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스타 전도연의 새로운 도전

다시 꿈을 꾸는 ‘칸의 여왕’

[일요시사 취재2팀] 함상범 기자 = 영화 <기생충>이 오스카 작품상을 수상하면서, 대한민국은 소위 ‘국뽕’에 취해 있다. 전 세계를 열광시킨 영화였던 것은 물론, 수많은 할리우드 배우 앞에서 여유롭게 미국 영화계의 거장을 존경한다는 봉준호 감독의 언행은 모두를 감동시켰다. 이미 13년 전 ‘제60회 칸 국제영화제’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배우 전도연도 마찬가지였다. 배우로서 정점에 오른 뒤 뚜렷한 자극이 없었던 그에게 <기생충>의 활약은 남다르게 다가왔다. 새로운 꿈을 꾸게 됐다는 ‘칸의 여왕’ 전도연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 ⓒ메가박스플러스엠<br>

영화 관객의 입장서 배우 전도연의 연기를 보는 것은 어쩌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유괴를 당한 것으로도 모자라 죽임을 당한 아이의 엄마(<밀양>)였고, 신분 상승을 노리는 하녀(<하녀>)였으며,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수년간 가족과 생이별한 아내(<집으로 가는 길>)이기도 했다. 또 붉은 드레스를 입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퇴물’이 된 술집 마담(<무뢰한>)이기도 했으며, 세월호 침몰로 아이를 잃은 엄마(<생일>)였으니, 힘든 것도 당연해 보인다. 이렇듯 전도연이 연기한 인물들은 하나같이 극단의 환경에 놓여 있었다. 

<지푸라기…> 
‘숙명’으로

앞서 거론된 영화는 어떤 사건이 발생한 뒤 인물의 심리를 표현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극을 이끌어가는 건 늘 전도연이었다. 그의 작품은 언제나 전도연의 얼굴에 의존했다.

그러다 보니 배우로서도 감당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대본 혹은 대사에 적혀 있는 것 이외에도, 진짜 본질에 가까운 감정을 알아내야 하는 숙제가 뒤따랐다. 거절하고 거절하다가도 결국 돌아오는 대본과 함께 “이 인물은 전도연밖에 소화할 배우가 없다”는 말이 붙었다. ‘숙명’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인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그가 인물 중심의 서사가 아닌 사건 중심의 서사로 전개되는 신작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이하 <지푸라기>)로 관객과 만난다. 전도연은 큰돈이 앞에 나타났을 때 만나는 모든 사람을 속이고 상처 주는 연희를 연기한다. 활달하고 애교 섞인 귀여운 표정 뒤에 살벌함을 감춘 인물이다.


‘귀여운 소시오패스’가 적당한 묘사다. 극단의 감정을 절절이 쏟아내야 했던 기존 전도연의 얼굴과는 사뭇 다르다. 극중 전도연은 연희를 두고 “내면의 깊은 감정까지 굳이 알아낼 필요 없이 주어진 텍스트만 해석해도 충분했다”고 언급했다.

“이 영화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하겠다고 했어요. 정말 재밌더라고요. 연희라는 인물 자체가 대본에 모두 세팅돼있었어요. 굳이 보이지 않는 감정을 찾을 필요가 없었어요. 예를 들어 <밀양>만 하더라도, 미쳐가는 신애의 모습을 제가 찾아야 하거든요. 연희는 전사를 쓰지도 않았어요. 지금 연희가 가진 얼굴이 과거에도 같은 연희가 아니었을까. 그녀는 이미 과거에도 이렇게 살아왔을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뭔가 만들려고 하지 않았어요. 여러 생각하지 말고 마음을 비우고 편하게 연기를 하자는 생각이었죠. 굳이 부담이 있었다면, 부담스럽게 뭘 하지 않는 거였죠.”

고민이 많이 필요하지 않는 인물인 연희는 영화 내에서 놀랍다. 타인에게 아픔을 주는 데 거리낌이 없는 데다 심지어 장난스럽기까지 하다. 큰 일을 저지르고도 태연하다. 전도연은 충격적인 행위를 일관하는 게 매우 자연스러운 이 인물을 즐기는 데 성공한다. 

“배우 입장에선 정말 반가운 작품이에요. 부담도 없었고요. ‘묻어갈 수도 있겠구나’는 생각도 들었어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감정이 중요했던 이전의 작품들과는 다르죠. 전작 모두 보이지 않는 감정이 엄청 중요했거든요. 저는 그걸 찾느라 늘 치열했어요. 이번에는 사실 연희한테 감정이입도 안 됐어요. 너무 이상한 사람이잖아요. 그런 연희를 연기하는 것을 그저 즐겼던 것 같아요. 사연이 있고 커다란 감정이 있고 그랬었는데, 이번에는 그냥 소시오패스죠. 정말 재밌었어요. 새롭기도 했고요.”

