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르포]게이들의 '놀이터' 이태원을 가다

  • 한종해 han1028@ilyosisa.co.kr
  • 등록 2012.01.27 10:5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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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가 어때서요?" '이태원 프리덤'

[일요시사=한종해기자] “자기~ 남친 있어?” “어 나 파트너 있어.” 이태원에 위치한 게이클럽 안에서 나눠지는 대화 중 일부다. 게이(남성 동성애자)들이 즐겨 찾는 주점이 밀집한 이태원은 게이들을 위한 해방구다. 이태원역을 가로지르는 길에 위치한 소방서를 지나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면 게이 업소가 모여 있는 ‘게이힐’이 나온다. 종로와 신당동을 이어 이태원이 게이들을 위한 새로운 메카로 떠오르고 있다. 게이뿐만 아니라 이성애자와 여성들도 자주 찾는다는 이태원의 게이힐을 <일요시사>가 직접 찾아 취재했다. 

이태원 '게이힐', 편견 벗어난 '소수민족' 해방구
18년 된 게이클럽 역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지난 14일 오후 11시께. 게이들의 모임이 열린다는 서울 용산구 이태원 소방서 근처 한 클럽. 클럽을 주변으로 펼쳐진 미로 같은 골목길에는 곳곳에 게이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이 날리고 있었다. 기자가 도착했을 때 인근 도로까지 길게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짧은 머리에 가죽바지를 입은 20대 초반의 남성, 면바지에 흰 티셔츠를 입은 호리호리한 체격의 30대 중반 남성 등 대부분이 남자였다.

여성 입장료,
남성의 두 배

입장료는 남성 1만원, 여성은 2만원이었다. 보통 클럽의 경우 여자는 돈을 덜 받거나 공짜인 것과는 정반대의 경우. 게이들이 주가 되는 클럽이기에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종이티켓을 받아 손목에 착용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휘황찬란한 조명과 음악에 맞춰 수백 명의 남자들이 서로 뒤엉켜 춤을 추고 있었다. 외국 남성들과 한국 남성들이 대부분이었고 일부 여성들의 모습도 보였다. 남성들이 많아 우중충할 것 같았던 생각과는 다르게 생기가 넘치고 즐거운 분위기였다.

40여 평의 무대를 가득 메운 수백 명의 남성들은 음악에 온몸을 맡긴 채 자신의 끼를 내뿜고 있었다. 윗옷을 벗어던지고 춤을 추는 이도 있었고, 서로를 끌어안거나 상대의 몸을 쓰다듬으며 춤을 즐기는 이들도 눈에 띄었다.


한편에 마련된 바에는 춤을 추지 않는 사람들이 맥주와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마음에 드는 상대가 있는지 살피거나 작업을 거느라 정신이 없었다. 마음에 드는 동성이 있으면 둘만의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칸막이가 쳐져있는 공간도 있었다. 클럽 내부가 수많은 무지개 빛깔의 깃발들로 치장되어 있고 남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90% 이상이라는 것 말고는 여타의 클럽과 같아 보인다. 이곳이 바로 이태원 '소수민족'의 놀이터다.

바에서 홀로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는 외국 남성과 이야기를 나눠봤다. 이 남성은 이태원과 인접해 있는 용산미군기지의 군인이란다.

이 남성은 "가끔 미국의 자유분방함을 느끼고 싶을 때 이곳을 찾는다. 여기서는 대부분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별다른 거리낌이나 차별 없이 즐길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날 클럽을 찾은 외국 남성 중 상당수가 주한미군이었다. 머리를 짧게 자른 건장한 체격의 외국 남성들이 간혹 보이는 여성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며 '작업'에 여념이 없다.

이 남성은 또 "솔직히 누가 게이인지 알고 싶지도 않다. 여기서 마음껏 즐기다 미국으로 돌아가면 내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누가 알겠는가"라며 자리를 피했다.

기자가 미군과 대화를 나두던 도중 입구를 통해 8명의 여성들이 클럽으로 입장했다. 전체적인 성비로 봤을 때 극히 일부분이었지만 여성들의 입장도 꾸준했다. 두 배 이상 차이나는 입장료도 이들의 발걸음을 막을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게이클럽을 즐겨 찾는다는 이수연(24)씨는 "집적대는 남자들이 없어 편하게 수다를 떨 수 있다"며 "여자들에겐 어떤 유흥가보다 안전 한데다 귀찮지 않아 좋다"고 말했다. 함께 온 신국화(24)씨도 "게이들 중에는 젊고 잘생긴 '훈남'들이 많아 '눈요기' 하기에도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게이클럽도 역시 클럽인 걸까? 이런 여성들을 노리는 남성들도 있었다. 호기심에 게이클럽을 찾았다는 조영일(29·남)씨가 기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씨에게 다가왔다. "옆에 남성분과 일행이냐?"라고 물었고 기자가 아니라고 하자 이씨에게 '작업'을 걸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여성들이 모여 있는 곳엔 반드시 남자들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들과 게이들이 한데 어우러져 자연스러운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게이클럽을 찾는 게이들은 이들을 반가워하지 않았다.

한 게이커플의 얘기를 들어봤다. 이 커플은 "게이들을 위한 공간에서 게이들이 호기심의 대상으로 전락하는데 불쾌하다"며 "안 그래도 많은 사람들 때문에 공간도 부족한데 인구밀도를 쓸데없이 높이고 있다"고 토로했다.

