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천우는 우리의 현실이 삼국시대 당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간파하고 북한과 중국에 의해 우리 영토가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음을 경계했다. 이런 차원에서 역사소설 <삼국비사>를 집필했다. <삼국비사>를 통해 고구려의 기개, 백제의 흥기와 타락, 신라의 비정상적인 행태를 파헤치며 진정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바, 즉 통합의 본질을 찾고자 시도했다. <삼국비사> 속 인물의 담대함과 잔임함, 기교는 중국의 <삼국지>를 능가할 정도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우리 뿌리에 대해 심도 있는 성찰과 아울러 진실을 추구하는 계기가 될 것임을 강조했다.
측간에서 잠시 용무를 본 연개소문이 느릿느릿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들어선 연개소문의 표정이 나갈 때와는 다르게 상당히 어두웠다.
“무슨 일입니까, 대감.”
연개소문이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는지 보장왕의 질문도 알아듣지 못한 듯했다.
이윽고 고개를 돌려 춘추를 바라보는 표정이 편치 않아 보였다.
“궁금합니다, 대감. 왜 그러십니까?”
“방금 경주에서 도착한 세작으로부터 이상한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를 생각하느라 그만.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세작이라는 소리에 모든 사람들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감금
“무슨 내용입니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절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도대체 무슨 소식이기에 그러십니까?”
“이번 사절의 목적이 지원 요청이 아니라 당나라 지시에 따른 일종의 정찰이라는 정보였습니다. 지난 번 당나라의 진대덕이란 놈이 다녀간 것처럼.”
연개소문의 말에 모두가 경악했다.
“어쩐지!”
누군가의 입에서 의혹에 가득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하!”
갑자기 연개소문이 보장왕 앞에 부복했다.
“가까이서 보필하지 못한 불충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고구려의 실세 막리지 연개소문이 나이 어린 보장왕 앞에 부복하자 다른 신하들 모두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일제히 부복했다.
순간 보장왕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자초지종을 밝히시고 준엄하게 조처하세요!”
짧게 답한 보장왕이 바로 나가버렸다.
그를 확인한 연개소문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춘추를 똑바로 주시했다.
연개소문의 지시로 춘추 일행이 한적한 사택에 감금되었다.
표면상으로는 당장이라도 참수할 듯하면서 시간을 끌자 춘추가 일말의 희망을 품고 돌파구를 찾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 국경에서 만난 두사지의 말을 떠올렸다.
춘추가 경비 서는 사람에게 선도해를 만날 수 있도록 간곡하게 선처를 부탁하자 연락받은 선도해가 감금되어 있는 가옥을 방문했다.
“간절히 뵙기를 원하셨다는데 무슨 용건입니까?”
처음 보는 선도해였건만 그에 대한 느낌이 남달랐다.
“선 책사, 잠시 시간 좀 내주시구려.”
춘추가 급하기는 급했던 모양이었다.
그곳까지 선도해가 찾아왔으면 그 이면을 헤아릴 수 있을 터건만 자신의 입장만 생각하고 있었다.
“무슨 용건인데 그러십니까?”
춘추가 급하게 선도해의 소매를 잡고 구석으로 이끌었다.
“책사께 제 목숨을 의지하려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제게 목숨을 의지하다니요?”
“여기서 벗어날 수 있도록 선처 바랍니다.”
“저를 저승길에 동행하려 하십니까?”
소매를 잡은 춘추의 팔을 뿌리치며 돌아서려 했다.
“책사께 보여줄 물건이 있소.”
“물건이라니요?”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는 선도해의 시선을 뒤로하고 춘추가 안으로 들어가더니 보따리를 들고 나타났다.
연개소문 태도 돌변…당황한 춘추
선도해의 조언…‘죽느냐, 사느냐’
“그게 무엇입니까?”
“직접 확인해보시지요.”
선도해가 조심스럽게 보자기를 풀자 고운 청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청포 아닙니까, 그러면!”
“신라 대매현 고을의 사간으로 있는 두사지가 곤경에 처했을 때 책사께 전하라 한 물건이오. 그러면 방도가 나올 것이라 하였소.”
“이 사람이 큰일 낼 일을 하였군!”
스스로에게 한 자조 섞인 말이었다.
“책사, 도와주시오.”
“그런 말씀 마시오. 차라리 제가 죽고 말겠습니다. 만약 공을 도와주다 발각된다면 저는 물론이거니와 저의 피붙이 모두 참수를 면치 못합니다.”
“책사, 이곳에서 탈출시켜 달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아둔한 저에게 계책을 달라는 의미입니다.”
“계책이라니요?”
“이 삼엄한 경비를 어찌 뚫고 빠져나갈 수 있겠소. 그저 계책만 알려준다면 평생 그 은혜 잊지 않겠소.”
선도해가 주위를 둘러보고 다가섰다.
“두사지의 소개가 있었다면 마냥 모른 체 할 수는 없소. 그래서 저녁에 술과 음식을 가지고 다시 방문할 터이니 그때 세세한 부분에 대해 이야기합시다.”
믿기지 않는지 춘추가 빤히 바라보았다.
“내 두사지의 청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 하지 않았소. 그러니 믿고 기다리십시오.”
두사지란 이름에 힘주어 말하자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선선히 물러났다.
저녁 무렵 선도해가 하인의 손에 음식과 술을 들려 춘추를 다시 찾았다.
“고맙소, 선 책사.”
선도해가 말을 하지 않고 그저 웃기만 했다.
“왜 그러시오?”
“공의 행동이 너무 황당해서 그럽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개인 간도 그렇지만 국가 간은 이해득실이 가장 주요한 요소로 작용하지요. 그런데 공은 그를 무시하고 충정 하나만으로 일을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것도 다른 나라가 아닌 고구려를 상대로.”
“그러면 세작 혐의는?”
“그는 일종의 계략에 불과하지요.”
“계략이라면?”
“연개소문 대감에게 춘추 공의 행동이 어떻게 비쳐졌겠습니까? 당나라를 상대로 전쟁도 불사하려 권력을 갈아치웠는데 그리고 백제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전혀 반대급부도 없이 원수를 갚아 달라 했으니.”
“그래서 계획적으로.”
춘추가 말하다 말고 천장을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몰렸다
“반드시 명심하십시오. 뭔가를 요구할 때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법입니다. 신라가 당나라에 조공을 바치듯이.”
당나라에 힘을 주어 이야기하자 춘추가 고개를 숙였다.
“또한 정황파악도 중요하지요.”
“그는 말씀하시지 않아도 잘 알겠습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날 방도도 알고 있습니까?”
“결국 연개소문 대감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신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로 들리오만.”
“당연합니다.”
춘추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선도해를 빤히 바라보았다.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 들려드리지요.”
“무슨?”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