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그룹 새 황제의 임무

아버지 흔적부터 말끔히 지운다

[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DB그룹이 오너경영 체제로의 회귀를 알렸다. 전문경영인 아래서 실무를 익힌 젊은 황제는 옛 영광을 재현해야 하는 숙명을 안게 됐다. 다만 후계자가 짊어진 짐은 그리 만만한 것들이 아니다. 미래 먹거리를 챙겨야 하는 건 물론이고, 자질에 대한 물음표도 떨쳐내야 한다. 회사를 위해서라도 아버지와 철저한 선긋기가 요구된다.
 

▲ 김남호 DB그룹 신임 사장

DB그룹(옛 동부그룹)은 1969년 1월 설립된 미륭건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창업주인 김준기 전 회장은 고려대 경제학과 재학 시절 자본금 2500만원으로 회사를 차렸고, 미륭건설은 1970년대 중동 건설 시장 진출을 계기로 급격히 사세를 키웠다. 

중동서 벌어들인 외화를 밑천으로 한국자동차보험(현 동부화재)을 인수하면서 본격적인 사업 다각화를 꾀했다. 동부그룹이 한때 금융·철강·반도체·농업 등을 영위하는 60여개 계열사를 거느린 재계 서열 10위권 대기업집단으로 발돋움하게 된 배경이다.

다사다난 
수난사

하지만 동부그룹은 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며 급격한 내리막을 타기 시작했다. 1조3000억원을 들였던 동부제철 전기로 사업은 처참한 실패로 결론났고, 주력 계열사들은 연이어 엄청난 부채의 압박에 시달렸다.

결국 2014년 12월31일 모태기업인 동부건설은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이후 순차적으로 동부제철, 동부건설, 동부익스프레스 등 비금융 계열사가 떨어져 나가면서 그룹의 공중분해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럼에도 동부그룹은 무너지지 않았다. 수년간 구조조정 홍역을 치루면서 외형은 위축됐지만, 금융계열사 주축으로 수익성 악화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급한 불을 끈 뒤에는 사명 변경을 통한 체질 개선에 박차를 가했다. 동부그룹은 지난 2017년 11월 이미지 쇄신작업의 일환으로 사명을 DB그룹으로 변경했다. DB는 동부(DongBu)의 영문 머리글자이며 ‘드림 빅’(Dream Big) 의미를 담았다.
 

▲ DB그룹 CI 선포식 ⓒDB그룹

그룹 계열사들 역시 DB로 새 단장했다. DB Inc로 변경된 ㈜동부를 필두로 ▲DB손해보험(동부화재) ▲DB생명(동부생명) ▲DB금융투자(동부증권) ▲DB저축은행(동부저축은행) ▲DB하이텍(동부하이텍) ▲DB메탈(동부메탈) ▲DB라이텍(동부라이텍)이 간판을 바꿔 달았다.

오너경영 체제로 회귀
옛 영광 재현에 집중

새 출발한 DB그룹의 수장은 이근영 동부화재 고문이 맡았다. 경영권이 곧바로 오너 일가에 넘어가는 것보다 전문경영인 체제로 가는 게 낫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한국산업은행 총재, 금융감독위원장 겸 금융감독원장을 지낸 이 회장은 2008년 동부메탈과 동부생명 사외이사를 맡으며 동부그룹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이 회장 체제서 DB그룹은 꾸준한 성장세를 나타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자산규모와 매출액은 각각 66조원, 21조원 수준으로 불어났다. 그룹 전체 매출의 90%를 담당하는 금융 부문이 건실한 수익을 낸 덕분이었다.

금융부문은 코로나19 사태에도 1분기 매출액 5조8000억원, 순이익 1600억원을 달성하는 등 전년보다 개선된 실적을 거뒀다.


제조부문 역시 가시적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미운오리새끼’ DB하이텍이 실적 개선을 이뤄내면서 금융과 제조를 양대 축으로 하는 사업 모델이 탄력을 받고 있다. DB하이텍은 올해 1분기 매출 2258억원, 영업이익 647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동기 대비 각각 41%, 189% 증가한 수치다. 영업이익률은 29%에 달한다.

이 회장 체제서 내실 다지기에 성공한 DB그룹은 최근 2세 경영 신호탄을 쏘아 올리며 또 한 번 대대적인 변화를 예고한 상태다.

내실 다지고
후계자 앞으로

DB그룹은 지난 1일 이 회장이 물러나고, 김남호 DB금융연구소 부사장을 신임 그룹 회장에 선임했다고 밝혔다. 김 신임 회장은 내년 초 정기주총을 거쳐 그룹 제조서비스부문의 실질적 지주회사인 DB Inc의 이사회 의장도 겸임할 예정이다.

1975년생인 김 신임 회장은 김 전 회장의 장남이다. 2002년부터 3년간 외국계 경영컨설팅회사인 AT커니서 근무했고, 2007년 미국 시애틀 소재의 워싱턴대 대학원서 경영학 석사 취득, UC버클리서 금융 과정을 수료했다. 2009년 DB그룹에 입사해 동부제철, 동부팜한농 등 주요 계열사서 생산·영업·공정관리·인사 등 각 분야 실무경험을 쌓았다.
 

