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 떠나는 신인 작가들의 속사정

“힘겨운 영화판, 미련 없이 떠난다”

[일요시사 취재2팀] 함상범 기자 = 영화의 태초에는 이야기가 있다는 말이 있다. 좋은 시나리오의 바탕에서 좋은 영화가 탄생한다는 얘기다. 공감 가는 캐릭터와 현실성 있는 사건, 가슴에 와닿는 대사, 시대를 관통하는 메시지가 있는 작품은 대부분 시나리오에서 출발한다. 작품의 미덕이 분명한 시나리오를 쓰는 능력 있는 작가가 많을수록 이야기 업계가 성장하며, 따라서 새로운 스타 발굴이 필수다. 하지만 한국 영화계는 좋은 작가가 유입되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영화판에 좋은 신인 작가가 없어요.” 한 영화 제작자의 말이다. 영화 <쉬리> 이후 한국 영화계가 몸집을 불릴 때부터 ‘좋은 작가가 없다’는 말은 늘 있었지만, 최근에는 좋은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를 찾는 게 정말 어려워졌다고 한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10년 전만 하더라도 영화는 대중 예술 콘텐츠 중 가장 명예로운 플랫폼으로 받아들여졌다. 문인들이 시를 가장 높은 수준의 예술로 칭하는 것처럼, 2시간 사이에 이야기를 전달해서다. 또 하나는 관객이 직접 돈을 내고 영화관까지 찾는 수고를 감당하는 콘텐츠라는 것도 가점 요소다.

그 관객의 수가 때로는 1000만명이 넘어갈 때는 매우 큰 수익과 함께 한국 영화사에 남을 명예를 얻는다. 

“열 개 시나리오 중 개봉의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지는 시나리오가 아홉 개”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도박성이 짙은 산업이지만, 그만큼 과실이 달고 크기 때문에 영화에 도전한 창작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영화에 대한 메리트가 점차 낮아지고 있다. 유튜브와 웹드라마 등 뉴미디어가 활성화될 뿐 아니라 집에서 얼마든지 높은 수준의 작품을 시청할 수 있는 OTT가 대중화되면서 비교적 비싼 금액을 지불하고 영화관까지 찾아야 하는 수고가 필요한 영화는 올드미디어로 전락하고 있다. 

코로나19가 발발하기 전부터 한국 영화계는 사양산업의 길로 접어들었다. 52시간 근로제 적용에 예외 산업이었던 영화 산업이 제외됨에 따라 한국 영화계는 막대한 제작비 상승을 겪으면서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발간한 ‘2020년도판 한국영화연감’(이하 연감)에 따르면 2019년 30억원 이상의 제작비가 투입된 상업 영화는 총 45편으로, 이 영화에 투입된 총제작비는 약 4559억원이다. 이는 2016년 기준 2956억원(33편)보다 무려 1600억원 이상이 늘어난 수치다.

2017년에는 3618억원, 2018년에는 4101억원으로, 제작비는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영화 매출 규모 상승폭은 그리 크지 않다. 2016년 총매출은 4530억원, 2017년에는 4947억원, 2018년에는 4584억원이다. 일반적으로 4500억원을 전후한 매출을 기록했다.

2019년은 약 5664억원의 총 매출을 기록했다. 이전보다 갑작스럽게 매출이 늘어난 이유는 <극한직업> <기생충> <엑시트> 등 1000만을 넘겼거나 육박한 영화가 세 편이나 된 덕분이다. 

2019년 평균 1000억원 이상의 수익을 남겼지만, 실제로 손익분기점을 넘긴 영화는 18편에 해당한다. 이는 27편의 영화는 손실을 봤다는 것을 말한다. 


100억 넣으면 8억 손해 보는 산업
웹소설·드라마로 떠나는 작가들

연감에 따르면 매출액 1위 영화인 <극한직업>을 제외하면, 44편 영화의 평균 수익률은 -8.1%까지 떨어진다. 일반적으로 100억원을 투입하면 약 8억원의 손해를 보는 산업이라는 것. 