애교 섞인 ‘소시오패스’
정교하고 본능적인 연기력

<지푸라기>가 신선한 점은 처음부터 전도연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제나 무거운 얼굴로 극의 처음을 열고 끝을 맺어왔는데, 이번에는 무려 50분이 지난 뒤에야 얼굴을 비친다. 그때부터 영화는 진한 색을 입고 쉼 없이 달려간다. 절절한 감정을 표현하지 않아도 전도연의 존재감은 어마어마하다. 이어지는 가벼운 언행에도 결국 엄청난 무게감을 안겨주는 그의 연기력은 이번에도 놀랍다. 

관객을 압도하기 전에 감독부터 제압하는 게 전도연의 능력인 듯하다. 영화감독이 배우에게 애정이 있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엄청난 존경을 받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전도연이라면 예외다. <지푸라기>를 연출한 김용훈 감독에게 전도연에 대한 평가를 부탁하자, 빠른 템포로 칭찬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 ▲ⓒ메가박스플러스엠

김 감독은 전도연에 대해 “정교하면서 본능적인 배우”라며 “기술적으로는 현장서 풀샷이 ‘OK’ 사인이 나면 얼굴을 따는데, 모든 장면을 다 완벽하게 해내요. 연기적인 기술이거든요. 그것만 해도 훌륭한데, 순간적으로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왔을 때 이미 그 인물처럼 본능을 발휘해요. 갑자기 바람이 싹 날렸는데, 연희처럼 바람을 피하더라고요. 차에 타는 장면이었는데, 헝클어진 머리를 운전석 위에 거울을 내리면서 머리를 다듬으며 대사를 던지는데, 거기서 이미 제압됐죠. 그게 첫 촬영이었어요.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을 해도 안 아까워요. 인간문화재로 등재할 수 있으면 그러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좋은 배우의 미덕 중 하나가 캐릭터에 보편적이고 타당한 인간의 모습을 불어넣는 것이다. 찰나의 순간, 진짜 그럴 것 같은 행동을 자연스럽게 녹여낸다. 송강호나 이병헌처럼 전도연 역시 탁월하다. 이는 노력이 아닌 천재적인 재능으로 볼 수 있다. 

“누군가를 죽이는데 다리가 보여야 됐어요. 촬영하는데 저도 모르게 다리가 더 잘 보이게 하려고 몸을 틀더라고요. 그건 연희스러운 거잖아요. 저도 생각하고 한 건 아니에요. 그 상황에 가장 자연스러운 행동인데, 저도 모르게 나왔죠. 많이들 칭찬했어요. 기뻤고요.”

“인간문화재로 
등재하고 싶다”

<지푸라기>는 전도연을 비롯해 정우성, 박지환, 배성우, 정만식, 신현빈, 정가람, 진경 그리고 윤여정까지 주요 배우가 많다. 각자마다 사연이 있고 스타일이 있다. 모든 인물이 적절히 설명돼야 하는데 그것을 구현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었다. 게다가 감독은 단편영화 한 작품밖에 안 한 신인이었다. 불안했다는 게 전도연의 솔직한 속마음이었다. 

“걱정을 많이 했어요. 먼저 캐스팅이 걱정이었죠. 인물이 너무 많잖아요. 사실 영화가 촬영까지 갈 수 있을까도 우려됐어요. 마음을 비우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막상 촬영에 들어가서도 이 인물들을 한 이야기에 충분히 담아낼 수 있을까 했어요. 막상 영화를 보고서는 만족감이 컸어요. 감독님이 정말 수고하신 것 같아요.”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애착이 생긴 전도연은 캐스팅에 전적으로 가담한다. 먼저 윤여정에게 전화를 걸어 역할을 맡아주길 요청한다. 또 이미 도장을 찍은 정우성에게도 전화해 ‘잘해보자’고 독려하기도 했다. 배우가 이토록 나서기란 쉽지 않다. 

“윤여정 선생님한테 전화를 했어요. 시나리오를 읽었는데 정말 재밌다는 얘기를 했죠. 그러면서 치매 걸린 시어머니 역할을 해달라고 했어요. 뭔가 숨바꼭질 같은 게 필요한 인물이잖아요.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선생님께 ‘역할이 좋다’고 하니까 ‘그렇게 좋으면 네가 하지 그러니’라고 하시더라고요.(웃음) 결국 해주셨는데, 저를 믿어주신 거니까 감사하죠.”

