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문재인정부가 들어선 지 한 달이 지났다.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감지되고 있으며 이전 정권과 확실히 선을 긋고자 하는 모습도 눈에 띈다. 급격한 변화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부류도 제법 보인다. 문 대통령과 힘겨루기 양상에 돌입한 재계가 대표적이다. 팽팽한 기싸움의 결말은 둘 중 하나. 재계가 정부의 강도 높은 압박을 이겨낼지, 백기를 들지 두고 볼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재계가 일자리 정책을 둘러싸고 강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정부와 재계 사이의 주도권 다툼이 시작됐다는 평가가 제기되는 가운데 자칫 전면전으로 번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포문 연 재계
역공세 정부
포문을 먼저 연 쪽은 재계였다. 한국경영자총협회(이하 경총)는 자신이 주관하는 포럼에서 문 대통령의 일자리 정책에 불만을 드러냈다. 여기에 문 대통령이 즉각 유감을 표명하며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김영배 경총 부회장은 지난달 25일 열린 포럼서 “정부가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해결 없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요구가 넘쳐나게 되면 산업현장의 갈등이 더욱 심화될 것”이라며 “이는 일자리 창출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는 새 정부의 국정운영 방향과 배치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경총의 작심 발언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4월 말에도 김 부회장은 “세금을 쏟아부어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은 임시방편적 처방에 불과하고, 당장은 효과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다”며 대선 후보였던 문 대통령의 공공 일자리 창출 공약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의 일자리 정책을 겨냥한 작심 발언이 나오자 청와대는 즉각 반응했다.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은 “경총은 비정규직으로 인한 사회적 양극화를 만든 주요 당사자로서, 책임감을 갖고 진지한 성찰과 반성이 먼저 있어야 한다”며 “정부, 노동계, 재계가 힘을 모아 비정규직 문제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현 정부가 공식적으로 유감을 표명한 건 집권 후 이번이 처음이다. 경총의 주장에 대한 불쾌감을 표출하는 동시에 문 대통령이 정책을 추진하는 데 있어 모멘텀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를 강력히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새 정부 경제공약 본격 드라이브
“대화는 없다”…단절된 연결고리
비정규직 정책을 둘러싼 한차례 잡음은 시작에 불과하다. 갈등은 최저임금 결정 과정에서 본격화될 전망이다. 최저임금법에 따른 올해 최저임금 최종 결정 시한은 오는 30일. 지난 3월31일 고용노동부 장관의 심의 요청에 따라 최저임금위원회는 6월말까지 내년도 최저임금액을 결정해야 한다. 새 정부가 들어선 직후 결정되는 사안이라 그 어느 때보다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기대가 높다.
실제로 과거 최저임금 인상률은 정권 성향에 따라 등락을 거듭했다. 국민의정부, 참여정부 시기에 최저임금 평균 인상률은 각각 9%, 10.6%인 데 반해 이명박 대통령 집권기에는 5.2%에 불과했고 박근혜 대통령 재임 당시에는 7.4%를 기록했다.
재계는 최저임금 ‘동결’ 주장을 꺼내기 어려운 상황이다. ‘소득주도성장’을 내세우는 현 정부에 최소한의 성의를 보여야 하는 까닭이다. 적어도 물가 인상률과 엇비슷한 기준점을 제시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최순실 게이트’로 정경유착 현실과 불투명한 재벌 경영의 민낯이 드러났다는 점은 재계 입장에서는 치명적이다. 문 대통령의 경제민주화 공약이 대중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가운데 자칫 항명으로 비칠 가능성도 충분하다.
‘동상이몽’
불편한 동거
현 정부와 재계의 불편한 동거는 대선 과정서부터 일찌감치 예견된 것이다. 문 대통령은 ▲재벌의 불법 경영승계, 황제경영, 부당특혜 근절 ▲불공정 갑질 근절 ▲공정거래위원회 역할 강화 ▲하도급 근로자 임금 체불 해결 ▲중소기업·소상공인·자영업자 보호 등을 주요 ‘경제민주화’ 공약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공약이 이행될 경우 주요 중소기업들과의 공정한 거래 시스템, 투명한 기업지배구조 등을 서둘러 갖추지 않을 경우 대기업들은 새 정부로부터 집중적 제재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
문재인정부가 추진하는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최저임금 시급 1만원 선 인상 ▲소상공인·골목상권 보호를 위한 복합쇼핑몰 규제 등 나머지 주요 경제 정책들도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당장 임금 비용이 늘어나고, 공격적 사업 영역 확대에 제동이 걸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재계는 급격한 경제민주화나 일자리 창출 압박이 부작용을 초래할 것이라는 입장을 누차 밝혀왔다. 지난 2월에는 한국상장회사협의회, 코스닥협회, 한국중견기업연합회가 공동 성명을 통해 경영 투명성 확보, 소액주주 보호 등을 취지로 추진되는 상법 개정 움직임에 공식적으로 반대의 뜻을 표명하기도 했다.
