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간판도 없는 삼양식품 ‘비밀곳간’ 추적

  • 김성수 kimss@ilyosisa.co.kr
  • 등록 2012.03.12 14:5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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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 황태자 키워라!”…‘전인장 지령’ 받은 찜질방 주인

[일요시사=김성수 기자] 사무실이 없다. 직원도 없다. 그 흔한 홈페이지도 없다. 보통 이런 법인을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페이퍼컴퍼니’로 의심한다. 이른바 ‘유령회사’다. 50년 전통의 ‘라면 명가’ 삼양식품이 수상한 회사를 끼고 있다. 정확하게는 받들고 있다는 표현이 맞다. 사명만 노출됐을 뿐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는 삼양식품의 ‘비밀곳간’. 그 실체를 캐봤다.

삼양 지배구조 핵심 비글스 ‘유령법인’ 의혹
사무실·종업원 따로 없어…“회사 실체 모호”

서울 양천구 목동 목동파라곤 105동 지하 601호. 50년 전통의 ‘라면 명가’ 삼양식품 지배구조의 핵심으로 떠오른 ‘비글스’ 주소다. 그러나 지난달 28일 오전 11시 찾아간 이곳에서 비글스 사무실을 찾아볼 수 없었다.

지하 6층을 샅샅이 뒤져봐도 마찬가지였다. 간판조차 걸려있지 않았다. 엉뚱하게도 ‘스파’가 자리 잡고 있다. 지하 6층 전층을 사용하고 있었다. 정확한 명칭은 ‘파라곤스파’. 말이 좋아 스파지 여느 찜질방과 다를 바 없이 운영됐다.

“찜질방에 무슨
회사가 있겠냐”

스파 직원들도 비글스란 회사에 대해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한 관리인은 “찜질방에 무슨 회사가 있겠냐”며 “여기는 그런(비글스) 회사가 없으니 딴 데 가서 알아보라”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직원들의 날카로운 시선에 쫓겨나듯 스파를 나왔다. 그리고 이튿날 비글스 본사 전화번호인 2654-○○○○로 연락해봤다.


‘예 스파입니다.’

전날 방문했던 스파였다. 비글스의 전화번호도 스파와 같았던 것이다. 스파 안내데스크라며 전화를 받은 직원은 “스파 전화번호가 여러 개 있는데, 이 번호도 그중 하나”라고 했다.

삼양식품의 ‘비밀곳간’인 비글스를 두고 말들이 많다. 식품업계에 실체가 모호하다는 뒷말이 끊이지 않고 있다. 실제 <일요시사>의 취재 결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무실이 없다. 직원도 없다. 그 흔한 홈페이지도 없다. 기업공개는커녕 외부감사와 공시도 하지 않고 있다. 이쯤 되면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페이퍼컴퍼니’로 의심해볼 만하다는 게 감독당국의 지적이다.

국세청 관계자는 “페이퍼컴퍼니, 즉 유령회사 여부를 판단할 때 가장 먼저 사무실과 직원 존재를 파악한다”며 “특히 매출이 없거나 허위매출이 발생하고 있다면 거의 맞다고 보면 된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꽁꽁’ 베일에 싸인 비글스는 어떤 회사일까. 1961년 설립된 삼양식품은 1963년 한국 최초로 라면을 생산, 이를 기반으로 유지, 장류, 유가공, 사료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그러나 1989년 ‘우지파동’ 사건과 무리한 사업다각화로 1998년 IMF 당시 화의를 신청했고, 이후 뼈를 깎는 구조조정 끝에 2005년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최근엔 ‘나가사키짬뽕’ 히트로 옛 명성을 되찾는 등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다.

우여곡절 와중에 2세 체제가 안착됐다. 전중윤 창업주의 2남5녀 중 장남인 전인장 회장은 1992년 영업담당 이사를 시작으로 경영관리실, 기획조정실 사장 등을 거쳐 2005년 부회장에 오른데 이어 2010년 회장으로 취임했다. 전 창업주는 명예회장으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전 회장이 ‘경영 바통’을 물려받기 직전 소리 소문 없이 생긴 게 바로 비글스다. 2007년 1월 설립된 비글스는 농산물 도소매 업체다. 경영컨설팅 및 기업투자관리, 해외기술알선 등도 사업목적에 포함돼 있다. 당초 강남구 청담동 고급빌라 퍼즐하우스에 ‘둥지’를 틀었다가 2008년 10월 현 주소인 목동파라곤으로 이전했다.

