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천우는 우리의 현실이 삼국시대 당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간파하고 북한과 중국에 의해 우리 영토가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음을 경계했다. 이런 차원에서 역사소설 <삼국비사>를 집필했다. <삼국비사>를 통해 고구려의 기개, 백제의 흥기와 타락, 신라의 비정상적인 행태를 파헤치며 진정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바, 즉 통합의 본질을 찾고자 시도했다. <삼국비사> 속 인물의 담대함과 잔임함, 기교는 중국의 <삼국지>를 능가할 정도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우리 뿌리에 대해 심도 있는 성찰과 아울러 진실을 추구하는 계기가 될 것임을 강조했다.
“자네들은 군인이니까 어쩔 수 없다 해도 남아 있는 백성들은 어찌할 텐가?”
용석이 차마 답을 하기 힘든지 죽죽을 바라보았다.
“그 일은 형님과 검일이 해결해 주셔야지요.”
모척과 검일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걱정 마십시오. 어차피 저나 용석은 군인으로서 목숨을 바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수성이 아니라 저희가 성 밖으로 나가 일전을 벌일 생각입니다. 그래야 형님이나 검일이 명분이 서지요.”
항전의 대가
이제는 모척과 검일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참 어찌 이런 개 같은 경우가.”
검일이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술잔을 들어 한 번에 비워내자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모두가 잔을 비웠다.
“형님과 검일에게 부탁 있습니다.”
“말해보게.”
“우리 신라 백성들 사람답게 대우 받을 수 있도록 잘 조처해 주십시오.”
모척이 답에 앞서 다시 잔들을 채웠다.
“반드시 그리 되도록 하겠네.”
“고맙습니다, 형님.”
“그리고.”
이번에는 용석이 나섰다.
“말해보게.”
검일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나도 힘든 부탁하려네.”
“뭔가?”
“내일, 일전을 벌일 때 기왕이면 우리 목은 형님과 자네가 베어주었으면 하네.”
“그게 무슨 말인가?”
“어차피 항복하지 않으면 목을 베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네. 어찌 인간으로서 그런 말을 하는가. 자네들은 자네들 입장에서 최선을 다한 경우이니 그에 따라 최상의 예우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갈 걸세.”
“암, 그래야지.”
힘겹게 대꾸한 모척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를 살피며 죽죽이 자리에서 일어나 모척에게 큰 절을 올리려하자 모두가 일어나 서로서로를 바라보며 큰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다음날 죽죽과 용석은 말했던 대로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성 밖으로 나와 백제 군사들과 일전을 벌였다.
그야말로 알로 바위치기식의 싱겁고도 허망한 전투였다.
결국 신라 병사 모두가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뒤늦게 나타난 모척과 검일의 주도로 죽죽과 용석의 시체는 단정하게 치장하여 신라의 수도인 경주로 보내졌고 전사한 병사들의 시체는 땅에 안치되었다.
또한 성안에 남아 있던 백성들은 각자의 의사에 따라 고향으로 혹은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으로 보내졌다.
의자왕은 사비성으로 보내진 백성들을 성 서쪽에 흩어져 살게 하였고 검일과 모척으로 하여금 대야성을 지키게 하였다.
대야성의 소식을 접한 김유신이 걸음을 재촉하여 김춘추의 집에 도착했다.
춘추는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마루 기둥에 기대어 먼 하늘만 응시하고 동생 문희는 그 곁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유신의 출현을 살핀 문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라버니, 이 일을.”
더 이상 말도 잇지 못하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어쩌겠나, 그만들 진정하게.”
유신의 말에도 불구하고 춘추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살피며 춘추에게 바짝 다가섰다.
“그만 정신 차리고 차후를 논해야 할 거 아닌가.”
재차에 걸친 요구에도 전혀 미동을 보이지 않자 기어코 소매를 잡아끌었다.
“처남!”
죽죽‧용석, 죽음을 택하다
시름 잠긴 춘추…신라의 운명은?
춘추가 유신을 불러놓고는 막상 말을 할 수 없었던지 길게 한숨만 내쉬었다.
“오라버니 말씀을 들었어야 했는데.”
문희가 춘추를 대신하듯 중얼거렸다.
“힘들겠지만 이제 다 지난 일 다시 이야기하면 무엇 하겠느냐. 어서 방으로 들어가자꾸나.”
유신이 애써 춘추와 문희를 이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내 방금 여주를 만나고 오는 길이네.”
춘추와 문희가 동시에 유신을 바라보았다.
“뭐라 하시던가요?”
문희의 말에 답은 하지 않고 길게 한숨부터 내쉬었다.
“왜 그러세요?”
“역시 여자로는 한계가 있더구나.”
“한계라니요?”
“즉각 병사들을 모집해서 대야성을 되찾자고 했더니. 참으로 답답하네.”
“그러면 모른 체하시더란 말입니까?”
잠자코 듣기만 하던 춘추가 목소리를 높였다.
“모른 체할 수는 없지.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지.”
“잘못되다니요?”
“우리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생각 않고.”
말을 하다 말고 춘추를 주시했다.
“그러면 또 당나라에!”
“그렇다네. 내 참.”
유신이 간략히 대답하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주시하던 춘추가 시선을 허공으로 돌리더니 어금니를 깨물었다.
“가시지요, 처남.”
“가다니, 어디를?”
“가서 여주를 만나야겠어요.”
순간 문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춘추의 팔을 잡았다.
“가기 전에 먼저 생각을 정리해야 하지 않겠어요?”
문희의 말에 마치 생각을 정리하는 듯 춘추가 물끄러미 유신을 바라보다가는 털퍼덕 주저앉았다.
“처남 생각은 어떻습니까?”
“어찌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하네.”
“무엇이 말입니까?”
“스스로 국방을 강화할 생각은 않고 그저 기대려고만 들고, 또 이상한 일에만 관심을 쏟으니.”
“여자라 그런가요?”
문희가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물론 여자라는 한계도 있지만. 그래도 한 국가의 군주라면 여자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일처리 해야 하건만 그저 남에게 의지하려고만 하니 더 큰 문제 아닌가.”
“그러면 지금 우리 힘으로는 백제를 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까?”
“고구려까지 백제군에 합세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네.”
“고구려까지요?”
유신이 즉답을 피하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담판을 짓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한데.”
“근본적인 대책이라면 결국 우리도 세를 강화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야 당연하지.”
“현재로는 전혀 방도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 말에는 답하지 않았다.
“일단은 작금의 불부터 끄고 봐야 하는데.”
말을 하다 말고 춘추가 다시 일어났다.
“또 왜 그러나?”
“가시지요. 가서 여주와 담판을 지읍시다.”
“어떻게 말인가?”
“현재 우리 힘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다면 고구려를 만나야지요.”
“고구려를!”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