▲ DB그룹 사옥

김 신임 회장의 등장은 전임자의 의중이 강하게 반영된 인사로 읽힌다. 이 전 회장은 고령으로 체력적 부담이 커지면서 여러 차례 자리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고, 지난달 말 그룹 경영협의회서 퇴임 의사를 공식화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이 회장은 계열사 사장단이 참석한 자리서 오너 2세인 김 신임 회장이 경영 전면에 나서달라고 피력하기도 했다.

김 신임 회장은 DB손해보험과 DB Inc의 지분 9.01%와 16.83%를 각각 보유한 최대주주기도 하다. DB손해보험은 DB생명·DB금융투자·DB캐피탈을, DB Inc는 DB하이텍과 DB메탈을 지배하고 있다. 김 신임 회장은 2000년대 초부터 그룹 지배구조상 정점에 있는 계열사들의 최대주주 지위를 확보해왔다.

김 신임 회장의 취임은 DB그룹은 창업 이래 50년 가까이 그룹을 이끌어 온 창업주 김 전 회장의 시대를 완전히 청산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재계에서는 김 신임 회장 체제로의 전환은 3년 전부터 예견돼온 수순이었다고 보고 있다.

명확한 입지
큰 그림 장점

실제로 김 신임 회장은 김 전 회장 퇴임 후 이 전 회장을 보좌하며 그룹 경영을 이끌기 위한 준비과정을 밟아왔다. 게다가 김 전 회장은 암투병 중으로 경영복귀가 사실상 어려운 것으로 전해졌다. 

김 신임 회장은 국내외 투자금융전문가들과의 인적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2010년대 중반 그룹 구조조정 과정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부팜한농, 동부대우전자 등을 매각하는 작업에 깊이 관여해 금융·IT 중심으로 그룹을 재정비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최근에는 DB메탈의 워크아웃 졸업을 위해 유상증자를 이끄는 등 경영정상화를 이뤄냈다는 평가도 받는다.

DB금융부문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고 있는 DB금융연구소에서는 금융 계열사들의 중장기 발전전략을 세웠다. DB금융부문이 안정성, 수익성, 성장성 등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다만 일각에선 김 신임 회장이 금융부문뿐 아니라 제조부문까지 책임지는 과정서 경험 부족을 드러낼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DB그룹은 유동성 위기를 겪으며, 금융부문 의존도가 한층 높아진 상태다. 제조부문이 총 매출서 차지하는 비중은 10% 남짓에 불과하고, 김 신임 회장 역시 금융부문에 주로 역량을 드러냈다. 상대적으로 제조부문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질 수 있다.

김 신임 회장 입장서 다행인 건 DB그룹이 엄청난 손실에도 불구하고 제조부문에 대한 투자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특히 DB하이텍은 DB그룹의 제조부문의 미래를 좌우할 핵심 전력이다.

부친과 선긋기 우선
경험 부족 당면과제

DB하이텍은 국내 유일의 순수 파운드리 업체로 1997년 옛 동부그룹이 동부전자를 설립한 후 2000년 국내 최초로 파운드리 사업에 나섰다. 2013년 위기에 봉착한 DB그룹이 계열사 매각과 워크아웃 등에 돌입하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게 DB하이텍이었다. 

일단 DB하이텍은 기대치를 충분히 충족시키고 있다. 시장에서는 DB하이텍의 올해 매출액과 영업이익을 각각 9230억원, 2511억원으로 보고 있다. 영업이익률 예상치만 27.2%에 달한다.

오너 일가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잠재워야 할 과제도 놓여 있다. 필요에 따라 아버지와의 철저한 선긋기가 요구된다. 가사도우미와 비서에게 성폭력을 저지른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던 김 전 회장은 지난 4월, 1심서 징역형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김 전 회장은 지난 2016년부터 2017년 사이 별장의 가사도우미를 성폭행하고 비서를 강제로 추행한 혐의로 기소됐다. 

총수의 상식 밖 행동으로 인해 순식간에 그룹 이미지는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심지어 브랜드 사용료 문제에 따른 사명 변경을 김 전 회장과의 거리 두기 차원으로 몰아가는 시선도 적지 않았다. ‘동부’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할 경우 그룹은 남이 돼버린 동부건설에 브랜드 사용료를 내야 했는데, 이 금액은 연간 수십억원에 이르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김 전 회장은 2017년 7월 질병 치료 명목으로 미국으로 떠났다가 출국 이후 성추행 의혹이 불거지자, 곧장 국내로 돌아오지 않는 촌극을 벌였다. 이 탓에 약 2년 동안 수사가 진척되지 못했다. 

넘어야 할 산
무거워진 어깨

도피행각을 벌이던 김 전 회장은 지난해 10월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출국한 지 약 2년2개월 만이었다. 그를 향한 시선은 이미 존경받는 창업주서 파렴치한 기업인으로 뒤바뀐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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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