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 쑥갓, 가지… 소박한 우리네 밥상의 주인공이자 <식재료 이력서>의 주역들이다. 심심한 맛에 투박한 외모를 가진 이들에게 무슨 이력이 있다는 것일까. 여러 방면의 책을 집필하고 칼럼을 기고해 온 황천우 작가의 남다른 호기심으로 탄생한 작품 <식재료 이력서>엔 ‘사람들이 식품을 그저 맛으로만 먹게 하지 말고 각 식품들의 이면을 들춰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나름 의미를 주자’는 작가의 발상이 담겨 있다. 작가는 이 작품으로 인해 인간이 식품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피마자
먼저 강원도 아리랑의 가사를 인용해본다.
1절. 아주까리 정자는 구경자리
살구나무 정자로만 만나보세
2절. 열라는 콩팥은 왜 아니 열고
아주까리 동백은 왜 여는가
3절. 아리랑 고개다 주막집을 짓고
정든 님 오기만 기다린다
(후렴)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다
다음은 조선 중기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한 바 있는 성현이 쓴 작품 ‘피마자’(蓖麻子)이다,
百草多微細(백초다미세)
여러 풀들 크기 작은데
渠今乃許長(거금내허장)
피마는 어찌 크게 자라나서
擢莖高過屋(탁경고과옥)
뻗어나간 줄기 지붕 덮고
張葉暗侵霜(장엽암침상)
긴 잎은 서리 얕잡아보네
破殼斑蟲出(파각반충출)
껍질 까면 나오는 벌레 같은 씨
和酥烈焰光(지소열염광)
연유에 섞으면 불빛 밝고
祛風尤有效(거풍우유효)
중풍 고치는데 효험 있다니
病骨得平康(병골득평강)
병든 이 몸 덕분에 편안하리
강원도 아리랑에 두 번이나 등장하는 아주까리가 바로 피마자다.
성현의 작품을 자세하게 살피면 왜 아주까리가 강원도 아리랑에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에 걸쳐 등장하는지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듯하다.
풀은 풀인데 풀답지 않게 크고 줄기는 집을 뒤덮을 정도라 했다.
또 아주까리의 씨 즉 피마자는 밤을 밝히는 등잔불 대용으로 이용되었고 중풍에 걸린 사람들에게 효험이 있다 기록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아주까리란 이름에 대해 살펴본다.
어원 사전을 살피면 아차질가이(阿次叱加伊)가 아가리→아족가리→아주까리로 변했다고 한다.
그런데 자꾸 필자에게는 ‘아주 까리하다’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 지울 수 없다.
‘까리하다’는 말은 어떤 물건이나 사물 등의 특징이 유별하고 멋있어 보일 때도 쓰지만 정확하게 판단 내릴 수 없을 때도 사용한다.
아울러 필자는 후자의 의미로 ‘아주 헷갈리는 풀이라는 의미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피마자의 줄기와 씨에 관해서는 피마자 기름 등 그 효능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잎에 대해서는 그다지 널리 알려진 바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피마자 잎에는 렉틴 성분이 많이 함유돼 있어 면역시스템을 정상화시켜 주고 암을 예방하는 데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하튼 경상북도 청도 지방의 풍속 중 한 단면을 살펴보자.
‘향토문화전자대전’에 실려 있는 글이다.
정월 대보름에 오곡밥을 먹을 때는 반드시 고사리, 아주까리 잎(피마자 잎), 도라지, 취나물 등의 묵은 나물을 먹어야 한다.
오곡밥을 먹을 때는 맨 먼저 피마자 잎으로 쌈을 싸서 먹는데 피마자 잎이 액막이 잎이고, 이것으로 쌈을 싸서 먹으면 산에서 꿩알을 주울 수 있다고 여겼다.
등잔불 대용으로 이용된 아주까리 ‘피마자’
‘화해의 식품’으로 평가되는 ‘김’의 유래는?
김
김영삼 전 대통령과 멸치에 관한 일화는 세간에 화제로 남아 있다.
그런데 이에 못지않은 일이 있다.
작고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김종필 전 총리와 김에 관한 일이다.
김 전 총리 역시 명절 등에 반드시 선물을 보냈는데 그게 바로 김이었다는 이야기다.
그 이유가 걸작이다.
‘김을 많이 먹으면 머리카락이 세지 않고 검은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이라 언급하고는 했다.
그런데 단지 그 이유 때문이었을까.
이와 관련해 선조들의 사례를 살펴본다.
조선조 주자학의 대가인 송시열의 <송자대전>에 실려 있는 글을 인용한다.
그 양가(兩家, 조목의 집과 유성룡의 집)는 오랫동안 서신도 상통하지 않았는데, 어떤 사람이 유상(柳相, 유성룡)에게 충고하기를 ‘두 분의 사이가 점점 좋지 못하게 돼 가는데, 어째서 먼저 통문(通門)하지 않습니까?’ 하자, 유상이 즉시 서신을 작성, 해의(海衣)까지 겸해 보내니, 조목이 답하기를 ‘영공(令公)께서 해의를 보내시니, 해의가 도리어 해의(解疑 의심이 풀렸다는 뜻)가 됐습니다’고 했다.
이를 부연해보자.
유성룡은 <징비록>의 저자로 이순신 장군의 적극적인 조력자였다.
이에 반해 조목은 퇴계 이황의 제자로 관직에 들어서지 않고 학문 연구에만 일념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두 사람의 관계가 소원했던 모양이다.
이를 살핀 제 3자가 유성룡에게 조목과 화해할 것을 권유하자 유성룡은 글과 함께 해의(海衣) 즉 김을 선물로 보냈다.
그러자 김을 받은 조목이 해의 때문에 해의(解疑)됐다는 한편의 해학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이를 통해 김이 화해의 수단이 됐음을 은연 중에 살필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김 전 총리도 이런 화해의 의미를 알아줬으면 해서 지인들에게 보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제 위 기록들을 근거로 필자가 감히 ‘화해의 식품’으로 명명하고 싶은 김이란 식품의 명칭이 유래된 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혹자는 삼국시대 당시 전남 광양에서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왕에게 진상했기에 김이란 명칭이 유래된 것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조선 후기 학자 이만영이 1798년(정조 22)에 엮은 유서인 <재물보>를 살펴보자.
이에 따르면 ‘해의는 자채(紫菜)의 속명이며, 우리말로는 짐이라 한다’고 기록돼있다.
즉 김의 원래 이름은 ‘짐’이었는데 이 명칭이 세월이 흘러 김으로 변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