여자가 있는 곳엔
반드시 남자도 있어

이어 "이 클럽을 찾는 이유가 동성애자들을 담담하게 받아들여 주기 때문인데 우리를 신기하게 생각하는 일부 사람들 때문에 게이들만을 위한 공간이라는 특성이 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기자와 대화를 마치고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클럽을 나간 이 게이커플을 보다가 문득 게이커플의 남녀역할이 궁금해졌다. 클럽의 종업원을 만나 게이에 대한 '모든 것'을 들어봤다.

이 종업원의 말에 따르면 게이커플 사이에도 분명히 남녀가 존재한다. 게이커플의 성관계에서 남성 역할을 하는 사람을 '때짜', 여성 역할을 하는 사람을 '마짜'라고 한다. 성관계에서 마짜는 때자보다 비교적 편하고 쾌감이 크기 때문에 게이 중 상당수는 마짜다. 한마디로 여성의 역할을 하는 게이들이 많다는 것.

그렇다면 이들은 어디서 성관계를 할까? 이 종업원은 "모텔을 이용한다. 하지만 게이들은 대부분은 재력가가 많다"며 "결혼 생각이 없기 때문에 돈을 모으기보다는 팍팍 쓰는 경향이 있어 호텔을 이용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편하게 놀려는 ‘여자’, 그를 노리는 ‘남자’
보디빌더 고용한 게이전용 남성마사지

이어 그는 "게이들 사이에서도 외모에 따른 부익부 빈익빈이 존재한다"며 "잘생기고 젊은 게이들은 우대받고 못생기고 뚱뚱한 게이들은 상대적으로 천대 받는다"고 덧붙였다.

취재를 마치고 클럽을 빠져나온 시간은 새벽 1시.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거리는 반짝이는 네온사인 덕에 대낮을 방불케 했다. 거리에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로 넘쳐났으며 술에 취해 길바닥에 앉아 있는 남성을 꾀려는 게이들도 있었다. 지나가는 남자들을 붙잡고 휴대폰 번호를 교환하는 게이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이 업소가 위치한 골목은 통상 '게이힐'로 불리고 있다. 이태원역 3번 출구를 통해 나와 소방서가 있는 곳으로 걷다가 소방서 뒷골목으로 들어가면 아스팔트 바닥에 '진입금지'라고 적혀있는 곳부터 '게이힐'이 시작된다.

이곳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P클럽, Q클럽 등 게이클럽이 있고 게이들만 출입 할 수 있는 게이바가 있다. 바로 옆 골목에는 트렌스젠더들을 위한 바가 있으며 아랫골목에는 예전 미군들을 대상으로 영업했던 집창촌 후커힐이 있다.


남성역할은 ‘때짜’
여성역할은 ‘마짜’

골목을 따라 위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게이들을 위한 남성전용마사지 업소도 있다. 이 업소는 보디빌더들을 마사지사로 고용해 인기가 높다 특히 모 업소의 남성 '고고쇼'는 게이들 사이에서 인기폭발이다.

이태원의 게이골목은 금·토·일에만 화려하게 빛나며 새벽 2~4시 사이가 성황이다. 불이 켜지는 3일 동안 이태원 게이골목을 찾는 게이들은 업계 추산 주당 약 1000명에 이른다.

클럽에 출입하기 위해 정해진 입장료를 내고 티켓을 구매해야 하며 티켓이 찢어지거나 분실하지 않는 이상 하루 동안은 계속 출입이 가능하다. 일반 클럽과 마찬가지로 티켓을 이용해 술이나 음료 한 잔을 구매할 수 있으며 더 원할 시 추가비용을 내고 사야한다.

게이클럽의 사장과 종업원들은 모두 게이다. 남성 이성애자들도 있는데 이들은 클럽의 안전을 책임지기 위해 고용된 사설경비업체 요원들뿐이다. 이곳에서는 '소수민족'이 이성애자인 것이다.

이태원의 또 다른 게이문화는 게이바다. 게이바는 클럽과는 다르게 조용함으로 승부한다. 이곳을 찾는 게이들은 상대와 대화를 나눌 뿐이며 이성애자나 여성들은 출입하지 않는다.


이태원에 있는 일반 바도 술집으로 영업하다가 새벽시간이 되면 게이클럽 분위기로 바뀌는 곳도 있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태원 뒷골목이 게이들의 '놀이터'가 됐을까? 이태원 게이클럽의 역사는 19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2월경 이태원에 첫 게이클럽 '파슈'가 오픈했다. 이때까지 모든 게이업소는 종로와 신당동에 모여 있었으며 대개 단란주점형식이었던 것에 반해 파슈는 춤을 추며 보다 분방한 섹슈얼리티를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파슈는 같은 해 가을 경 '사장이 돈을 갖고 튀었다'는 풍문만을 남긴 채 문을 닫았다.

이듬해 '트랜스'라는 이름의 게이바가 입성했으며 6월 '스파르타쿠스'라는 이름으로 클럽이 오픈했다. 스파르타쿠스는 근대 클럽의 형태로 20대 초반의 게이들이 급증하면서 이태원은 삽시간에 새로운 게이의 메카로 떠올랐다. 2012년 현재 이태원에는 30여 곳의 게이업소들이 성업 중이다.

18년 전부터 시작된
이태원 게이클럽

이태원은 용산미군기지가 만들어졌을 때부터 외국인이 많이 모이는 지역이었다. 그들은 한국 사람들에 비해 성소수자들에게 관대하다 보니 게이들이 자연스럽게 이태원을 찾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태원에서 오랜 기간 장사를 해왔다는 한 노점상 주인은 "트렌스젠더든 게이든 누가 지나가든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며 "그럴 수도 있지,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은 것 아니겠느냐"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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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