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천우는 우리의 현실이 삼국시대 당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간파하고 북한과 중국에 의해 우리 영토가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음을 경계했다. 이런 차원에서 역사소설 <삼국비사>를 집필했다. <삼국비사>를 통해 고구려의 기개, 백제의 흥기와 타락, 신라의 비정상적인 행태를 파헤치며 진정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바, 즉 통합의 본질을 찾고자 시도했다. <삼국비사> 속 인물의 담대함과 잔임함, 기교는 중국의 <삼국지>를 능가할 정도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우리 뿌리에 대해 심도 있는 성찰과 아울러 진실을 추구하는 계기가 될 것임을 강조했다.
춘추가 고개 숙여 답례하고 잔을 비워냈다.
“이 잔도 받으시지요. 공을 만난 일을 내 죽을 때까지 잊지 않고 기억하리다.”
연개소문이 자신의 잔을 비우고 춘추에게 건네자 이번에도 공손한 자세로 비워냈다.
연거푸 잔을 비운 춘추가 보장왕에 이어 연개소문의 잔을 채웠다.
“그런데 신라의 귀하신 공께서 어쩐 일로 이 고구려까지 오셨소?”
원군 요청
순간 춘추가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연개소문을 바라보았다.
고구려의 막리지가 자신이 입국한 이유를 여러 날이 지나도록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은 듯했다.
그런 춘추의 모습을 보장왕이 은은하게 웃으며 바라보았다.
“막리지 대감은 지금 천리장성 축조로 변방에 기거하는 중이라 작금의 사정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신라에서 귀한 분이 오셨다고 내 특별히 불렀으니 미처 자세한 내막을 파악할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보장왕의 설명에 그제야 이해된 듯 춘추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이 자리에서 그 연유를 물어도 되겠소이까?”
연개소문이 은근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답은 시원하게 했지만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왜요, 자리가 편치 않습니까?”
“어디서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난감하여 그럽니다.”
“우리 일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나라 밖 사정을 미처 헤아릴 겨를이 없었소. 그러니 수고스럽겠지만 배움을 주신다는 차원에서 부탁드리오.”
춘추가 잠시 보장왕을 바라보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신라의 원수를 갚아 주십사하는 이유로 찾아뵈었습니다.”
“신라의 원수요?”
“얼마 전 백제의 기습공격으로 상당히 곤혹스런 일을 당했습니다. 아울러 그 과정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자신의 딸과 사위의 죽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백제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연개소문이 가볍게 혀를 차며 보장왕을 바라보았다.
“전왕이 보위에 있을 때 발생한 일이지요.”
“허허, 어떻게 그런 일이. 한동안 평화롭게 지내지 않았습니까?”
보장왕의 설명에 연개소문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춘추를 바라보았다.
“물론 한동안 평화롭게 지냈습니다. 하지만 새로 보위에 오른 의자왕이 지난 시절에 있었던 관산성 전투의 패배를 설욕한다는 구실 하에 기습공격을 감행하는 바람에 그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연유로 고구려에 원군을 요청하러 오신 게고요.”
답을 한 연개소문이 그제야 일의 자초지종을 알겠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아닙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당연히 서로 돕고 살아야지요. 그러니 너무 심려 마십시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춘추가 표정을 밝게 하고 가볍게 고개 숙였다.
“그런 경우 신라는 우리에게 무엇으로 보답하겠습니까?”
연개소문의 예상치 않은 발언에 춘추의 어깨가 순간적으로 움찔거렸다.
“당연히 보답해야지요. 하지만 현재로서는 달리 방도나 여력이 없어 이렇게 염치불구하고 빈손으로 도움을 청하러 왔습니다.”
연개소문 찾아간 춘추…군대 동원 요청
거래 제안한 연개소문…신라의 선택은?
“그래요?”
마치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보장왕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짐도 여태 결정내리지 못하고 막리지 대감께서 오실 때까지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오.”
연개소문이 고개 돌려 뚫어져라 춘추를 주시했다. 그 모습에 춘추를 위시하여 훈신 등 사절 일행의 표정이 곤혹스럽게 변해갔다.
“이보시오, 춘추 공. 정녕 그러합니까?”
“훗날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제 목숨을 걸고 약속드리겠습니다.”
연개소문이 자신의 잔을 채워 단숨에 비워내고 길게 여운을 남겼다.
“내 공에게 제안해도 되겠소?”
“말씀하시지요.”
“과거의 정리로 보아 귀국의 곤란함을 우리가 마냥 모른 체할 수는 없소. 오래전에 광개토대왕께서 물심양면으로 귀국을 도와주었듯이 말이오. 그러나 작금의 경우는 그때와 다르오.”
“다르다 하심은?”
“당시는 왜놈들의 침입이었기에 같은 민족으로서 아무 조건 없이 도와줄 수 있었소. 그러나 지금은 이민족이 아니라 우리 민족인 백제와의 분쟁에 관한 일이오.”
너무나 합당한 말인지라 춘추가 답을 하지 못했다.
“아울러 지금 고구려는 당나라와 일전을 불사하려 하오.”
말을 잠시 멈추고 보장왕을 바라보자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 내 공에게 두 가지 제안을 하렵니다.”
“말씀하시지요.”
“하나는 당나라와의 관계를 끊어달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백제와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귀국의 진흥왕이 탈취한 마목현과 죽령을 돌려달라는 주문입니다.”
연개소문의 말이 끝나자 김춘추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공의 우국충정을 모르는 바 아니오. 그러나 우리의 적국인 당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서, 또 귀국이 백제에 당한 쓰라림을 회복하고자 하면서 우리에게 빼앗아간 영토를 돌려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슨 명분으로 귀국을 도울 수 있겠소.”
보장왕이 은근한 투로 덧붙였다.
“물론 둘 다 받아들여주면 좋겠소. 그러나 최소한의 성의를 표한다는 차원에서 한 가지라도 받아들여 주시오. 그러면 고구려는 기꺼이 신라를 돕겠소.”
교착상태
연개소문이 다시 말을 잇자 춘추뿐 아니라 신라 사절단의 표정이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물러나지도 못하는 교착상태에 빠져 서로의 얼굴만 벌레 씹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사이 한 궁인이 연개소문에게 다가와 귀엣말로 속삭였다.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연개소문이 보장왕과 주변 사람들에게 잠시 자리를 물려야겠다며 양해를 구했다.
연개소문이 밖으로 나오자 선도해가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측간에나 들렀다 들어가겠소.”
“그러시지요, 대감. 그러면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