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심왕’ 회장님의 스리슬쩍 귀환기

  • 김성수 기자 kimss@ilyosisa.co.kr
  • 등록 2017.03.06 09:35:23
  • 호수 110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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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없어도 회사 잘 돌아가던데…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수 기자 = ‘추심왕’으로 불리는 윤의국 고려신용정보 회장. 검찰 수사를 피하고 죽을 고비까지 넘긴 그가 슬그머니 ‘회장 명함’을 다시 꺼냈다. 제 발로 떠났다가 소리 소문 없이 ‘지휘봉’을 잡게 된 과정을 짚어봤다.

“기업은 윤리적 책임을 넘어 자선적 책임이 있다.” 올초 신년사를 통해 임직원에게 나눔을 강조한 윤의국 회장은 요즘 사회공헌활동에 여념이 없다. 저소득 가정·독거노인 등 소외계층에 각종 용품을 전달하는가 하면 희귀성난치질환자도 도왔다. 예년에 비해 훨씬 많은 기부금을 내고 있다. 윤 회장이 사회 환원에 부쩍 신경 쓰는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자살 시도 ‘발칵’

2014년 10월 고려신용정보에 검찰이 들이닥쳤다. 윤 회장과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임영록 전 KB금융지주 회장이 특혜를 줬다는 의혹을 받았다. KB금융 통신인프라고도화(IPT)사업 비리를 수사했던 검찰은 인터넷 전자등기시스템 사업자 선정 과정에서 불거진 혐의와 관련해 고려신용정보 본사를 압수수색했다.

전자등기시스템은 과거 법무사 등 법률대리인이 등기소를 직접 방문해 처리해오던 근저당등기 설정업무를 전산화하는 사업.

검찰은 윤 회장이 대주주로 있는 소프트웨어 개발업체 L사가 해당 사업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는 과정서 부정한 청탁을 받은 임 전 회장이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했다. 검찰은 임 전 회장이 옛 재정경제부 국장으로 근무하던 2005년부터 윤 회장과 알고 지냈다고 전했다.


비리로 상폐 위기 몰리자 사퇴 카드
잠잠해진 틈타 소리 소문 없이 복귀

그해 10월 검찰에 불려갔던 윤 회장은 사흘 뒤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한강에서 투신자살을 시도한 것. 반포대교 중간 지점에서 강물로 뛰어내렸고, 곧바로 신고돼 경찰이 구조할 수 있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검찰 조사 중에 벌어진 일인 만큼 윤 회장의 자살시도 배경을 두고 온갖 소문과 설이 난무했다.

검찰은 윤 회장이 투신하는 바람에 수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윤 회장의 심리상태가 불안정한 점 등을 감안해 신병부터 확보하기 바빴다. 사건은 정관계로 확대되는 듯했으나 흐지부지 됐다. 검찰은 윤 회장이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곧바로 체포했지만, 횡령 혐의만 적용하는 데 그쳤다.

윤 회장은 2008년부터 2014년 10월까지 회계장부를 조작하는 방법 등으로 회사 자금 11억1700여만원을 빼돌린 혐의로 구속됐다. 검찰은 “윤 회장이 빼돌린 회삿돈을 차명계좌에 넣어 관리하면서 골프 비용이나 개인 빚을 갚는 데 썼다”고 설명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윤 회장은 회사 주주들에게 소송까지 당했다. 일부 주주는 윤 회장 등을 상대로 “회사에 30억원을 배상하라”는 소장을 법원에 냈다. 이들은 “고려신용정보가 2013년 영업이익이 2억7500만원에 불과했는데도 윤 회장 등은 14억1600만원에 달하는 보수를 받아갔다”며 “골프단을 창단하거나 과도한 접대비와 광고비를 지출하는 등 회사를 방만하게 운용했다”고 지적했다.