결과적으로 영화 자체에서 얻어지는 수익이 적기 때문에 작가에 대한 집필료는 더 적을 수밖에 없다. 또 영화는 정산이 매우 늦는 산업이다. 작가의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일반적으로 신인 작가의 경우 한 작품에 약 2000만원가량의 계약금을 받고 2년에서 3년 동안 시나리오 작업에 매진한다. 온 힘을 다해 시나리오를 썼지만, 캐스팅에 실패하거나 투자를 받지 못해 제작에 돌입하지 못하면 그간의 노력은 헛수고가 된다. 

혹여 시나리오가 영화화돼 흥행에 성공한다고 해도 수익의 약 1%의 수익만 얻는다. 대부분 개봉 후 정산을 마친 다음에 수익금을 얻는다. 

영화진흥위원회가 개최한 업계현안인식포럼에서 작가조합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크레딧을 보유하지 못한 작가가 2018년에서 2020년 사이 시나리오 계약을 체결하고 집필한 7건의 집필료 실수령액 평균은 1143만원이다.

영화 시나리오에만 매진하면 연봉 500만원에 그칠 수 있다. 

김병인 작가조합 대표는 “배우나 감독이 수억원의 출연료와 연출료를 받는 것에 비해 작가의 노력은 너무 터무니없이 책정되고 있다”며 “2년 동안 1000만원가량의 집필료를 받는 현실이다 보니 생활고에 지치는 시나리오 작가가 많다”고 말했다.

이러한 현상은 제작자가 악의적이어서는 아니다. 영화계가 하이리스크·하이리턴의 구조를 띠고 있어서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로 영화는 R&D(연구·개발, Reaserch&Develop)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작품이 개봉까지 가기 너무 어려운 현실에 놓여있다. 

빚을 내서 시나리오를 개발하다 수십억원가량의 빚더미에 오른 제작자들도 수도 없이 많다. 

아울러 제작비 상승으로 리스크가 더욱 커지면서 경제적 책임이 커진 투자사는 이미 능력을 증명한 기성 감독과 작가들에게 기회를 주려 한다. 이미 티켓 파워를 증명한 배우가 아니면 투자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빚더미에
놓인 현실


영화계는 사실상 배우나 작가, 감독 등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스타를 발굴하기 어려운 구조가 됐다는 게 중론이다. 

한 영화 배급사의 본부장은 “2016년만 하더라도 30억원 제작비로 작가주의 색채가 강한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이제 그런 영화를 만들려고 하면 50억원이 넘게 든다. 그럼 200만 관객을 넘겨야 한다. 코로나19가 아니더라도 작가주의 색감이 강한 영화로 200만 관객을 동원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영화에 대한 특별한 열망이 있지 않은 신인 작가들은 영화가 아닌 다른 채널을 찾는 게 요즘 현실이다. 특히 10~20대를 겨냥한 포털사이트 웹소설에 많은 신예 작가가 투입되고 있다. 비록 집필의 강도가 비교할 수 없이 힘들기는 하나 드라마의 경우에는 감독보다 더 작가를 대우해준다.

흥행에 따른 수익도 드라마가 훨씬 좋은 편이다. 

김병인 대표는 “요즘 문예창작과 학생들을 만나서 물어보면, 다 웹소설을 쓴다고 한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영화 시나리오를 쓴다고 했었다.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매월 정산이 되기 때문이다. 웹소설도 대박을 터뜨리면 10억원 이상의 수익을 낸다”며 “대부분 작가들도 영화보다도 드라마를 선호한다. 그만큼 대우를 받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역시 작가들이 드라마에 유입되면서 드라마 시장이 훨씬 더 커졌다”고 말했다. 

또 하나의 문제는 크레딧 여부다. 한국 영화계의 가장 큰 적폐 중 하나가 감독들이 작가의 크레딧을 뺏는 사례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영화 <마이웨이>의 원작을 쓴 김병인 작가조합 대표도 강제규 감독과 크레딧 문제로 큰 싸움에 휘말리기도 했다. 


김 대표는 “내가 작가조합 대표를 맡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자신이 만드는 영화에서는 정의를 운운하면서 뒤에서는 부조리를 온몸으로 드러내는 영화감독들이 너무 많다. 이미 부와 명예를 얻은 자들이 가진 것 없는 작가들의 작은 결실마저 뺏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고 말했다.

