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vs 재벌 '전면전' 막전막후

  • 김성수 kimss@ilyosisa.co.kr
  • 등록 2012.07.18 11: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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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겨누자 방탄…숨 막히는 일촉즉발 대치

[일요시사=김성수 기자] 폭풍전야다. 민주통합당과 대기업 사이에 심상찮은 전운이 감돌고 있다. 아직 본게임이 시작되지 않았지만 현 상황만 본다면 누구 하나가 무릎을 꿇어야 끝날 판이다. 일단 주도권은 민주당이 쥐고 있다. 이미 살벌한 으름장으로 선전포고한 상황. 대기업들은 지금까진 대놓고 반기를 들지 않았지만 점점 노골적인 반기류가 형성되고 있어 일촉즉발의 전면전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민주통합당이 '재벌개혁'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민주당은 지난 12일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개정안 등 경제민주화 실현을 위한 6개 법률 개정안을 당론으로 발의했다. 민주당은 "6개 법률안은 경제력 집중 완화·불공정 행위 엄단 등 재벌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화하고 중소기업을 보호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6개 법률 개정안은 ▲재벌경제력 집중완화법 ▲불공정하도급거래 개선법 ▲전속고발권 폐지법 ▲경제사범 사면권제한법 ▲사내하도급 불법파견규제법 ▲중소기업보호법 등이다. 이를 하나하나 뜯어보면 결국 대기업 규제로 이어진다.

출총제 재도입 주장
"순기능 약화" 반발

가장 논란이 많은 개정안은 출자총액제한제도(출총제) 부활이다. 김영주 의원이 대표 발의한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출총제 재도입을 골자로 하고 있다. 상위 10위 대기업 집단의 모든 계열사에 대해 순자산의 30%까지만 다른 회사의 주식을 취득 및 소유할 수 있도록 했다. 단 3년의 유예기간을 부여한다. 김기식 의원도 최근 출총제 부활이 담긴 개정안을 발의했다. 다만 민주당에서 낸 내용보다 한발 더 나아가 30대 대기업에 순자산을 25%로 제한하도록 했다.

출총제는 회사자금으로 다른 회사의 주식을 매입해 보유할 수 있는 총액을 제한하는 제도다. 대기업의 문어발식 계열사 확장을 막기 위해 1987년 첫 도입됐고, 외환위기 직후 폐지됐다. 이후 DJ 정부시절인 2001년 부활했다가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으로 2007년 출자한도를 완화했다. '비즈니스 프렌들리(친기업주의)'정책을 선언한 MB정부 출범 후인 2009년 3월 폐지됐다. 부채비율 100% 미만 기업, 동종업종, 민영화 공기업, 외국인 투자기업, 국가경쟁력 강화 산업, 부실기업 등에 대한 출자는 제한대상에서 제외돼 있다.


이번 개정안대로 출자총액 기준을 10대 대기업에 순자산 30%까지로 정할 경우 SK그룹과 현대중공업그룹이 대상 기업집단에 속한다. 두 그룹이 해소에 필요한 출자금액은 4조3000억원에 이른다. 만약 출자총액 기준을 30대 대기업에 순자산 25%로 정하면 대상 기업집단은 더 늘어난다. SK그룹과 현대중공업그룹을 비롯해 한진·한화·STX·LS·동부·현대·부영그룹이 해당된다. 해소에 필요한 출자금액은 12조7000억원 정도다.

당연히 재계는 출총제 부활을 반대하고 있다. 전경련은 "수출이나 해외시장 개척 등 대기업의 순기능까지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공정위도 반대의 뜻을 내비쳤다. 김동수 공정위원장은 "출총제는 실효가 없다는 지적에 폐지한 제도인데, 다시 부활했을 때 어떤 효과를 얻을 수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당이 낸 개정안엔 순환출자 금지법도 있다. 재벌의 소유구조 투명화와 경제력 집중을 완화하기 위해 상호출자의 회피수단으로 전락한 순환출자를 금지하는 내용이다. 기존 순환출자는 3년간 유예기간을 두고, 유예기간 이후에도 해소되지 않을 경우 의결권을 제한하도록 했다. 또 지주회사의 부채비율을 현행 200%에서 100%로 낮추도록 했다.