걱정이 많았던 작품, 게다가 이례적으로 중간부터 투입되는 특별한 상황까지 있었던 터라, 우려는 비교적 컸다. 하지만 문제는 쉽게 해결됐다. 

“첫 촬영 날에 감독님을 보는데 여유가 넘치는 거예요. 신인 감독이 그러기 쉽지 않거든요. 이미 현장을 즐기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안도가 됐어요. 그 이후로는 쭉 달렸죠.”

연희는 태영(정우성 분)과 연인 관계다. 정확히 말하면 갑자기 연락이 두절됐다가 또 갑자기 태영 앞으로 찾아오는 인물이다. 전도연과 정우성, 멜로 장르서 각자의 성별로 활약한 두 배우지만, 작품으로는 처음으로 만났다. 데뷔 30년 만이었다. 극중 연희가 느닷없이 태영을 찾아와 밥을 차리며 애교를 부리는 장면이 두 사람의 첫 촬영분이었는데 당황했었다고 했다. 
 

▲ ▲▲ 배우 전도연 ⓒ메가박스플러스엠

“정우성씨가 예상과 다른 연기를 하더라고요. 저도 애교를 부려야 하는데 힘든 면이 있었죠. 그래도 버텼어요. 그걸 버티고 나니까 상황이 만들어지더라고요. 그 다음부터는 쉬웠어요. 우성씨와 가까워졌는데, 멜로보다 코미디를 해보자고 제안했어요. 멜로는 어쩌면 뻔할 것 같고, 둘이서 코미디를 하면 엄청 재밌을 것 같아요. 물론 해보고 싶다고 되는 건 아니지만…(웃음)”


국내 영화계서 연기를 가장 잘하는 여배우가 누구냐고 하면 전도연이라는 답이 독보적으로 나오곤 하는데 여기엔 이견이 없다. 남자배우의 경우 송강호와 이병헌, 최민식, 한석규, 김윤석, 설경구, 하정우 등이 기호에 따라 이래저래 나뉘지만, 여배우는 전도연으로 모인다. 국내 최고라는 말이 결코 무색하지 않다.

여전히 그가 최고를 유지하는 비결은 위치를 가리지 않고 수용하는 자세에 있는 듯하다. 옳은 행동이라면 적극 받아들이려는 태도가 그 명성을 만든 건 아닐까. 이번에는 신현빈이 그에게 긍정적인 자극제가 됐다. 

“봉·박 감독과
같이하고 싶다”

“제가 극 중에서 머리를 자르고 나와요. 미란(신현빈 분)과 만나는 마지막 장면이었는데, 현빈이가 머리를 자르겠다고 한 거예요. 연희를 닮고 싶은 마음을 짧은 머리로 표현하겠다는 의지였죠. 사실 딱 한 신이에요. 한 신을 위해 머리를 자른다는 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닐 수 있어요. 감동받았어요. 그런 어린 친구들이 열심히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 자극이 돼요. 저도 더 노력하게 되고요.”

<지푸라기>는 큰돈이 담긴 돈 가방을 처절하게 쫓는 자들을 통해 ‘욕망’을 발언한다. 사회를 둘러보면 돈이라는 가치가 어떤 다른 가치보다 우선시 되는 것을 발견할 때가 많다. ‘걸어 다니는 중소기업’이라고 불리는 배우에게도 돈은 중요한 가치일까. 전도연은 돈보다 일이라고 했다. 

“물론 돈 좋죠. 돈 앞에서 누가 자유롭겠어요. 돈 있으면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은 해요. 하지만 돈이 행복의 기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돈이 있어서 행복한 사람은 행복할 거고, 돈이 있다고 해도 불행한 사람도 있을 거잖아요. 저는 요즘에 일에 대한 욕망이 커졌어요. ‘많은 작품을 하고 싶다’는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주체적으로 하고 싶어요.”


그러면서 새로운 꿈도 꾸게 됐다. 바로 ‘오스카’다. 인터뷰는 <기생충>이 오스카 4관왕을 거둔 다음 날인 11일에 진행됐다. 모두가 감동으로 버무려진 날, 전도연도 똑같았다. 그 역시 아카데미 시상식에 가는 꿈을 꾸게 됐다.   