<일요시사> 취재 결과 수많은 작가들이 감독으로부터 크레딧을 뺏기는 것으로 확인됐다. 수많은 감독과 제작자들마저 크레딧을 악용한 사례가 정말 많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데뷔 영화에서 엄청난 흥행을 거둔 A 감독은 신인 작가의 원고를 뺏어 연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원고를 뺏긴 작가는 비토하는 심정으로 영화계를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넷플릭스를 통해 개봉한 영화의 제작자와 감독은 5고까지 쓴 작가진의 크레딧을 뺏으려 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당한 요구에 분개한 작가 B는 소송을 준비했으나, 그 과정에서 꼬리를 내린 제작자와 감독으로 인해 별 무리 없이 넷플릭스에 공개됐다.

제작자의
흔한 갑질

익명을 요구한 작가 B는 “당시 그 영화의 감독이 제작자에게 크레딧을 강력하게 요구한 것으로 안다. 그렇게 되면 작가료와 감독료를 동시에 받을 뿐 아니라, 모든 명예와 스포트라이트가 감독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라며 “그 감독과 재계약하고 싶었던 제작자가 내게 악의적인 요구를 했다. 영화계에서는 흔한 갑질”이라고 토로했다. 

국내에서 명작을 다수 남긴 유명 작가 C는 감독 D와 지겨운 신경전을 벌였다고 토로했다. C에 따르면 D는 영화 개봉까지 원작자인 C와 단 한 번도 회의를 거치지 않았다. 이후 촬영이 끝나고 편집 과정에서 D 감독은 C 작가 몰래 각본 크레딧에 자신의 이름을 앞에 두려고 했다.

개봉을 앞두고 C 작가가 편집 스태프에 확인했다가 이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C 작가는 “각본 크레딧에 순서는 매우 중요하다. 시나리오에 누가 더 많이 기여했냐는 의미다. D 감독은 시나리오를 만드는 과정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시나리오가 나온 뒤 대사만 고쳤다. 그럼에도 편집 때 몰래 그의 이름을 앞에 넣으려 한 것”이라며 “내가 그야말로 노발대발을 해서 원래대로 고쳤는데, 개봉 전에 또 바꾸려고 하다가 또 걸렸다. 다시는 그 사람과 일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대표가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작가 조합에서 취합한 사례 87건 중 40%의 작가가 개봉한 영화의 크레딧을 불인정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각본에 해당하는 원고를 쓰고도 각색 크레딧에 이름이 올라가거나, 각본 크레딧에서도 순서가 후 순위로 밀리는 것이 그 예다. 

김 대표는 “굉장히 많은 작가가 크레딧에 대해 공정하지 않다고 여기지만, 대다수가 불이익을 당할까봐 문제제기조차 안 한 것으로 나온다”고 말했다.

이야기의 뼈대를 구성한 사람이 각본에 이름을 올리고, 대사를 바꾸거나 몇 가지 상황을 고친 사람은 각색에 이름을 올리는 게 불문율이다. 작가 조합의 주장에 제작자들은 이 같은 현상이 발생할 수 있는 배경은 시나리오에 대한 기여도의 해석이 각기 다른 상황이 많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시나리오가 고쳐지고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중요한 아이디어나 대사에 대한 해석이 작가나 감독, 제작자의 입장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가 많아 크레딧을 두고 다툼이 벌어진다는 것.

익명을 요구한 한 영화 제작사 대표는 “과거에는 감독이 작가의 크레딧을 뺏는 경우가 정말 많았다. 이를 악용한 제작자도 많았다. 지금도 모두 없어졌다고 할 수는 없지만, 표준계약서가 나온 이후에는 많이 나아지고 있다. 크레딧으로 인해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많이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또 하나는 우리나라는 특이하게도 감독이 직접 글을 쓰고 연출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박찬욱, 봉준호, 최동훈, 나홍진, 이준익, 류승완, 한재림, 윤종빈, 이병헌 감독 등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감독들은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까지 도맡는다. 직접 각본을 쓰지 않더라도 파트너 작가를 두고 기획단계부터 함께 시나리오를 개발한다. 