공정거래법 등 6개 개정안 당론으로 발의
경제민주화 등 재벌개혁 강력한 드라이브

순환출자 역시 재벌그룹들이 계열사를 늘리고 계열사를 지배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주요수단 중 하나다. 예를 들어 그룹 계열사 A사가 B사에 출자하는 방식으로 A사는 B사의 최대주주가 된다. 이어 B사가 C사에 출자할 경우 B사의 최대주주인 A사는 B사와 C사를 동시에 지배하는 식이다. 이 경우 한 계열사가 부실해지면 출자한 다른 계열사까지 부실해지는 악순환이 발생할 수 있다.

순환출자는 상호출자 금지로 생겨난 편법이다. 현행법은 계열사 간 상호출자를 금하고 있는데 순환출자에 대해선 별도 규정을 두지 않고 있다. 순환출자 금지가 실행되면 현재 상호출자제한 대상인 63개 그룹 중 삼성그룹, 현대차그룹 등 15개 그룹이 적용 대상이다. 삼성그룹의 경우 순환출자 해소 비용이 30조∼40조원에 이를 것으로 계산된다. 전체적으론 천문학적인 돈이 필요한 셈이다.

재벌그룹 총수를 겨냥한 법안도 있다. 바로 사면법 개정안이다. 이 개정안은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등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재벌 총수나 그 일가가 징역형을 선고받고 형기의 3분의 2를 복역하지 않았거나 집행유예 기간 중에 있으면 대통령이 특별사면을 할 수 없도록 규정했다.

당장 현재 재판을 받고 있는 총수들이 불안하게 생겼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횡령·배임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과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은 수백억·수천억대 회사 자금을 빼돌린 혐의로 각각 3심과 2심이 진행 중이다.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은 300억원을 횡령하고 미공개 정보를 이용해 100억원의 손실을 회피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지금까지 특별사면 혜택을 받은 총수들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 임창욱 대상그룹 회장,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 등이다. 과거 죄 지은 대기업 총수들은 대부분 특사 출신이다.

"이제 특사도 없다"
재판 중 총수 불안

민주당은 전속고발제도 개정과 국가 당사자 계약법, 하도급 공정화법도 발의했다. 전속고발제도는 현행법 위반 행위에 대해 공정의 고발이 있어야 공소를 제기할 수 있는 제도다. 민주당은 이를 개정, 담합과 시장지배적지위의 남용 등 중대한 위반행위에 대해선 공정위의 고발이 없이도 누구나 고발이 가능하도록 했다.

국가 당사자 계약법과 하도급 공정화법은 중소기업 보호를 위한 조치다. 국가 당사자 계약법 개정안은 국가 발주 사업에 있어 중견기업과 중소기업의 사업 참여기회 확대를 위해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소속 회사 등 대기업의 사업 참여를 의무적으로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도급 공정화법은 중소기업이 대기업과 납품단가 협상을 할 때 중기 업종별 협동조합에 하도급대금 조정을 위임할 수 있도록 했다. 현재 하도급 계약 후 90일이 지나야 가능한 납품단가 조정신청 조건을 계약 후 60일로 단축하는 내용과 대기업 파견근로자의 지위를 강화하는 내용도 담겼다.

민주당의 전방위 공세에 재계는 할 말을 잃은 분위기다. 가급적 표정 노출을 삼가고 있다. 최대한 멘트도 아끼고 있다. 혹시 트집을 잡히거나 집중 타깃이 될 가능성 때문이다.