볼 수 없었던
미묘한 냉기류
현 정부와 재계 사이의 미묘한 냉기류는 분명 이례적이다. 과거 대통령들의 경우 취임 직후 경제 단체들과 ‘경제 살리기’를 위한 회동을 갖고 화기애애한 장면을 연출하는 등 화합의 기간을 가져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당선 후 26일 만에 4대 그룹 총수를 만났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취임 전 손길승 당시 전경련 회장의 예방을 받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취임 전부터 재계의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물론 현실적 요인을 무시할 수 없다. 아직 경제부처 내각, 경제 관련 참모진 인선이 완료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인수위원회 없이 정부가 출범하다보니 우선순위에서 밀린 측면도 있다. 그래도 과거와 달라진 분위기인 것만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현 정부가 교류 자체를 꺼려하는 인상이 짙다. 실제로 대통령 직속 일자리위원회에 대한상의·중소기업중앙회·한국경영자총협회가 민간 위원 몫으로 참석하는 것 외에 재계와 특별한 교류 움직임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재계는 정경유착 고리를 끊겠다던 문 대통령의 성향이 반영됐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재계 항명이 불쾌한 대통령
일자리 창출 공감대 어떻게?
더욱이 재계는 새 정부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도 마땅한 통로를 찾기 힘든 상황이었다. 국가일자리위원회의 ‘일자리 100일 계획’에 따라 비정규직 많은 대기업에 대한 부담금 부과 방안이 검토되고 있지만, 재계로서는 마땅한 의견 제시 기회조차 없다. 하소연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애매한 여건에 처한 셈이다.
경총은 작심 발언 후 몸을 낮추는 기색이고 ‘재계 맏형’ 노릇을 하던 전국경제인연합회도 문 대통령과 불편한 관계다.
문 대통령은 2012년 9월 민주통합당 대선후보로 확정된 직후 경제단체와 양대노총을 초청한 간담회를 주재하면서 전경련만 제외시킨 바 있다. 현재 전경련은 문 대통령의 최우선 국정과제인 적폐청산의 대상으로 지목됐다.
문 대통령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전경련 해체에 대한 대선주자 공개질의’서 “전경련은 더 이상 경제계를 대표할 자격과 명분이 없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출구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출범 한 달이 지나면서 변화 기류도 조금씩 감지되고 있다. 대한상의는 지난 8일 사실상 인수위 역할을 맡고 있는 국정기획자문위와 간담회를 가졌다. 자문위에선 김연명 사회분과 위원장, 대한상의에선 이동근 상근부회장이 각각 나왔다.
오는 7월10일에는 대한상의가 이용섭 국가일자리위원회 부위원장을 초청해 조찬 간담회를 통해 소통의 물꼬를 틀 예정이다. 민간 일자리 창출과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및 최저임금 1만원 인상 등을 논의하기 위한 정책간담회 형식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장관급 인사가 경제단체장과 직접 소통하는 첫 자리라는 데 의미가 있다는 평가다.
그러나 경총, 전경련 등 재계를 대표하는 단체는 이번에도 논의 대상에서 빠졌다. 이도영 일자리위 정책개발부장은 “경총, 전경련과 소통하기 위해 현재 실무진이 일정을 조율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두 단체는 “정부로부터 공식적인 요청을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달 말로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에 파견할 경제사절단 구성에서도 정부는 재계와의 소통에 소극적인 모습이다. 노무현정부 시절 삼성·현대차·LG 등 총수와 경제단체장 등 31명을 경제사절단으로 꾸린 바 있다.
뻔히 보이는
눈치싸움
다만 재계의 자발적인 일자리 창출 노력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현 정부가 강조해 온 경제공약의 대부분은 한계가 명확하다. 즉, 정부와 재계의 대화는 필수란 뜻이다. 양질의 일자리 확충이라는 공감대 아래 어쩔 수 없이 정부가 재계와 소통의 창구를 마련 할거란 주장에 힘이 실리는 배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