고려신용정보는 상장폐지 직전까지 갔다. 한국거래소는 상장사에서 횡령 혐의가 발생하면 경영 계속성과 경영 투명성, 투자자 보호 등 상장 적격성을 심사한다. 고려신용정보는 최대주주인 윤 회장의 횡령 혐의 때문에 매매거래가 정지됐다. 당시 회사 측은 “문제 소지가 있는 경영진이 모두 일선에서 물러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에 윤 회장이 회장직에서 물러났고, 차기 회장으로 유력한 윤 회장의 장남 윤태훈 부사장도 대표이사에서 사임했다. 대신 전문경영인(CEO)이 키를 잡았다. 그 결과 가까스로 거래소의 심사 대상에서 제외돼 상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죽을 고비 넘기고
슬그머니 회장실로

고려신용정보는 2015년 1월 말 윤 회장에 대한 1심 판결 결과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고 공시했다. 이후 결과는 공개하지 않았다. 전산등기시스템 청탁 의혹은 무혐의 처분됐다. 법조계 관계자는 “특수1부가 맡은 사건치고는 싱겁게 끝났다”며 “특수부의 굴욕이란 말까지 나올 정도로 먼지만 털다 말았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20개월 뒤인 지난해 9월 윤 회장이 조용히 경영에 복귀한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 고려신용정보 분기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 9월30일 기준 윤 회장은 회장직(미등기임원·상근)에 다시 등재됐다.

회장 인사임에도 불구하고 임원 명단 맨 꼭대기가 아닌 중간에 끼어있는 점이 여느 회사와 달라 눈에 띈다. 그의 아들 윤 부사장도 대표이사직만 내놨고, 등기임원은 그대로 유지해온 것으로 파악됐다.

그렇다면 윤 회장은 왜 컴백했을까. 그의 복귀를 두고 따가운 눈총과 당연한 수순이란 주장이 엇갈린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사고 친 오너가 언제 그랬냐는 듯 경영에 복귀하는 것은 자칫 주주들의 반감, 나아가 국민적 불신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회사 측은 “지금같이 위기 상황에선 신속한 의사 결정, 즉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며 “(그렇다고) 전문경영인 체제는 달라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고려신용정보는 매출이 2014년 805억원서 2015년 823억원으로 늘었다. 영업이익과 순이익도 각각 20억원·14억원서 52억원·34억원으로 불었다.

조용히 다시 등장

같은 기간 총자산은 235억원서 251억원으로, 총자본 역시 130억원서 152억원으로 증액됐다. 105억원이었던 부채의 경우 99억원으로 줄었다. 지난달 9일 이사회서 24억3300만원의 배당을 결의하는 등 지난해 성과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그동안 실적만 보면 회장이 없어도 회사는 잘 돌아간 셈이다.


<kimss@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고려신용정보는?

고려신용정보는 채권추심 전문업체다. 돈을 갚지 않은 불량채무자의 빚을 대신 받아주는 업무로 수수료는 회수금액의 20∼30%가량. 이와 함께 신용조사, 민원대행용역 등도 한다.

청주서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개인 사업을 했지만 실패한 윤의국 회장은 1985년 단돈 60만원을 들고 무작정 상경했다.