재계 대표단체인 전경련도 조심스런 입장이다. 전경련은 "경제민주화 정책엔 이의를 제기하지 않지만 일방적이 아닌 그 방향에 대해 충분한 논의 과정이 필요하다"며 "대기업 관련법들이 무더기로 추진되면 고용, 성장, 투자 등에서 여러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고 밝혔다.

민주당과 대기업 사이에 전운이 가득하다. 아직 본게임이 시작되지 않았지만 현 상황만 본다면 누구 하나 무릎 꿇어야 끝날 판이다. 일단 주도권은 민주당이 쥐고 있다. 이미 살벌한 으름장으로 선전포고한 상황. 대기업들은 지금까진 대놓고 반기를 들지 않았지만 점점 노골적인 반기류가 형성되고 있어 일촉즉발의 전면전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재계 노골적 반기류 형성
비상경영 등 뒷문 잠그기 
'외풍'에 맞불? 엄살?

실제 대기업들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 꼭꼭 문을 걸어 잠그는 모양새다. 정치권 ‘외풍’에 대한 대비책인 한편 대응책으로도 해석된다.

가장 먼저 롯데그룹은 지난달 비상경영 체제 전환을 선포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계열사 사장단 회의에서 "극도로 불안정한 경제상황이 계속되고 있다"며 "전 계열사는 즉시 비상경영 시스템을 구성하고 구체적인 액션 플랜을 수립하라"고 지시했다. 삼성그룹과 현대차그룹, SK그룹 등도 사실상 비상경영체제로 전환하거나 준 위기경영체제로 들어갔다. 이들 그룹의 각 주력 계열사들은 세계 실물경기 위축에 대비한 수출 유지와 비용절감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해외시장을 직접 점검하는 등 현장 경영을 강화하고 있는 주요 그룹 총수들은 연일 임직원에게 위기의식과 이에 따른 긴장을 주문하고 있다. 총수들은 경기침체에 따른 위기를 타개할 하반기 경영구상에 몰입하기 위해 여름휴가도 없다고 한다.

심지어 인력 감축 움직임까지 감지된다. GS칼텍스는 외환위기 이후 14년 만에 영업인력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실시해 70여명을 줄일 방침이다. 대한항공은 근속 연수 15년, 만 40세 이상인 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 신청을 받았다. 지난해 10월에 이어 또 다시 희망퇴직을 실시한 것으로, 이번에 40∼50명이 신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GM은 부장급 이상 임직원 100여명을 대상으로 희망퇴직 신청서를 받았다. 재계에선 모 그룹도 조만간 대대적인 인력감축에 나설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일부 대기업은 신규 채용까지 제한할 것으로 보인다. 올해는 물론 내년 초 채용 계획도 대폭 수정할 기업도 있다.

인력 감축 움직임에
신규 채용까지 제한

대기업들의 위축은 설문 조사를 통해서도 잘 나타난다. 최근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내 주요 대기업 10곳 중 9곳은 올 하반기 경영 환경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못지않게 나쁠 것으로 전망했다. 긴축 경영에 들어가겠다는 곳도 80%를 넘었다. 인력 구조조정 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대기업도 상당수였다.

유로존 위기로 글로벌 실물경기가 위축되면서 국내 경제사정도 좋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기업들의 '허리띠 졸라매기'는 당연한 수순이다. 하지만 대기업들의 비상경영 선언에 다른 목적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도 있다. 정치권 공세를 향한 일종의 맞불로 보는 시각도 없지 않다. 같은 맥락에서 엄살로 보기도 한다.

대기업 한 임원은 "유럽발 경제위기가 장기화 조짐을 보이면서 기업들이 비상경영의 고삐를 바짝 죄고 있다"며 "비용 절감, 인력 감축, 자산 매각 등 대책 마련에 분주한 와중에 '외풍'까지 덮친다면 국제경쟁력 약화 등 정상적인 기업 활동이 크게 위축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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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