“정말 역사적인 사건이죠. 뭐라도 받으면 좋은 거였는데, 4관왕이라니. ‘악’ 소리도 안 날 만큼 큰 기쁨이었어요. 사실 오스카는 다른 세상 이야기였는데, 현실로 만들어준 거잖아요. 제가 비록 칸 국제영화제서 상을 받긴 했지만, 또 하나의 문이 열린 거잖아요. 저도 꿈을 꾸게 됐어요. 이왕이면 윤여정 선생님과 함께요.”

왜 윤여정일까. 두 사람은 <지푸라기> 뿐 아니라 <하녀>에서도 호흡을 맞췄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일까, 두 사람은 이후 교감을 나누며 진한 선후배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전도연은 윤여정을 사랑하는 듯 보였다.

“저는 선생님이 너무 궁금해요. 언제나 그분 연기를 보고 싶어요. 개인적으로 만나도 즐거운 사람이고요. 나이가 있으심에도 트렌디하고 허물없이 작품선택을 하고요. 정말 놀라워요.”

국내 최고 감독으로 칭송받던 봉준호 감독은 이제 전 세계를 아우르는 감독이 됐다. ‘칸의 여왕’과 ‘오스카의 왕자’는 한 작품에서 만날 수 있을까. 상상만으로도 설렌다. 

꽤 무거웠던 ‘여왕 왕관’
오스카 무대를 상상하다

“봉 감독님이 저랑 작품하고 싶다는 말을 많이 했어요. 자주는 아니지만, 사적으로도 많이 봤어요. <옥자>를 준비할 때, 한 번 보자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그 때 ‘내가 옥자로 나오는구나’라고 생각했죠. 근데 아역 안서현에 대해서만 물어보더라고요. <하녀>서 저랑 같이 연기했거든요. 전 사심이 있었지만, 그 분은 사심 없이 얘기하셨어요.(웃음) 봉 감독님이나 박찬욱 감독님과 한 번 같이 해보고 싶어요. 요즘 많이 어필하고 있어요.” 

꿈과 변화, 이런 단어들이 연기 경력 30년 전도연의 입에서 자주 나왔다. 그리고 내용이 비교적 가벼운 시나리오들도 그를 향하고 있다. 차기작은 한재림 감독의 <비상선언>이다. 송강호와 이병헌이 나오는 재난 영화다. 이 역시 사건이 중심이다. 늘 80% 이상을 차지하던 전도연의 분량이 <지푸라기>도 그렇듯 <비상선언>서도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기뻐 보였다. 
 

▲ ▲▲ 배우 전도연 ⓒ메가박스플러스엠

“저 자신도 모르게 엄청난 파도에 휘말린 상황이었어요. 언제나 숨쉬기조차 버거운 인물들을 연기해야 했고요. 제작하시는 분들이 제가 그런 연기를 잘 한다고 생각했나봐요. 그래서 피로도가 컸어요. <생일> 같은 영화는 홍보하기도 조심스러워요. 아무래도 웃을 수 없으니까. ‘칸의 여왕’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후로는 연기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다들 ‘연기 한 번 해봐’라는 식의 시선이 있었어요. tvN <굿 와이프> 찍을 때였는데 제가 ‘눈물의 여왕’이잖아요. 윤계상씨 앞에서 힘든 걸 호소하며 눈물을 흘리는 신이었는데, 밑에서 스태프 모두 고개를 내밀고 쳐다보는 거예요. 눈물이 안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우는 척만 했어요. 대사에 ‘실컷 울었네’가 있는데, 빼달라고 했었어요. 솔직하게 말했죠. 부담스러웠다고. 사실 그런 무게를 달고 살았던 것 같아요.”

늘 칸의 여왕이라는 제일 윗자리에 있다 보니, 연기라는 직업이 무겁게 다가왔다. 13년이 지난 이제야 조금씩 그 무게가 가벼워지고 있다. 대규모 자본이 투입된 블록버스터서도 전도연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비교적 작은 역할은 물론 <백두산>처럼, 카메오로도 전도연을 부르고 있다.  

오스카의 꿈
자극을 받다

“<백두산>에서처럼 카메오로만 나와도 사람들이 새롭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 저 역시 새로움에 목말라 있어요. 분량은 전혀 문제가 안 돼요. 이제는 조금 밝고 즐거운 작품을 연기하고 싶어요. 블록버스터에도 나가고 싶고요. 저에게 흥행은 아픈 손가락이잖아요. 개인적으로 기대도 있고 그래요. 해외진출도 때 되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언어적인 부분 때문에 조심스러웠는데, 또 모르죠. 그러면서 조금씩 오스카에 서는 저를 상상해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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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