닥치는 대로 일했던 윤 회장은 1991년 신용조사업 전망이 좋다는 말을 듣고 고려신용정보를 차렸다. IMF는 회사에 기회가 됐다. 설립 5년 만에 시장 1위가 됐고, 2002년엔 코스닥에 상장했다. 현재 윤 회장이 최대주주(18.59%)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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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의 임기 초반 난맥상이 이어지지만,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용꿈을 꾸지만, 새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강경 보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 대표에게 그와 용꿈을 함께 꿀 수 있는 창조적 소수가 없는 이유는 뭘까? 국민의힘은 지난달 장외투쟁에 집중했다. 지난달 21일엔 대구에서, 지난달 28일엔 서울에서 각각 개최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지난 2일 기자간담회에서 “장외투쟁을 통해 정부·여당의 잘못을 국민에게 알렸다”며 “그 과정에서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하락했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지지층 결집으로 싸울 동력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벌어지는 지지율 격차 하지만 외부의 평가는 다르다. 보수 신문 <조선일보>는 지난달 23일 사설에서 “스마트폰과 각종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라서 국민은 정치권 소식을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다”며 “장외투쟁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준다”고 비판했다. 추석 연휴 직전인 지난 2일 오후엔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체포됐다가 지난 4일 체포적부심이 인용돼 석방됐다. 김건희 여사의 경기 양평군 공흥지구 개발사업 개입 의혹과 관련해 김건희 특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던 고 정희철 단월면장도 “특검이 강압 수사를 했다”는 취지의 자필 메모를 남긴 채 같은 날 사망했다. 이후 국민의힘은 국회에 정 면장의 분향소를 차렸고,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빈소를 지키고 있다. 지난달 6일 방송된 JTBC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엔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출연했다. 이 방영분은 지난달 26일 발생한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사건 이후인 지난달 28일 촬영됐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은 “국가적 재난 때문에 지금도 국민은 피해를 보고 있는데, 한가하게 예능 촬영하고 있었다면, 이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추석 연휴 내내 쟁점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의 대여 투쟁엔 힘이 붙지 않는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1일부터 2일까지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0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민의힘 지지율은 전주 대비 2.4% 하락한 35.9%로 확인됐다. 47.2%의 지지를 얻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보다 11.3% 뒤처지는 수치였다. 이는 장 대표의 자화자찬과는 다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이 대통령과 민주당엔 ▲검찰 해체 시도 ▲조희대 대법원장과의 갈등 ▲이 대통령의 예능프로 출연 논란 ▲김현지 제1부속실장 관련 논란 등 악재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지지율 격차가 10% 이상 벌어진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지난 13일 장 대표와 상임고문단의 오찬 회동에 참석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정 전 의장은 장 대표에게 “과거 안하무인 정치 행태를 보여온 보수 정당의 잘못이 크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 깊은 반성과 성찰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 등과 함께 못할 이유가 없다. 새 지도부는 용광로 같은 화합의 정치를 만들어내길 바란다”며 “부정선거론이나 ‘윤 어게인’ 같은 낡은 의제와 결별하고, 민생을 살피면서 국가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온 힘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답 없는 장외투쟁에 멀어지는 대권 ‘밖에서’ 집착… 본질 “사람 없어서” 정 전 의장의 발언 중 핵심은 한 전 대표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 대표는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와 관련해 의견이 엇갈려 한 전 대표와 결별했다. 장 대표는 지난달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전 대표를 지지하는 분들이 무차별적으로 저를 비난·모욕·배척하는데 어떻게 정치 행보를 같이 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엔 자신의 당 대표 당선을 도운 강경 보수 성향 유튜버들의 반발을 감수하면서 당내 중도 성향으로 평가받는 김도읍 의원을 정책위의장으로 발탁하는 등 중도 공략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유튜버 고성국씨는 이에 크게 반발하면서 “많은 분이 ‘김도읍이 웬 말이냐’고 비판하는데, 김 의원은 그런 비판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했다. 