“2년에 1100만원 번 경우도 있어”
“신인에 부와 명예, 기회가 없다” 

신인급 감독들 역시 직접 시나리오를 써야만 데뷔할 기회가 생긴다. 작가와 연출의 기능을 구분하지 않는 점이 한국 영화계의 특수성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김 대표는 “할리우드 영화의 크레딧을 살펴보면 감독이 시나리오 크레딧을 겸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다. 하지만 한국은 크레딧상 감독이 시나리오 크레딧을 갖는 경우가 70~80%에 달한다. 연출의 기술과 작법의 기술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다. 두 영역을 모두 섭렵한 감독도 자연스레 있는 것이지만, 과연 한국의 감독들만 유독 80%나 되는 감독이 그에 해당하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상업 영화의 경우 화자가 아닌 청자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전개돼야 한다. 그렇다면 기획개발단계에서 제작자, 작가, 감독 간 치열한 논쟁을 통해야만 좋은 작품이 나올 확률이 높아진다. 하지만 작가의 포지션이 없어지면서 오히려 좋은 콘텐츠를 만드는 구조를 스스로 약화시키고 있다. OTT로 대변되는 온라인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똑똑한 전략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1년에 제작되는 한국 영화가 약 40편이라고 하면 절반 이상의 작품이 유명 작가나, 직접 시나리오를 쓴 기성 감독의 것이다. 한 감독당 약 3년에 한 번씩 작품을 내놓는다고 해도 120편 중 약 40편 이내의 작품만이 신인 작가에게 기회가 주어진다.

이마저도 신인 감독과 경쟁을 해야하는 수준이다. 바늘구멍이나 다름없다. 

신인의 이름으로 부와 명예를 얻기에 너무 높은 장벽이 된 영화계는 신인 작가가 메마른 상황에 이르렀다. 신인 작가가 부나 명예를 노력에 비해 얻기 힘든 영화계에 굳이 노력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각에서는 영화계가 이른바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코로나19로 인해 제작과 유통 등 모든 부분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은 영화계가 다시 성장을 도모하려면 새로운 이야기와 스타가 발굴돼야 하는데, 현시점에서는 위기에 대한 논의조차 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신인 작가가 많다는 것은 스포츠 선수로 치면 기초체력이 좋다는 얘기다. 체력이 좋아야 기술도 좋아지는 법인데, 한국 영화계는 기초체력이 계속해서 약화되고 있다”며 “OTT의 힘이 세지는 악조건 속에서 한국 영화계의 미래는 너무 어두워 보인다”고 우려했다.

