 전면적으로 협력해 왔다”며 “일련의 과정에서 많은 오정보가 확산하는 상황에서도 정부의 ‘기밀 유지’ 요청을 엄격히 준수했다”고 주장했다. 김 의장의 사과는 국회 6개 상임위원회가 참여하는 대규모 연석 청문회를 이틀 앞두고 나왔다. 정부가 범부처 TF를 과기부 총리 산하로 확대하고 다각도로 압수수색과 조사를 진행하는 등 대응 수위를 높이는 상황에 압박을 느꼈을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그러나 사과와는 별개로 김 의장은 청문회에 불출석하겠다고 밝혔다. 김 의장뿐만 아니라 동생인 김유석 쿠팡 부사장, 강한승 전 쿠팡 대표 등이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하면서 쿠팡에 대한 부정적 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여기에 쿠팡이 내놓은 보상안도 도마 위에 올랐다. 쿠팡은 지난달 29일 고객 정보 유출 사태와 관련해 총 1조6850억원 규모의 보상안을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전체적으로 보면 1인당 5만원 상당이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뜯어보면 쿠팡의 ‘꼼수’가 보인다. 청문회는 나 몰라라 보상안은 ▲쿠팡 전 상품 구매 이용권 5000원 ▲쿠팡이츠 5000원 ▲쿠팡트래블 2만원 ▲명품 플랫폼 알럭스 2만원 등으로 구성됐다. 소비자들은 보상금의 상당 부분이 쿠팡트래블과 알럭스 등 평소 이용 빈도가 낮은 서비스 이용권 위주로 구성된 점을 지적했다. 실제 이번 보상안을 통해 쿠팡트래블과 알럭스를 처음 알게 됐다는 소비자도 있다. 시민단체도 쿠팡의 보상안에 반발했다. 참여연대는 “1인당 5만원 보상이라고 했지만 현금이 아닌 구매 이용권으로 사실상 강제 소비를 유도하는 방식”이라며 “보상이 아니라 매출 확대를 위한 마케팅에 불과하다”는 내용의 논평을 발표했다. 쿠팡의 행보는 사사건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국민을 조롱하고 정부를 기만하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쿠팡이 미국 시장에 상장한 기업이지만 매출 대부분을 우리나라에서 벌어들이는 상황인데도 이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에 분노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회원 탈퇴, 보상안 거부, 집단소송 참여 움직임이 거세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심지어 이재명 대통령도 쿠팡 사태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했다. 이 대통령은 쿠팡 사태가 일어나고 사흘 뒤인 지난달 2일 “쿠팡 때문에 국민의 걱정이 많다”면서 “사고 원인을 규명하고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면서 “관계부처는 해외 사례를 참고해 과징금을 강화하고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도 현실화하는 등 실질적인 실효적 대책에 나서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뒤늦은 사과·꼼수 보상안 도마 위에 이래서 정치권 인사 영입했나? 의혹 12일에도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반복되는 것에 대해 “경제 제재가 너무 약해서 규정 위반을 밥 먹듯이 한다”며 “앞으로는 규정을 위반해 국민에게 피해를 주면 엄청난 경제 제재를 당해서 ‘회사가 망한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규정을 위반하면 난리가 나야 하는 것 아니냐”며 “그런데 위반해도 태도를 보면 ‘그래서 어쩔 건데’ 이런 느낌이 든다”고 지적했다. 정부도 쿠팡에 강력하게 경고하며 전방위 대응을 예고했다. 실제로 같은 달 29일, 배경훈 부총리 겸 과기부 장관 주재로 ‘쿠팡 사태 범정부TF’ 회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과기부와 경찰청, 개인정보위원회, 금융위원회 등은 역할을 분담해 신속한 조사를 진행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배 부총리는 “쿠팡이 국내 고객 정보 3000만건 이상을 유출한 것은 명백한 국내법 위반 사항으로 정부는 쿠팡이 관련 법령을 위반한 사실이 확인될 경우, 다른 기업과 동일하게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조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상황에 따라서는 영업정지 여부도 판단할 것으로 보인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압박에도 쿠팡이 연달아 이상한 행보를 보이자 ‘믿는 구석’이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다. 그 정도로 쿠팡의 현재 대응 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일각에서는 쿠팡이 미국 기업인 것에 주목하고 있다. 미국 증시가 쿠팡의 모든 결정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라는 것이다. 실제 쿠팡이 자체 조사 결과를 발표한 다음 날 미국 뉴욕 증시에서 쿠팡의 주가는 6% 급등했다. 국내에서는 쿠팡의 ‘셀프 조사’에 분통을 터트리고 있는데 미국 시장에는 호재로 작용한 것이다. 쿠팡이 정치·국회 인사를 대거 영입한 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정치권 인사를 영입해 쿠팡 관련 각종 논란을 틀어막고 있다는 의혹이다. 해당 의혹은 ‘강력 경고’ ‘전방위적 대응’ 등의 수사를 사용하고 있지만 실제 조사는 흐지부지될 것이라는 관측이 조심스럽게 나오는 배경으로도 꼽힌다. 변죽 울리다 무사통과? 실제 최근 원내대표직에서 사퇴한 더불어민주당 김병기 의원이 국정감사를 한 달여 앞둔 시점에 박대준 전 쿠팡 대표 및 대관 총괄과 오찬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쿠팡이 일용직 퇴직금 미지급 사건에서 검찰 외압 의혹, 물류센터·배송 기사의 과로 및 산재 사망 문제가 제기된 상황이었던 만큼 적절성 논란이 불거졌다. 김 의원은 그달 16일 자신의 SNS에 “공개 일정이고 적어도 5명이 (함께) 식사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만남보다 대화의 내용이 중요한 것 아니냐? 참고로 지난해 7월16일 쿠팡 물류센터도 방문했었다”고 적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