고씨는 “국민의힘은 자유통일당 등 원외 보수 정당에 지방자치단체장 30석을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장 대표는 이들의 요구를 일체 무시하면서 이들의 영향력 감소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때는 “공천 청탁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보수의 김어준 반열에 오르려는 것 아니냐”는 평가까지 들었던 전한길씨도 최근엔 전당대회 당시의 기세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장 대표는 추석 연휴이던 지난 7일, 서울의 한 극장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2>를 관람했다. <건국전쟁 2>는 1947년부터 군·경찰·서북청년단 등과 남조선노동당이 제주도에서 번갈아 이어간 학살 사건인 4·3 사건을 다뤘다. 이를 연출한 김덕영 감독은 주로 남조선노동당의 학살 위주로 내용을 구성했다. 김 감독은 평소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부정선거론을 주장해 왔던 인물이다. 4·3 사건은 국가 폭력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여전히 민감하다. 하지만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 일각에선 잊을 만하면 양민 학살을 부정하거나 군경의 대응을 찬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장 대표의 <건국전쟁 2> 관람은 보수 정당 수장이 4·3 사건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를 남긴다. 아울러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주장을 수시로 제시하는 세력은 강경 보수 세력이다. 이런 대응은 이재명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국민의힘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국민의힘 지지율 추세로 확인할 수 있다. 추석 연휴 전까지 집중했던 장외투쟁도 장 대표 스스로 직접 전면에 나서 여론을 움직이려 한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하지만 장 대표가 강경 보수 진영의 지원을 토대로 당선됐던 것 자체가 강경 보수 외 유권자에겐 큰 호감을 주지 못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민의힘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됐던 것은 당내 쇄신이었다. 기행은 멈췄지만… 특검 3개(김건희·내란·채 상병)가 국민의힘을 동시에 겨냥하는 현 상황은 모두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의힘엔 ▲부정선거론 근절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 제거 ▲중도 공략 등 산적한 숙제가 있었다. 장 대표가 무시 전술로써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을 서서히 줄이고 있지만, 유권자로선 만족을 느끼기 어렵다. 정권을 맡을 수 있는 정당으로 다시 도약하기 위해선 확실한 절연이 필요했다. 하지만 장 대표 스스로 <건국전쟁2>를 관람하면서 그동안 구사했던 무시 전술도 그 진의를 의심받을 가능성이 열렸다. “당내 쇄신이 아닌 자신의 영향력 확대만을 위한 무시였느냐”는 의심이다. 특정 세력의 지원을 받은 수장이 수성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대개 토사구팽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정치력을 높이 평가받는 역사적 인물들은 적절한 토사구팽을 통해 수성기를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이 이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장 대표 취임 이전 국민의힘은 권영세 전 비상대책위원장·권성동 전 원내대표가 일명 ‘쌍권 체제’를 구성해 ▲대선후보 심야 교체 시도 ▲자체 개혁안에 대한 특정 계파의 조직적 저항 등 기행을 저지르면서 여론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에서 이런 기행은 잘 보이지 않으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이는 재보궐선거 당선으로 국회에 입성해 재선 의원이 된 지 불과 1년여가 지난 장 대표의 짧은 정치 경험 등 부실한 정치 기반으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장 대표에 대해 꾸준히 “용꿈을 꾸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 대표도 이를 직접 부인하진 않는다. 그런데 용꿈은 특정 정치인 1명이 특출나다는 이유만으로 꿀 수 있는 꿈이 아니다. 장 대표는 아직 “용꿈을 꿀 만큼 특출난 정치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용꿈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선 ▲시대적 사명 구현 ▲강한 개혁 의지 ▲구체적 개혁 대안 제시 ▲강도 높은 자체 혁신 ▲추상적 비전을 구체화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 구성 등 요소가 필요하다. 용꿈은 용이 되려는 사람과 이를 뒷받침하는 집단의 상호 작용으로 현실이 된다. 전문가 집단은 추상적 비전을 구체적 개혁 대안으로 제시해야 하고, 용꿈을 꾸는 사람은 구체적 개혁 대안을 현실에서 구현해 민심의 호응을 얻어야 한다. 부실한 정치 기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저서 <역사의 연구>를 통해 ‘창조적 소수’라는 개념으로 용꿈을 현실화하는 과정을 이론화했다. 토인비는 문명의 순환을 통해 역사의 변혁 과정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이 쇠퇴하거나 낯선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이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꿈꾸는 집단이 나타난다. 토인비는 이들에게 ‘창조적 소수’라는 이름을 붙였다. 장 대표가 강경 보수와의 관계에 명확하게 선 긋지 못한 채 장외투쟁에 집중하는 것에 대한 해답도 있다.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가 새로운 발전을 이끌 수 있는 비결로 혁신적인 구상을 제시했다. 