허약해진
기초체력

한 영화 감독 역시 “실제로 영화를 두고 감독의 예술로 칭하다 보니, 작가들이 빛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좋은 이야기를 쓰는 좋은 작가가 적어지면서 한국 영화계를 우려하는 시선에 대해 동의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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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국민의힘 행사에서 영향력을 과시하다가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국민의힘에서 ‘보수의 김어준’을 꿈꾸는 것 같다. 전씨는 과연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했던 영향력을 단번에 얻을 수 있을까?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지난 8일, 대구 EXCO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전당대회 대구·경북지역 합동연설회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지난 3월 창간한 <전한길뉴스> 소속 언론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선거판 난장판 하지만 전씨는 언론 취재의 한계를 넘어 반탄(탄핵 반대) 성향 후보들의 연설 도중 응원하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반대로 찬탄(탄핵 찬성) 성향 당 대표·최고위원 후보들이 연설할 때마다 “내부 총질” 혹은 “배신자” 등 원색 비난을 했다. 이날 김근식 최고위원 후보는 전씨를 직접 지칭해 “부정선거 음모론에 빠지고, 계엄을 계몽령이라고 정당화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투쟁할 수 있겠느냐”면서 비난했다. 그러자 전씨는 김 후보에게 욕설하면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격동시켰다. 찬탄 성향 조경태 당 대표 후보가 연설할 땐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을 들고 항의하는 등 지지자들의 조 후보 비난을 유도했다. 그러자, 찬탄 성향 일부 당원들이 전씨에게 물병을 던지면서 항의했다. 한 당원은 전씨에게 “난 20년 차 당원인데, 입당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당신이 왜 이런 난동을 부리느냐”고 따져 물었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전씨의 전당대회 출입을 막기 위해 대의원이 아닌 일반 당원의 행사장 출입을 금지했다. 이어 전씨에 대한 징계 가능성도 내비쳤다. 그러자 전씨는 <전한길뉴스> 발행인 신분을 내세워 “언론 탄압”이라며 반발했다. 이처럼 전씨는 국민의힘 당원과 언론인이란 신분을 왕래하면서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개입하고 있다. 지난달 31일과 지난 7일엔 시사평론가 고성국씨 등과 함께 주최한 ‘자유 우파 유튜브 연합 토론회’에 각각 장동혁·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출연시켜 ‘면접’을 보는 위력을 국민의힘 내외에 과시했다. 특정 진영의 강경파를 대상으로 언론사·유튜브 채널 등을 운영하면서 힘을 과시하는 모델로는 방송인 김어준씨가 있다. 김씨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친문(친 문재인) 강경파 성향 당원·지지자를 대상으로 라디오·유튜브 방송을 진행하면서 당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당 대표 후보들을 면접하는 형식은 김씨가 지난해 3월 자신의 유튜브 방송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민주당 총선 후보자였던 이언주·전현희 의원과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출연시켜 객석의 청중에게 큰절을 시킨 것과 비슷하다. 김씨가 지난 6월 기획·진행한 ‘더 파워풀’ 콘서트엔 ▲문재인 전 대통령 ▲민주당 정청래 대표 ▲김민석 국무총리 등 다수의 민주당 내 유력 정치인이 참석했다. 입당하자마자 영향력 과시 물의 당원·언론인 오가며 전대 개입 김씨는 지난 2011년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로 활동하면서부터 민주당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왔다. 물론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한 영향력을 전씨가 단기간에 얻긴 어렵다. 이 때문인지 전씨는 국민의힘에 입당하자마자 ‘10만 당원 양병설’ 등을 주장하면서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지만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출마하기 위해선 당비를 3개월 이상 납부하고, 연 1회 이상 교육을 받은 책임당원이어야 한다. 전씨는 지난 6월 온라인으로 입당했고, 당 대표 후보 등록일은 지난달 30일부터 단 이틀 동안이었다. 따라서 전씨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출마 길이 막힌 전씨는 전당대회에서 당원·언론인 신분을 교차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당원들을 선동해 영향력을 과시하려고 한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가 민주당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과 주변 진영 전체를 둘러싼 질서는 20세기 초·중반에 활동했던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이 갖는 틀과 비슷하다. 그람시는 “자본주의는 견고하게 발전할 것”이라는 대전제를 토대로 “언론·문화 등 각 분야에 진지를 구축해 참호전으로써 상대 세력을 약화해야 한다”는 사상을 정리했다. 