비글스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09년 삼양식품 지배구조의 축으로 떠오르면서다. 프루웰(79.87%), 삼양베이커(50%), 원주운수(20%), 삼양축산(48.49%), 삼양유통(63.09%), 삼양티에이치에스(100%) 등 계열사들을 지배하고 있는 삼양식품의 최대주주는 삼양농수산(33.26%).

비글스는 이 삼양농수산(26.9%)을 장악하고 있다. 결국 비글스가 삼양농수산을 통해 삼양식품과 그 계열사들을 거느리는 위치에 있는 셈이다. 삼양식품 지분(1.66%)도 있는 비글스는 2008년까지만 해도 계열 출자구도의 정점에 있는 삼양농수산 지분이 없었지만, 이듬해 계열사들이 갖고 있던 지분을 넘겨받았다.

이후 비글스가 삼양식품 오너일가의 개인회사로 드러나면서 더욱더 세간의 시선이 쏠렸다. 전 회장의 장남 병우군이 비글스 지분 100%를 소유한 사실이 알려진 것. 이에 따라 비글스는 삼양식품 3세 체제를 위한 ‘전진기지’란 분석이 힘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비글스는 ‘눈치 없는’주식 매매로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비글스는 지난해 12월 나가사키짬뽕의 인기로 삼양식품 주가가 폭등하자 주식 12만4690주를 팔아치워 40억원이 넘는 시세차익을 거뒀다. 뿐만 아니다. 앞서 비글스는 지난해 평창이 동계올림픽 수혜주로 거론되면서 대관령목장을 소유한 삼양식품 주가가 2배 가까이 뛰자 잽싸게 지분 14만3290주를 매각해 약 35억원을 챙겼다.

이를 두고 ‘얌체 매매’란 빈축과 함께 ‘먹튀 논란’이 일기도 했다. 당시 삼양식품 측은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회사 관계자는 “비글스가 매각한 지분은 삼양식품 전체적으로 봤을 때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며 “회사가 주식을 사고파는 것은 당연한 기업행위”라고 일축했다.

비글스가 삼양식품의 ‘비밀곳간’으로 부상하면서 동시에 비글스를 둘러싼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이상한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그 실체가 모호하다.

대법원 법인 등기부등본에 따르면 비글스 사무실은 서울시 양천구 목동 917번지 목동파라곤 105동 지하 601호다. 국세청과 금융감독원 등 당국에 신고된 주소지도 같다.

오너 최측근 가신
대표이사직 겸임

그런데 <일요시사> 취재 결과 해당 주소지엔 식품사업과 전혀 연관이 없는 찜질방이 영업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 찜질방을 운영하고 있는 업체는 ‘휴네트개발’. 비글스와 휴네트개발이 한 주소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두 회사는 전화번호도 같았다. 자본금 5000만원으로 1996년 4월 설립된 휴네트개발은 당초 학습교재를 제작하다 2003년 11월 부동산과 서비스 업체로 전환됐다.

비글스와 휴네트개발의 대표이사도 동일 인물로 드러났다. 비글스 대표이사인 심의전씨는 휴네트개발 대표이사도 맡고 있다. 심씨가 휴네트개발 경영(사내이사)에 참여한 것은 2003년 4월. 대표이사는 2007년 12월부터 역임했다.

이듬해 10월 심씨는 비글스 대표이사까지 맡았다. 비글스가 청담동 퍼즐하우스에서 목동파라곤으로 이전한 시점(2008년 10월17일)은 심씨의 취임일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는 사전에 논의 후 비글스가 휴네트개발로 주소지만 옮겼다는 추론이 가능한 대목이다.


심씨는 전 회장의 최측근으로 알려졌다. 회사 내부에선 ‘전인장 그림자’로 통한다고 한다. 인천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심씨는 비글스 외에도 전 회장, 김정수 사장(전 회장 부인)과 함께 삼양농수산 등기임원에 올라있다. 지난해 3월 임기 3년의 사내이사로 선임됐다.