혁신적인 구상을 통해 세상에 충격을 주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진골 귀족들 간 왕위 쟁탈전이 장기간 이어져 중앙정부가 지방 통제 능력을 잃었던 통일신라 말기엔 후삼국시대가 이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미 멸망한 고구려·백제가 통치했던 지역에선 유민 의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정치적 비전이었다. 왕건은 ‘삼한일통’이란 구호를 내걸면서 신라에 우호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이는 신라를 무력으로 함락해 경애왕을 살해한 후 신라의 각종 기술자를 후백제로 압송했던 견훤의 대응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견훤의 대응에 분노했던 신라 호족은 고려로 기울었고, 이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 결정적 밑거름이 됐다. 훗날 고려는 원나라의 간접 지배와 권문세족의 수탈로 인해 저물었다. 권문세족이 산과 강을 경계로 대농장을 소유하면서, 조세·부역을 직접 감당하는 평민의 경제 기반이 무너졌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2000명 규모의 사병 집단 가별초를 거느린 대부호였다. 그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왜구와의 전쟁에서 대활약해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의 막료로 가담한 정도전·조준·남은·윤소종은 당시 새로운 흐름이었던 성리학을 배운 신진사대부였다. 이들 중 조준은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을 막을 수 있는 방편으로 과전법을 제시했다.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모두 몰수해 국유화한 후 전·현직 관료에게 경기도에 한정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였다. 과전법은 이성계의 막강한 권력·군사력을 기반으로 실현됐고, 그가 새 왕조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과전법이 시행돼 백성들이 춤을 추면서 기뻐할 때, 국왕 즉위 이전부터 대토지를 보유했던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고려가 왜 멸망했고, 조선이 왜 개창될 수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싸울 동력 확보” 자화자찬 “이미 한계만 노출” 평가도 이성계의 등장 이전 강력한 권력과 군사력을 가졌던 사람은 최씨 무신정권을 열었던 최충헌이었다. 그런데 최충헌은 정치개혁과 체질 개심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정예 병력을 자신의 사병 조직에 포함할 뿐, 거란 유민의 고려 침공을 방치했다. 거란 유민은 당시 떠오르던 몽골과의 협력을 통해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늑대를 몰아내고 호랑이를 불러들였을 뿐이었다. 최충헌 사후 닥친 국난은 여몽 전쟁이었다. 최우 등 최충헌의 후계자들은 임시 수도 강화도에서 오로지 정권 보위에만 집중했다. 그들은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항복한 후 몽골군이 철군하면 항복 조건을 어기는 행태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백성들은 각자도생해야 했다. 최씨 정권이 몰락한 후 집권했던 무신 집권자들도 이 행태를 반복했다. 그들이 국난 극복을 등한시한 결과, 고려는 몽골이 중국을 접수한 후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장기간 받아야 했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역대 정권은 모두 새로움을 강조하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정 종식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을, 이명박 전 대통령은 경제위기 극복을,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적폐 청산을, 이 대통령은 내란 종식을 제시했다. 토인비가 문명의 순환을 강조했던 이유는 성공하거나 많은 것을 누리면 나태해지는 인간의 속성과 관련돼있다. 토인비는 “성공한 창조자는 다음 단계에서 다시 창조자가 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는 “성공 자체가 큰 흠결이 되기 때문”이라며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노를 젓는 손을 쉬고 있어서 사회 발전에 쓸모를 다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에선 김용태 전 비대위원장과 윤희숙 전 혁신위원장이 당 체질을 개선할 혁신안을 발표한 후 실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명 ‘언더 찐윤’으로 통하는 영남권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은 조직적으로 이를 방해했다. 이를 똑똑히 목격한 장 대표는 지방선거 승리를 외치면서도 당내 혁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 주류와 반목하는 한 전 대표와 친한계(친 한동훈)를 겨냥해 패널 인증제를 언급하는 등 당 주류의 영향력을 고착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누구나 꿈꿔도 이룰 수 없는… 하지만 여론은 국민의힘의 혁신과 중도 확장을 바라고 있다. 이 때문에 이재명정부의 초반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용꿈을 함께 실현할 창조적 소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기 사람은 진득하게 비전을 통해 설득하면서 만들어진다. 장 대표에게 필요한 것은 “국정감사 이후엔 어디서 장외투쟁을 하느냐”가 아니라 “왜 내 주변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직접 장외투쟁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용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아무나 이룰 수는 없다. <ctzxp@ilyosisa.co.kr>