각 분야에 구축한 진지는 결정적인 시기에 전개할 기동전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 구조가 뿌리내리면서 러시아 2월·10월 혁명과 같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뒤집는 혁명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람시는 주도권 다툼으로써 체제 내 혁명을 추구하는 취지의 사상을 구체화했다. 우리나라에선 소련 해체가 가시화되던 1980년대 후반부터 기존 노동운동에 문화·예술운동을 접목하는 단체가 활동하는 등 각계에서 다른 방향의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민주당을 받치는 양대 축은 각계의 시민단체들과 진보 성향 매체들이다. 대규모 정치 이벤트가 진행될 땐 민주당 지원 사격을 맡으면서, 정치적 명분과 정당성을 구축·홍보하는 역할을 맡는다. 또 민주당에 인력을 공급하는 역할도 한다. 주요 선거 등 대규모 기동전이 필요한 상황에선 각자의 진지에서 일시에 뛰쳐나와 물량을 공급하는 식이다. 이 같은 구조를 상징하는 사람이 민주당 윤미향 전 의원이다. 정의기억연대 대표로 오랫동안 활동하던 윤 전 의원은 민주당을 통해 국회의원이 됐지만, 횡령 의혹이 유죄로 확정돼 의원직을 잃었다. 같은 당 추미애 의원 등 민주당 일각에선 윤 전 의원의 사면을 강하게 지지했고, 결국 8·15 광복절특사를 통해 사면·복권됐다. 민주당과 그람시 하지만 시민단체와 매체는 대중을 직접 동원하기가 어려운 데다, 매체는 언론 고유의 한계가 있다. 시민단체 역시 시민들의 참여가 부실하다는 핸디캡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도 존재해 왔다. 이 때문에 삼각 구조를 받쳐줄 또 하나의 하부 구조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준 사람이 바로 김씨였다. 김씨는 지난 1998년 ‘안티 <조선일보>’라는 깃발을 내걸고 <딴지일보>를 창간한 후 풍자·B급 정서·유머를 지향해오고 있다. 당시 <딴지일보>에선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찍어 먹는 용도로 내는 간장의 위생 상태를 취재해 기사화하거나 국가혁명당 허경영 명예대표의 대권 도전 과정을 풍자하는 등 ‘신선한 B급 정서’를 지향해 독자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한편으로 김씨에게 평생 따라다닐 놀림거리를 남겼다. 김씨가 <딴지일보>의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용 성인용품을 판매했고, 성인남녀의 만남을 중개하는 사이트를 개설했던 탓이다. 보수 성향 유권자들은 여전히 김씨를 비판하면서 당시의 전력을 함께 언급한다. 이후 김씨는 ▲황우석 박사 옹호 ▲영화감독 겸 코미디언 심형래씨 옹호 등 숱한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황 박사 옹호는 그럴 듯한 음모론을 제시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 김씨의 특성과 깊이 맞물린다. 당시의 논란도 김씨에 대한 비판론을 형성하는 중심축이다. 그랬던 김씨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계기로는 크게 2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를 처음 시작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 중 1명으로 활동했단 것이었다. 김씨는 당시 민주당 백원우 의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거친 항의를 말리고 고개 숙여 사과하는 문 전 대통령을 주목했다. 이후 김씨는 문 전 대통령의 킹메이커를 자처했고, 이는 ‘나는 꼼수다’ 진행 이후 문 전 대통령의 대세론으로 이어졌다. ‘나는 꼼수다’는 김씨 특유의 B급 정서·음모론이 이명박정부에 대한 다양한 불만과 맞물려 대성했던 방송이었다. ‘나는 꼼수다’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김씨의 성향을 구체화한 방송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해당 팟캐스트의 상징으로 통하는 “쫄지 마”는 여전히 회자된다. ‘나는 꼼수다’는 구체적인 사실관계 검증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명확한 당파성을 매개로 특정 정당·진영 사람들이 선호할 음모론과 괴담을 이미 밝혀진 사실관계와 섞어 전달하는 것에 집중했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선을 적당히 왕래하면서 민주당 지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영웅과 악당들 이는 집단의식으로 연결됐고, 김씨에겐 거대한 영향력을, 민주당엔 거대한 지지 집단을 만들어줬다. 김씨는 ‘나는 꼼수다’를 통해 단순·명쾌한 이분 구도를 완성했다. 그를 선호하는 민주당 지지자의 정치관은 “보수진영이란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이는 정의로운 주인공이 지구 정복을 노리는 악당의 무리에 맞서 싸우는 어린이용 만화의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울러 현재 민주당 핵심 지지 세대로 알려진 4050세대가 미국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선호하는 것과 연결해볼 수 있다. 이 세계관엔 초월적인 힘을 갖고 모든 생명체의 절반을 죽여 우주를 정화하려는 악당에 맞서는 영웅들이 등장한다. 이 세계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은 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사건이었다. 이들에게 노 전 대통령 사망사건은 거대 악당과 싸워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해주는 절대적인 명분이었다. 김씨가 이 사건에 주목하고, 상주로서 백 전 의원의 항의를 제지하던 문 전 대통령을 주목한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우리 고전문학 중 전설은 김씨의 평소 주장과 비슷한 서사 구조를 띠고 있다. 