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을 <홍길동전>의 저자로만 알고 있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조선시대에 흔치않은 인물이었다. 기생과 어울리기도 했고, 당시 천대받던 불교를 신봉하기도 했다. 사고방식부터 행동거지까지 그의 행동은 조선의 모든 질서에 반(反)했다. 다른 사람들과 결코 같을 수 없었던 그는 기인(奇人)이었다. 소설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허균의 기인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파격적인 삶을 표현한다. 모든 인간이 평등한 삶을 누려야 한다는 그의 의지 속에 태어나는 ‘홍길동’과 무릉도원 ‘율도국’.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조선시대에 21세기의 시대상을 꿈꿨던 기인의 세상을 마음껏 느껴볼 수 있는 장이 될 것이다.
어머니와 어린 딸 그리고 만삭의 아내를 대동한 허균이 피난길에 나섰다.
비록 소달구지에 일행을 싣고 옷가지를 준비하였으나 가뜩이나 흉년이 들어 모두가 힘든 데다 또 늦은 봄이라 식량이 귀했다.
게다가 서둘러 길을 떠나오는 바람에 먹을 것도 변변히 챙기지 못했다.
물론 마음속에서는 전쟁이 빨리 끝나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아내와의 추억
큰 형님의 이야기가 있었지만 조정 대신들로부터 설사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막강한 조선의 군대가 왜구를 한방에 격멸할 것이라 호언장담하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터였다.
그를 믿고 피난에 대해서는 생각도 않고 있다 왜구들이 한양 가까이 다가온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급하게 서둘러 길을 떠났으니 그야말로 맨 몸에 가까웠다.
피난길에 나선 만삭의 아내에게 점점 산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부인에게 제대로 먹일 음식이 없었다.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처지였다.
결국 아내는 그 난리 통에 아이를 낳았다.
아들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불행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 아기를 절대로 놓을 수 없다는 생각인지 부인까지 아기 뒤를 따라갔다.
피난길에 소를 처분하고 옷가지를 팔아 저승길이나마 곱게 보내고자 했으나 시시각각 몰려오는 왜군으로 인해 급히 야산에 묻고는 거의 실신 지경에 이른 어머니와 어린 딸아이를 데리고 외가가 있는 강릉으로 갔다.
“부인, 그만하고 나하고 좀 시간을 보냅시다.”
허균이 길쌈을 하고 있는 아내의 손을 잡아당겼다.
부인이 흠칫하고 놀랐다.
“서방님, 누가 보면 어쩌시려고.”
“누가 보면 어떻다는 말이요. 내가 나의 여인을 만지고자 하거늘.”
누나가 시집가고 빈자리를 아내가 메워 주고 있었다.
누나가 허균의 정신세계에 미친 영향을 현실에서 보완해 주고 있었다.
명문가의 여자답게 모든 일이 정형화 되어 있었다.
홀로 남은 시어머니를 극진하게 섬기었고 또한 너그러운 성품과 엄격함으로 집안의 대소사를 훌륭히 이끌어 가는 믿음직스럽고 아늑한 느낌을 주던 아내였다.
아내가 잠시 밖의 기척을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길쌈을 하던 손을 멈추고 못이기는 척하며 허균이 이끄는 대로 따랐다.
“서방님, 혹여 저로 인해서 글공부 게을리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그것이 무슨 소리란 말이오. 부인을 위해서라도 더욱 열심히 공부에 정진해야 함을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거늘.”
전쟁 통에 사랑했던 아내를 떠나보내다
떠나야만 가치를 아는 인간의 어리석음
한창 물이 오르고 있는 아내를 안고 있노라면 야산에 피어있는 이름 모를 꽃향기에 홀린 듯했다.
그 향기에 마음이 혼미해지고 또 몸은 저절로 요동치고는 했었다.
“어머니께서 서방님이 여기에 계신 사실을 아시면 저에게 역정을 내실 일이옵니다.”
허균이 그렇게 말하는 아내를 더욱 세게 끌어안더니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마치 멀지 않은 곳에 있을 어머니에게 자신이 지금 아내와 함께 있음을 알리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아내가 급히 그런 허균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러다가 진짜 어머니께서 들으시면 어쩌시려고…….”
“어머니께서 부인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내가 훤히 알고 있거늘.”
그 소리가 흡족했던지 허균의 가슴으로 가만히 머리를 기대왔다.
“내가 부인에게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친어머니에게도 그리 잘하기가 힘들 터인데. 하물며 시어머니께.”
허균이 말하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자신의 품에 들어온 아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누나도 부인과 어머니 관계처럼만 지낼 수 있었다면…….”
바로 그것이었다. 사랑하는 누나가 남편뿐 아니라 시어머니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하고 외로이 생활하고 있는데 대한 아쉬움이었다.
“세월이 지나면 차츰 나아질 일이옵니다.”
“그럴까.”
“그렇고말고요. 시누이께서 아이도 낳고 살림에 재미를 붙이다 보면 서로 화목한 사이를 유지할 수 있을 거예요.”
사랑스러운 아내가 그리 말하는 것이 진정이라 생각 들지 않았다.
누나가 사는 모습을 누구보다도 안타까워하던 아내였다.
허균은 누나의 일로 늘 걱정하는 자신의 심기를 편하게 해주고자 하는 아름다운 의도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 아내를 있는 힘을 다해 안아보았다.
행복에 겨운 미세한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부인. 이제 우리도 서서히 후사를 준비해야 하지 않겠소.”
부인의 시선이 허균의 얼굴로 향했다.
마치 미워죽겠다는 듯이 사랑스러운 표정이었다.
순간 허균의 손이 앙증맞은 부인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미 불같이 성을 내고 있는 자신의 중심에 부인의 손을 올려놓았다.
“나리, 진실로 부인을 사랑하셨었군요.”
허균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아내를 비명에 먼저 간 누나려니 생각하고 살려고 했는데. 내 누나가 생전에 누리지 못했던 행복을 대신 아내에게 사랑으로 대해주면서 누나에 대한 생각을 순간순간 잊고자 했는데…….”
“그런 부인을 게다가 새로 태어난 아들까지 난중에 잃어버리셨으니…….”
허균의 시선이 천장으로 향했다.
공허한 눈길이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그 눈에 서서히 이슬이 솟아나고 있었다.
“매창이, 인간이란 동물이 우습지 않소.”
시선을 허공에 고정시킨 허균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이시온지.”
“살아서 곁에 있을 때는 그 소중함을 전혀 알지 못하다가 죽어서 곁을 떠나야만 그 가치를 알아채는 인간의 어리석음 말이오.”
가혹한 운명
매창이 허탈하게 말하는 허균의 모습을 안쓰러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에서 묘한 기운이 솟구치고 있었다.
마치 허균의 일이 자신의 일인 듯이 생각되었다.
매창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마도 허균은 지금 부인과 아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을 터였다.
그 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어느 순간 천장을 바라보던 허균이 매창을 바라보았다.
매창이 자신의 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듯 정색했다.
“이런 말씀 드리기는 송구하옵니다만 나리의 운명도 예사롭지만은 않은 듯하옵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