특히 심씨는 삼양식품과 삼양농수산에 라면, 스낵, 유제품 등의 포장지를 납품하고 있는 테라윈프린팅 대표이사도 역임 중이다. 1968년 삼양식품 인쇄사업부로 출범한 테라윈프린팅은 2008년 분사했지만, 여전히 삼양식품과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 이 회사 경영에 참여한 심씨는 2006년 9월부터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비글스의 직원이 없다는 점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중소기업으로 분류된 비글스가 세무당국에 신고한 종업원은 단 1명이다.(2010년 말 기준) 통상적으로 종업원수에 대표이사도 포함되는 사실을 감안하면 심씨 혼자 회사를 꾸리고 있다는 얘기다. 국내 굴지의 식품기업인 삼양식품을 ‘수하’에 두고 있는 사실상 지주사가 직원 한명 없는 ‘1인 회사’란 점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휴네트개발 한 직원은 “이곳(지하 6층 스파)에 비글스 사무실과 직원은 따로 없다”며 “딱 구분돼 있지 않지만 다 같이 쓰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직원은 비글스에 대해 묻자 “뭐 때문에 꼬치꼬치 캐묻냐. 여기서 뭘 하든지 무슨 상관이냐”며 “(비글스에 대해) 자세히 모르고 알아도 알려줄 수 없다”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별도의 사무실과 직원이 없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도대체 무슨 사업으로 실적이 얼마나 되냐는 것이다. 이 역시 지금까지 언론 등에 단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다.

주소지 목동스파로 확인 직원은 ‘사장님’ 단 1명
회사측 ‘모르쇠’ 일관 “오히려 더 의문 키워”

<일요시사>가 입수한 비글스 재무현황 등에 따르면 과일과 채소 등 농산물 도소매가 주사업인 비글스는 2008년 5600만원의 매출을 거뒀다. 2009년과 2010년엔 각각 6억6400만원, 6억700만원을 기록했다. 비글스는 삼양농수산 등 계열사와의 거래로 적지 않은 매출을 올리고 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비글스의 영업이익은 2008∼2010년 각각 1000만원, 1억700만원, 1억원으로 나타났다. 그동안 인건비는 단 한 푼도 지출되지 않았다. 이는 직원이 없다는 점을 뒷받침한다.


순이익의 경우 2008년 1000만원, 2009년 3300만원에서 2010년 적자(-2700만원)로 돌아섰다. 같은 기간 총자산은 1억900만원에서 29억8300만원으로, 총자본은 5800만원에서 6400만원으로 늘었다. 부채도 5100만원에서 29억1900만원으로 불었다.

비글스 설립 자금의 출처도 불분명하다. 비글스의 자본금은 5000만원이다. 병우군이 지분 100% 소유한 것은 이 돈을 전액 출자했다는 뜻이다.

1994년생인 병우군의 올해 나이는 18세. 2007년 비글스 설립 당시엔 13세였다. 초등학생이었던 병우군이 어떻게 5000만원을 마련했는지 의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병우군은 5세 때인 1999년 삼양식품 지분(0.69%·1만주)을 처음 매입할 당시 취득 방법을 증여나 상속이 아닌 ‘매수’라고 공시해 의아해하는 시선이 많았다.
삼양식품과 휴네트개발 등은 이렇다 할 해명이나 반박을 하지 않아 오히려 더 의문을 키우고 있다. 이들 회사는 모두 <일요시사>의 취재를 사실상 거부했다. 하나같이 피하기에 급급했다.

삼양식품은 비글스와의 관계 등에 대한 질의서를 보냈지만 답변하지 않았다. 회사 홍보실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장남 병우군 소유
13세때 회사 차려

삼양식품 홍보실장은 “비글스에 대해 전혀 아는 사실이 없다. 어디서 뭘 하는 회사인지도 알지 못한다”고 잘라 말했다. 이 말대로라면 삼양식품도 비글스의 실체를 모른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는 이어 “다만 말할 수 있는 부분은 법적으로나 도의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에 유령회사란 표현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덧붙였다.

<일요시사>는 ‘키맨’심씨에게도 정확한 사실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공식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어떠한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휴네트개발 관계자에게 수차례 메모를 남겨도 소용없었다. 이 관계자는 “메모를 전달했다”는 말만 반복했다.

현재 심씨 외 유일하게 비글스 등기명부에 감사로 등재돼 있는 김모씨(대학 교수)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비글스 감사를 맡고 있는 것은 맞다. 어찌 어찌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지금은 학교 일로 바쁘다. 나중에 통화하자”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이후 끝내 연락이 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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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