전설은 능력이 뛰어난 주인공이 현실의 한계에 좌절하고 무너지는 비극적인 구조를 취한다. 또 설득력을 부여해야 많은 사람에게 퍼질 수 있어서 실제 존재하는 지역·지명을 매개로 그럴듯하게 전개된다. 여기엔 각박한 현실을 바꿔줄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는 민중의 소망이 담겨있다. 그래서 조선시대엔 “정씨 성을 가진 영웅이 새 나라를 만들어 왕이 될 것”이란 취지의 예언서가 오랫동안 돌아다녔다. 김씨의 주장은 21세기판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김씨는 민주당과 주변 진영을 취약한 상황에서 거대한 악에 도전하는 영웅으로 묘사하고, 지지자들은 그 영웅담에 환호한다. 그러면서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우는 영웅을 또 잃을 수 없다”는 공감대를 공유한다. 그들은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 김씨는 ‘김어준 유니버스’ 혹은 ‘민주 유니버스’를 만들었고, 지지자들은 관객을 넘어선 참여자로서 희열과 보람을 느낀다. <한국일보>는 지난 2017년 이들의 세계관을 소개하면서 “대통령이 국민을 지켜야지, 왜 국민이 대통령을 지켜야 하느냐”고 비판했다. 완전히 다른 ‘B급 정서’ 카타르시스·도파민 차이 김씨는 ▲세월호 고의 침몰설 ▲천안함 피격 사건 관련 가짜 뉴스 살포 ▲코로나19 대구 확산설 등 주장을 이어가면서 지지자들에게 정치적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했다. 그들이 김씨를 통해 느낀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은 고스란히 민주당의 정치적 자양분이 됐다. 그래서 총선 출마 후보들은 김씨가 보는 앞에서 지지자들에게 큰절을 해야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체포 대상 중 1명으로 김씨를 지목했던 것은 김씨에게 엄청난 이익이 됐다. 당시 계엄군은 김씨가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스튜디오 주변을 통제했다. 김씨는 지난해 12월13일 국회에서 “계엄군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를 사살한 후 북한 소행으로 공작하려고 했다”면서 “정보 출처는 국내에 대사관이 있는 우방국”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그 우방국은 미국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지만, 미국은 국무부·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이를 부인했다. 반면 민주당 최민희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김어준님’의 증언을 허구로 단정하고 비난부터 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과 보수 세력은 민주당과 그 주변 세력처럼 정교한 조직체를 만들지 못했다. 보수 세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피커 역할은 전씨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맡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김씨처럼 진영 전체를 들썩일 수 있는 정치적 유머 감각과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하지도 못한다. 이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강경 보수 지지자들 외 국민 사이에서 웃음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고, 국민의힘 내부서도 강하게 비판한다. 국민의힘이 지난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이겼을 당시엔 민주당에 비판적인 2030세대 남성과 6070세대를 아울러 민주당을 지지하는 4050세대와 2030세대 여성을 포위한다는 ‘세대포위론’ 전략이 제시됐다. 그러나 윤 전 대통령과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가 불화 끝에 결별하면서 이 연합은 얼마 가지 못해 해체됐다. 당시 승리를 주도했던 국민의힘 지지층은 이 대표 특유의 합리주의를 지지하는 젊은 유권자와 강경 보수를 지향하는 노년 유권자로 분열됐다. 전씨는 많은 공무원 제자를 거느린 유명 한국사 강사였다. 따라서 적절히 순화된 주장과 교묘하게 선정한 정치적 입지를 섞어서 정치 전면에 나섰더라면,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와 달리 그럴듯한 이야기를 구성하고 유머를 섞는 능력을 보여준 적이 없다. 전씨의 옛 제자들은 그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절대로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는 김씨와 달리, 직접 국민의힘에 입당해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려 하는 등 적당히 선을 긋지도 않는다. 정치인들이 알아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큰절을 하게 만드는 김씨와 달리, 전씨는 스스로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전당대회서 눈에 띄는 행동을 했다. 전에겐 없는 것들 무엇보다 김씨가 “이 대통령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가진 것 아니냐”는 설까지 나올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구축하기까지 15년이 걸렸단 사실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으로 국민의힘은 정치 구조를 통찰하지 못해 민주당이 장기간 공들여 구축한 정치 구조체를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도 전씨는 ‘전한길 유니버스’ 제작을 멈추지 않는다. 과연 전씨는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